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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3세기에 고대 시실리에에 아주 의심이 많은 왕이 있었습니다. 히에론2세라는 왕입니다. . 그는 자신이 쓰고 있는 왕관이 순금으로 되었는지 아니면 세공업자들이 불순물을 넣었는지를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왕은 아르키메데스를 불러서 연구토록 했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왕의 분부에 따라 고민 고민했습니다. 어느 날, 욕조 안에 들어가 몸을 담구는데,, 밖으로 물이 흘러 넘치는 것을 보고는 금의 순도를 알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아르키메데스 원리’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금과 은은 각각 다른 비중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부피라도 무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목욕탕에서 발견하고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에 뛰쳐나와서 외친 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유레카”입니다. “찾았다. 나는 찾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유레카’하며 기쁨으로 외쳐본 경험이 있습니까? ‘유레카’ ‘나는 찾았다’는 이런 기쁨의 삶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유레카’를 외친 한 여인을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의 말씀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열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드라크마는 헬라 돈입니다. 둥근 엽전 모양으로 은으로 되었습니다. 한 드라크마는 그 당시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그 당시 여인들은 이 드라크마를 이어서 장식용 목걸이로 만들어 사용했던 모양입니다.
열 개의 드라크마로 목걸이를 만들어 사용하던 여인이 열 개 중에 하나가 없어진 것입니다. 돈의 가치로 따지자면 크다고 생각하면 크고, 적다면 적은 돈입니다. 이 여인은 한 개의 드라크마가 없어진 것을 알고서는 ‘그까짓 것’ 하면서 무시한 것이 아니라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았다고 했습니다. 등불을 켜고 찾았다고 한 것을 보면 돈을 잃어버린 때가 해진 후의 저녁이지 않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중동의 집 구조상 불볕더위를 창문을 작게 하든지 아예 없는 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옇튼 여인은 잃어버린 돈을 찾기 위해서 등불을 켰습니다. 그 당시에 전기가 있습니까? 호롱불 같은 등잔에 불을 켜고서 찾았으니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란 쉽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집은 바닥이 차기 때문에 갈대로 된 돗자리를 깔고 살았다고 하니 돈을 찾기가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등불을 켜 들고 갈대자리를 들춰가며 그것도 빗자루로 쓸어가면서 이 돈을 찾았습니다.
여인은 날이 어두웠으니 그 밤은 그냥 지내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 그 돈을 찾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하룻밤을 기다리지 못하고 기어코 빗자리로 들고 먼지를 일으키면서 마루를 쓸어 잃은 돈을 찾았습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찾았던 것입니다.
찾았을 때에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 벗과 이웃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라고 했습니다. 기쁨으로 잔치, 축제를 연 것입니다.
이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는 누가복음 15장에 앞서 나오는 ‘잃어버린 양’ 비유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차이점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차이점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보십시다.
백 마리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자기의 의도적인 선택에 의해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자기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그는 잃어버려진 자리에 던지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잃어버린 양은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목자를 떠나갔습니다. 마치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의도적인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진리를 거절합니다. 적극적인 무신론자가 되어버리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잃어버려진 자리에서 삶을 시작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동기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와 창기 같은 사람들은 그 시대의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도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운명적인 상황 가운데로 떨어져서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가끔은 볼 수 있지만 이슬람 국가 여성들은 특별한 겉옷을 입습니다. 서양에서는 흔히 베일(veil)이라 부르지만 지역과 종교적 성향에 따라 부르카(Burka) 니캅(Niqab) 히잡(Hijab) 차도르(Chador) 샤일라(Shayla) 등 종류가 다양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 정권화 되자 당장 등장한 것이 부르카입니다. 부르카는 '가림'의 정도가 제일 심합니다. 부르카는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가립니다. 보통 하늘색 천이며 간혹 주황색 천으로 된 부르카도 있습니다. 부르카는 눈 부분마저 망사로 가려 놓았습니다. 한쪽 눈만 망사로 뚫어 놓은 극단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 나라의 여인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운명적인 상황입니다. 우리가 그런 지역에 태어나지 않고, 그런 관습이나 종교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든 인생은 이런 운명적인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기도 하지만 또 한편적으로는 죄인으로 태어남으로써 죄를 범하고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도적 선택과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나를 죄 가운데 몰아넣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내 속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강한 충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있는 바울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랴”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행함이 없는 나 자신의 모습! 다시 말해서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를 억누르고, 나를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하는 끈질긴 내 속의 부조리하고 불합리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진리를 수긍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은전은 자신이 잃어버렸다는 자각이 없습니다. 반면에 잃어버린 양은 자신의 처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양은 들에서 방황하면서 아마도 자기 목자의 이름을 있는 힘을 다해서 불렀을 것입니다. 그는 상처를 견디지 못하여 자기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목 놓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전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 은전은 잃어버려졌으면서도 자기가 잃어버려졌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아마도 집 마루 어느 구석에 떨어져 있는 이 은전은 자기 여주인의 목에 걸려있는 것보다도 그 마루 밑바닥 먼지 속에 떨어져 있는 것을 당연한 삶으로 생각하면서 마냥 그렇게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존재의 비극입니다. 내가 구원 받지 못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죄인인지,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지, 내가 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은전이 집 안에 있듯이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밤에 이 세상을 떠나가시면 하나님 앞에 서실 확신이 있습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오늘밤에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 많은 교우들이 망설입니다.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죽어봐야 알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그렇다면 요한복음 3:16을 외우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바로 여러분과 내가 포함되어 있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요한복음 3:16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누가 이 약속을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약속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오늘밤에 죽어도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갑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어릴 때부터 외우고 있지만 이 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도 아들이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니까 아들 체면 세워 주시고, 집안에 종교가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들었지만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이 진리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감격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마지막 병상을 지키면서 어머니에게 이 구원의 진리를 매일 매일 설명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어머니, 살면 감사하고, 죽으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입으로 예수님을 시인토록 도왔습니다.
잃어버린 은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잃어버린 은전처럼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오늘도 어두운 운명 속에 던져져 있는 영혼들이 없습니까? 여인처럼 등불을 켜 들고 밤새워 가며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누님께서 지금 혈액암과 사투를 벌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모릅니다. 불교에 빠져 있습니다. 매주마다 안부 전화를 합니다. 그런 저를 보고 아내가 이제는 구체적으로 전도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지금까지 기도를 하고, 넌지시 전도를 했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복음을 제시해야 하겠습니다. 병은 깊고, 연세를 들어가시는데, 예수님을 모르고 있으니 걱정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 집안에는 아직도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 상황 속에 있는지 모르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찾아가 만나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등불을 들어야 합니다. 이 등불은 바로 성령 하나님의 조명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내게 조명을 비추어 주시어 내 영안이 맑아져야 합니다. 희어져 낫을 기다리는 익은 들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역사하시면 영혼이 보입니다. 생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하시면 나는 그냥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성령의 조명이 있으면 우리는 증인 된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부름이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평범한 나의 삶 속에서 증인 된 삶으로 우리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와 관계하는 사람, 매일 만나는 사람이 잃어버린 은전과 같은 존재인데, 어두움 속에 갇혀 있도록 그냥 두겠습니까? 여인이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듯이 잃어버린 존재가 된 영혼을 찾고 만나고 권하고 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신문에 감동 깊은 기사를 보았습니다. 11살 때 길을 잃고 가족과 헤어진 어린이가 실종 34년 만에 45세의 장년(壯年)이 되어 부모와 재회했습니다.아들이 사라졌을 때 41세였던 아버지는 75세의 노인이 되고도 포기하지 않고 애타게 아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34년 동안 찾았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잊고 포기하지만 부모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포기해도 자기들은 포기가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인은 잃어버린 은전을 포기하지 않고 찾았듯이 하나님께서는 나를 찾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은전을 찾은 여인의 기쁨과 잔치를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 결론짓는 메세지가 무엇입니까? 1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됨이니라”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합니다. 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들이 기뻐한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사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수종 드는 천사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천사들은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하나님의 기쁨이 되겠습니까?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올 때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겠습니까? 이 잃은 자를 찾아 돌아오게 하는 자입니다. 이 기쁨이 넘치어 서로 나누는 공동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으로 함께 즐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찬송 / 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