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
말이 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
말이 허공중에 떠돈다 말이 여행객들 가득한 호이안 호텔 로비에서 춤춘다 말이 현대사의 정글인 비엔남 숲속에, 식민지의 서사를 음미하러 온 프랑스인들의 아침 뷔페식당에 가득하다 말이 피에 젖어 운다 말이 호이안 다운타운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피의 말로서 피를 씻을 수 없고 증오의 말로 증오를 잠재울 수 없다 말이 많은 곳에는 분란의 역사가 있다 말이 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침묵 속에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화가와 시인은 다르면서 같다 다름을 받아들이면 친구가 될 수 있다 하고 싶으나 마음속으로 삼킨 말 길게 할 수 있으나 남을 배려하여 짧게 줄인 말 필요한 것은 말하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표정이나 마음이다 말하지 않고 함께 나눈 소주 한잔 속에 우주가 담겨 있다 말이 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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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옥정에서 선배 시인을 만나다
토요일 진료를 서둘러 마감하고 KTX를 타기 위해 광주 송정역에 갔다 주차장이 만원이라 불편하지만 역과 조금 떨어진 뒤편 제3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역까지 10분 정도 걸어서 갔다 ‘차를 타되 목적지에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 후 조금이라도 걸어다니’라고 환자들에게 말했던 것을 스스로 실천한 셈이다 역내에서 파는 멸치국수에 광주를 상징하는 주먹밥을 곁들어 시장을 반찬 삼아 달게 먹었다 서둘러 온 탓인지 시간이 있어 땀에 젖은 마음을 식히려 아이스커피를 사 마셨다
나는 오랜만에 열차를 타고 애증으로 점철된 이 나라 가을 들판 하늘과 강물을 보고 싶은데 앞자리의 젊은 여자는 머리를 숙이고 휴대폰에서 영화를 보는지 함께 사용하는 커튼을 자꾸 내린다 밖을 볼 수 없으니 마음이 어두워지면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정읍을 지나며 연락이 두절된 주영국 시인의 시「정읍 지나며」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열차도 정읍 지나 청죽의 마디 같은/칸칸의 희망을 달고 서울로 가고”있는지 물어본다 더 깊은 어둠 터널을 여럿 지나고 잠을 청해보기도 하다가 눈을 감고 오늘의 시를 생각한다
한국의사시인회 고문인 마종기 시인을 인사동 옥정에 초청하여 간담회를 가지는 날이다 머나먼 타국에서 ‘안 보이는 나라의 사랑’과 ‘모국어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노래한 선배 시인을 만나는 날, 한국의사시인회 창립 10주년 가을이었다 3년 가까운 코로나의 단절과 고립에서 벗어나 입과 얼굴을 가린 마스크의 답답함을 벗고 인사동은 사람들로 뒤엉긴 채 부글부글 들끓고 있었다 낯익은 종로구 인사동 12길 골목에도 사람들로 만개한 가을이 보였다
겨우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하여 선배 시인을 만났다 책에서 본 인상 그대로인 정정한 모습 후배들을 대하며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이름을 메모하는 한 사람씩 다정하게 호명하며 사진을 찍어 주시는 향년 83세인 노 시인의 겸손함이 그대로 전달되어 온다 최근에 발표한 시 3편「혼자 쓰는 방」, 「아침의 발견」, 「겨울의 응답」을 인쇄해오셔서 직접 낭송하신다 선배 시인에 대한 답사로 후배 시인인 홍지헌 회장의 시「오늘은 비가 와서」, 「마중」을 서홍관 시인이 읽었다 시로 맺어진 인연 아름다운 시의 향연이다
김완
광주출생으로 2009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상의 말들』, 『바닷속에는 별들이 산다』, 『너덜겅 편지』 등이 있다. 송수권 시문학상, 남도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