바라밀은 윤회 언덕에서 열반으로 건네주는 뗏목 / 오경 스님 2
지난 시간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조건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는 자성과 실체가 없어 공하다.’는 제법의 실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연기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보살문명품좦에 설해놓은 것을 근거로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경문에 보면, 부처님은 중생들의 때를 따라 중생들을 제도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중생들의 시대와 상황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현대적 언어로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교화해야 합니다.
또한 그 ‘이해를 따른다’는 것은 이 시대 사람들의 세상 이해,
즉 지식에 맞춰서 법을 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불교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박학다문 해야
이 시대에 맞는 방편을 쓰고, 이 시대 중생들의 사유와 말과 행동과 좋아하는 것을 따라서
거기에 맞춰서 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또한 경문에 보면, 부처님을 ‘적멸을 좋아하고 많이 듣는 분’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하면 마음 편하게 말없이 선정에 든 사람, 적멸까지만 생각을 합니다.
공함을 이해하고, 세속에 연연해하지 않고 세속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고
부처님을 이해하는 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반만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문자(多聞者)입니다.
화엄경은 물론 초기경전에도 수행자는 박학다문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지는 부처님을 수식하는 언어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앎에 자연스럽게 갇힙니다.
우리의 앎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
그리고 우리의 앎을 확대하는 것, 박학다문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다문만으로는 여래의 법에 즉 진리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경문은 설하고 있습니다.
다문이 필요하지만 다문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정법을 수지하긴 했지만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보배를 세는 것처럼,
또 맛있는 음식을 나열하면서 먹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수행을 아무리 나열하면 뭐합니까? 우리가 해야죠.
다음은 설법의 깊은 이치를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이때 문수사리보살이 덕수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시되
“여래의 깨달은 바는 오직 한 법인데 어떻게 해서 여래께서는 무량한 제법을 설하십니까?”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하나지만 그 하나를 설하면 그것을 듣는 중생의 근기 따라,
업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각각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일음(一音)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무량한 음성이 되는 겁니다.
비유하면 바람은 소리도 없고 하나인데 그 바람이 소나무를 만나면 솔바람 소리를 내고
대나무를 만나면 대숲 바람 소리를 내며 깃발을 만나면 펄럭이는 소리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관건입니다.
자신의 수준을 높이지 않으면 똑같은 불교를 해도 불교가 우리 수준을 높여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자기를 정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가족도, 내가 속한 사회도, 이 지구도, 이 사바세계도 내 업의 결과입니다.
업을 정화시킨다는 것은 내 몸만 정화시키는 게 아니라
내 사회, 내 가족, 내 나라를 보다 아름다운 곳으로 바꾸는 것이 업의 정화이고
이것이 대승불교이자 연기적 세계관에 근거한 화엄적 수행관입니다.
삼학 닦는 것이 기본 가르침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개별적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는
연기적 관점에서 세상과 인생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태를 보는 시각과 그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이
불교적이지 않으면 불교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생과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이 불교적이고
일상의 상황들을 불교적으로 이해하고 사유해야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이때에 문수사리보살이 지수보살에게 물어 말씀하시되,
“불자야 불법 가운데는 지혜가 으뜸이거늘
여래가 무슨 이유로 중생들을 위해서 어떤 때는 보시를 찬탄하고
어떤 때는 지계를 찬탄하며 어떤 때는 인욕을 찬탄하고
어떤 때는 정진을 찬탄하며 어떤 때는 선정을 찬탄하며
어떤 때는 지혜를 찬탄하고 어떤 때는 다시 자비희사, 사무량심을 찬탄합니까?
끝내 오직 한 법만으로는 출리를 얻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불교는 지혜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니까 깨달음만 얻으면,
지혜만 얻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생각할 수 있죠?
그러나 한 법을 설해서, 한 법만으로 도를 얻은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성품과 분수가 각각 다름을 알아서 그 응하는 바를 따라서 법을 설하되,
인색한 자를 위해서는 보시를 찬탄하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지계를 찬탄하고,
화를 잘 내는 자에게는 인욕을 찬탄하며 해태한 자에게는 정진을 찬탄하며
정신이 산만한 자에게는 선정을 찬탄하며 우치한 자에게는 지혜를 찬탄하며
인자하지 못한 자에게는 자애를 찬탄하고
남을 해코지하려는 사람에게는 대비를 찬탄하고
근심과 걱정이 많은 자에게는 기쁨을 찬탄하며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평등심을 찬탄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수행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부족한 것,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하는 겁니다.
전체적으로는 그 사람이 지혜롭기도 하고 자비롭기도 한
원만한 인간상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적 인간상이요, 화엄경이 추구하는 인간상입니다.
계, 정, 혜 삼학을 균형 있게 닦으라는 게 부처님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좋아한다고 해서 참선만을 고집 하거나 경전 보는 것만 고집하거나
기도만 하거나 하지 말라고 돼 있습니다.
육바라밀, 사무량심을 온전히 다 닦아야 바른 수행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보시와 지계는 집을 짓는데 있어 마치 땅과 같은 토대가 되며
인욕과 정진은 울타리와 같아 보살의 보호하는 갑옷이 되며
선정과 지혜는 보살이 의지할 바라고 비유를 통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라밀은 뗏목과 같습니다.
생사윤회의 이쪽 언덕에서 열반의 저쪽 언덕으로 건네주는 수단입니다.
육바라밀이라는 뗏목을 타고 우리가 저 언덕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같은 육바라밀의 토대 위에
우리들이 어떻게 마음을 쓸 것인가를 밝혀놓은 것이 사무량심입니다.
자비희사, 이 네 가지 마음을 끝없이 써야 된다는 겁니다.
자(慈)의 마음 즉 사랑의 마음을, 사랑의 손길, 사랑의 눈길을 항상 줘야 합니다.
자애로운 마음, 인자한 마음을 써야 합니다.
또한 고통에 빠진 중생을 보면 같이 슬퍼하는 겁니다(悲).
그래서 그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구해주려는 마음을 항상 내야 됩니다.
경전 의거해 쉼 없이 용맹정진
달라이라마 스님은 자비를 공감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자비란 남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기쁜 사람을 보면 진정으로 자기일 같이 기뻐해줄 수 있고
슬픈 사람을 보면 함께 슬퍼해주며 고통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기뻐하는 마음인데 이게 더 어려워요.
자기한테 생긴 기쁜 일을 기뻐하는 게 아니고 남이 잘 된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겁니다(喜).
이것은 칭찬하는 마음과 통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훌륭한 일, 존경받을만한 일, 선한 일, 옳은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칭찬하고 존경하고 편들어주고 기뻐해주기만 해도
우리 사회는 밝아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생들이 가장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가 열심히 살아서 남을 인정해 주고도 자기가 설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장점과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장점과 능력,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이 남의 장점을 인정하고 칭찬할 수 있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 남을 인정하거나 칭찬하지 못합니다.
다음은 버리는 마음, 평등한 마음입니다(捨). 사랑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은 버리는 마음에서 완성됩니다.
사랑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면 중생들은 집착하게 됩니다.
그 집착을 버리고 평등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捨)무량심입니다.
이것이 화엄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수행에 대한 모범답안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수행하면 안 되고
경전을 의거해서 끊임없이 용맹정진(勇猛常精進)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