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로마' 나가사키를 가다 (하)
혹독한 고문에도 천국 체험한 ‘신앙 승리’
- 시마바라성당 전경. 시마바라 반도는 신학교와 수련소, 병원이 있는 일본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
3만 신자 신앙지키다 순교
열탕 고문에도 ‘성체 찬미’
매년 5월 운젠신앙제 열려
나가사키 순례는 해당 지역이 넓고 내용 또한 방대해 3회에 걸쳐 다루기엔 무리가 따른다. 나가사키를 포함한 일본 가톨릭 순례는 일본 가톨릭교회의 순교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번 특집에서 일본 천주교회의 순교사를 다루기에는 지면이 허락지 않는다. 다행히 지난해 11월 24일 거행된 일본 가톨릭 ‘베드로 키베와 187위 시복식’을 앞두고 본지에 3회 연재된 ‘간추린 일본 가톨릭 순교사’를 참고할 것을 당부한다(11월 16·23·30일자). 나가사키 순심대학 학장이자 일본 가톨릭 순교사 전문가인 가다오카 치즈코(片岡 千鶴子) 수녀가 쓴 ‘간추린 일본 가톨릭 순교사’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일본 선교에서부터 기나긴 박해시기와 종교자유의 부활까지 여정을 알기 쉽게 전해준다. 이번호에서는 3만명의 신자가 신앙을 사수하다 장엄한 죽음을 맞이한 시마바라(島原)와 열탕고문으로 유명한 운젠(雲仙), 호코바루를 순례한다.
시마바라의 난
하비에르의 입국(1549년) 이후 30년 동안 선교활동 영역은 서쪽으로는 나가사키로부터 동쪽으로는 교토지방까지 넓혀졌고 기리스탄은 10만 명을 넘을 만큼 성장했다. 1579년 순찰사로 일본에 들어온 발리냐노 신부는 현지인 사제 양성을 위해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세웠다. 신자 영주(다이묘, 大名) 아리마 하루노부의 옛 영지로 주민 대부분이 신자였던 시마바라 반도도 신학교와 수련소, 병원이 있는 일본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
- 운젠 계곡에 세워진 순교 복자 기념비.
사건은 새 영주 마츠쿠라(松倉)의 핍박에서 비롯됐다. 마츠쿠라는 성을 짓기 위해 주민의 노동력과 막대한 세금을 착취하며 기리스탄을 탄압했다. 흉년과 기근이 심했던 1637년, 신자 임산부가 체납을 이유로 고문당하다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을 계기로 일대의 신자들과 주민들이 봉기해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시마바라의 난’이다. 3만여 명의 봉기군은 16살 소년대장 아마쿠사 시로의 지휘로 처음엔 승리하지만 막강한 무기를 지닌 12만 명의 에도막부(幕府) 군사에 패한다.
옛 영주 아리마의 가신들과 신자 영민들은 3개월간의 전투에서 대부분 죽고 여성과 아이들 2만 명 정도만 남았다. 남은 이들도 “신앙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생매장되거나 참수당했다. 이들은 막부 군이 쏜 탄피로 십자가·성패를 만들어 결속을 다지고, 순교하기 전에는 성체 대신 입에 물고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장 발굴조사에 의하면 혀 밑 하악골 부근에서 성패가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신심조직이던 ‘성체회’의 깃발을 진중기(陣中旗)로 사용하고 “성체는 찬미받으소서”를 외치며 대항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신자들은 ‘성체회’ ‘로사리오회’ ‘자비의 회’ 등 신심단체가 조직돼 매우 체계적이고 신앙심이 깊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진중기의 깃발은 오늘날 시마바라성당 벽에 걸려있으며, 성당 내부는 당시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막부에 대항하던 모습, 순교 때의 모습을 담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운젠
시마바라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운젠은 땅 깊숙한 곳에서 품어내는 유황천의 증기와 열기가 주변을 하얗게 덮고 있다. 온천을 유난히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겐 관공명소로 알려져 있으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장렬한 순교의 무대이기도 하다.
- 시마바라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당시 신심조직인 '성모의 회' 모습을 표현했다.
1627년 사제들의 협력자이던 바오로 우치보리와 동료 순교자들은 손가락이 잘리고 이마엔 인두로 ‘기리스탄’이라는 글자를 새기는 고문을 당했다. 펄펄 끓어오르는 진흙의 열탕 속에서 고문을 받고 올라올 때 “성체는 찬미받으소서”라고 외치며 하느님을 찬미했다. 우치보리의 세 아들 역시 손가락이 잘리고 바다에 던져져 순교했다. 발토로메오 바바(馬場)는 “천국이 먼 곳에 있는줄 알았는데 이처럼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내 마음은 기쁨에 넘친다”며 시를 읊을 만큼 경탄할 신앙의 승리였다. 바오로 우치보리의 순교일인 5월 17일이면 운젠 계곡은 온통 진달래로 붉게 물들여진다. 나가사키교구가 주최하는 운젠신앙제에는 해마다 국내외 순례객들이 줄을 잇는다.
운젠계곡을 찾은 날,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만치 짙은 안개와 가랑비가 순례자의 앞을 가린다. 매케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계곡 사이에 세워진 ‘순교 복자 기념비’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10여 미터 뒤, 순교자들이 열탕 고문을 받았던 바로 그 자리에선 아직도 하얀 증기와 열기가 끓어오른다.
“성체는 찬미받으소서.”
“순교자들이여, 복된 복자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호코바루
1657년 오무라(일본 최초의 신자 영주)의 영(嶺)내 동굴에서 성화를 모시고 집회를 갖던 신자 608명이 검거되는 ‘군(郡)박해’ 사건이 발생한다. 시마바라의 난 주동자 아마쿠사 시로가 살아온다는 예언을 접한 관은 이들 가운데 411명을 처형했고, 78명은 옥사, 20명은 종신형에 처했다. 411명을 한 곳에서 처형할 수 없어 5군데로 나눠 같은 날 처형했는데, 호코바루에서 131명이 처형되었으며 순교자의 목을 소금에 절여 옥문에 걸어두었다고 전해진다. 기리스탄의 부활 신앙을 두려워한 관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몸과 머리를 분리해 각각 500미터 떨어진 곳에 따로 매장했다. 당시 수총(首塚:머리)과 동총(胴塚:몸) 자리엔 무명 순교자들을 기억하게 하는 동상만 우뚝 서 있어 순례자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호코바루엔 일본 205위, 조선인 13위를 기리는 ‘복자 비’가 있다.
나가사키 순례 안내하는 이 율리에타 수녀
“순교자들의 신앙 체험하세요”
- 이 율리에타 수녀가 니시자카 26 성인 기념관을 찾은 한국 순례자들에게 관장 신부의 말을 통역하며 안내하고 있다.
“우라카미성당이라면 원폭으로 초토화된 성당이었고 나가사키의 큰 성당이라는 정도의 설명으로는 나가사키 순례를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없지요. 일본은 온천이 많으니 온천욕도 하고 성지는 적당히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아요.”
1년째 나가사키 순례 안내 소임을 맡고 있는 이 율리에타 수녀(예수성심시녀회)는 “나가사키 순례에 대한 한국 신자들의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며 아쉬워했다.
“일본 가톨릭 교세가 열악한데 성지가 얼마나 있을까 하고 왔다가 놀라는 분들이 많아요. 그만큼 제대로 된 순례 안내가 필요하다는 예기지요.”
이 수녀는 1997년부터 8년간 히로시마교구 야마구치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귀국 후 잠시 본당사목에 종사하다 지난해 7월 나가사키로 다시 파견됐다. 나가사키 순례가 국내에 알려지면서 순례자가 느는 반면, 일본 구경에 그치고 돌아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수녀회가 특별 소임을 맡긴 것. 배경엔 이문희 대주교(전 대구대교구장)의 간곡한 뜻이 있었다.
“순례 오시면 3박4일간 동행하면서 각 성지와 더불어 순교사, 역사, 교회사 안내 등으로 순례피정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요즘 들어 캠프를 곁들인 학생순례, 교사 피정을 위해 오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나가사키 성지순례를 위한 홈페이지 제작도 마무리 단계에 있다.
이 수녀는 “나가사키 순례는 가톨릭신문사투어 프로그램이 가장 잘돼 있다”면서 “다른 여행사 일정으로 오더라도 시간이 허락된다면 순례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