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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료실 스크랩 [마가복음 성경주해] 9장-16장
하남 추천 0 조회 72 15.06.10 16: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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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성경주해] 9장-16장

 

[마르코복음] 9장1-13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이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때라고 생각했다.다른 사람들은 부활 혹은 성령강림의 날에 실현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음미해 보면 먼 훗날의 사건을 암시하셨음을 알 수가 있다.그렇게 가까운 시일안에 이루어 질 일이라면"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일부만이 죽기 전에 보리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변모 혹은 부활 때에는 사도들이 다 살아있었다.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고 오는 때는 이방인들 사이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설정되는 때,혹은 예루살렘 멸망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이 큰 사건은 지금까지의 낡은 질서를 뒤엎고 성전과 회당의 폐허위에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빛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놓을 것이다.그런데 성서에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세례자 요한은 사막에서 옛 예언자들의 고행을 하였고 엘리야와 같은 힘과 솔직함을 가지고 당시의 악덕을 채찍질했다.세례자는 메시야에게 기름을 붙지 않았으나 세례를 베풀었고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소개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넘겨 드렸다.그리고 어떤 경우에나 완전한 겸손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서 자취를 감추려고 하였다."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이것을 보면,세례자는 성서가 서누자에게 지우고 있던-율법학자들이 엘리야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있던- 사명을 다 했던 것이다.세례자는 메시아 뒤가 아니라 앞서 왔다.엘리야는 벌써 왔고 말라기의 예언이 이미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실현되었다(마태오 11:10).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앞선 표였다.엘리야처럼 요한은 정의를 위하여,모욕받던 윤리법을 지키기 위하여,하느님께 대한 참된 숭배로 괴로워 했다.교만한 이세벨이 엘리야를 박해했던 것처럼,음란한 헤로디아가 요한을 박해하였다.이렇게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마음을 흐리게 했던 의심을 풀어 주셨던 것이다.그들은 이제 세례자 요한의 모습으로 엘리야가 왔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마태오 17:13)

[프란체스꼬회 성서연구소편]

열두 사도만 가리키는 것 같지만,다른 제자들도 포함한 것 같다....어떤 교부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용을 뜻하는 것이라 해석하고 있는데 변용은 6일후에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에(2절 참조),6일이내의 짧은 시일을 문제삼아,그 동안 죽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소 이상한 일이라고 해석한다.어떤 학자는 이 구절을 13장에서 서술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특히 21-37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다른 학자는 이 구절을 루가24장49절과 사도행전 1장8절에 비추어 성령강림 이후 불가사의하게 이루어진 교회의 힘찬 발전에 관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전승에 따르면 다볼 산이다.다볼 산은 표고 562미터로서 나자렛의 남동쪽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다.이 밖의 변용의 산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헤르몬 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 산은 표고가 2,814미터나 되고 오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무리한 주장인 것 같다. ...원어"라삐[ (흐)랍비 ,히브리,아람어]"는 "나의 위인이여"란 뜻이다.신약성서에서는 율법을 설교하는 저명한 선생(마태오 23:7 참조)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고 있다.요한은 요한 복음서 1장38절에서 "선생"(그리스어"디다스카로스")이라 설명하고 있다.또한 10장 51절의 "라뽀니"[(흐)랍부니 ,요한 20:16에도 나온다]는 "라삐"의 아람어적 강조형이다.또한 11장21,14:45,10:51절을 제외한 다른 열 군데의 "선생"은 "디다스카로스"의 번역어이다.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마르코는 70년경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이 사실때문에 곤혹을 느꼈다.그래서 시한어(1절)와 변모사화(2-10절)를 연결하여 예수님의 청중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은 스승의 모습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았으니"하나님의 나라가 힘차게 오는 것"을 본 거나 진배없다고 풀이했다.억지 해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하느님이 모세에게 이레째 날에 나타나셨다(출애굽24,16).세 제자는 5,37;14,33 에도 나온다.출애 24,1.9 에도 모세를 동반한 사람 셋이 명기되어 있다. 출애24,15에서는 시나이 산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었다"....."예수님시대에는 율사가 아닌 사람에게도 그런 존칭을 사용했다.우리나라에서도 교직자 아닌 사람을 보고도"선생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그런데 1세기 말엽부터는 랍비는 율사만을 가리키는 존칭으로 국한되었다.변모하신 예수님,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천상 존재들이다.이런 이들은 마땅히"영원한 초막에"(루가 16,9절:요한 14,2)거처하기 마련인데 베드로는 현세적 초막을 지어드리려 한다....종말인 " 야훼의 날"이 닥치기 전에 엘리야가 재림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화해시킨다느니(말라 3,23-24),화해시킬 뿐더러 열두 부족을 재건한다느니(집회 48,10-11)하는 사상이 널리 퍼져있었다.그런데 거족적 화해도 재건도 실현되지 않았으니 종말의 선구자 엘리야가 재림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따라서 예수님은 종말의 인물일 수가 없다.이것이 유다교인들의 반론이었다....11 그들은 그분께 물어"애 율사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했다 12 그러자 그분이 그들에게ㅡ말씀하셨다."물론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놓는다구요? 그러면 왜 인자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기를,그는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고 했습니까? 13 사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엘리야는 왔으나 그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바로잡아 놓는다구요?"(의문문)대신"바로잡아 놓습니다"(긍정문)로 번역할 수도 있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셈어로 보아 "죽음을 맞보다"(taste death)는 8:35 하반절에서 생각해 본 폭력에 의한 살해를 뜻하는 냉혹한 사실을 가리킨다...."지상의 형상으로부터 초超지상의 형상으로 변형하는 이적은 헬라 신비주의와 비교될 변신이 아니라 유대의 묵시 문학적 이념이라는 맥락을 암시한다."단12:3,바룩2.51:3,5,10,12,에녹1.38:4,104:2,에스라4.7:97 등을 볼것....변모산의 위치에 대하여는 아마도 헬몬산(9,000피트)....베드로가 그 자리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자청은 확실히 그 상황의 의미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다.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사람들을 집회시켜 뜻을 전하실 그러한 회막을 새로 세우겠다는 의욕은 두번째 탈출의 때가 성취하였으며 안식일의 목적이 실현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그는 예수님께서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고난에 앞서서 지금 당장에 약속된 영광의 실현을 찿으려고 성급하였다.베드로의 견해에는 변모 사건이 장차 있을 성취된 나라의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순간적으로 잠시 보여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말해 준다....베드로가 랍비라는 칭호를 예수님께 사용함은 놀라운 일이다.왜냐하면 이 사용이 주는 인상은 가이사랴 빌립보 두루 다닐 때에 그가 아직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의 위엄을 발견하지 못한 양 보이기 때문이다.또 하나의 심층적 해석으로서 아직 제자들은 메시야의 직무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해를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르코복음 성서주해] 9장 14-50 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어떤 사본에는 기도 다음에 "단식"이란 말이 있는데 후세에 써넣은 말이라고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예수님의 일행은 가파르나움으로 돌아왔다.갈릴래아 지방 선교를 이 곳에서 시작했고 또 이곳에서 끝냈다.예수님께서 이 곳에 돌아온 것은 기원29년 9월 경이었을 것이다.그분이 머문 집은 베드로 혹은 마태오 레위의 집이었을 것이다....제자들이 토론한 문제는 그들의 순수한 히브리적 정신 생활에서 나온 것이다."위대한 사람","높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갈망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생활에 젖어 있었다.종교집회,재판,공동식사에서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어느 자리를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시되었다.....중도를 취하는 성서학자들도 있다.그들에게 이 어린이는 모든 제자 혹은 모든 어린이의 상징이 아니다.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사도들 가운데 세운 어린이는 겸손한 사람들,작은 사람들,신분이 낮은 사람들,당시 사회에서 어린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것처럼 사회가 별로 소중히 다루지 않은 사람들,오히려 보호와 원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하였다....유다인 사이에는 물에 던져 죽이는 사형법은 없었지만 로마인은 이런 형벌을 주고 싶다.십자가의 사형 방법과 함께 팔레스티나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유대인의 집에는 두 가지 맷돌이 있었다.여자 노예가 돌리는 것과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이었다..."게헨나"는 지옥의 원어이다.이 말은 행복의 거처인 생명과는 반대의 벌의 세계를 가리킨다.기원은 히브리어로"게 힌놈"아람어로"게 힌남"이다.원래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힌놈 골짜기를 가리킨다.이 곳은 아하스 왕과 므나쎄 왕 시대에 이 골짜기에서 모록이라는 우상에 어린이를 산채로 태워 희생으로 바친 때부터 저주를 받은 곳이다.이에 대한 예언자의 위협(예레미아 7:32;19:6)은 이 곳이 마지막 심판 뒤에 지옥이 열릴 곳으로 보게 된 근거를 주었던 것이다. 48절은 이사야 66장24절의 인용이다.이사야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지만 힌놈 골짜기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뒤에 구더기와 불은 악인들의 받을 벌의 상징이 되었다(집회7:17;유딧16:17).구더기와 불은 하느님의 판결에 따라 사람을 죽은 시체 상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채 괴롭힌다.사실 그렇다. 죄인은 그 괴로운 가책을 느끼게 되어 있는 것이다.....예수께서는 악인이 받을 고문의 두려움과 그 시간의 길이를 나타내기 위하여 유다 문학에서 잘 알려진 구더기와 꺼지지 않는 불을 인용하셨다.그러나 상징일망정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교훈의 깊은 현실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유익한 소금이라도 어떤 상태에서는 화학적으로 무력하거나 해로운 것이 될 수 있다.만일 소금이 그 짠 맛을 내지 못하거나 썩는 것을 막는 그 특유한 성질을 잃게 된다면 무슨 수단을 써도 다시 그 성질을 되돌이킬 수가 없다.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그럼 누구를 "작은 이들"이라 하셨을까?당신 제자를 가리키셨다고 보면 무난하다.그렇다면 37절의 뜻인즉,"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셈이요.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느님을 영접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이는 37절의 여러 병행문과 신통하게 잘 들어 맞을 뿐더러(마태10,40;누가10,16;요한13,20),"심부름꾼은 심부름 보낸 분과 같다"는 이스라엘 격언과도 꼭 맞는다.그런데 불행히도 전승자는"작은 이들"이 제자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어린이들인 줄로 착각했다....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는 종말에 죄인들이 갈 곳을 그렇게 불렀다(에티오피아 에녹서 27,1;54,1-2;90,26-27).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예수님이 표현하신 낙심과 좌절의 소리침은 마음에 심한 고통을 의식하신 것과 같은 피로의 표현이다(참조,3:5,8:12).예수님의 외침이 제자들을 향하신 것이며 저희들은 홀로 있어 중요 계기에 실패하였다.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예수님의 낙심이 제자들에게 겨눈 것임을 알고 마음이 놓인다.저희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며 치유의 능력을 소유한 특권자들이다.저희들이 예수님의 자리에 서서 예수님의 능력을 행사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불신앙으로 실패하였다.다른 경우에 여러번 불신앙과 마음의 완고함때문에 책망을 받은 그 점이 제자들의 특징을 노출시켜 주며 또한 저희의 과업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저희들이 예수님께 의존하여야 할 관련성에 대한 값 비싼 깨달음이 미흡하였음을 노출하여 준다(4:40,6:50,52,8:17-21).....예수님의 이 답변은 최소한,제자들이 기도로 그리고 성실한 신앙으로 치유 행위를 행하지 않았다고 하는 암암리의 비평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그러나 기도가 충분히 치유의 힘이 된다고 한 강조는 유대주의에 있어서 쉐마(신명기 6:4-6)와 시편 3편,91편의 반복적 낭독이 악령에 대항하는 강력한 능력자(agent)이라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지극히 놀랍다.초대교회를 통해서 금식의 효력이 강조 내지 장려되면서 그 금식의 강조가 29절에 관한한 모든 사본에 영향을 끼쳐 놓았다.그러나 신앙의 힘의 근거이며 또한 그 힘의 수단으로서 예수님은 기도만을 말씀하셨다.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6:7) 자기들의 임의조작의 소관이며 임의로 집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유혹이 있었다.이 유혹은 불신앙의 교활한 형식이다.왜냐하면 그 유혹은 하나님께 둔 신뢰보다는 자신들을 신뢰하도록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저희들은 전자에 사귀를 추방한 성공적 경험이 그 권능의 지속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아님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진상인 즉 상황이 요구할 때마다 주의 권능에 철저히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연자매를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고 한 회화적 묘사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왜냐하면 초기 열심당의 지도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정치적 항거를 일으켰을 때에 로마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어떤 지휘자들에게 내린 끔직스러운 처형에 대하여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다(참조,행5:37).[요세푸스의 고사록 14.15.10을 보면 항거하는 갈릴리 사람들이 헤롯의 지지자들을 물에 던져 죽게 한 기록이 있다]....책임을 져야 할 것으로 추상적 행위가 아닌 신체의 구체적 부분을 언급하는 일은 팔레스틴 사람들의 습관이다....소금은 종교적 의미가 아닌 가내적家內的 의미로 설명이 된다.예수님의 이 뼈대가 선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팔레스틴 주민들의 생활에서 두 가지를 관찰하여야 한다."소금이 없으면 세상이 살아남을 수 없다"의 격언은 소금이 식물의 부패를 방지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유로 하여 고전사회에 있어서 소금이 생활의 필수품이었음을 생동적으로 일깨워 준다.반면에 플리니 1세는 사해에서 얻은 소금이 짠 맛을 상실하여 아무 쓸데없는 것으로 화하는 사실을 이미 관찰하였다(사해에서 만든 소금은 석고나 다른 불순물과 혼합되어 있어서 신선도와 알칼리 검증을 하여야 한다)

 
  [마르코복음 성서주해] 10장 1-12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마르코복음 10장은 독자를 다른 지방과 다른 시간으로 끌고 간다.28년 여름에서 29년 가을 말경까지 곧 15-16개월 동안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신 중심지였다.예수님께서 이 곳을 떠난 것은 요한 1:5에 기록되어 있는 명절을 지내며 페니키아와 데카폴리스에 잠깐 들르기 위한 것이었다.거기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온 지방을 돌며 선교하시고 기적을 행하셨다.9장 끝에 예수님은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오셨다(마르코9:33).이 도읍과 지방을 이번에 떠나시면 부활 뒤가 아니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신다...마르코의 9장과 10장 사이에 4,5개월의 공백이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요한과 루가복음의 내용으로 이 곳을 메울 수 있다.29년 9월 말경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난 것은 초막절(요한 7:14)에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위해서 였다.그리고 12월 봉헌절(요한 10:22)를 위해 다시 돌아 오셨다.그 후 적의 음모를 피하기 위해 후에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로 가셨다.선구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이었다(요한 1:28;10:40).예수님께서 최초의 제자를 부르시고(요한 1:35-42) 전도를 시작한 그 곳에 계셨다.예루살렘에서는 봉헌절 때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적대행위가 몹시 노골적으로 나타났으나(요한 10:31-39)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군중으로부터 위로를 받으신다....예수님께서는 갈릴래인들이 보통 지나 다니던 사마리아의 길을 피하시고 요르단 강 동쪽 기슭을 끼고 남으로 향하고 거기서 베레아(요르단 강 건너편)로 가셨다.유다를 먼저 기록한 것은 그곳이 참된 목적지였기 때문이다.여기서는 주위에 몰려 드는 군중을 피하시지 않으신다.베레아라는 곳은 ..농업지대로서 인구도 갈릴래아보다 적었다.예수님께서는 이 곳이 예루살렘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음모에 걸려 들 두려움이 없는 곳이라 생각했다...속을 떠보려고"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하고 문제를 내놓는다.버릴 수 없다고 한다면 모세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 되고 또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베레아에서 조강지처를 쫓아 내고 그 대신 헤로디아를 얻은 안티파스 왕을 공공연히 비난하는 것이 된다.왕에게 특히 헤로디아에게 혼인윤리를 회상시키기 위해 용감히 대들었던 세례자 요한은 그 댓가로 자기 목을 내 놓게 되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이혼의 구실이 되었던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란 성서에서는 확실히 또 오직 하나 아내의 불륜을 가리키고 있다. 만일 무엇인가 아내에게 비난받을 일이 남편 쪽에 있다면이혼을 할 권리를 잃게 되었다(신명기 22:13-19,28-29).이와 같이 생각된 이혼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었다.그리고 유배 이후의 유다인의 성서문학은 혼인을 맺으면 풀 수 없다는 대로 기울고 있었다(말라기2:14-16;잠언 31:10-31). 샴마이와 그 제자들은(기원 전 30년-후 1년) 용감히 이 길에 들어섰다.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아내의 간통만이 이혼장을 써 줄 이유를 만들었다.곧 기질에 맞지 않는다든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이유때문에 이혼할 수는 없었다.랍비 요가난과 랍비 엘르아잘도 같은 의견이었다....랍비 힛레루는...결혼 후 10년이 지나도 어린이가 없다,남편과 말다툼을 했다,친척 앞에서 불손한 태도를 취했다,베일을 쓰지 않고 외출했다,다른 남자와 말을 했다,혹은 고기를 지나치게 구웠다,국의 소금 맛이 너무 짜다,혹은 가정의 비밀을 흘렸다 등의 이유가 있다면 그 아내를 내 쫓을 수 있었다.결국 2세기가 되면서 유명한 랍비 아카바는 더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을 경우 전처를 내 쫓을 수 있는 권리를 남편에게 주었다.이러한 것을 보아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입에 올릴 무슨이유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남편이 아내를 내어 버려도 좋습니까?"(마르코10:2)라는 질문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다.예수님 시대에 이혼장이 얼마나 악용되고 있었던지 바울로 사도의 스승이기도 했던 힛레루의 손자 랍비 가믈리엘은 결혼하고 있는 여인을 남편의 폭력과 邪淫사음에서 보호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을 정도였다.이혼장은 히브리 말로 쓰도록 되어 있었다.율법학자가 쓰고 두 증인이 서명하고 처의 후견인에게 넘겨 주었다.그리하여 아내는 자유롭게 되고 부모가 있으면 친정에,또 부모가 죽었을 경우는 친구 또는 친척집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나이 적은 어린이는 아내의 손에 남겨지기지만,부양의 의무는 남편에게 있었다.6살 난 사내 아이는 아버지와,딸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는데 어느경우에나 아버지에게 부양할 의무가 있었다.그렇게 해서 쫏겨난 아내는 재혼 할 수 있었다....율법은 어떤 경우에 이혼장을 쓰도록 남편에게 허락하는데 그것은 유다인의 관습으로도 인정되었다.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관습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남편은 이혼장을 쓸 수 없다.만약에 이혼장을 쓰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전처의 권리가 아직 성립되고 있기 때문에 전처에 대하여 간통을 한 것이 된다.여기서 예수님은 이혼뿐만 아니라 일부다처제까지도 금하신다.12절에서는 남편을 버리는 아내에 대해 말씀하신다.마르코만이 기록하고 있는 이 경우는 유다교의 율법에서 다루지 않는 문제이다(NIC:성불능이거나 부부애의 권리를 거부당하였을 때에 그리고 불합리한 금욕을 요구당하였을 때에 아내는 이혼재소를 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 같은 경우에도 이혼은 남편의 결정에 유보된다).어떤 사람은 이런 중요한 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로마의 풍속(NIC:로마인의 법에서도 비교적 근자에 일어난발전이며 공화국말기에 와서야 인정이 되었다,기원전 50-40년경)에도 응용토록 하려고 마르코 자신이 후에 집어넣은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그러나 그 당시 이웃 나라 그리이스 문화의 관습이 팔레스틴에도 침투하고 있었다.이 점에 대해서 로마에서는 평등했다.풍속이 문란해짐에 따라 여자도 곧잘 이 권리를 행사하였다.팔레스틴의 왕실은 이 점에 대하여 몹시 해로운 모범을 주었다.헤로대 대왕의 자매 사로메는 기원전 25년,유다의 율법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 남편을 버렸다.또 헤로디아는 필립보를 버리고 안티파스에게 시집갔다.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쿰란의 종파만은 일부일처제를 주장한 데다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다(다마스커스 문헌 4,21).....55년경에 에페소에서 고린토 교회로 써 보낸 편지에서 바울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풀이했다.이혼해서도 안 되지만 부득이 이혼 한 경우 재혼 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1고린 7,10-11).그리고 비신자 부부가운데 한편만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에는 신자편에서 이혼을 주장해서는 안되지만 비신자편에서 이혼하려고 하면 갈라서도 무방하다(1고린 7,12-15)...초대교회 일부에서 이혼은 허락하되 재혼만은 금지한 흔적이 엿보인다.

  [마가복음 성경주석] 10장13-31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흔히 생각하길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성인이 모친들일 것으로 보나 제자들이 책망한 대상이 남성 대명사이기 때문에 그 어린이들이 부친이거나 또는 그 어린아이들 자신이거나 심지어는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좀  나이든  소년일 것이라고 여러가지로 생각이 든다. ...어린이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순수한 사랑,당신의 품안에 그들을 품으신 것으로 표현이 된 부드러움,기도와 안수하심으로 그들에게 주신 축복은 아직 헬라 사회 안에 지배적으로 남아 있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부정적으로 경직된 자세를 함께 보는 맥락에서 적절하게 이해되어야 한다....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어린이들을 노출시키지 않음을 자랑하고 있다...."선한 선생"의 칭호는 유대인 자료에는 예가 없고(헬라주의에 의하면 상례적인 연설 형식이다) "선한"의 의미가 "친절" "관용이 큰" 또는 다른 의미로 선을 표시한 것인지는 고사하고라도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끼쳐 준 인상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여 준다....."어려서부터"는 계명의 멍애를 메고 준행할 책임이 있다고 보는 12살 때를 가리킨다(참조,M.Berachoth 2.2,눅 2:42).자기 재산을 매각하여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라고 하신 명령은  이 특수 상황에만 해당이 된다....17절의 질문에 대한 심층적인 답변은 모든 것을 팔아 구제하라는 명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오라는 부름에 있는 것이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마르코의 용어는 8살에서 12살의 어린이를 가리켰는데 루가는 어린아이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루가 18:15).이것은 모순이 아니다.아마 쌍방 모두를 포함했을 것이다....젊은이를 재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더 말할 나위 없이 소유의 기쁨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의 가능성,그리고 아마도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곧 경건한 유다교적 사고방식이다.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유다교에서는 재산을 하느님의 축복,경건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따라서 재산은 하느님의 자비의 증명이었다.예수님의 말씀은 젊은이가 품은 이 신념을 버리게 하지는 못하였다.....30절에서 표현된 친척들 속에는 아내와 아버지가 빠져 있다. 아마 고린토 전서 4장 15절의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200주년 신약성서주해,초대교회 일각에서는 하느님 아버지나 친 아버지만 아버지라 불렀다(마태23,9).그래서 여기에 자기"아버지"를 떠났더니 교우"아버지들"이 생기더라 하는 말이 없을 것이다.]

 
   [마가복음 성경주석] 10장 32-52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이 요구는 메시아 잔치에서 존귀한 자리를 가리킬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종말론적 심판으로 왕위에 등극하실 때에(8:38'13:26을 볼 것) 그 왕국에서 영화와 권세를 누릴 자리를 바라고 한 요구일 수도 있다(참조 왕상2:19;시110:1;에스드라1서 4:29,집회서12:12,요세푸스 고사록 6.11.9)...다른 사람의 잔을 마신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을 공유한다고 하는 잘 알려져있는 표현이다....예수님과 제자들은 요한의 회개의식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요한은 그것을 "세례"라고 불렀으며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명백한 맥락안에 두었기 때문에 명백히 예수님도 당신의 고난을 세례라고 부르셨다(눅12:50)...39절에서 두가지 이미지가 역설적으로 야고보와 요한에게 적용되고 있다.그 형제의 주장은 '저희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 할 것입니다'였다.(참조,벧전 4:13).....그러나 여기에서의 언급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순교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왜냐하면 기독교 문헌에서 보아 세례의 이미지를 이 순교의 뜻으로 한 해석은 2세기의 고비 길을 넘어설 무렵까지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차라리 예수님의 예언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베데의 아들이 복음을 위하여 큰 핍박과 고난을 참아야 할 것임을 뜻하셨다(참조 행12:2;계 1:9)...여리고의 위치는 요단강 서쪽 5리 그리고 예루살렘 동북쪽으로 18리 지점이다.여리고의 옛 시가는 1세기에 이미 크게 훼손되었고 헤롯이 남쪽으로 새로운 시가를 확대하여 그의 훌륭한 冬宮동궁을 거기에 세워 놓았으며 그 고장은 경관이 아름답고 땅이 비옥하여 유명한 곳이다(마태나 마가는 이스라엘의 여리고를 생각하고 있고 누가는 헤롯이 세운 여리고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여리고에서 수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사람이 없는 산지로 가로 막혀 있으며 그래서 위험한 구간으로 유명하다.그러나 교통량은 많았다고 한다.순례자들이 빈번한 시가의 어귀에 눈먼 걸인이 앉아 있는 광경은 근동 지역에 흔히 있는 광경이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1-31절까지는 30년 2월 경 베레아에 머물럿고 32-52절까지는 30년 3월 말경 에브라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의 일이다.여기서도 제4 복음서가 공관 복음사가 특히 마르코의 공백을 채워주고 있다.요한 복음 11장17-44절까지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레아를 떠나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아로 가셨고 거기서 라자로를 부활시키셨다.이 기적은 최고의회 의원의 분개를 더욱 부채질하였다.요한11장45-53절까지 그리고 56절을 보면 가야파의 권고로 유다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대사제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하라고 명령하셨다.그것은 군중을 격분시키지 않고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의도에서였다.요한11장54절을 보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서 들은 예수님께서는 곧 베다니아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에브라임 사막 가까운 지방으로 가시어 머물러 계셨다.여기서 희생의 길을 나서기 전 며칠을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다.....예루살렘은 해발 1,200미터의 차가 있었다....몸값이란'값을 대신 지불한다'는 의미가 된다.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개념이 있었다.그리이스 고전문학과 구어체 그리이스말에도 몸값이란 말이 있는데 포로나 종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치뤄진 돈을 말한다.몸값은 돈 대신 어떤 때는 하나의 희생을 말할 때도 있었다.비브로스의 퓔롱은 페니키아 왕들이 국란을 만났을 때 신들의 노여움을  풀고 백성을 구하기 위한 몸값(대속물)으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아들의 생명을 내 놓는 관습이 있었다'고 말했다.....헤로데가 쾌락의 도시로 만들었지만 추위를 피하기에 이상적인 고장이었다.많은 저택이 즐비하고 극장과 경마장 그리고 수영장이 있었다.이 지방은 당시 팔레스틴의 제2 중요 도시로 바리사이파와 최고의회의 종교적 감화를 받고 있었다.예수님께서는 걸어서 반 시간 걸리는 옛 도시를 지나 가셨다....이 기적의 기록은 잘 알려져 있는 조그만 문제를 제기한다.마르코와 루가는 소경이 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마태오는 두 사람이라고 말한다.또 루가의 기적이 거리의 입구에서 일어났다고 했지만 마태오와 마르코는 출구라고 하였다...당시 소경은 서로 돕기 위해 자주 두 사람이 일행이 되었던 것이다.마르코와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초대 교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바르티메오만을 기록했는지 모른다.장소에 관해서도 거리 입구냐 출구냐 할 때 거리가 남쪽으로 퍼진 점을 보아 복음 사가는 같은 곳을 가리켰는지 모른다.

  [마가복음 성경주석] 11장 1-14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감람산은 예루살렘의 동변東邊 그러니까 예수님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여리고에서 2,600피트 높이로 쭉 구릉을 형성하고 있는 감람산으로 접근해 오셨다.순례자가 걷는 길은 감람산 동쪽 구릉에 있는 베다니를 통하여 기드론 골짜기를 너머 예루살렘 시의 북문에 연결되어 있다....베다니는 예루살렘 시에서 5리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며(요 11:18)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에 가자면 마지막 동리였다.베다니는 벳바게보다 먼저 당도할 위치에 있으나 벳바게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까닭은 예루살렘 중심으로 거론하였기 때문이다.....잎이나 잎사귀가 많은 가지나 또는 들에서 거두어 들인 식물일 수 있다.종려가지에 대한 언급은  요한복음 12:13 에만 나온다.만일 이것이 종려나무라고 하면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의 거주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여리고에서 가져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힐렐의 시편(시 113-118)은 예전의 목적을 위해 유월절과 장막절에 사용하였으며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을 위한 기도와 찬양과 감사에 초점을 두고 있다.시편 118:25이하의 내용은 실질적으로 9절에 나오고 10절에 있는 응답은 그 인용에 대한 주석의 제시이다.9-10절이 보이는 교차 대구법의 구성은 이 노래가 교창임을 말하여 준다.즉 (a) 호산나! (b) 찬송하리로다.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b') 찬송하리로다.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a')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짐작건대 "호산나"의 뜻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불러 들일 수 있는 기도라고도 할 수 있으나(우리를 구원하소서) 예전적 사용을 위하여 내려오는 중 본래의 의미를 이탈하였으며(할렐루야와 같이) 찬양의 고함소리 같이 또는 피차 순례자를 만났을 때 하는 인사말이나 유명한 랍비에게 하는 인사말같이 사용되었다.시편 118:26절을 보면 절기에 찿아온 순례자에게 내린 축복이 있고 그와 같이 9절 하반절을 이해하여야 정상일 것이다."찬송하리로다.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는 종교적인 인사말의 일부가 되고 있다.이와 같이 구문적 의미는 모호한 바가 있으나 마가가 독자들에게 보다 깊은 뜻을 알게 하려고 하였으며"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참조,창 49:10)의 문절에 담겨진 메시아 사상을 파악하도록 의도하였음이 확실하다.랍비들은 시편 118:25 이하를 다윗에 관한 것과 최후에 있을 구원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하였다.그리고 이 해석이 10절에 나오는"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는 문절에 대한 뜻을 풀어 줄 것이다.여기에 실려있는 교창은 다윗의 나라가 회복하기를 희구하는 매일의 기도를 올릴 때에 가르치는 제18축도祝禱의 제 14에 나온다.마지막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지극히 높은 곳에 거하시는 이여)는 하나님께서"구원의 시대"를 열어 주실 것을 위한 호소이다.그 문절 자체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정립함이 없이 메시아 소망에 관한 일반적 타입을 말하여 준다.군중의 열망은 뜨거우나 그러한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성취된 시각이 이미 도달하였음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예수님의 인격으로( 참조 1:14 이하) 사실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심히 가까이 와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성내에 들어오자 군중들은 믿을 수 없을만큼 쉽게 해산하고 말았다.저희들이 거의 18마일의 거리인 여리고에서 걸어왔기 때문에 이미 시각이 늦었다고 하는 말은 자연스럽다....사건의 의미는 액면 이상의 것이다.이 사건은 해석을 통하여 의미를 지닌다.예수님께서 제철이 아닐 때 열매를 찿으신 예상 외의 그리고 모순적인 행동의 성격은 비상한 호기심을 자극하며 또 그 사건자체를 넘어서 있는 그것이 지닌 깊은 의미를 지적하여 준다.예수님의 행동은 구약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동과 유사한 바가 있는 (예,사20:1-6;렘 13:1-11, 19:1-13; 겔 4:1-15) 예언적 리얼리즘의 한 예인 것이다.자주 예언자들은 무화과 나무를 들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의 신분을 설명했고(예, 렘 8:13,29:17;호 9:10,16;욜 1:7;미 7:1-6) 또 한편 무화과나무의 파멸은 심판과 관계가 있다( 호 2:12; 사34:4 ; 참조 눈 13:6-9).여기 이 맥락에서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시대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그리하여 무화과나무에 떨어지는 저주는 예루살렘에 떨어질 불가피한 가공적可恐的 운명이다.이러한 해석은 이미 안디옥의 빅터가 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주석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그는 말하여 예수님이"예루살렘 위에 떨어질 임박한 심판을 설명하기 위하여 무화과나무를 사용하셨다"고 하였다.....감람산 동편의 보호구역에 3월말이나 4월초에는 잎이 나고 있는 무화과나무를 볼 수 있다.이 때쯤에 열리는 열매는 사실 잎보다 먼저 영그는 풋과실뿐이며 보통의 경우에는 먹을 수 없다.이런 종류의 열매는 6월 이전에는 먹을 만큼 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통은 모두 땅 위에 떨어지고 만다.그리하여 며칠이 지나면 나무에는 잎만 남게 된다.이러한 사실은 13절에 나오는 내용과 일치한다.문제는 먼거리에서 본 외양과 가까운 거리에 나타나는 진상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제 4복음서에 의하면 공생활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자주 예루살렘[(히)에루살렘]에 올라 가셨다.[28년의 과월절을 위하여(요한 2:13-3:15참조) 잘 알수 없는 축일에 5번 그리고 29년 초막절을 위하여(요한 7:1-10:21 참조) 또 29년 12월 봉헌절을 위하여] 이와 달리 마르코와 다른 복음사가에 의하면 죽으실 때에만 예루살렘에 올라 가신다.성지 주일 전날인 토요일에서 체포되는 날 즉 성 목요일 밤까지 성도聖都에서 하신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서는 조금밖에 알려지지 않았다.곧 성지주일날 메시아로서 환영(마르코 11:1-11) 예수님의 인격과 사명에 대한  성전 안에서의 논쟁(마르코 11:27-12:44)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끝날에 관한 제자들과이 대화(마르코 13:1-37) 그것만을 실었다.예리고에서 소경을 고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세리 자캐오의 손님이 되어(루가 19:1-10) 금화의 비유를 말씀하신다(루가 19:12-27).그리고 예루살렘 쪽으로 걷기 시작하셨다. 마르코와 다른 공관 복음만을 읽으면 예수님께서는 예리고(예리코)에서 곧바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금요일 아침 예리고를 떠나서 그날 밤 베다니아 혹은 그 부근에 이르렀다.예수님께서는 순례자의 무리가 뒤따라오는 것을 남겨두시고 토요일에 베다니아에 머무르신다.밤에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라자로와 그 자매와 함께 식사를 드시고 다음 일요일 다시 길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신다.그 때 순례자 군중에게 메시아로서 환영을 허락하셨다.당신의 때가 벌써 왔다.그리고 로마인의 의심을 일으키지 않은 소박한 이 개선을 허락하시고 지금은 당신이 기대되어 온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도록 허락하실 때였다.......예리고의 옛 길을 갈 때 베다니는 예수님의 좌측에 해당되며 앞에는 감람산이 서 있고 거기에는 벳파게가 있었다.벳파게는 베타니아 근방 감람산 중턱에 있었고 베다니아에서 성도를 향하는 길목에 있었다.탈무드는 벳파게를 예루살렘 교외로 보고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서 가까왔다.이 이름은 <익지않은 무화과의 집>이란 뜻이었다.베다니아란 이름의 원말이 확실치 않다.탈무드에서는<종려 열매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다.사실 감람산 중턱에는 무화과와 종려의 열매가 무성했다.또 베다니아는 <슬픔의 집> 혹은 <순종의 집>이란 뜻이기도 하다.옛 베다니아의 마을은 요한 11장 18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약 2.5킬로미터 쯤에 있었다.그리고 성도를 향해서 가면 지금의 회교도의 엘.아자리에 부락에서 좀 올라 간 곳에 있으며 거기에는 지금도 라자로의 무덤이 있다.옛 우물의 폐허가 퇴락한 마을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라자로의 집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은 엘.아자리를 내려다보는 북서쪽 언덕 위에 서 있었다.감람산은 성도의 동쪽으로 지중해에서 해발 810미터 사해에서의 해발 1,200미터이다.이리하여 예리고에서 오는 나그네의 눈에서 예루살렘의 모습을 가로막고 있다.감람산에서 보는 조경은 굉장하다.먼저 케드론의 골짜기와 게쎄마니 동산이 그리고 좀 저쪽으로 성도와 성전이 내려다 보인다(마르코 13:1).다시 남쪽으로 베들레헴,북쪽으로 사마리아와 가리짐산 동쪽으로 요르단의 골짜기와 사해 그리고 그곳을 넘어서 모압과 길르앗산이 보인다.구약시대에는 솔로몬이 여기에 우상의 제전을 세웠기 때문에(열왕 상 11:7;열왕 하 23:13) 지겨운 회상의 땅으로서 이 산을 <멸망의 산> <장애의 산>이라 했다.신약시대가 되자 감람산은 거기에서 이루어진 복음적 사건으로 인하여 대단히 유명해졌다.곧 메시아 이신 예수님의 개선,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끝날에 대한 말씀,예수님의 고민과 체포,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교훈과 훈계가 여기서 이루어졌다.끝으로 감람산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 승천의 날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올라 가신 곳이다......이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기 위하여 혹은 되살아난 라자로를 보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베다니아에 나온 사람들과 과월절을 지내기 위해 줄지어 온 예리고에서 온 순례자들이다.이 순례자들속에는 갈릴래아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왜냐하면 그들은 큰 축일이 되면 감람산 기슭에서 야영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행렬은 감람산 꼭대기에서 떠나 케드론 골짜기를 내려 와 거기에서 성전 앞 광장까지 올라갔다....호산나!"는 본시 이 말은 "주소서,야훼여,구원을 주소서"(시 118:25)란 뜻이었지만 차츰 그 원말의 뜻을 잃고 기쁨을 나타내는 환호의 외침이 되었다.<만세>란 뜻이다.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의 지식이 아니더라도 일찍 열리는 무화과나무는 6월이 되어야 열매를 딸 수 있다는 것,그리고 가을의 무화과는 나무에 달린 채 겨울을 넘겼다 하더라도 봄이 되어 새로운 잎이 나면 모두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마가복음 성경주석]11장15-33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종교 행위상의 이유에서 성전의 일부로 여겨진 감람산에는 순례자들이 성전에 바칠 희생에 합당한 비둘기나 다른 완벽한 제물을 매매하는 시장이 4곳 있었다.이 시장은 대제사장의 권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헤드린이 관장했다.이방인의 뜰에서 행하여 온 상행위는 이미 오래된 관례이지만 주후 30년이전에 성전의 구내에서 깨끗한 제물에 대한 매매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적인 증거는 없다.V.Eppstein의 이론에 의하면 성전 앞뜰에서 희생축으로 바칠 동물의 거래는 최근에 시작한 행위이며 감람산에 있는 본래의 시장에서 걷어 들이는 이익과 상응할 시장을 개설하기 원한 가야바가 시작하였다고 한다.이러한 이론을 지지해주는 랍비문헌의 증거는 상당하며 성전의 시장과 감람산의 시장은 이 시기에 격렬한 시비를 몰고왔다.그리고 감람산에 4개의 시장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성전 구내에서 희생축의 매매가 과거부터의 관례가 아니며 사실 성전 멸망 40년 전인 주후 30년경에 가야바가 시작한 특례적이며 충격적인 방종행위임을 생각나게 하는 증거가 된다.....이방인의 뜰은 성전 구내의 내부로 들어서기 전에 위치한 비교적 넓은 구내(475 X 300평방미터)이며 그것과 성전 내부 사이의 경계선에는 높은 담이 있어 둘로 분리되고 있다.금령禁令에 의하여 그 앞뜰을 통로로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는 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별로 신성한 곳이라는 의미는 없었다.일반 통용의 화폐가 로마인의 화폐인 지역에서 출애굽기 30장 13-16에 명령된대로"성소의 세겔(반 세겔=2 데나리온=2 드라크마)대로" 1년에 1회 내는 성전세를 바치기 위하여 유대인을 도와주기 위한 절차가 있었다.1세기에 모든 성전의 납입금은 두로의 은화로 바쳐야 했다.왜냐하면 두로의 세겔이 옛 히브리 세겔의 가장 근사치였기 때문이다.필요한 환전의 교환을 하기 위하여 세금 납일인 니산월 첫째날이 되기 5일전에인 아달월 25일에 성전 앞뜰에서 또는 그보다 앞서 아달월 15일에는 그 지방에서 은전 교환을 하였다.돈을 바꿀 때에 약간의 수수료를 받로록 허락한 까닭은 은전이 통화通貨하는 동안 마손된 중량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한 세겔의 1/24).환전상의 상을 언제 둘러 엎으셨는지는 그 날짜에 관한 지식을 입수할 길은 없다.그러나 짐작건대 아달월 25일에는 지역 시장에서 그리고 성전에서 행하신 일은 니산월 1일이라고 할 수 있다....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제휴는 예수님의 행위가 준엄한 서기관의 법과 일치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풍자적이다....무리들이 경이를 의식하였다.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메시야적 권위의 비밀을 간파해 보았다고 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예수님에 대한 호응이 있기 때문에 성전 당국은 즉시 예수님을 체포하기 보다는 여론의 회오리 바람을 불러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죽일 의논을 하였다.........25절의 말씀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로기온(logion,예수님의 교훈과 말씀)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그 문절의 구성이 주기도문의 예문禮文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K.Stendahl은 의역으로 풀어 설명하면서 이 문절이 이 맥락에 적합함을 철저히 증명하였고 이 맥락이 전능적 기도와 관계가 있다고 하면서"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특히 너희 기도가 메시아 시대의 권능을 함께 향유할 것을 기대하는 기도일 때에-다른 사람에게 혐의가 있으면 용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23-24절의 말씀을 병치론竝置論에 의하여 풀면 능력있는 기도의 조건으로서 믿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기꺼이 용서할 줄 알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11:27-12:27 이 중요한 까닭은 유대인의 모든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감정이 노골화되었기 때문이다.대제사장이나 장로들에게 내린 암시적인 심판이 11:27-33에 나오며 그 뒤 즉각 따르고 있는 (12:1-11) 포도원의 비유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예수님시대에도 성전 안에서 여러 가지 부정이 이루어진 것 같다.상인들은 이방인의 광장에서 소 따위를 팔기 위해 상당한 돈을 주고 대사제들에게 그 권리를 주고 샀다.이리하여 일종의 전매권을 얻어 특히 큰 축일에는 엄청나게 비싼 값을 매겨 멀리서 온 순례자들의 돈을 긁어 모았다.당시의 랍비 벤 가믈리엘은 한 잎의 은화로 살 수 있는 비둘기를 금화 한 닢에 팔고 있다고 개탄하였다....유다인이 큰 방해나 곤란이 있을 때 흔히 산에 비유하였다는 것을 알면 도움이 될 것이다.이러한 곤란을 이길 수 있는 랍비는 산을 뿌리째 뽑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마가복음 성경주석] 12장 1-17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당시만 하더라도 요단강 고지의 전역이나 高고 갈릴리의 상당 지역이 외국인 지주들의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묘사된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였다.임대 계약에 따르면 그 해의 소출의 일부를 사용료로 지불하도록 되어 있다....저희들의 망상 즉 지주는 사망하였고 그이 재산은 현재 소유한 자의 것이 될 것이라는 우둔한 가정은 현실이라고 하는 암반岩盤 위에서 파쇄破碎되고 만다.지주는 이러한 소작인들의 저항을 정부나 관청의 개입에 호소하여 강제에 의해 해결한 후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임대할 수 있다.이 비유의 처음과 마지막에 이사야 5:1-7에 대한 인유引喩가 있는 것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결행하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를 깨닫도록 호소하는 절실한 방법이었다.이사야 5장에서는 포도원 자체가 부당하였으나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반항하는 소작인들이 문제의 초점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민중들이 아닌 민중의 지도자들에게 특별히 겨냥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주후 6년에 로마 영지인 유다에 로마인세가 처음 부과된 이후 계속 일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감정적 쇼크를 이해함이 중요하다.당시의 갈릴리사람 유다는 세금을 부과하기 위하여 인구조사를 하는 일은 노예상태로 접어드는 서론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았다.열심당들은 납세는 씨이저가 자기들을 통치함을 순응하는 행위라고 보고 완강하게 반대하였다.바리새파는 세금과 관련된 모욕을 한으로 여겼으나 납세는 정당하다고 보았으며 원칙적으로 헤롯당들은 그 납세제도를 지지하였다.그러나 이 납세가 하나님의 법으로 보아 용납이 되는 지에 대해 질의될 때 바리새파의 중요한 관심은  그 문제가 도덕과 종교의 의의가 있다는 것으로 집약되었고 헤롯당들은 정치적 내지 민족주의적 의의가 중요 관심사였다.이 자리에서 도전자들이 예수님께 새삼 이 문제를 제기함은 동기적으로 불순하였다.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받으시고 신학적으로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몰아 세운 것이다.질문의 형식은 예수님께서 필연코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긍정적 답변을 하시면 백성들의 안목에서 그가 불신받게 될 것이다.왜냐하면 납세는 로마에 굴복하는 혐오스러운 표였기 때문이다.부정적 답변은 로마 당국의 강력한 제제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로마제국의 전반적인 유통처럼 유다에서 납세로 용납이 된 유일한 주화는 로마 주화인 데나리온이었다.이 작은 은전은 보통의 경우 18센트 가량의 가치를 가진다.디베리오의 데나리온은 표면에 남신 아구스도와 여신 리비아의 반신반인인 아들 디베리오가 황제로 부조浮彫되었고 약자인"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카이사 아우구스투스"라는 문자가 나온다.이면에는"Pontifex Maximus"(대제사장)라고 글씨가 새겨 있다.초상이나 글이나 다 황제숭배에 뿌리내리고 있고 신적영광의 선언이 그 취지이다....민간정부가 강력하여지면 항상 그 위임받는 기능을 넘어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그 본질 속에 자리잡고 있다.말하자면 이러한 경향은 언제나 자아초월로 지향한다.권력에 항상 수반되는 유혹인 자기영광의 추구는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신격화하는 황제 숭배의 방종에서 제일 명백하다.예수님께서는 강력하게 하나님과 인간을 혼돈하는 오만을 거부하신다.다시말하여 신성의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속한다.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6년 로마의 아우구스토(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항제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임금 아르켈라오(헤로데 대왕의 아들)를 폐위시키고 코포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주민세를 거두어 황실 금고에 바치도록 하였다.여기 주민세란 인두세로서 어린이와 노인만 빼고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 주민 누구나 내야했다.


  [마가복음 성경주석] 12장 18-34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헤롯이 아나넬(Ananel)을 임명한 후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107년의 기간 중 대제사장으로 직무를 수행한 28명 중에서 3개월간 직무를 수행한 하난 벤 하난(Hanan ben Hanan) 한 사람만이 사두개인이라고 요세푸스는 확인하였다.....하스모네 일가의 최후 투사인 마타디아 안티고너스 2세가 사망한 후 사두개파는 주로 부정적인 역활을 취하였고 바리새 서기관들의 권위를 비난하며 바리새 서기관들이 율법의 정의에서 그리고 할라카적 규칙의 세분화에서 보여준 창의성을 거부하였다.셰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유태교의 19가지 축복으로 되어있는 기도를 말한다.안식일과 성일이외의 날에 낭송된다)에 있는 두번째 축도에 표현되어 있는 바와 같이(송축하리로다 주여 죽은 자들을 일으키심이로다) 당시 일반화되어 있는 유대인의 경건에는 부활에 대한 확신이 동질적 요소였다.그리고 묘지에서 선포하는 송영을 보면"그가 너를 일어나게 할 것이라.그가 말씀하시는 대로 죽은자들을 일으키시는 그에게 송축하리로다!"하였다.사두개파는 교리적 입장을 모세오경에서 취하여 이 부활이 후세에 수정한 사상이라고 하여 이 부활 신앙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악명이 높았다....예수님은 부활생명의 사실을 성경과 하나님의 계약적 성실성에 호소하여 지탱하신다.인용된 문장이 출 3:6 이며 오경에서 왔음이 의미있다.성경의 오경부분은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권위로 신성시하기 때문이다.주석적인 많은 견해는 출애굽기 3:6 에 부활에 대한 암시적 확인이 있다고 함을 거부하며 여기에 당시의 사상과 어떤 관련도 없는 랍비적 변론방법이 있음을 발견한다.(랍비 가말리엘 2세는"너희가 하나님이 열조에게 약속하신 그 땅에서 너희 날을 연장하기 위하여"를 저희들이 그 약속을 받을 수혜자라고 하는 근거위에서 부활을 연역하였다.같은 해석의 방법에 서 있는 랍비 요하난은 그 율법이 실효를 거두기 위하여 아론은 영원히 생존해 있어야 한다고 민수기 18:28을 연역하였다.예수님의 변증은 이것보다는 심오하다.) 그러나 정확히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두개인의 오류를 수정하실 의사이시다.그들의 오류는 성경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고 하는데 그 뿌리가 있다.....만일에 사망이 그들 족장사의 종결이라고 하면 계약에 의하여 보장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파괴가 된다.그럴 경우에"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의 형식은 단지 상징일 뿐이다.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함은 당신의 계약에 대한 의무 조항인 것이다.....율법 전체를 요약하여 한 마디로 말하려고 하는 시도는 일찌기 과거의 어떤 서기관적 교사와 관련한 일화에서 기억되고 있다.한 이방인이 질문하였을 때 장로 힐렐(Hillel,B.C.40-A.D.10경)은 답변하여"네가 싫어하는 것은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이것이 율법의 전부이며 기타는 주석이다.가서 그것을 배우라"하였다.예수님에게서 율법의 전부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전심적 사랑에의 부름이다.마가만이 홀로 예수님께서 답변을 주실 때에 셰마('너희는 들으라'는 뜻,신명기 6:4절의 첫 단어이다)의 서언으로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이 셰마의 사용은 당시 경건한 유대인이 조석朝夕으로 하루에 두 번씩 올리는 신앙의 고백과 기도이며 기원 전 2세기부터 그렇게 하여 왔다.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기원전 152년 하스모네 가문의 요나단이 왕권에다 대제관직까지 겸임하자"경건한 사람들"이 반기를 들었다.그 가운데 평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바리사이당을,일부 제관들이 주축이 되어 에쎄느당을 조직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제관들과 예루살렘 유지들은 하스모네 가문에 동조하여 사두가이 당을 조직했다.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한 나머지 죽은이들의 부활을 부인했다.사실 부활사상은 모세오경에는 없고 기원전 2세기에 비로소 싹튼 사조였던 것이다(이사 26,29;다니 12:1-3). 그리고 사두가이들은 부활뿐만 아니라 천사의 존재도 부인했다(사도 23,8)....부활한 사람들은 부인을 데리고 있지 않은 천사들과 같게 된다는 사상은 묵시문학계에서도 볼 수 있다(이디오피아 에녹 15,7;51,4;104,6; 시리아어 바룩 51,10)....유대교의 계명은 무려 613개 조항이나 되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禁令이다.따라서 예수님시대를 전후해서 유대교직자들은 잡다한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 논하곤 하였다.기원전 2세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집필된 아리스테아 서간의 필자나 기원전 20-15년경 이스라엘에서 크게 활약한 힐렐 율사는 황금률을 첫째가는 계명으로 꼽았고 예수님시대의 유대교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외우던 신앙고백문(셔마)에서는 하느님 사랑을 으뜸가는 계명으로 내세웠으며 같은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유대인 사상가 필로는 하느님 공경과 이웃 사랑을 기본 계명으로 보았는가 하면,서기 135년경에 순교한 율사 아키바는 레위19,18을 따라 이웃 사랑을 율법의 통일 원리로 강조했다....누가 이웃이냐는 문제를 두고 유대인들사이에는 여러 설이 있었다.예수님 당시의 사해 근처에 살던 꿈란 수도자들은 자기네 회원만을 이웃으로 여겼는가 하면 일부 해외 유다교인들은 온 인류를 이웃으로 간주했다.유대인들 절대 다수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동포만을 이웃으로 여겼다.첫째가는 계명에 관한 대답을 엮은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온 인류를 이웃으로 보았다.그들은 바로 폭넓은 뜻의 이웃 사랑을 율법의 골자로 삼았다(갈라 5,14;로마 13,9;야고 2,8)...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번제나 친교제보다 낫다는 사상은 1사무 15,22;호세 6,6 에도 있다.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제사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사실이 역력히 드러난다.번제는 황소,수양,수염소,수비둘기 따위를 잡아 가죽만 빼고 나머지는 전부 태우는 제사로서 적어도 하루에 두번 아침과 오후에 지냈다.친교제는 암수를 구별하지 않고 소,양,염소를 잡아 기름기를 태우고 가슴과 오른쪽 다리는 제관이 차지하며,나머지는 제물 봉헌자가 가족과 친지와 나누어 먹는 제사로서 하느님과 친교하는 뜻으로 바쳤다.

페데리꼬 바르바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정치적인 동시에 하나의 종파이기도 했다.그 이름은 솔로몬 시대(열왕기 상 2:35)의 대사제 사독에서부터 출발했다.그들 거의가 사제 집안 출신인데 반하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사회의 온갖 계급에서 나왔던 것이다.가장 명예있는 자리를 차지했고 재산이 많았던 그들은 현존하는 질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그들이 볼 때 정치적인 면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너무 민주적이었고 열심당은 너무나 혁명적이었다.그들은 종교적인 면으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지도를 받고 있던 유다인과는 상당히 달랐다.그들은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고 있었다.그리스 사상계에서도 에피쿠로스 학파,스토아 학파,플라톤 학파 등은 육신의 부활을 반대하고 있었다.그들이 육신의 부활을 부정한 것은 영혼의 불멸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그 밖에도 그들은 천사의 영과 내세의 생명을 부정하였다.그리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었지만 그 섭리를 믿지는 않았다(사도 23:8)...마태오와 루가에는 없는 최초의"이스라엘아 들으라,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란 말씀은 어른이 된 남자 유다인들이 매일 아침 외우던 <쉐마=들으라>라는 중요한 기도의 시작부분이다.이 말씀이 다음에 나오는 계명보다 앞에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대단히 중요한 뜻이 있는 것이다.왜냐하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은 하느님이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며 당신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사랑은 하느님께서 하신 이 선택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답이다.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것이다.자기 모든 능력과 모든 정력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이다."마음을 다하고" 마음은 히브리 사람들의 심리학에서 지혜가 담긴 자리였다."목숨을 다하고" 이것은 '정신을 다하고'라고 번역해야 더 옳을 것이다.모든 감각적 능력을 가지고"생각을 다하고",모든 영적힘을 가지고"힘을 다하여" 물리적인 모든 정력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

  [마르코복음 성서주해] 12장 35-44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메시아를 가리키는 이름가운데<다윗의 자손>이란 것이 가장 인기 있었는데 그런만큼 가장 위험스러운 이름이었다.왜냐하면 이분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온 세계의 종교적,정치적 중심이 되리라는 지상적,국가적인 모든 갈망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는 성서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던(요한7:52) 저 율법학자들에게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여 메시아의 초월적 기원을 이해시키려고 애쓰시는 것 같다.....그러나 기원 후 100년이나 250년 경 랍비들은 이 시편의 메시아적 해석을 부정하고 이 시편을 아브라함 혹은 에제키아 왕에게 돌렸다.그러나 이것은 메시아의 위엄을 나타내는 성서의 가장 유력한 곳을 그리스도교도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유다인들은 일반적으로 긴 옷을 입고 있었지만 특히 눈길을 끄는 번뜩이는 옷을 입고 길이나 광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고 또 연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성 목요일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예수님은 부인의 광장으로 물러 나셨다.여기에는 15단의 반원형으로 된 넓은 계단이 이스라엘 광장과 통하고 있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이 계단에 앉아 계셨을 것이다.여기서는 왼편에 나란히 놓여 있는 13개의 헌금궤가 잘 보였다.유다인들은 거기에 헌금을 넣었다.과월절이 되면 헌금자의 수가 몹시 많았다.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손에 가득히 동전을 가지고 있었다.금화나 은화를 넣으면 간단하고 좋았을 것을 부피를 돋보이게 하려고 동전을 쓰는 것이었다.....렙돈은 그리이스 돈 가운데 최소 단위의 동전으로 그리이스 은전 드라크메(로마의 은전 데나리온)의 128분의 1이다.로마 돈으로 환산하여 두 렙돈은 로마동전 한 코드란테스(노동자 하루 품삮의 64분지1에 해당된다.2007년 일당을 5만원으로 환산하면 800원 정도이다)같은 액수라 한다....그녀의 가난한 선물은 그 가치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들의 큰 기부보다 뛰어난다.그녀에게 있어서 두 렙돈을 내는 데에는 큰 희생이 따랐다.이 과부는 주님을 받들기 위해 그 날 자기에게 필요했던 것까지 내놓았다.다른 사람들은 쓰고 남은 것을 바쳤다.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이스라엘 남자들은 누구나 축일에 두루마기 비슷한 예복을 입었는데 율사들과 바리사이의 예복은 한결 길었던 것 같다.또한 남자들은 출애13,1-16;신명 6,4-9;11,13-21을 적어 담은 작은 성냥갑 비슷한 소위 성구갑(트필린)을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고 다녔다.그리고 겉옷 자락과 4곳에 흰실과 푸른 실로 꼬아 만든 술을 달고 다녔는데 이른바 "옷단 술"(지짓)이다.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남들보다 성구갑도 큼직하게 하고 옷단 술도 기다랗게 만들었다 하다(마태23,5).....율사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선생님"(랍비) 또는 "아버님"(압히,아빠)이라 부르며 인사했다.회당에서 신도들은 전면에 있는 성경 보관소를 향해 앉았고 율사들은 보관소를 등지고 신도들을 향해 앉았다.그리고 율사가 잔칫집에 오면 매우 영광스럽게 여겨 상좌에 모셨다(루가 14,7-10 참조).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서기관들은 세마포의 통 옷과 긴 백색의 발까지 닿는 두루마기의 끝에는 옷 술이 달려 있어서 구별되었다.백색 세마포는 대접을 하여야 할 사람을 구별하여 준다.그리하여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제사장,레위사람,서기관)이나 또는 자기의 위치를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이 백색의 옷을 그리고 착색의 옷은 일반 서민의 의상이었다.....1세기의 서기관들은 그들의 전문 지식의 행사에 따른 보수 지불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주로 보조금으로 생활하였다.걸식을 하는 서기관은 별로 없으나 여러 가지 근거에서 보아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은 영세민의 계층에 속하였다.그들 서기관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행위는 경건 행위로 크게 권장되었다.특별히 생활고에 고통받고 있는 서기관을 도와주어 그 어려움에서 놓여나게 하는 일은 특히 공로로 높이 생각되었다.많은 유복한 유대인들이 자기 재원을 서기관들이 자유로이 쓸 수 있게 하였다.그러고 보니 부작용도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되었다.서기관이 "과부의 자산을 삼킨다"고 한 비난은 얼마 안되는 한정된 재산의 소유자에게 기식하기 때문에 생긴 비난의 소리이다.

  [마르코복음 성서주해] 13장 1-19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역사가 요세푸스에따르면 어떤 돌은 길이가 12미터,높이가 4미터,폭이 6미터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다.제자들에게 놀라움의 외침을 하게 한 것은 헤로데 대왕이 조화있게 장식한 그 건축보다 성전 전체의 크나큰 규모였다. 이러한 성전은 모든 공격에 저항하고 때로는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다.....에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그리이스와 로마의 유명한 신전은 어마어마한 폐허를 남겼더라도 그 개축이 가능했지만 예루살렘은 얼마 안되는 벽면만 남긴 채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벽마저 허물어 버렸다)  문자 그대로 재가 되어 버렸다.예루살렘을 저령한 티토는 어떻게 해서든 성전을 보존하고 싶었다.한 병사의 장난으로 서전 안에서 불이 났을 때 그것을 끄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그러나 끝내 불을 끌 수가 없어서 온 도성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그야말로 성전과 그것을 둘러 쌓은 건축 행각을 받치고 있던 기둥 등이 돌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다.363년 유리아노 황제가 그리스도의 예언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성전을 세우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거짓 메시아는 예루살렘 멸망 전까지 끊이지 않는다.곧 마법사 시몬(행 8:9-11) 파도스 총독 때의 테우다스(유다 고사故事 XX 5:1) 또 역사가 요세푸스가 암시하고 있는(유다 전기戰記 13:14) 무수한 거짓 메시아가 나타난다.이들에 대해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허풍쟁이와 사기꾼은 하느님의 영광을 받았다고 말하며 대중의 열광을 선동하고 거기서 하느님의 표지를 주는 것처럼 그들을 사막으로 끌어 냈다."펠릭스 총독 때 이두매와 트랜스 요르단을 지나 에집트에서 온 한 사기꾼은 예언자라고 자처하고 3만명의 대중을 모아 사막에서 감람산으로 이끌고 가 거기서 예루살렘을 점령한다고 외쳤다.자기들이 가까이 가면 에루살렘 성벽이 무너진다고 했다(유다 전기 II 13:5;유다 고사 XX8:6).페스도 총독 때에도 같은 사건을 볼 수 있다.대의명분이야 어쨌든 사실상 메시야란 분은 자기에게 하느님의 사명을 전해 주고 기적을 행하며 정치적인 독립을 약속하는 사람이었다.이와 같이 거짓 메시아는 유다인의 종교심을 이용하여 폭동을 되풀이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끝나는 전쟁으로 끌어 넣었다....고대에도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지만 예루살렘 멸망에 앞선 불화의 전쟁은 참으로 많았다고 할 수 있다.파아르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백성과 백성,도읍과 도읍이 서로 충돌하여 어디서나 피가 흘려지고 있다.갈리아에서는 윈데크스와 뷔르지뉴스 때에 도나우강,제르마니아,프리다니아,빨트인人의 모든 국경지대에서(타찌토우스 연대기 12:13,13:6-8;스웨토니우스=네로전 39). 그리고 팔레스틴에서는 구마누스 총독(48-53년)과 제시우스 프로르스 총독(64-66년)때에 유다인의 혁명이 있었고 가이사리아,아스카롱,프톨레 마이오스,띠로,다마스커스,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는 유다인과 그리이스인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졌는데 요세푸스에 따르면 저마다 도성을 적대시하는 두 진영으로 갈려 있었던 것 같다(유다 고사II 17:10,18:1-8)......30년에서 70년 사이에 지진이 일어나 소아시아,아카야,마케도니아,그레타섬 및 이탈리아를 괴롭혔다.61년과 62년에는 라우디케아,골로사이,예라포리스 등지에서 특히 심했다.63년 베스뷔오스 부근에 있던 폼페이와 헤르그라눔이 파괴되어 잿더미로 화했다.64년 로마시의 절반이 파괴되었다.글라우디오 황제 때 팔레스틴과 로마는 기근으로 괴로움을 받았다(행 11:28).그러나 이러한 재난은 아직 진통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여기서는 진통이라는 말 대신에 고통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특히 심한 진통을 가리키고 있지만 이 진통 뒤에는 애기가 태어나는 기쁨이 있다.지금의 시련도 마찬가지이다.그것은 심히 두려운 것이겠지만 70년의 파멸로서 종교적인 새 시대의 시작을 기록할 것이다.....예루살렘의 멸망에 앞서 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나라들-그것은 그 당시 알려진 전 세계였지만-에 복음을 전한다.그것은 바울로가 사도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울려 퍼졌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로마서 10:18).동시에 디모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그분은 만방에 전해져서 온 세상이 그분을 믿게 되었으며 영광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1디모테오3:16) ...구나벤바우엘,라그랑쥬,쁘라 같은 현대의 모든 성서학자는 이 성소를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전조는 68년에 있었다.이 때 기스가랴의 요한이 성전을 요세로 바꾸고 두 명의 대사제를 죽였다. 그리고 열심당의 단도로 사람의 피를 강물처럼 흐르게 했다.다음 69년에는 로마 군단이 헤브론 엠마우스 베델 및 예리고를 점령했다.이미 예루살렘은 포위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예루살렘의 멸망이 눈 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 표지였다(루가 21:20).그리스도교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요르단 건너편 벨라라는 도읍으로 피난했다.예루살렘에 남는다는 것은 좋든 싫든 전쟁과 살육에 말려든다는 뜻이었다.주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서 그들은 도시가 포위되기 전에 그 곳을 떠났고 폭풍이 가라않은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열심당이 그렇게 성전을 더렵혔다는 것은 뚜렸한 전조가 되는 주의였다.도시를 점령한 로마인은 거듭 성전을 더렵혔지만 이것은 이미 전조前兆라는 뜻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더우기 이런 비극이 겨울에 일어나면 기온이 내려가 춥게 되고 우기가 닥치면 비 때문에 길이 진흙탕이 되고 강이 범람하여 밤의 추위가 더 심래질 것이다.그 참상은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역사가 요세푸스의 말을 회상시킨다."이렇게 큰 불행은 일찌기 볼 수 없었다."


  [마르코복음 성서주해] 13장 20-37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역사의 주된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 위에 있는 것 같은 비유를 사용했던 것이다("그 재난이 다 지나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고") 예를 들면 바빌론의 멸망(이사야 13:10)혹은 에돔의 멸망(이사야 34:4)에 대한 예언에서 이사야는 그렇게 하였다.또 에제키엘은 에집트를 거슬리는(에제키엘 32:7-8) 예언을 하는 데에서 요엘은 야훼의 날을 쓸 때(요엘 3:2)에 같은 묘사법을 쓰고 있다.그러므로 만일 여기에 24절과 25절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만으로 현재의 세계의 종말이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예수님께서는<사람의 아들>의 재림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를테면 즐겨 이용하였던 후천적인 상징과 말씀을 사용하셨다.여기서는 과학자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그 말씀의 모든 뜻은 종교적인 것이다....<세대>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예수님과 같은 시대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그리고 이"이 모든 일들이"라는 말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말한다.그렇다고 하면 28절에서 30절까지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몹시 가까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30년 경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70년에 일어난 사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이 해석 곧<세대>가 그리스도와 같은 시대 사람을 가리킨다는 설은 15세기 경부터 시작된 것이다....팔레스틴에서 거의 모든 나무,감람나무,떡갈나무가 잎이 떨어지지 않는데 무화과나무만이 해마다 새로운 잎으로 변하기 때문이다.수액이 위로 오르고 겨울에 마른 것 같이 보이던 가지를 연하게 보이면서 싹과 잎이 돋을 때는 벌써 여름이 가까이 온 것을 알려 준다.일반 해석자,휴비,라그랑쥬 등은"이 모든 일들이"란 말을 이 이야기의 동기가 된 4 계절에 대응시켜 해석하고<예루살렘 멸망의 전조>라는 뜻으로 보았다.무화과나무가 몇 달 전부터 여름이 가까운 것을 알리는 것과 같이 예루살렘 멸망의 전조는 도망하여 구원을 받을 만한 시간적인 여유를 줄 것이다...이 시대는 그리스도와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게 보이지만 다른 해석도 권위 있는 교부들과 성서학자들의 지지가 있기 때문에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리라 생각된다(예언적이라면 위로부터오는 예언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하느님의 천사들과 나란히 아들을 기록하는 것은 마르코 뿐이다.이것은 예수님 당신의 말씀일 가능성이 있다.왜냐하면 후에 전도하면서 이와 같이 천사들과 예수님을 나란히 들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증명하는 베드로가 없었다면 오히려 싣지 않았을 지 모르기 때문이다.그래서 후세의 아리오파 이단자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밑자리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절을 이용했다.그러나.....단지 이 세상에 태어난 아들은 인간에게 마지막 날과 그 시간을 알릴 사명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승천하시는 날까지도 사도들은 그 호기심을 채울 수가 없었다(행 1:7).....로마인의 풍습과는 달리"저녁.....한 밤중....닭이 울 때.....이른 아침"이라고 나눈 것은 베드로의 표현을 따른 것이리라.

 [마가복음 성경주석] 13장24절 성서주해  選 성경주해 

   출처-페테리꼬 바르바로의 마르코복음

 

"그 재난이 다 지나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고"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메시아 출현에 뒤이어

우주적인 이변이 이어 질 것이다.

예언자들 또는 묵시록의 저자들은,하느님의 심판의 표현이었던

역사의 주된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

24절과 같은 비유를 사용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바빌론의 멸망(이사야13:10)혹은 에돔의 멸망(이사야34:4)에 대한 예언에서 이사야는 그렇게 했다.

에제키엘은 이집트를 징벌하는(에제키엘32:7-8)예언을 하는 데서,

요엘은 야훼의 날을 쓸때(요엘3:2)에 같은 묘사법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여기에 24절과 25절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만으로 현재 세계의 종말이라고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사람의 아들"의 재림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를테면 즐겨 이용하였던 후천적인 상징과 말씀을 사용하셨다.

여기서는과학자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의 모든 뜻은 종교적인 것이다.

 
   [마르코복음 성서주해] 14장 1-31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공관복음 사가는 가야파의 집에 있었던 음모의 이야기를 중단하고(14:1-2,10-11)베다니아에 있었던 기름붓는 이야기를 꺼낸다.그것은 유다가 스승을 배반하기로 마음을 굳힌 곳이 이 곳에서라고 생각되기(요한12:5-6) 때문이다.유다는 아마도 주님을 철저하게 사랑한 일이 없을 것이다.그리고 이 곳에서 당신의 죽음이 다가왔다고 하시고 그 장례에 대하여 말씀하신 이상 스승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었다.그러나 사실상 베다니아에서 기름부은 사건은 음모의 모임보다 앞서 이루어졌다.요한 12:1절에서는 과월절 6일전 곧 30년 4월1일 토요일에 이루어졌다고 한다.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식사를 마련한 것은 시몬이었다.아마도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나병을 고쳐주신 모양이다.되살아난 라자로도 손님의 하나였다(요한12:2).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있었다.그 여자는 자기 집에서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옛 해석자는 시몬이 라자로의 아버지라고 상상하였다.그러나 이것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여인이 넓은 방으로 들어 온다.라자로의 누이 마리아였다(요한12:3).그 여인은 속에 옥합(설화석고로 만듦)을 들고 있었다.순수한 나르드 향유가 들어 있는 값진 옥합이었다.<순수한>나르드 향유라고 한 것은 당시에도 불량품이 있었기 때문이다.쁘리뉴스라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인도의 히말라야 지방에서 자란 나무에서 얻은 나르드는 가장 귀중한 향유의 한 종류이다.인도의 나르드 말고 값이 좀 싼 그래다,시리아,갈리아의 나르드가 있었다....그 향유는 300데나리온이나 값이 나갔다.당시로서는 상당한 가격이며 노동자 한 사람의 1년분의 노임이었다....요한12:1-8까지에서 기록한 베다니의 기름부음과 마태오 26:6-13,그리고 마르코 14:3-9 까지에 실린 기록은 같은 사건이다.별 차이가 없어 설명하기 쉽다.오히려 장소도 같고 때도 거의 틀리지 않고 참석자도 사용된 향유도 완전히 같다..단지 요한만은 향유를 머리에 부은 것이 아니라 발에 부었다고 하였다(요한12:3).이와는 달리 루가가 기록하고 있는 기름붓는(루가 7:36-50)사건에 대하여 옛 해석자는 반대설을 내세웠다.그러나 지금 베다니아에서 한 기름부음은 별개의 것이다.루가가 기록하고 있는 기름부음은 갈릴래아에서 이루어졌고 수난 1년 전쯤 일이며 한편 마태오나 마르코,요한이 기록하는 기름부음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다니아에서 그리고 수난 전에 이루어졌다.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다르다.갈릴래아에서는 그 여자의 믿음과 사랑을 칭찬하셨지만 베다니아에서는 그 여자의 경건한 행위를 변호하고 그 상징하는 뜻을 가리키셨다.....물긷는 일은 당연히 부녀자가 할 일이지만 지금은 남자가 물을 길어 간다.그래서 눈에 잘 띌 것이다.두 제자가 예루살렘에 들어 간 것은 샘泉의 문을 통해서 였을 것이다.거기서 씨로에의 샘에서 물을 길어 가지고 돌아 가는 남자와 만난다....2층에 있는 이 방은 유다인의 집에서는 가장 넓은 방으로 테라스 밑에 있는 그 집 전면적을 차지한다.이 방에는 깔개가 깔려 있어서 식사를 할 수도 있고 잠을 잘 수도 있었다....마태오와 마르코 그리고 요한이 뚜렷이 암시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사랑의 성사를 결정하셨을 때 유다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빵이라는 말은 발효시킨 빵을 가리키는 말이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확실히 누룩없는 빵을 쓰셨을 것이다.그런데 누룩있는 빵을 가리키는 말을 쓴 것은 아마도 초대 교회에서 성체를 이룰 때 보통 빵과 누룩없는 빵 양쪽을 다 사용했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서가 아니라면 이제는 이 세상에서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실 것이다.곧 지금까지 당신이 말씀해 오신 죽음을 맞이할 때가 벌써 가까왔다는 것이다....과월절 만찬 끝에 감사의 노래로 힐렐 시편의 마지막 시편(113-118)을 노래하였다.113편과 114편은 식사하는 사이에 노래하였다.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11사람에게 둘러 싸여 최근의 발굴사업으로 발견된 계단을 지나 띠로포에온을 내려 온다.샘의 문으로 도시를 나와 거기서 케드론을 건너 감람산으로 갔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일반적인 관례에서는 1주간의"유월절 절기"라고 하여 실제적인 의미에서 상술한 절기를 하나로 묶었다.1절에 보면 그 절기의 2중적 국면이 구분이 되어 있으며 그런 사실은 1세기의 유대인의 문헌으로는 방증하기 어렵고 구약의 관례를 보여 준다(레23:3이하;민 28:16 이하,대하 35:1,17;스 6:19-22).유월절 양을 희생하는 날이(니산월 14일)"무교절의 첫째 날"이라고 좀 막연하게  정하여 놓았기 때문에 니산월 14일부터 소급하여 계산할 것인지 결정하기 곤란하다.2중적으로 결합되 있는 문구로 짐작하여 니산월 15일로 보아야 할 것 같다.그러므로 본문의 시간은 그 달 13일 어느 시간이 된다....저희들이 공중 질서를 유지하고 로마 당국에 의한 실력에 의한 개입을 피하려고 하면 계략이 절대로 불가피하였다.절기기간의 예루살렘의 인구는 50,000명에서 250,000명으로 불어난다.민요의 위기는 폭발 직전이고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이 생길 수 있는 격앙激昻하기 쉬운 갈리리 사람들편에 있어서 그 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태였다.그렇기 때문에 2절의 언급은 유월절과 결합이 된 구원의 소망에 의하여 고조된 폭동의 열기가 흥분한 군중을 휩쓸어 소요를 일으켰을 때에 군중이나 상황을 통제 불가능할 때를 가리킨다....인도에서 자생하는 뿌리에서 추출한 향유인 나드라고 할 수 있다.나드의 향기를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넉넉한 분량을 작은 용기 속에 밀봉하여야 하며 그 용기를 열었을 때에는 한번만 사용하여야 한다.이 사기 그릇으로 된 주전자형의 용기에 긴 목이 있어 그리로 향유를 붓게 되어 있으며 그 향유를 사용할 때에는 그 긴목을 깨야 한다.1세기에 플리니 1세는"최량의 질의 향유는 옥합 속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이 향유의 값이나 나드라고 품질을 밝힌 점을 미루어 모친이 딸에게 전하여 줌으로써 대대로 상속하여 주는 동산임이 틀림없다....유월절 전야에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를 하기 때문에 저희들이 빈자구제의 문제로 거론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는지 모른다.또한 관례에 의하면 이 절기 기간에 예루살렘에서 지출한 비용의 두번째 10의 1조의 일부분은 구제금으로 지출한다....그 식사의 종류는 무교병과 포도주와 쓴 나물과 건과乾果와 양념과 포도주로 만든 쏘스와 그리고 유월절 어린 양의 구운 고기 들일 것이다....이 유월절 식사의 진행은 가장이 유월절 기도를 올리며 할렐의 시편으로 제창하는 것이 구성의 핵심으로 되어 있다.온 가족이 자리를 정하면 가장이 축복을 선언하므로 시작이 된다. 이 축복은 먼저 이 축제를 그리고 그 다음에는 포도주를 축복한다.그런 후에 참석자들은 첫번째 잔을 마신다.그 후에 음식이 안으로 들어온다.이 음식은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야채와 과즙과 불에 구운 어린 양고기이다.그런 후에 아들이 어찌하여 이 밤이 다른 밤과 유별나며 각별한 풍습과 식사가 무슨 이유인지 질문을 한다.가장은 이 질문에 답하여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기사를 회상시켜 준다.그러므로 자연 이러한 교훈은 하나님이 마련하여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와 미래에 있을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넘치게 만든다.즉"그러므로 주 우리의 하나님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시여.우리로 하여금 평화로이 임하는 이 절기를 즐기게 하옵시고 주께서 이 성읍을 세워주심을 기뻐하는 마음과 여호와를 섬기는 즐거움으로 즐기게 하옵소서....그리고 우리는 구원의 새노래로 당신께 감사하리이다" 이 새노래는 옛 할렐(시113-115)의 전반에서 인용하였으며 그것이 있은 후에 포도주의 두번째 잔을 마신다.그렇게 한 후에 가장은 떡을 취하여"우리 주 하나님,세상의 주재자여 당신이 이 땅에서 떡을 만들어 내셨나이다"하고 축복을 한다.그렇게 한 후에 가장이 떡을 떼어 식탁에 앉은 자들에게 주고 그들은 받은 후에 비로소 구운 새끼 양의 고기를 먹기 시작한다.그리고 이 식사는 밤 자정을 넘겨서는 안 된다.식사를 모두 마쳤을 때가 되면 가장은 세번째 포도주 잔을 감사의 기도로 축복을 한다.그런 후에 할렐의 두번째의 부분(시116-118)의 노래를 하며 그것이 끝나면 네번째 잔을 마심으로써 유월절 식사를 끝낸다....엄숙하게"다시는...마시지 아니하리라"하신 말씀의 뜻은 이 자리가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이며 고별의 성격을 제시하여 준다.예수님의 이 금욕적 맹세의 목적은 대리적 고난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한 그의 결정이 확고 부동임을 선언하신다.잔치와 포도주에 관한 예언적 맹세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진노의 쓴 잔을 받아마시겠다는 결심에 의해 자신을 바친다.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원래 대제관직은 1인 종신직이었다.그러나 예수님시대에는 대제관을 파직하는 일이 생겨 전직 대제관 안나스와 현직 대제관 가야파(18-36년)가 있었다.현직 대제관은 18,000여명에 달하는 제관과 레위의 우두머리였을 뿐 아니라 유대 최고의회의 의장이기도 했다.여기 "대제관들"은 현직 대제관과 중견제관들의 총칭이다.....이제 무교절 첫날 곧 목요일인데 그 날 오후 (유대교 월력으로는 니산 14일) 3시경부터 성전에서 양을 잡고 해가 진 다음에(니산 15일) 예루살렘 시내에서 해방절 만찬을 먹었다고 한다.

   [마르코복음 성서주해] 14장32-72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옛 순례의 기록을 참고하여 실시한 요즈음의 고고학 조사단은 예수님께서 번민하시고 유다가 배반한 곳을 정확히 알아 낼 수 있었다.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곳과 체포되신 곳은 뚜렷이 구별되어야 한다.일종의 동굴이라기보다 배신의 동굴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게싸마니 동산에서 계단으로 올라 가야 했다.이 동굴은 길이가 17미터 폭 9미터 그리고 높이가 3.5미터로 달걀형으로 된 6개의 기둥이 돌 천정을 바치고 있다.380년에서 390년 사이에 세워진 대성당의 토대를 찿기 위하여 이루어진 발굴 조사에서 예수님께서 번민하신 큰 바위도 발견되었다.예수님의 기도로 성별되고 그 피로 적셔진 특히 성스러운 이 바위 위에 그 대성당을 세웠다.그래서 4세기가 끝날 무렵부터 사제들은 주님의 피와 땀이 섞여 있었던(루가 22:43-44) 이 곳에 주님의 잔을 바쳤던 것이다.이 바위는 배신의 동굴에서부터 남으로 100미터 쯤 떨어져 있다.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 포위 때 감람산은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한다.그러나 이 큰 바위 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 미래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번민하신 곳임을 알려 준다.번민의 대성당은 1926년에 그 재건 공사가 완전히 끝났다.지금 그 바위는 성당의 한가운데에 있다...."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루가 22:41)곧 20-25미터의 거리를 두고 앉으셨다....입고 있는 옷은 잘 사는 집안에서 입은 잠옷이다.평민은 낮에 입은 겉옷을 그대로 입고 잠을 잤다.발자욱소리와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깨어나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고 밖으로 나온 그의 옷을 보면 집이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그는 게싸마니 부근에 있는 어느 집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또 만찬을 나눈 이층방이 마르코의 집이었다고 한다면 거기에서 따라 왔는지도 모른다......그는 6년이가 7년에서 15년까지 대사제직에 있었다.빌라도의 전임 총독 발레리우스 클라토우스(15-26년)에게 파면은 되었지만 그의 변함없는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 덕망도 높았다.그의 사위 가야파는 18년에 대사제가 되었고 그리고 그의 다섯아들 엘르아잘,요나타스,테오피로스,마티아스,아나누스가 뒤를 이어 그 자리에 앉았다.이리하여 50년간 대사제직은 그 집안의 전유물이 되었었다.안나스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항상 상담역을 맡는 등 성전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역사적인 이 사실은 왜 예수님께서 안나스에게 소개되었는가 하는 사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심문은 두 번이 아니고 한 번뿐인데 그것은 대사제 가야파 앞에서 이루어졌다.가야파의 저택이 예루살렘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고 있다.시온산 꼭대기 북쪽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람도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사람도 있다.마르코는 예수님 시대의 최고의회의 구성원인 대사제,원로,유법학자들이 다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밤에 소집된 긴급집회이기 때문에 대사제들은 모였겠지만 다른 두 그룹,곧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두 모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그러나까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그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최고회의의 가야파는 발레리우스 크라토우스에 의해서 18년의 대사제직에 올랐지만 36년 뷔텔리우스에 의해서 마침 빌라도와 동시에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파면되었다.빌라도라는 의심많고 질투심이 많은 또 폭군적이며 탐욕스러운 총독 밑에서 이토록 오랫 동안 가야파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얼마나 천한 노예의 근성의 소유자였던가를 잘 말해 준다...네 사가史家의 기록을 맞추어 보면 베드로의 배반은 세 번 다 시간이 다르며 또 말 상대가 다르다.같은 것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처음의 두 번은 아마 문지기로 있던 여종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 같고 마지막 한 번은 종들의 위협을 받아 이루어졌다....갈릴레아 평민들은 콧소리를 죽이고 또 어떤 모음의 음조를 바꾸어 발음한다.그래서 때로는 유쾌한 오해를 빚는 일도 있었다.당시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갈릴레아 사람 하나가 무엇인가를 청하고 있는데 유다인 한 사람이 그를 놀리며 대답한다."어리석은 갈릴레아 사람아,자넨 무얼 구하고 있나? 하모루(나귀)인가 하마루(포도주)인가,아니면 아마루(양털)인가 혹은 잉마루(양)인가?"...오늘날 베드로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슬피 울었던 그 장소에는 닭의 울음소리를 기념하는<성 뻬뜨로.인.가리깐떼>(닭이 울었을 때의 성 베드로)라는 아름다운 성당이 서 있다.그렇다.현대에 사는 우리도 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ㅂ반하는 죄를 범할 지 모른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진심으로 뉘우치고 주님의 자비를 믿고 주께 돌아 가는 것이다.어떤 경우에나 실망,체념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뉘우침의 눈물보다 귀한 것도 없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나의 아버지"인 "아바"를 언어 그대로 보존한 것은 예수님께서 가정에서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언어로 기도하셨음을 말하여 준다.예수님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 기도를 함으로써 새로운 일을 하셨다.왜냐하면 초기 팔레스틴의 유대주의 문헌을 보면 개인이 사사로이 하나님을 향하여"아바"를 사용한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일반적인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친숙한 가족적인 언어의 사용은 기도언어로서 불경이며 따라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아버지께 대한 한 자녀로서 단순하고도 내적이며 신뢰감으로써 기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하나님께 향한 말씀 중에 나온 "아바"의 사용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깊은 곳을 열어 보여 준다.36절에 나오는 "아바"는 아버지께 향한 무조건의 순종과 신앙의 표현이다......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한 영장이 산헤드린에서 발급되었음이"대제사장,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라고 한 포괄적 제시에서 나타난다.예수님의 신병身柄을 구속하는 조치를 홀로 유대인 당국이 책임지고 감행하였다는 해석을 뒷받침하여 주는 세부적 증거 중 하나는 체포한 후 즉시 예수님을 대제사장의 집으로 압송한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레위 사람들로 구성이 된 성전수호병을 가세하기 위하여 성전구역 너머의 질서와 공안을 담당하고 있는 사병들 그러니까 예비병들을 동원하였다.저희들은 체포의 권한을 집행하며 죄수들을 법정으로 이송하며 법정에서 언도한 형을 집행한다.겟세마네에 당도한 파견병들은 무장하고 있으며 상기한 직무를 맡고 있는 경호원들일 것이다....만일 문서로 체포의 영장이 법에 의하여 요구되었다고 하면(참조,행9:2) 그 중 한 사람이 그 문서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 파견대의 지휘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로마제국의 영지에서는 시민권이 없는 사회계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민법이나 대체적으로 형사법을 집행할 때에 지방의 행정책임자들에게 위임하였다.로마인의 총독의 통치아래 있을 시에도 지방사정에 속하는 범법자나 피의자를 체포할 때에는 독자적인 경찰병력을 행사하여 산헤드린이 손을 쓸 수 있었다.기록의 검토에 의하면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들이 취한 처사가 유대인의 형법규정의 정상 운영과 아무런 모순이 되거나 하자가 있다고 할 수 없다.....지금까지 줄곧 산헤드린에 의한 예수님의 사용언도의 재판이 절기날에는 중범인의 재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금지 조항 때문에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들을 하였다.그러나 신명기의 법(신 13:12,17:13,21:21)에 의하면 특정적으로 심각한 중범인 경우"온 세상이 듣고 두려워 하여"(신 17:13) 그러한 범죄를 다시 범하지 않게 하는 보보기로 날짜에 구애없이 처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초기의 타나이트 석의釋義에 의하면위의 문절을 해석하여 범법자를 순례자가 모이는 날에 처형한다고 한 뜻으로 본다.이러한 관례법을 밟으려면 예수님의 경우에는 체포된 후 즉시 재판한 후에 지체없이 처형할 필요가 있었다.....마가의 의도는 법정이 정원 출석에 의하여 개정이 되었다고 하는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려고 함이었다.미쉬나에 의하면 회원 중 23명만 참석하여도 정족수가 되었다.이 때의 대제사장은 가야바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요셉이었다.보통의 경우 임기가 4년이던 때에 그가 19년의 임기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서(A.D.18-37) 그의 외교적 수완이나 행정가로서의 능력이 탁월함을 알 수 있다.기록에 보면 전자에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았던"원로 제사장들"(짐작건대 안나스,이스마엘 벤 휘아비,엘르아살 그리고 카미토스의 시몬)과 친분이 있었다.그리고 성전 경호 사령관,성전 집사,3인으로 구성된 성전 회계와 관계가 깊다.장로라 함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가를 대표하며 부유한 지주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대제사장과 장로는 예루살렘의 전통적인 지배계급층을 구성했으며 사두개적인 성향을 띤 채로 여전히 산헤드린 내에서는 균형있는 세력을 유지하였다.세번째에 해당하는 계층인 서기관들의 대표들은 주로 바리새적인 확신을 지지하는 중류출신인 법률가들이다.만일 미쉬나가 1세기의 법정구성을 정확하게 문서로 기록하였다고 하면 저희들은 높은 자리에 반원형으로 서로 얼굴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앉았다.그들이 앉은 우편과 좌편에 서기가 두 사람 서 있어 진행을 기록하였다.그리고 피의자와 증인들의 자리는 중앙 앞에 있었다.....유대인의 법정심리에 있어서는 증인이 검사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이 증인들은 판사와 피고인 앞에서 한 사람씩 직접 발언을 한다.한 사람씩 나와서 하는 발언이 세부적으로 비교하여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의 증언은 증거로 용납되지 않았다.한밤중에 예수님을 정죄할 증인들이 쉽게 동원된 점으로 미루어 저희들 모두에게 곧 예수님께서 체포될 것과 소집이 있으면 즉시 출두하도록 사전에 타협이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한번 죽이기로 결정이 난 후에 산헤드린은 그의(가공할 신성모독의)행위가 용납될 수 없다고 하는 공식입장을 외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그러므로 그를 내어버림과 공적으로 파기함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행위인 침을 뱉는 일과 매질이 따른다.예수님의 얼굴을 가리우고 손바닥으로 치면서 그분을 친 자가 누구인지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한 요구는 이사야 11:2-4의 오래된 해석을 보존하여 주고 있다.그곳에 보면 눈으로 볼 필요없이 냄새를 맡음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여기 본문에 기술된 내용은 메시아인가 아닌가 하는 신분을 확인하는 전통적인 관례이다....비교적 규칙적으로 한밤중에서 새벽 3시 사이에 3번 운다고 한다...예루살렘에서 12여년을 관찰하여 본 결과 새벽닭의 울음 소리 3회의 시각이 대충 첫번째는 한밤중이 30분지났을 때 두번째는 대충 1시간 지난 후에 그리고 3번째의 울음은 2번째의 울음이 있은 후에 한 시간이 지났을 때이다.모든 닭울음은 3-5분간이고 그리고는 밤은 다시 고요히 깊어 간다.

. [마르코복음 성서주해] 15장 1-47절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꼬 바르바로

빌라도는 본티오라는 로마의 역사 깊은 가문 출신으로 유다의 5대 총독이었다.26년에 임명되어 36년에 해임되기까지 역사상 가장 커다란 의미를 지닌 종교사건들이 일어났다.즉 선구자의 세례,예수님의 공생활,그 심문,십자가의 처형 그리고 사도들의 최초의 전도와 교회의 시작,이런 일들이다....불요불굴의 성격,독재적인 법관,이런 평이 있는 반면에 빌라도는 실제로 야심가로서 의지가 박약하고 결단력이 모자라는 인물이었다.그는 유다인의 국가감정,종교적인 희망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다만 마음 속 깊이 그를 멸시하고 있을 뿐이다.너무나 자주 백성들을 압박하였다.졸렬한 통치때문에 폭동이 일어나서 자기편이 우세할 때는 피를 흘려 가면서라도 진압하고 반대로 열세에 몰릴 때에는 돈으로 매수하여 질서회복을 꾀했다.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로마인의 환심을 사는 것과 티베리우스 황제의 신임을 얻는 것이었다.총독생활 초기에는 여러가지 피비린내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에탐의 水道수도를 개량하기 위하여 성전의 보화를 약탈하였고 반대하는 유다인이 있을 때에는 무차별 학살을 하였다.적어도 로마가 표면적으로 존중하고 있던 유다인의 종교감정을 무시하고 밤 시간을 틈타서 군단을 상징하는 우상의 표지를 예루살렘에 세웠다.루가13:1을 보면 아무런 방비도 없는 갈릴레아인들을 성전 안에서 학살하였다.이리하여 그는 30년 경 유다인의 덕망을 얻지 못하고 반대로 원망의 대상만 되었다.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인간으로서 마음 속 깊이 미워한 이 총독에게까지 협조를 구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미워했던가를 웅변으로 말해준다.....가시관에 관한 기사가 없는 것을 보면 옷을 갈아 입힐 때 그것을 벗긴 것 같다.그것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5세기의 십자가에는 가시관이 없었다.가시관이 있는 십자가는 13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오리게네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여기에는 옛날 아담의 두개골이 묻혀 있었고 지금은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 온 인류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고 하였다.그러나 이것은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성 에로니모는 그 이름에 대하여 이 곳은 사형집행자으로 사형된 사람들의 두개골이 여기에 흩어져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이 견해도 근거가 없다.만일 그랬다면 왜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거기에 자기 무덤을 만들게 했는지 알 수가 없다.지금 그 곳을 골고타라고 부르는 것은 혹과 같은 형태가 두개골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하긴 이 곳은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은 5-10미터의 높이였다.....마태오는27:34에서 일반적으로 쓴 맛을 나타내기 위하여 또 아마도 시편69:21의 영향을 받았음인지"쓸개 탄 포도주"라고 하였다. 이 음료는 수형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귀족 부인들이 마련하는 것이었다....유다인들은 특히 엄격하였으므로 사형의 경우에도 허리에 걸친 속 옷만은 벗기지 않았다.그러나 예수님은 로마군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에 로마의 관습에 따라서 모든 옷을 베꼈다고 생각할 수 있다.십자가에 어떻게 못박았느냐 하는 점도 명백하지 않지만 땅에 놓인 십자가 위에 예수님을 눕혀 놓고 못을 박아 그대로 세웠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로마인은 보통으로 기둥을 먼저 세우고 땅에 놓았던 가름대에 수형자를 달아 그것을 들어서 기둥에 달았다.그리고 아래로 쳐진 발에 못을 박았다.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메어 단 것이 아니라 못박았다(요20:25-27;루가24:39-40)는 것이다.발은 따로따로 못을 박았을 것이다.두 발을 못 하나로 박은 십자가는 12세기이후에 만든 것이다.사형집행자들은 자기들의 일을 마치고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이것은 당시 사형집행인들의 권리였다.만일 마르코의 기록을 요한19:23-24로 보충한다면 4사람이 나누어 가졌음을 알 수 있다.이 4부분은 외투,속옷 그리고 머리에 쓰는 것과 신이었을 것이다....두 복음사가(마르코와 요한)가 서로 같은 시간을 기록하려고 하였는데 제3시의 끝과 제6시의 시작쯤이라고 했다고 보면 납득이 간다.곧 두 사람 다 예수님은 낮에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고 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엘리야>라고 알아 들었던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르코의 기록보다 마태오가 27:46절에서"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라고 기록한 그대로 말씀하셨다고 생각된다....이 때 성전에서는 밤의 희생이 이루어지고 유다인의 과월절양이 수 천 마리나 잡히고 있었다.같은 시간에 과월절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골고타에서 당신의 거룩하고 깨끗한 희생을 인류의 대속물로서 바치셨던 것이다(1고린토 5:7)...거의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지성소의 휘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지성소의 휘장이 찟어졌다면 그것은 구약과 그 의식의 폐지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이렇게 되면 대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 누구나 다 들어 가 하느님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다른 해석자들은 성소의 문 앞에 있는 휘장이라고 말하고 있다.이러한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이 성소에서 나와 우리와 가까이 하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전설에 따르면 이 백인대장은 후에 회개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한다.....지금의 렌데스,당시의 아리마태아라고 한 마을의 요셉이라는 사람이었다.최고의회의 회원으로 유력한 인사였고 빌라도에게 교섭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로마법에는 수형자의 시체가 썩을 때까지 또는 들짐승이 뜯어 먹을 때까지 형틀에 남겨 두도록 되어 있었다.그러나 만일 수형자의 시체를"묻기 위하여"가족 혹은 친구들이 청할 경우에는 큰 이유가 없는 한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로마법은 "수형자의 몸을 묻기 위하여 청구하는 사람들에게 넘겨 주어야 한다"고 정확히 명시하고 있었다.....요셉 덕분에 예수님은 사용된 일이 없는 새 무덤을 얻으셨다.이 곳은 사형장에서 겨우 39미터 떨어진 곳이다.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로마인의 관청은 일출과 함께 일을 시작한다.그러므로 산헤드린은 이 계루된 사건을 해가 뜨자마자 빌라도에게 이첩할 필요가 있었다..만일에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심리를 야간심리로 하지 않고  아침에 진행한 그 후에 빌라도에게 인도하였다고 하면 그때는 시간이 너무 늦어 총독이 그날의 일과를 이미 계획한 후에 중단시키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의 심리는 한밤중에 강행되었다.본질상 산헤드린은 판사석이지만 로마법정에서의 판결은 황제가 임명한 행정장관의 유일한 책임이었다.보통의 경우에 총독과 자리를 같이하는 법정변호인이나 관리들은 판결권이 없으며 법률적인 조언을 말할 뿐이다.로마 제국의 동반부에서는 법정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희랍어였다.그러나 요세푸스의 진술에 의하면 유대에서는 법정심리와 진행에 통역을 사용하거나 지방어를 사용함으로써 하였다고 한다.원칙적으로 공개적으로 심리하게 되어 있는 예수님의 재판은 원고측의 고발과 자유롭게 발언하는 증인들의 청문형식으로 총독이 사실심리를 함으로 진행이 되었다.변호인의 주장과 증인의 증거제시가 판결이 골자가 된다.모든 증거가 수집이 되면 이 사실이 포고된다.총독은 법률자문과 협의한 후에 재판석에서 그 판결을 선고하면 그 언도는 즉시 지체없이 집행이 된다.....로마사람들이 가하는 매질은 지극히 잔인하다.죄수의 옷을 벗긴 후에 나무기둥이나 건물기둥에 묶거나 또는 그대로 마당에 내동댕이를 친 후에 몇 명의 파수병들이 수없이 채찍질을 가하여 온 몸이 찢어져 너덜너덜하도록 만든다.마가복음의 본문이 암시한 태장인 공포의 살인도구인'플라게름'이었다.이 채찍은 가죽 끈 끝에 몇개의 뼈나 납같은 것이 달려있는 노끈으로 되어 있다.로마법에서는 얼마나 많은 회수를 매질할 것이가에 대한 규정이 없다.그러므로 태장형을 치른 죄수는 그 채찍질이 끝나면 혼절하며 사망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요세푸스도 갈릴리 출신의 자기의 정적 몇 사람이 이 태장형에서 내장이 터져 나와 노출될 때까지 매질을 다한 일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총독 알비너스는 선지자 예수 바르 하난이 뼈가 나올 때까지 매질을 한 일이 있었다.보통의 경우 최고형의 언도가 내리면 처형 직전에 매질을 한다.그러나 매질을 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형벌이었다....마가가 사용한 언어는"강도들"이라고 하여 정당하지만 어의語意 그 이상의 의미 그러니까 정치범에 해당하는 자들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요 18:40에 있는 그대로)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단어가 자주 열심당을 가리켜 사용되었다....아모스 선지는 종말론적인 주의 날의 맥락에서 정오에 어둠이 발생할 것을 예언한 바 있으며 그것에 의하면 흑암은"독생자에 대한 애곡"의 표시였다(암8:9이하).필로는"제왕이 사망하거나 도성이 멸망할 시에"그 심각성의 증거로서 해나 달이 초자연적으로 가리워지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언급하였다.태양이 빛을 잃었다 함은 역사적 관점에서 위기의 표식이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고난이 우주적이고 또 종말론적인 차원이 있음을 강조한다....여기에 언급된 휘장은 헤롯의 성전입구에 있으며 낮시간에 문들이 열렸을 때에 앞뜰에서 바라볼 수 있는 그 장엄한 휘장일 것이다(참조 마27:51,54).이러한 결론은 유대인의 전승과 유대-기독교인의 전승에 의하여 뒷받침이 되고 있다.....복음서는 어디에도 예수님의 시신을 씼었다고 하는 언급이 없다.그러나 시신을 씼는 관례는 너무도 중요한 유대인의 관례이기 때문에 안식일에도 이 관례는 지켜도 좋다고 허용되어 있다. 요셉이 세마포를 준비하는 동안에 예수님의 시신을 유혈 그대로 두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예수님을 장레하였다고 한 진술(요 19:40) 은 세마포로 싸기 전에 그 시신을 결례대로 씼었다고 하는 가정을 확고하게 하여 줄 증거가 된다...정문이 구릉쪽으로 열려 있고 안에 내실이 있다.그 내실의 뒷부분에 정방형의 문이 약 2자 높이에서 안으로 인도한다(참조 요20:5,11,"꾸부려...속을 들여다보니",안치실은 6자내지 7자의 네모꼴이며 천정의 높이도 대충 그와 같다).매장이 일은 내실에서 거행한다.이 시대의 일반적인 경우에는 넓적한 돌 슬래브로 입구를 봉하여 동물의 출입이나 도굴꾼들을 막았다.마가의 기사에 의하면 큰 돌을 그 자리에 굴려 입구를 봉하였다고 하였다.그 돌은 둥근 모양이나 만일 그 무덤이 예외적으로 부유한 자의 격식을 갖춘 무덤이라면1미터 정도의 직경을 가진 연자 돌 모양 잘 다듬어진 원형일 것이고 암반 위애 넓적한 궤도를 파 굴려서 제 자리에 서 있도록 하였을 것이다.그 궤도를 팔 때에 입구 쪽으로 내리받이가 되도록 경사가 있기 때문에 입구를 막았을 때에는 용이하게 굴러내리도록 하였다.그러나 그 돌을 굴려 출입구를 열려고 할 때에는 수 명의 장정이 힘을 합쳐야만 한다.이러한 규모의 무덤은 수개처 있을 뿐이다.그러나 전부 그 연대가 예수님 시대에 속한다.

 
  [마르코복음 성서주해]16장 성경주석  選 성경주해 

    페데리고 바르바로

향료는 토요일 밤에 산 것이 된다.일요일 아침 아직 어두울 때 세 부인이 예루살렘 길거리에 나와 샀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막다라 마리아는 제 눈으로 무덤 입구가 열린 것을 보고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지 전혀 하지 못하고 도리어 시체를 도둑맞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되어 미친듯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리려고 달려 간 것 같다(요한 20:2)....이 결론부분(9-13)은 상당수의 권위 있는 옛 사본에는 실려 있지 않았다.그러나 어떤 사본에는 보다 짧은 형태로 실려 있다.소문자 사본 또 라틴어 사본,불가따 등에도 이 결론이 실려 있다.또 이 결론은  유스티노(2세기)와 성 이레니오(2-3세기)에 의해 알려졌고 따찌아노는 그의 디아텟사론에 싣고 있다.에우제비오와 성 예로니모도 이 결론의 정전성을 의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에서 읽혀지고 있었고 성 에피파네오,금구 성 요한,성 암브로시오,아우구스띠노 등도 이것을 사용하고 있다.....4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인정되고 4세기 이후 의문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인정을 받아 왔다.이것을 보면 마르코 자신이 몇년인가 후에 덧붙인 것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이야기하고 또 사도들에게 준 사명과 능력을 기록함으로써 자기 복음을 완성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옛날의 전통과 많은 성인들 그리고 현대의 성서학자,구나벤 바우엘,라그랑쥬,휴비 등은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 뒤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자들을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보내시어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아멘!"

뉴인터내셔널 성경주석

무덤 정면의 현관에 들어서면 그 안에 전실이 있고 그 속에 두 자쯤 높게 네모진 입구가 있다.이 시대의 무덤구조는 이 전실과 안치실 사이에 낮게 파인 작은 입구가 있는 것이 표준이 되는 특징이다.시신이 안치되는 내실은 6자 또는 7자의 네모꼴이며 천정의 높이도 대충 그와 같다.

 출처 : http://blog.daum.net/evangerlist/4439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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