妣竹山安氏。開城府少尹挺女。
어머니는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개성부 소윤(開城府少尹) 안정(安挺)의 따님이다.
소윤(少尹)
조선시대에 상서사(尙瑞司) ·종부시(宗簿寺) ·한성부(漢城府) ·개성부(開城府) 등에 둔 정4품 벼슬. 국초의 관직인데, 상서사 ·종부시의 소윤은 뒤에 첨정으로 고치고, 한성부의 소윤은 1466년(세조 12) 서윤(庶尹)으로 고쳤다가 1887년(고종 24) 다시 소윤이라 하였다. [출처] 소윤 [少尹 ] | 네이버 백과사전
정극인(丁克仁,1401∼1481)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성(靈城).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 광주(廣州) 출신. 진사 곤(坤)의 아들이다.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고, 여러 번 과시에 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그뒤 풀려나 태인으로 남귀(南歸), 초사(草舍)를 짓고 불우헌이라 명명, 자호 또한 이를 사용하였다. 불우헌 앞 비수천(泌水川)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아 양성을 힘쓰면서 향리자제를 모아 가르치고,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풍교(風敎)에 힘썼다. 1451년(문종 1) 일민천거(逸民薦擧)의 은전으로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 되어 은일(隱逸) 6품(六品)을 받았고,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으로 있다가 1453년(단종 1) 한성판관 성순조(成順祖)의 역권(力勸)으로 전시(殿試)에 응시, 급제하여 김수령방(金壽寧榜) 정과(丁科)13명에 들었다.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자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로 있다가 그 직을 사임하고 태인으로 돌아갔다. 그해 12월 조정에서는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4등을 내렸다. 이로부터 다시 출사하여 약 10년간, 네번의 성균관주부, 두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내고, 사헌부감찰 및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등을 역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으로 다시 전하여 조산대부 행사간원정언(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으로 특승되었다. 그러나 1470년(성종 1) 치사,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1472년 영달을 구하지 않고 향리 자제를 교회(敎誨)한 공으로 3품산관(三品散官)의 은영(恩榮)이 내리자 이에 감격, 〈불우헌가 不憂軒歌〉·〈불우헌곡 不憂軒曲〉을 지어 이를 송축하였다. 비록 환로의 영달은 없었으나 선비로서의 지개와 풍도를 고수하였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81세로 죽었다. 문학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여 최초의 가사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단가(短歌)〈불우헌가〉,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시가사에 공헌을 하였다. 정극인은 원래 광주(廣州) 두모포리 태생인데, 처가가 태인인 까닭으로 이곳에 우거하게 된 것이다. 송세림(宋世琳)의 〈동중향음주서 洞中鄕飲酒序〉 발문에도 애초의 태인 사람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되었다.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2. 1680년 경 간행된 조종운(趙從耘,1607∼1683)의『씨족원류(氏族原流)』「죽산안씨(竹山安氏)」편의 안원형(安元衡) - 안면(安勉) - 안정생(安挺生)은 판개성부윤(判開城府尹)이라고 했는데...
판부윤(判府尹)
고려 후기 도성(都城) 내의 사무를 맡아보던 개성부(開城府)의 으뜸 벼슬로 종2품관. 판개성부윤(判開城府尹)의 준말. 충렬왕 34년(1308)에 충선왕(忠宣王)이 급전도감(給田都監)과 5부(五部)를 개성부에 합치면서 개성부에 판부윤 1인을 두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