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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후 처음 만난 사람
2014, 9, 28
요20 : 11-18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보이신 그 영광은 믿는 자가 하나님께 받는 그 어떤 영광보다도 더 큰 영광이요, 특별한 영광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처음 만난 사람은 제자들도 아니고 그의 어머니도 아니요, 그의 동생들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따랐던 마리아였습니다.
주께서 그녀를 부활하신 후 처음 만난 주신 것은 그녀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7귀신이 들려 귀신으로 인하여 그 인성이 파괴되어 사람답게 살지 못했고, 누구에게 사랑을 받은 일도 없고, 사람으로써의 무엇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지극히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주님을 만난 다음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그녀의 몸에서 7악귀를 쫓아낸 다음 제 정신이 돌아와 귀신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섬기는 주의 여종이 된 사람입니다.
가장 비천하고 비참한 생명에서 가장 영광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 누구의 종으로 살았습니까?
세상의 종이요, 육신의 종이요 마귀의 종으로 살았지 않습니까?
여기 7귀신이 든 막달라 마리아와 크게 다르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만나기 전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육신의 종이요 마귀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처럼 우리도 주님을 만난 다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변화된 새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대해서 약속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과 영생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하신 천국과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과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신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천국과 영생을 두고 결코 도박을 하지 마십시오.
의심하시는 분들이나 아직 확실하지 않는 분들은 물론 확신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항상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시편 24편에 있는 말씀대로 “여호와께 하나님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는 이들은 여호와를 찾고 그 얼굴을 구하는 자들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뜻은 개인적인 만남과 인격적인 만남을 의미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구체적으로 찾고 또 열심히 찾는 사람들은 주께서 그를 아십니다.
주님을 찾는 그를 반드시 만나 주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의, 즉 죄 사함의 축복과 영생의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주님을 찾고 만난 이들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주님은 자기를 찾는 이들을 아십니다.
주님은 주님을 찾는 이들의 눈과 귀를 열어 주시고 주의 부르심을 보고 듣고 마음으로 믿게 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보이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녀가 무덤을 떠나지 않고 울면서 주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시체를 찾고 있었지만 누구도 주님의 시체를 찾고 있지 않는데 그녀가 찾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께서 그녀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주님을 찾으세요, 그러면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항상 주님을 찾는 이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서도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달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5편 4절에 “여호아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하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11-12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에 와서 빈 무덤인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시체라도 어디서 찾아야 하는데 어디서 찾아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무덤에서 홀로 울고만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주님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주님의 시체를 찾지 못하여 울고 있는 마리아를 보고 계시는데 그녀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녀는 울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세마포만 놓여있는 무덤을 구부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뜻 밖에 두 천사가 주님이 누었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리아가 이들을 천사인 것을 알아보았는지 아니면 사람으로 알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성경에 천사가 나타난 것을 여러 번 기록하고 있는데 천사들의 복장은 다 흰 옷 입은 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흰 옷은 순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본래 천사의 모습은 사람의 형체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로 사람에게 보내기 위해서 사람의 모양과 사람의 말을 하게 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경에 흔히 나타난 천사의 모습은 사람입니다.
아마 부활하신 주님도 사람의 모습이니까 천사의 모습도 사람의 모습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윗이 시편 103편 20-22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을 여호와의 천사 또는 천군으로 표현한 말씀이 내게 참 은혜가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지으심을 받은 자라 하였고, 또 능력 있는 천사들이요, 천군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이기 때문에 천군 천사가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나도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천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천군 천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곳에 천들을 보내신 것은 오직 주님을 찾는 마리아를 위해서 보내신 것 아닙니까?
이것을 어찌 작은 영예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주님은 찾는 이들은 천사도 만난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두 천사가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 찾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주께서 주를 찾는 마리아에게 먼저 천사를 만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천사가 그를 늘 항상 함께 하며 돕는다는 말씀은 성경에 말씀입니다.
13-14절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천사들이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하고 물을 때 마리아는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녀는 내 주님을 사람들이 무덤에서 어디로 옮겨갔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울고 서 있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없어진 주님의 시체를 자기가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만큼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녀가 천사들에게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고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와 제자들 모두 처음에는 예수님이신 줄을 얼핏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그녀와 제자들 모두 주님의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고 그들의 영적인 눈이 멀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얼핏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전혀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딘가 좀 육으로 살아계실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막달라 마리아만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얼핏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동행하고 가면서도 내내 알아보지 못하다가 주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할 때 주께서 떡을 들고 축사하실 때에야 그들의 눈이 뜨이고 부활하신 주신 줄 알아보았습니다.
또 요한복음 21장 12절에 새벽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7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숯불을 피어 놓고 떡도 고기도 구워 놓고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 하실 때 제자들은 그분이 주님이신 줄을 알기 때문에 감히 누구냐 하고 묻는 자가 없더라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새벽 갈릴리 바닷가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떡도 굽고 생선도 구워 먹으면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 주님이신 줄 알기 때문에 감히 누구시냐고 묻는 자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부활하시기 이전과 어딘가 조금 달라 보이시는 이시라는 뜻 아닙니까?
또 성경 어딘가에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조금 달라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5-1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겨 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여기서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인 줄을 알고 “주여” 라고 하는 말은 영어의 sir에 해당되는 존칭어로 농부에게도 붙이는 뜻으로 별 의미 없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주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실 때 그 때야 주님을 마리아가 알아보고 “선생님”하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은 시체를 찾던 그녀가 살아계신 주님을 마났을 때 얼마나 반갑고 기뻐했겠습니까?
주께서 “마리아야” 하실 때 비로써 눈을 떠 그분이 주님이신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께서 “마리아야”하시고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실 때 비로써 마리아가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알았던 것처럼 우리의 경우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살아계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실 때 비로써 마리아가 눈을 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된 것처럼 우리도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가 영의 눈을 떠서 살아계신 주님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써 살아계신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야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주님께서도 나를 아신 다는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살아계신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은 우리들의 믿음을 그 때와는 다른 차원의 살아계신 주님과 교제하는 믿음이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여러분을 초청하시는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여러분을 부르시는 말씀을 보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라야 쓸데 있느니라 하시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영원히 멸망할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깨닫는 다면 주님은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고 우리 모두를 초청하셨습니다.
주님은 “다 내게로 오라.” 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런 부르심에 따라 응답하고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또 요한복음 6장 35절과 37절과 4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 중에도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또 37절에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던 어떤 죄인이든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않고 받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런 부르심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다면 그는 살아계신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시 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행하심을 믿는 자 그는 영생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초청하시는 말씀을 듣고 주께 나아가는 사람은 자기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요, 하나님께서 자기를 자녀로 삼으신바 된 사람이라는 당당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자라 할 수 있으며, 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그 믿음은 다시 뒤로 물러가지 않고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살아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알고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과 부르심을 알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차이는 확신과 순종과 마귀를 대적하는데 큰 차이가 있습니다.
17-1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를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누가복음 24장 38절과 39절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자기 몸을 만져 보라 하신 부활하신 주님이 마리아에게는 “나를 붙들지 마라.”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영영 죽은 줄만 알았던 예수님을 보자 막 잡고 늘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를 붙들지 말라 하신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은 영으로만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져 볼 수도 있고 붙들 수 있는 뼈와 살이 있는 신령한 몸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에게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하고 전하신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1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 가장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열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들” 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8-50절에 보면 예수님을 둘러싼 군중의 무리들을 향해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형제라 하시면 그들은 이 땅에서나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영원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여 주님과 같은 신령한 몸을 가질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또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 올라간다하라.”
우리는 이런 중요한 말씀을 대할 때마다 단어 하나 하나에 주의해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분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낳아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요, 우리와 피와 살을 같이 나눈 형제자매가 아닙니까?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분들이 누구라 하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곧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곧 우리 하나님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의 새 몸을 입고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도 되시기 바라십니까?
아주 분명한 길은 하나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다시 말해서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했습니다.
그는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올라갈 것을 확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부활과 영생이 있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과 부활하시어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신 것만큼 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