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가 만난 사람들(최범술 스님)
나는 불교신문 기자였기에 총무원장 석주스님, 조계종의 정신적 지도자 종정 고암(古庵) 스님과 한 건물에서 근무했다. 교계에선 종정 고암(古庵) 스님을 종정 예하(猊下)라고 부른다. '예하'란 高僧을 높이는 호칭이다. 카토릭 교회도 pope(敎皇) 아래에 cardinal(樞機卿), Arch bishop(大主敎), Bishop(主敎)이 있다. 총무원장, 종정 외에 월하, 전강, 대의, 탄허, 녹원, 지관스님 등 이 시대 한국불교 대표 선지식들 근황도 많이 알았다.
이제 후회되는 것이 딱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암(古庵) 종정 스님은 어려워서 직접 참선에 대해 많이 질문해보지 못한 점이다. 불국사 범종 불사 회향 행사 때 직접 종정 스님 모시고 경주를 다녀왔으나 기념사진 하나 남기지 못했다.
두 번째 크게 후회되는 것은 등장불 밑이 어둡다고 진주 망경남동 우리 집 옆 해인대학 학장으로 계시던 한국 불교계의 큰 별 최범술 스님을 몰라본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집에 오면 자주 해인대학에 가서 평행봉을 했다. 힘이 샘솟던 시절이라, 간혹 브로크 담 위에 앉아 지나가던 여학생을 구경했다. 그러면 스님이 담 위에서 내려오라고 방앗간 참새 쫒듯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곤 했다. 양복은 몇십 년 입었는지 고리삭은 양복이고, 키도 작고 뚱뚱한 몸매라, 우리는 스님을 무시했다. 달려오며 야단을 쳐도 얼굴만 빠안히 쳐다보며 킬킬 웃다가 스님이 옆에 오면, 훌쩍 담 너머로 뛰어내렸다. 지금도 웃음 나오는 그 시절 내가 놀려먹은 그분이 후에 불교신문 기자 하면서 알고 보니 한국을 대표할 고승 중의 고승이셨다.
우선 그분의 저서 <韓國의 茶道>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자. 모르는 사람들은 초의(草衣, 1786~1866) 스님의 <東茶頌>을 우리나라의 큰 자랑거리로 생각한다. 그런데 <東茶頌>을 읽어보면 그 내용과 체제가 세계 최초의 차 이론서인 당나라 육우(陸羽, 733-804)의 저술 다경(茶經)과 너무나 비슷함을 알게 된다. 초의(草衣, 1786~1866)는생존년대가 불과 3세기 전인데, 육우(陸羽, 733-804) 는 1000년 전 인물이다. 또 초의 스님은 '동다송' 서문에 서울에 사는 홍현주가 '차를 알고 싶다는 부탁을 해서 대답한 글'이라는 서문이 있다. 그로 보면 초의의 '동다송'은 독자 저술로 보긴 무리가 있고, 茶를 소개한 한 편의 편지라고 봄이 옳다.
최범술 스님은 경남 사천군 서포면 밤섬에서 태어났다. 13세인 1916년 1월 12일 다솔사로 출가, 불교에 입문하여 해인사 임환경 스님을 은사로 수계 했다. 당호는 금봉(錦峰)이며, 효당은 원효스님의 교학 복원에 평생을 바칠 것을 서원하여 스스로 지은 법호(法號)가 원효의 '효' 자가 들어간 효당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란 화두로 유명한 성철스님은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후 지리산 대원사에서 철학서 탐독하며 공부하다가 스님 권유로 해인사 입산했다.
최범술 스님은 초대 제헌국회의원 역임했고, 1936년 서울에 여성 교육기관인 명성여자학교를 설립했다. 1948년에는 신익희 씨와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고, 1952년 해인사 부동산을 담보로 해인대학을 설립했다. 일본에서 초대 민단 단장 박열의사, 독립운동가 박흥곤, 옥홍균을 만나 단체를 조직하여 일본천황 암살계획을 실행키 위해 상하이에 잠입해 폭탄운반을 하였다. 1930년 귀국하여 다솔사를 중심으로 불교청년들의 항일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결성했고, 만당의 당원과 우국지사들이 왕래하면서 다솔사는 항일 거점이 되었다.
스님은 다솔사 뒷산에 죽로차 차밭을 조성하고 차를 장려했는데, 거기 한용운 스님과 소설가 김동리 씨 형 김범부 씨가 자주 어울렸다. 다솔사 요사채에 10년 머물었던 김동리는 큰스님들 대화에서 중국 소신공양(燒身供養) 이야기를 듣고 소설 '등신불(等身佛)'을 썼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어떤 분인가. 대쪽 같은 절개를 지킨 선지식(善知識)이다. 육당(六堂) 최남선과의 일화가 유명하다. 3.1 만세 사건 이후 변절한 육당이 중추원 참의 관직을 받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마음으로 육당과 절교를 선언했다. 어느 날 육당이 길에서 스님을 만났는데, 스님은 그를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빨리 걸어갔다. 그래서 육당이 따라와 앞을 가로막아 서며 인사를 청했다. '만해선생 오랜만입니다.' 그러자 스님이 물었다. '당신 누구시오?' '나 육당 아닙니까?' 그러자 스님이 또 한 번 물었다. '육당이 누구시오?' '최남선입니다. 잊으셨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葬送)했어.'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면하고 가버렸다.
만해스님이 멀리서 찾아와서 만나던 효당 스님을 다시 생각케 한다. 옆에 계시던 태산처럼 큰 巨木을 알아보지 못한 나의 우둔한 안목을 후회하게 한다.
다시 茶 이야기로 돌아가, 광주 무등산에 의제 허백련 화백이 있다면, 곤양 다솔사에 효당 최범술 스님이 있다. 허백련은 다만 차를 즐겼지만, 최범술 스님은 차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분이다. 1975년 보련각(寶蓮閣)에서 펴낸 그 책은 원효스님 이래 한국 불교계의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잘 정리해 놓았다.
한번은 진주고 후배가 운영하는 여행사로 중국 항주엘 갔다가 스님 둘째 부인 소식을 들었다. 인사동 허름한 2층 집에서 나보다 1년 뒤로 진주여고와 연세대 졸업한 스님 부인 채원화 보살이 반야로(般若露)란 차회(茶會)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찾아가서 여대생들에게 老子를 강의하는 채보살을 만났는데, 나 역시 대학에서 老子를 익혔고, 또 최범술 스님은 망경동 한동네 살았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스님의 茶道 이야기, 조계종 종립학교 설립, 항일 운동 등을 자세히 소개했더니, 여대생들이 반색을 했다. 매번 강의해 주시면 어떠시냐고 묻고, 반응이 좋자 채원화 원장도 날더러 같이 차회(茶會) 운영하자고 제의했다. 그런데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다. 차일피일 미루던 중 해가 지났다. 그리고 연초에 초대장이 왔는데, 그땐 반야로(般若露) 차회(茶會) 초대장에 나 말고도 주한 외교사절 부인들 모습과 교수들 이름이 수두룩 했다.
후회 가득한 불교계 인연 중 뜻깊었던 일도 몇 개 있다.
첫째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 제정'에 앞장선 일이다. 1973년 어느 날 나는 일간지에서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 제정 촉구' 1단짜리 작은 기사를 발견했다. 용태영 변호사가 낸 소송이었다. 물어물어 사무실 찾아갔고, 서로 이야기가 되어 나는 그분을 총무원에 소개, 이후 그분이 조계종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 제정 자문위원 되어, 재판을 진행하여 승소한 것이다. 승소한 까닭은 당시 불교신자는 800만, 기독교 신자는 400만인데, 12월 25일 성탄절만 공휴일이라 종교 간 형평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소송이 고등법원에서 각하되어 대법원에 상고하던 우여곡절 끝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보내 결국 1975년 1월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여 결정된 것이다. 총무원장 경산스님 때 일이다.
두 번째 기억나는 일은 방송작가들 가야산 해인사 초청하여 템플스테이 시켜준 일이다. 신혼이던 나는 아내를 취재 길에 데리고 갔는데, 젊은 아내는 이서구, 신봉승 같은 원로 작가들 인기를 독차지했다. 두 대 버스 태우고 갔던 70여 명 방송작가들은 1주일 간 새벽 3시에 일어나 엄숙한 규율로 참선에 몰입하는 禪房 모습을 본 후론 싹 달라졌다. 그 뒤엔 드라마에 ‘중’이란 말을 삼가고 모두 ‘스님’이란 표현을 썼다.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램지 대주교 만난 일도 새롭다. 나는 대주교가 동국대 이사장실에서 우리나라 불교지도자들과 대담한 <기독교의 신비사상과 불교의 성불사상>을 취재 보도했다. 참선 배우려고 송광사 구산스님 따라온 하버드 출신 벽안(碧眼)의 납자들도 인터뷰도 했는데, 그때 푸른 눈의 그분들은 지금 서양에서 불교학자로 이름난 분이 되었다. 나는 그들 보다 먼저 마조(馬祖), 백장(白丈)의 어록도 읽었고, 진각, 원감, 태고, 서산대사의 오도송과 임종게도 읽었다. 아직 설악산, 지리산, 달마산 절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도 귀에 생생하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불교 학자는 못되었다 쳐도, 茶道 선생은 되어있어야 하질 않았나.
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세달사 장원관리인 조신스님 일화 비슷하다. 불교신문 그만두고 娑婆가 그리워 속세로 나가서, 기업체에서 50년 진흙탕 뒤집어쓰고 머리털 하얗게 센 후에, 은퇴하여 나와 깨달아보니, 인생 일장춘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