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암(李嵒)의 자(字)는 고운(古雲)이고, 초명(初名)은 군해(君侅)였다.
할아버지 이존비(李尊庇)의 초명은 이인성(李仁成)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그의 외삼촌인 백문절(白文節)에게서 배웠다. 글을 잘 지었고 예서(隷書)에 뛰어났다. 원종(元宗) 초에 과거에 합격하여 내시(內侍)에 적(籍)을 두었다가 국학박사(國學博士)·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승진하였고, 여러 번 옮겨 이부시랑(吏部侍郞)이 되었다. 충렬왕(忠烈王) 때 상서우승(尙書右丞)·사의대부(司議大夫)를 역임하였고,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다. 그때 좌부승지(左副承旨) 김주정(金周鼎)이 건의(建議)하여 필도적(必闍赤, 비칙치)을 새로 설치하여 기무(機務)를 맡기려고 하였다. 이존비는 바르고 곧아 처음에는 그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받지 못했는데, 좌우(左右)에서 그를 마땅히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필도적이 되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다. 신사년(1281)에 일본(日本)을 정벌할 때 이존비를 경상·충청·전라도도순문사(慶尙忠淸全羅道都巡問使)로 삼아 군량과 전함(戰艦)을 조달하게 하였는데, 조치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민(民)이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판밀직사사 감찰대부 세자원빈(判密直司事 監察大夫 世子元賓)으로 지내다가 죽었는데, 세자가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이존비는 바르고 곧은 사람인데 어찌 이와 같이 일찍 죽었는가?”라고 하였다. 〈이암의〉 아버지는 이우(李瑀)이며 철원군(鐵原君)이다.
이암(李嵒)은 어릴 때부터[髫齔] 보통 아이들과 달랐는데, 충선왕(忠宣王) 때 나이 17세로 과거에 합격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부인(符印)을 맡길 것을 명령하였고, 비성교감(秘省校勘)에 제수(除授)되었다가 여러 번 옮겨 도관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 충혜왕(忠惠王) 초에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 兼 監察執義)에 발탁되었고, 충숙왕이 복위하자 이암을 충혜왕의 폐행(嬖幸)이라고 하여 장(杖)을 때리고 해도(海島)로 유배하였으며, 이우(李瑀)를 파직하여 전리(田里)로 귀향시켰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지신사(知申事)를 제수하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진급하였으며, 정당문학 첨의평리(政堂文學 僉議評理)로 전임(轉任)되었다. 왕이 무인(武人) 한용규(韓用規)를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암이 옳지 않다고 고집하였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고 제학(提學) 정사도(鄭思度)와 더불어 정방(政房)을 제조(提調)하였다. 환관[宦者] 고룡보(高龍普)가 전주(銓注)가 공평하지 못하다고 왕에게 아뢰어 이암을 밀성(密城)으로, 정사도를 광양(光陽)으로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에 사면하였다. 충목왕이 죽자 충정왕(忠定王)을 모시고 원(元)에 갔는데,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이암에게 국무(國務)를 청단(聽斷)할 것을 명령하였다. 환국하여서는 정방을 제조할 것을 명령하고,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또 찬성사(贊成事)를 제수하고 좌정승(左政丞)에 임명하였다. 전함(戰艦)을 강에서 검열하고 돌아오는데, 궁시(弓矢)를 휴대하고 수행하는 자가 30여 기(騎)나 되었으며, 2기는 앞에서 인도하니 보는 자들이 참람하다고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초에 철원군(鐵原君)으로 봉하자 사직할 것을 간청[乞骸]하고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갔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홍건적(紅巾賊)이 침략해 들어오자 이암이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어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갔다. 박거사(朴居士)란 자가 비술(秘術)을 써서 적(賊)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므로 이암이 잡아서 개경(開京)으로 보냈다. 얼마 후에 이암이 기력이 떨어져 군사를 이끌 수 없으므로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을 보내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홍건적이 경성(京城) 가까이까지 다가오자 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고, 적이 평정되자 호종(扈從)의 공으로 1등에 녹선(錄選)되어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공민왕〉 13년(1364)에 죽으니 나이 68세였는데,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예(禮)를 갖춰 장사지내게 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이암은 법도[縄墨]를 준수하였고, 집에 있을 때에는 살림살이를 묻지 않았다. 책 읽는 것으로 스스로 즐겼고, 서법(書法)이 당대를 풍미하였는데, 일찍이 직접 「태갑편(太甲篇)」을 필사(筆寫)하여 왕에게 바쳤다. 그의 아들 이강(李岡)에게 말하기를, “너는 명심하여라. 나는 이미 늙었다. 관직이 없으니 간언(諫言)을 올릴 책임이 없지만, 마땅히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의무로 삼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우왕(禑王) 원년(1375)에 충정왕(忠定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아들은 이인(李寅)·이숭(李崇)·이음(李蔭)·이강(李岡)이다. 이인은 우왕 10년(1384)에 고성군(固城君)으로 죽었다. 이음은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홍건적을 평정한 공로로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으나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