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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집
위성유
종이거울/1
잘나가는 친구 얼굴이 보입니다
질투하는 내 얼굴이 보입니다
옆 동네 부잣집도 보입니다
궁궐 같은 부잣집 틈새로 작은 우리 집이 보입니다
짐수레를 끄는 할머니도 보입니다.
길가에 드러누운 무지랭이 들풀도 보입니다.
전단지를 건네는 아낙의 거친 손도 보입니다
둥지를 찾아 배회하는 겨울 노숙자도 보입니다
네모난 세상이 보입니다
눈감고 있는 둥근 세상도 보입니다
세상이 온통 뿌옇습니다
우리 동네 삼동소년촌 아이들
종이거울 안에서 굴렁쇠를 굴리는 그 모습이 예뻐만 보입니다
둥근 세상을 만드는 웃음 띤 하얀 거울 뒤로 꺼멓게 그을린 나의 탁해진 그림이 겹쳐 보입니다
종이거울을 닦고 보면 내 얼굴이 다시
착해져 보입니다
날개없는 천사는
날개를 달고 훠이 날고 있으므로,
내 검은 마음도 잠시 두고 갑니다
여기는 외로워도 외롭지 않은
아기 천사가 사는 작은 집
이유/2
꽃은 제 몸 안에 등뼈가 없어
눈으로 보다 한입에 덥석 삼켜버렸다
키를 심다/3
키 작은 아빠를 닮아
못내 아쉬워 하는 딸을 보며
모자란 크기 만큼
반쪽 심장을 곱게 잘라
딸의 가슴에 심어 주었다
마음은 자라 키가 되었다
2021년 겨울, 여기는 서울/4
여기는 공덕동 네거리
씽씽 경적소리 지저대며 달리는 혼돈의 차량들 사이로 폐지를 가득 싣은 짐수레가 빗길을 뚫고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허어헉 거친 숨소리와 구멍 난 장갑을 끼고 탁한 세월이 만들어 낸 굵게 금이 간 얼굴이 세겨진 늙은
여인이 내 동공 속으로 스며들었다. 거친 빗바람을 안간힘으로 찢어가던 그는 애초부터 가진 것이라곤 무너져
내리는 몸둥아리와 낡은 짐수레가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도 태생은 하나님의 귀하디 귀한 자녀였을 그 가엾은 사람
지상에서 우리 위에 군림하는 자와 우리와 다른 먼 나라 사람들은 한결같이 가난을 녹여 낼 이상적인 세계를
부르짖지만, 돌아온 것은 한 쪽으로 심하게 기운 저울추와 마주한 어둡고 험한 세상
비가 눈으로 바뀐 퇴근 길, 빨라 진 겨울밤
외롭고 쓸쓸한 여인은 어디로 사라져 갔을까
어제 처럼 화려한 불빛에 취한 고층빌딩
그들만이 휘파람 불며 노래하는 세상, 그래서 달빛도 구원을 포기하며 잠들어 버린 거리
2021년 겨울 차가운 거리
사라진 가여운 사람 지난 겨울에도 고난을 달고 살았을 생각에
나는 부끄러워 눈을 감고 역전을 배회하다
하늘이 내린 눈을 맞고 얼어버렸다
북새통/5
현재 시간 오후 6시 14분,
어둠과 함께 날이 저무려는 시간
지하철 2호선 안(內)에 어시장(⿂市場)이 열렸다. 겨울이 익어가고 김장철이 다가서면, 칼바람이 닻을 내리고
이칸 저칸 칸칸마다 켜켜이 살아 숨쉬는 비린 내음
새우젓 밴댕이젓 황석어젓,,, 이것들은 어디에서 모여들었을까? 젓갈냄새에 코끝이 저린다. 사방을 둘러봐도
젓갈장수는 내 눈 안에 보이질 않고 고단한 하루 삶을 끝내고 귀가하는 수많은 범민들이 밀치고 당기면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낮술에 거하게 취한 탓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해 비틀비틀거리는 무리, 주위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쩐내나는 입에 덕지덕지 욕을 달고 입을 나불거리며 실랑이 하는 무리와 이를 못마땅 한 듯 곁눈질하며
바라보는 무리,,,
이곳은 풀뿌리들로 매일 붐비는 완행열차
젓갈도 삭혀야 맛이고 인생도 묵혀야 맛이듯 우리는 낯설음을 털어내가며 익숙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민초(⺠草)들이 뿜어내는 고난과 시련의 향기를 더는 막을 길이 없다. 홀로 시선을 돌릴 수도 없다. 나도
그들과 더불어 묵혀 살아가는 한낯 민초(⺠草)일뿐,
그들은 내가 아는 누군가의 아들이요, 딸이요, 부모이기에 열꽃피는 마음으로 끌어 안았다
잠시 후 합정역에 멈춰 선 전철 나는 다시 6호선으로 길게 발을 실었다.
오는 봄/6
봄, 기다리면
금방 올 것만 싶다가도,
남몰래 왈칵
눈물 토해내던 그 날처럼
흠뻑 젖어서 올 때가 있다
보고픈 울 엄마
붉게 젖은 옷고름에
꽃 잎 날리 듯
담쟁이/7
힘껏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담벼락에 바짝 기대어 살금살금 암벽등반을 하는 것이다
그을린 벽을 덮고 두려움을 떨치며 혼자서 거미줄을 치는 것이다
심어진 운명대로 하늘만 믿고 앞만 보고 뻗어가는 것이다
주어진 길을 따라 매달리는 것이다
눈물을 줄여가며 생명끈을 엮는 것이다
추락의 공포 속에서도 견디는 것이다
오르다 오르다 그리하여
끝끝내 돌담 속에 작은 그림집 하나 짓는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너를 보고
살아가는 한 길이다.
모과/8
꽃이 열매인 나무가 있다
열매가 사랑인 나무가 있다
단단해질수록 더 깊어지는
은은한 그의 향기
널 닮아갈 수만 있다면,
부치지 못한 편지/9
- 추모시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가야 할 종착역이 저 하늘 어디쯤인 걸,
당신과의 연이 여기까지라는 걸 알면서도
당신 떠나는 길에
하얀 국화꽃 한 송이
애도의 향불 하나 피워놓았을 뿐,
차마 눈물 한 방울 떨구지 못하고 돌아섰습니다.
진정 어찌 당신을 보내야 할지,,,
이별이 두려워
이승과 저승 사이가 멀고도 멀어
차마 당신을 놓아드릴 수 없었기에 그리하였습니다.
어찌 이토록 빨리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까?
위문을 위해 할 일이 아직 태산 같은데
당신의 따스한 손길을 그리워하며
당신을 못 잊어 애타게 보고파 하는데,,,
어찌 이토록 우리 마음을 붉게 멍들게 하시고 황망히 떠나셨습니까?
범곡이시여!
위문으로 통하는 길목마다, 당신의 흔적의 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위문을 사랑한다, 말로는 누가 못할까요?
당신은 행동으로써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신 선구자이셨습니다.
당신의 헌신적인 마중물이 있었기에
우리 위문은 막힌 수맥을 뚫고 대대손손 흐르고 흘러, 광야를 흥건히 적실 수 있었습니다.
낙엽처럼 뿔뿔이 흩어진 우리들을, 대종회 탄생을 통해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학구열에 불타는 새싹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도 헌신하셨습니다.
이뿐입니까!
위문의 소식을 널리 알리고자 위씨 종보를 발행하셨고
선조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회주대제, 종친 참배 전국화에 힘써 주셨습니다.
그 업적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위문만을 위한 열정과 사랑으로
오직 위문을 위해 걸어오셨던 당신의 고귀한 발자취를 감히, 누가 밟고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신이 떠난 빈자리
어찌 후손들이 다 메울 수 있겠습니까?
위문에 대한 열정의 깊이가 바다와 같고
사랑의 뜻이 하늘처럼 드높았던 당신이여,
차마, 영원한 이별이 무서워 제 마음 언저리에 부치지 못하고 간직한 추모의 편지를 이제 곱게 접어 당신께로
띄워 보내려합니다.
저 하늘 어디쯤인지 모를 그 곳에서
저의 꼬깃꼬깃해진 글을 읽어보시거든,
늘 그랬듯이 5월의 태양이 저 뒷산으로부터 기지개를 켜는 그 날,
한 마리 새가 되어 회주대제에 훨훨 날아오시어
함박웃음으로 반갑게 후손들을 맞아 주소서.
'영원한 이별은 없다 '는 믿음 하나로
당신께서 위문을 위해 남기신 숭고한 업적을 길이 보전하며
우리는 영원토록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범곡이시여!, 이제 편히 영면하소서
가을 햇살/10
자꾸만 뒷걸음치려는
저 고운 햇살을
가슴으로 안아 말렸다
긴 긴 겨울밤
곁에 두고 보려고,
내 이름은 27번/11
내 이름은 27번
좋든 싫든 방문객은 나를 27번이라 부르지
나는 그들에게 이름없는 존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그뿐
고운 내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된 적은 없다네
나는 27번 창구 문지기
나를 찾는 벨소리가 이미 울린 지 오래
그들은 나를 찾아 두리번 두리번 헤매다
예고없이 들이닥치는 성난 파도
나는 온종일 파도 위에서 흔들거리는 키 낮은 돛단배
앉자마자 송곳 같은 혀로 중얼대며
나를 삼킬 듯 이글거리는 매의 눈들과 한판 혈투을 벌이지
참다 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냉가슴
못내 감추며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감정노동자
나도 감정이 숨쉬는 나무
감정이 숨을 터야 자라는 가냘픈 존재
마음의 실금이 커져만 갈수록
나는 한계의 기로에 서서
자꾸 자꾸 무너져 내리려 하네
진정한 노동의 가치로
공존하며 이어갈 인연들이
녹슬어 퇴색된 쇠붙이가 되려하네
오늘도 방문객들이 만들어 놓은
얽키고 설킨
웅성웅성 시끌벅적
오일 장터 한마당이로세
나도 집에선
자랑스런 아빠
자상한 남편
일터에선 꽤 괜찮은 동료라네
아직도 27번 창구를 찾는 전화 벨소리
쉬지 않고 울리네
서로 버리지 않기/12
주말 오후 쓰레기 분리수거장
낡고 쓸모없어 버려진 잡동사니 속에
아직은 쓸만한 것들이 눈에 띈다
세월의 거멓게 때가 타서
안쓰거나 못쓰거나 했을 주인 잃은 물건들
부디 인간들끼리는 서로 버리지 않길 빈다
우리에게 쓰다버려진 시간이란 없으므로,
야무진 다짐/13
시상에 파묻혀 새벽잠을 걷어낸 시간
흩어진 자모들이 조합이라도 하듯 나의 내면을 일으켜 세운다 육신은 오로지 오십이란 나이에 걸맞게 피곤을
재촉하지만 이내 머리는 갓 태어난 아이의 또렷한 눈망울처럼 초롱초롱 맑아진다 동녘의 해를 맛보기에 너무
이른 시간 아직은 해를 등지고 서있는 가녀린 그림자 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되물림 된 영적 능력이 내게도
있으리라 믿으며 펜을 잡는다. 나는 마른 사막 오아시스에서 물을 찾는 굶주린 낙타가 되어 간절함이 세상
밖으로 싹을 틔울때 까지 나의 길을 가련다 애초부터 신께서는 나의 길을 인도하셨을지라도 어리석은 내게는
보이지 않는 길이라 믿으며,
고요한 고향 마을 장닭은 우렁차게 목젖을 떨며 동트는 시간을 알리고 자욱한 안개 속을 헤치며 성급히 샛길을
나서던 엄마는 오직 원초적인 생존의 절박함을 내게 일깨워주었으니,
나의 존재여,
나의 꿈틀거리는 영혼이여
이 얼마나 축복인가!
이 못난 초승달 눈에도 말간 흰눈동자의 영혼이 아른거리며 살짜기 글귀을 토해내려하니,,,
겨울 아지랑이/14
한적한 난지천 공원
침묵하는 벤치에 앉아
드넓은 잔디숲을 응시한다
자세히 보니 아지랑이가
죽은 잎새로 피어나고 있다
철지난 계절에도
돌연 가을 장미가 피어오르듯
진정 피우려는 것들은
결코 계절을 탓하지 않는다
엄마/15
호미 부여잡고
일생 일만하시다
늙은 호미가 되어버린
내가 사랑하는
내 여자
머리에 이고 살았던 말/16
고향에 사는 어머니께
오십 년 낙엽처럼 주워담고
머리에 이고 살았던 말
어머니 사랑합니다
입속에서 날려보내니
젖은 가슴은 눈처럼
촉촉이 녹아내립니다
미래의 그들에게/17
태초부터 정해진 길은 없었다
포기를 모르고
흔적이란 발자국을 남긴 자들의
고마운 응답이었을뿐,
뒤를 따르는 자여
이제
나를 밟고 일어서라
나를 밟고 걸어가라
추석 무렵/18
막내야, 또 전화하냐?
서울 징하게 멀어야?
올래? 못 오것지야?
광주만 돼도 좋겠는디
내려오라고는 못하것다
왔다가면 좋기야 좋제
자식 보고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있것냐?
니들 알아서해라?
어쩔래?
내려왔다 갈래?
.
.
나는 한참 동안
노랗게 익어가는 달을
품고 울었다
걸치다/19
내리는 빗방울과 빗물을 안은 대지
흐르는 강물과 강물을 안은 바다
지는 낙엽과
그 낙엽 위에 쌓인 눈이 그렇다
지금 밟고 있는 징검다리와
딛으려는 왼발의 징검다리가,
지는 노을과 떠오르는 달과
밤하늘을 품은 별들이 그렇다
부는 바람과 뒤따르는 바람
만남과 이별이 그렇듯
이별 뒤 찾아 온 봄날이 그렇다
너와 내가 밟고가는 그림자가 그렇고,
한평생 너희들만 보고 살아간다는
한스럽게 기우는 팔순 노모의
한 삶이 그렇다
초코파이/20
아가야?
너 먹어라
아빠는
더는 자랄 키가 없단다
내 것도
네 것처럼 먹고
하늘만큼 자라라
.
.
.
아빠?
아빠도 먹어
응?
상처 속에 핀 사랑/21
고통을 극복하려하지 마라
어쩌면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마음의 상처가
단단하게 아물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쁨은 기쁨이었다고
슬픔은 슬픔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까지,
어쩌면 사랑은
사랑꽃 속에서 핀 것이 아니라
상처꽃 속에서 다시 피어난
절박한 내 영혼의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네 사랑이 지금 더 붉게
타오르고 있는 지
우리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남포 소등섬/22
오지 않을 날도
가지 않을 날도
나를 버리고 간다
남포 소등섬
기우는 저 붉은 노을은
내 발길마저 지우며 사라져 간다
스러진 자리에 쓸쓸히
배 한 척 남기우고 간다
어둠에 붉게 무너져서
더 아름다운 섬
그 곳에 홀로 남은 자여!
세월에 속지 마라
세월은 너를 데려 갈 힘이 없다.
압화/23
죽어야 산다고했다
사는 것이 죽는거라 했다
짧은 한번의 곡소리에
더이상의 슬픔도 없다 했다
억울한 누명도 없다 했다
보여지는 것이 전부라 했다
이것이 끝이라 했다
끝이 시작이라 했다
불멸의 영혼이라 했다
영혼의 마지막 실체라 했다.
눈물 한점 없이
유리관에 묻힌 너를 보면,
미안한 3월/24
내일 쉬고
모레는 쉬어가것다
3월은
영판 푹하것다
복사꽃 피우듯
애순도 쑥 자라것다
올리도
갈리도
만무했던
다시 핏물도는 미안한 3월
엄마
서럽게 무너진 앙가슴에
파묻혀
울고만 싶어라
방문객/25
그 비좁고도 좁은
한평 남짓 공간에 덥썩 자리를 틀고 앉았다
오늘은 또 몇명의 그들과 시름을 하며
나의 소중한 하루와 맞바꿀 것인가
왔다! 첫 방문객
험한 면상의 막무가내 그가 왔다
머리가 복잡하다. 편두통이 온다
너무나 무지해서 겁없이 덤비는 사람
너무나 잘나서 예리하게 내 속을 할퀴는 사람
아직은 철들지 많은 앳된 청춘 너마저,
난 그만 지그시 눈을 감고
침묵으로 말한다
침묵으로 말해야 살 수 있다
방문객은 두려울 게 없다
원하는 대로 직성이 풀릴 때까지
내 가슴 이곳 저곳에 비수를 꽂는다
그들은 그걸 화풀이라 칭하지만
우린 그들을 난동꾼이라 말하지 못한다
사람보다 무서운 게 있을까?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여 일어설 수 없도록 내게 무거운 돌짐을 지우니 어깨는 무너지고
가슴은 상처투성이가 된다
진정 인간은 꽃보다 아름다운 것인가
진정 상처를 아물게 하는 살가운 저 꽃보다 아름다운 것인가
내게 생채기를 남기고 간 그들은
진정 꽃인 것인가
악마를 가장한 꽃인 것인가
꽃은 우릴 보면 싱겁게 웃겠지
방문객
그들이 남기고 간 자리 만큼
내 입가에 마른 거품이 고인다
입술이 퉁퉁 부어 오른다
가슴이 멈추려하는 듯
얼마나 또 얼마나
그들을 마주하며 보내야 하는 가
오늘은 목요일
숨가쁘게 오후 4시가 지나치고
내 마음은 이쯤에서 너덜너덜 걸린다
동료가 건넨 달달한 박카스 한 모금에
목젖을 적시며 상처 곯음을 긁어낸다
저기 가는 방문객
나와 싸워 이겼노라 기쁘게도 가는구나
현재 시각 5시55분
아직 끝이 아니다
다시 띵동 벨소리가 울린다
우리 시선은 일제히 그곳을 향했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마지막 방문객이 될지 모르는 그를 맞이한다
마지막,,?
마지막이란 단어가 이렇게 고맙고 기쁨의 단어일 줄은 미처 몰랐다
마지막 방문객
그는 누구에게 상흔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
착각2/26
꽃아?
필때는 피우느라
몰랐지
피우는 것보다
지는 게 힘들다는 걸,
느티나무 할아버지/27
여름이 익어가는 7월
외암 마을에 구경 갔었지요
구불구불 돌담길 돌고 돌아
육백 살 드신 느티나무 할아버지와 마주하였지요
할아버지 내게 먼저 말을 건넸지요
야, 이 양반아?
왜 이제야 왔는가?
내 몸이 성할 때 좀 오지
육백 년 한자리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일세
푸르름 간직한 시절엔 내 풍채도 봐줄 만했는데,,
자네는 좋겠네
아직 몸뚱어리 실해서 그리운 사람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으니 자네는 살 만하겠네
난 이곳에 뼈를 묻고 이날까지 살아왔네
길고 긴 세월 한 번도 마실 나간 적이 없었다네
고향이 그리워도 갈 수 없고 동무가 보고파도 묵묵히 가슴에 묻고 살았네
보고픈 마음 하늘로 삐뚤삐뚤 뻗어 나가
겨우 이 마을 어귀 어딘가쯤 볼 수 있으니
드문 드문 날 찾아오는 손님 생각에 꽃단장하며 기다리는 중이라네
오늘은 저 고개너머에 누가 날 찾아오나
새벽부터 설잠에 일어나 말똥말똥 눈 비벼가며 진종일 기다리고 있다네
자네를 기다리는 노모처럼,
사랑이 묻는다/28
아빠?
엄마가 좋아
내가 좋아
한참을
하늘문턱에 거닐다
나도 묻는다
엄마와 함께면
엄마 좋고
너랑 함께면
네가 좋단다
사랑아!
어느 봄날/29
맑은 공기
푸른 하늘
따스한 봄볕
그리고 흐드러지게
피어오르는 봄꽃
모처럼 봄다운 날
좋아요, 너무 좋아요
사랑아?
너도 아니?
배고픈 마음으로도
살 수없는
이 맑은 봄날
붕어빵/30
아이야?
만지면
금세
앳된 얼굴 달아날까봐
눈으로만 본다
사랑의 거리에서
지그시,
꽃잎 진자리에 꽃대가 운다/30
어젯밤 한 줌 바람이 몰고 온
부탁이었을까?
짙게 뿌리는 햇살이 남긴
굶주림에 시린 바람 때문이었을까?
소슬소슬 내리는 빗방울의
울음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니, 꽃대 앞에 서성대는
어느 여인의 눈물자죽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모른다
꽃은 꽃인줄 모르고
피어 났을 뿐,
꽃잎 진자리에 꽃대가 운다.
연잎 사랑/31
동그런 정수리에
이슬 한방울 품기위해
남몰래 너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세상 밖으로
흘려 보내야 했니?
사랑이란
이렇게
주르륵주르륵
시린 이별 후에
간절함으로 안기우는
한아름 선물
어머니 인생강령/32
머나 먼 길
그래도
와서 보고가니
얼마나 좋으냐?
정주고
정받으니
얼마나 좋으냐?
먼길와서
곁에 두고보니
얼마나 좋으냐?
고맙다
고맙다
복받고
잘 살아라
오직 이뿐이다.
첫눈3/33
오늘은
운수 좋은 날
일년에 한번 뿐인
귀한 손님 마중가는 길
반갑다
보고 싶었다
내 영혼 펑펑 털리게 한
하늘이여
그리운 이여
다시, 불멸의 꽃으로 피어나리/34
<역주 간암선생문집> 출간을 기념하며,
허공에 흩어져 고이 잠들었던 꽃잎들이
한 잎 한 잎 역사의 부름에 떨리며 답하듯
250여년이 지난 오늘 비로소, 당신의 고귀한 업적이 불멸의 꽃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습니다
간암선생님?
님께서는 장흥 위씨 명문가 자재로 태어나, 천품이 영민하고 학문에 뜻이 깊어 이른 나이에 세상 이치를
깨우치시니
오직 우국충정 그 일념하나로,
남도 천리 길 그 먼 고향 장흥 땅을 오가며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남도 연해민 구제에 혼신의 힘을 쏟으셨습니다
어찌, 그 날의 처참했던 비극을 잊을 수 있겠는가!
천관산 연대봉수에 올라 송두리째 짓밟힌 왜구들의 만행에 통곡하며, 남해안 해상 방어 강화를 위해 남도 4도
설진하는 방략과 황폐해진 고금도 관왕묘 수호를 위해 상언까지 올리셨던 간암 할아버지!
높은 지조와 강직함으로 사회질서의 폐단에 비분강개하여 한 줄 한 줄 눈물로 써내려 간 열편의 시, 임계탄
자나 깨나 그 어느 곳에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귀하신 몸, 이 나라와 위문을 위해 기꺼이
불사르셨습니다
벼슬도 싫다, 귀향하여 대덕 초당에 터잡고 천관산 우러러보며 후학들의 입신양면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특히 위문의 자랑이신 존재 위백규선생의 탄생은 일평생 후학을 사랑했던 당신의 선견지명 그 놀라운 예지력
덕분이었음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꽃은 져도 그 향기는 남는 법
할아버지께서 이 나라와 위문을 위해 쌓아오신 업적들이 느즈막이 붉게 꽃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반석 위에 아로새긴 당신의 가르침은 역사 속에서 저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저희 후손들은 당신께서 남기 신 깊은 뜻 이어받아 위문이란 이름으로 하나되어 나아가겠습니다
고향으로 떠가는 편지/35
오래오래 살라고 전해들 주세요
뒷뫼산 부엉이 구슬피 울 때 까지 원없이 살다가라고들 하세요
지새끼들 지어 올린 생신상도 부끄럽다 거절 말고 거하게 차려달라고들 하세요
갈바람타고 석양 노을지면 밤새 외로우니 손주에게 전화 한통 해주라고도 하세요
더러는 회실가서 심심풀이 점 십원 내기 화투치며 막걸리 한잔 붉게 들이키고 오라고도 하세요
팔순 줄에 굽은 허리 부여잡고 더는 논수밭에 마늘은 심지않아도 된다고 전해 좀 주세요
봄꽃 피면 광양 매화마을로 꽃귀경도 가라고들 전해주세요
들에 나가 쑥도 캐고 냉이도 캐고 된장 섞인 보리국도 푹 삶아 드셔보라고 하세요
긴긴 겨울 뒷간 말래에 올려 둔 말캉한 대봉시도 실컷 드시라고 하세요
남몰래 내린 함박눈에 하늘가신 지애비 생각은 그만하라 전해들 주세요
새벽부터 울리는 장안사 주지스님 목탁소리에 극락왕생 불공도 드리라고들 해주세요
관산 오일장에 가서 냄 눈치보지 말고 맛난 쇠개기도 사다 드시라고 하세요
마을 샛길 끝에 살던 김양반, 자시에 하늘갔다고 슬픈 기별도 조심히 전해 주세요
울거면 조금만 우시라고 전해주세요
울음 그치거든 짐수레 끌고 마실 한바퀴 돌다오라고 해주세요
살아 온 인생 팔자, 짠하다고 그만 원망마라 전해주세요
지난 날 모진 시집살이 이제 다 풀어서 태워버리시라 전해주세요
오래오래 살라고들 전해주세요
지새끼 뒤늦은 효도받고 오래오래만 살다가라 전해주세요
해 저물 무렵 솔치재에 완행버스 불빛 보이걸랑 외등 밝혀두라고 꼭 좀 전해주세요
청춘/36
곱다 고와
안쓰럽다가도
나를 보고
너를 보면
곱다 고와
지금이
제일 곱다
고운 시절은
싫다가도
짠하다가도
돌아보면
곱고 고왔다.
용서/37
하나님? 이제
용서받지 못할 사람을
용서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랑받지 못할 사람을
사랑하기로 하였습니다
용서받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알고보니
나를 용서하고
나를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받지 못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은
나를 용서하고
나를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엄마/38
자식이 보낸
택배를 받고서
"절대 던지지 마시오,
깨지거나 파손될 수 있습니다"
두줄자리 글을 읽고,
세상 겁이나
만지지도 못하고
한시름만 했다는 엄마
세상 잘사는 건
서로 금가지 않게 사는 거라는데,
요즘 세상살이 무섭다는 말씀에
한번은 웃고
한번은 슬프다
순박한 사람
묘비명/39
빈손으로 왔다
잘먹고
잘놀다 갑니다
이사가는 날/40
상암동 이웃으로 지내 던 오랜지기 정아무개씨가 짐을 이고 떠난다
트럭에는 신형 냉장고 세탁기 대형TV,,,
살아 갈 세간만 폼나게 실렸다
정들다 구겨진 양은냄비와 낡아버린 숟가락들
고스란히 현관문 밑에 남겨두고 떠난다
잘가라
돌아선다
돌아보면
정 주고 정 떼는데,
꼬박 십년이 걸렸다
깨달음/41
하루하루가
천리같아도
돌아보면 천리도
하루 한 날이었음을,
팔월 어느 날/42
산이 아닌 곳에
새가 운다
논이 아닌 곳에
개구리가 운다
대낮인데
달이 뜨고,
매미 울음소리도,
들가 연잎에 안긴 한모금의 물도
자취를 감추고,
산들바람도 태양에 무릎을 접었다
그래도 가마솥의 옥수수는 익어만가리
사는 이유/43
한번
오지게
활짝 피워볼라고 살제,
서럽게 질라고 산단가!
자네 애미도
"이 좋은 시상"
"이 좋은 시상"
늘상 하더란 마시
한 하늘아래 살아도/45
한 하늘아래
한 날을 살아도
맑았다가 금세
흐려진 날이 있다
한 하늘아래 사는
너를 만나도
기쁘다가 금세
슬퍼지려는
그런 날이 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
너무 보고 싶었던
널 만나도
우는 널 보며
더 진하게
울고 싶었던 날이 있다
너도 그러냐?
더딘 사랑/46
네가 내게로 오는데
이리 더딘 것은
오래오래 머물기 위해서일거야
기다림의 깊이 만큼
진한 향기를 피우기 위해서일거야
보이지 않는 사랑
봄이 내게 오는 것처럼
오래오래 머물러줄래
달 기우는 밤/47
달도 기우는데
어디를 가고 있느냐?
사그락 사그락
댓잎 훑어가며
두려움에 떠는 대숲 길을
앞만 보고 달리던 철부지 아이들,
지금
어느 길,
어느 밤
어느 하늘가를
걷고 있느냐?
달도 차서 기우는 밤
외길을 걷고 있을 우정들아?
옛길 징검다리 건너서
이 곳으로 곧장 오너라?
여기,
첫사랑 그녀에게/48
널 만난다면
꼭 한번 묻고 싶었다
서툰 사랑은 했는지,
이제와 창피하고
낡고 초라해진
오래된 질문하나있다
애써
답하지 않아도 좋다
사랑아?
널 만나면 말해주고
싶었던 한마디
사랑도 지면
다시
사랑이 오더라
햇살 아래서/48
햇살이 널 품으면
넌 살포시
안기면 된다
목련 같은 여자/49
어느 봄날
하얀 목련을 보면
피우는 날보다
지우는 날 많은
꼬오옥 울 엄마
인생길 같다
피우고 기우는 길도
모르고 살았던
서럽게 저무는
한 여인의 눈물꽃 같다
내 여자는
고향 고읍천 길
꽃귀경 한번 못한
목련 같은 여자
공존의 4월/50
봄은
봄만의 날이 아니고
여름은
여름만의 날이 아니듯
가을 또한
가을만의 날이 아닌 까닭에
가을가고 겨울지나
봄이 온다는 것을,
겨울은
겨울만의 날이 아니기에
이 봄날에도
흰 눈꽃이 날리운다는 것을
흰 눈꽃 사이로 봄바람 분다는 것을
꽃처럼 사랑해/50
꽃을 기다리는 사람 눈에는
꽃만 보이듯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꽃이라 불러
사랑을 기다리는 예쁜 눈에는
사랑만 보이듯
사람을 사랑하는 그대는
꽃을 사랑이라 불러
꽃이 사랑이고
사랑이 꽃이라 불러
꽃피는 계절
네가 부르는 꽃노래 듣다
봄날이 기운다
꽃처럼 사랑하기에도
늘 여린 하루
아름다운 당신/51
알면 독이요
모르면 약이라지요
근데 이거 어쩌죠?
알고 싶은 걸요
당신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사랑이 아파서 운다/52
사랑이 아프다
아픔없이 사랑할 수 없을까?
아픔없이 행복할 수 없을까?
사랑은 아픔으로 와서
아픔에 익어 가는가?
아픔없이 사랑할 수 없을까?
사랑도 아픔만큼 깊어진다면
아픔만큼 견디며 사랑을 닮아보겠네
사랑은 아픔으로 오는가?
밤새 슬픔으로 내린 사랑이
얼마쯤 꽃으로 피어났는지
보고 보고파도 참아보겠네
내게로 오는 사랑의 아픔
그대는 내 시린 사랑만큼
아프지 말라며
차마 사랑한다고 말 못하겠네
지금
사랑이 아프다
사랑이 아파서
바보처럼 슬피 운다
눈빛/53
걱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말고
꽃을 보듯,
꽃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
살포시 떨어진 저 꽃잎
걱정을 걷어낸 흔적
바보야/54
왜, 모르냐
너는
넌 이렇게 예쁜데
넌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왜, 너만 모르냐
바보처럼,
모르고
서럽게 지려만하느냐
너를 그리다/57
꽃을 그린다는 것이
네 붉은 생각을 심다,
너의 얼굴을 그렸다
한 잎 두 잎
꽃잎이 모여
한송이 꽃이 되듯
너의 그리움으로 태어난
어여쁜 꽃은
오로지 네 것이고
내 전부다.
재회/58
네가 와도 좋고
내가 가도 좋다
다시 만나자
십년이 지나
잊혀지지 않는다면
서로의 모습, 지워도 지울 수 없다면
그때 우리 다시 만나자
변한 것은 세월
서로에게 멋쩍다 싶어도
자연스러운 것
그리움의 깊이
변한 것이 없다고
그 모습그대로라고,
지금 헤어짐을 두려워하지 말자
당신과의 인연 깊게 여울져
그리움은 낙엽처럼 쌓이기 마련,
그때 우리 꼭 다시만나자
세월이 변해도 인연은
흐르는 강물의 돛단배
고요히 강물 위를 흐르듯,
흔한 것에 대하여/59
흔한 것이
가장 소중할 때가 있다
익숙한 것이
가장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길가의 풀잎 하나
하늘의 구름 한 점
맑은 공기
그리고 물 한모금
살면서 누구나 한번 쯤은
생각했을지도 모를,
그 흔한 것들과 우린
사랑을 하고
사랑할 것이고
사랑해 갈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위해
얼마나 익숙해져가고 있는지
네 여자를 보면 안다.
유죄/60
기별하겠다던 사람
기다리다 긴 밤 세웠네
시일지나 하찮은 핑곗거리로
가식적으로 나를 위로하는 척
자기합리화로 최면을 걸겠지
애시당초 그날 일은
낚시꾼에겐 썩은 지렁이에 불과했다고,
일생 몸뚱이 안에 잔뼈 하나 없이 살아도
낚시꾼에게 각서 없이 신용 하나로 꿈틀대는 지렁이처럼
내게 약속이란 강물 속 붕어 떼가 나의 살점을
갈기갈기 공중분해 시켜도 지키고 싶은 그 아픔 이었다고
밥상머리 밀치고 술과 짠한 대화
독백은 침묵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봄비는 오락가락 새벽으로 흐른다
기다림은 슬퍼서 외로운 것이라며
한잔 술에 고독을 붓고 한 시를 엮는구나
에라 묻자. 저 강물에 피곪을,
깊게 닮았다/61-
졸업하는 딸에게,
아빠의 물음에
왜? 왜? 왜?
청구개리처럼
거꾸로 뛰어놀던 아이
진눈깨비 내리던 2월 어느 날
거추장스러운 졸업장을 품고 있는 기집애를 본다
사랑을 갈구하던 아이와
추억에 목말랐던 내 감정이 활화산처럼 타오를때도
멋쩍어 수줍게 찍은 초점흐린 졸업사진 속의 아이
그 아이가 너였다
뜨겁게 달아오는 해가
넓고 깊은 바다를 흠모하여 허우적거리다,
깊은 밤하늘에 이슬처럼 빛나는 샛별하나의 탄생, 바로 너였다
봉천동 허름한 월세방
발버둥치는 병아리 품에 안고, 동동구르던 부엉이 부부의 잠못 들던 밤들
달팽이 얇은 껍질 속에서도 더듬이 쫑긋 세워가며 느릿느릿 거리를 일방 통행으로 활보해야 직성이 풀리던
나의 분신같은 아이
깊게도 닮았다
벌써 6년을 훌쩍 넘어
거친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아 다시 떠나는 어린 낙타여!
내게는 미운 한마리 오리새끼
너무나
나를 깊게 닮았다.
소중한 날/62
엄마하고
불러본 날
몇 날
어머니하고
불러본 날
며칠
아직도
당신 등에 기대고 서면
마냥 수줍고 어린
나의 날들
어머니하고 불릴
당신의 날은
몇 날
며칠,
사랑/63
너로 인해
사랑이 돋고
너로 인해
사랑이 익는다
너를 보고 웃고
너를 보고 울고
너를 보고 산다
이게 사랑이다
보이지 않는 사랑
사랑하니까요/64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 그 말 못 합니다
사랑이 고프니까요
좋아해도
좋아한다 그 말 못 합니다
사랑이 좋으니까요
사랑해도 사랑한다
그 말 못 합니다
사랑이 내 사랑이니까요
너를 사랑하니까요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요
그대 사랑
내 사랑이니까요
부탁/65
기억하기는 어려워도
잊혀지는 건 잠시란다
그리움아?
네 곁에서
멀리 저멀리 떠나있더라도
그래그래
오래오래
기억해다오
시/66
너를 품고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도
너를 생각해
다시 힘내는 아침/67
산다는 것은
따스한 날 보다
흐린 날이 많다는 것
기쁜 날 보다
위로 받고 싶은 날이 많다는 것
외롭고 쓸쓸한 날이,
웃음꽃 핀 날 보다
울먹이는 날이 많다는 것
견디는 날 보다
견뎌야 할 날이 많다는 것
참고 용서하는 날이,
새날의 다짐처럼
시작하는 날이 많다는 것이다
스러지는 들풀이 아침 이슬 한모금을 토해내며
다시 세상밖으로 기지개를 켜 듯
널 보며 위로 받고
나를 위로하며 살아가리
택배 아저씨/68
띵동! 택배요
현관문을 열자
번개처럼 사라진 아저씨
두고 간 박스에
흥건히 새겨진 자국
똑, 똑, 똑
땀비 젖은 아저씨
한 줄 인생
시간이 돈이다
고향에서 건너 온
엄마표 모듬 꾸러미
오직 자식이
내 한 줄 인생이다.
그때는,,,/69
그때는 너도
그때는 나도
그것이
그것만이
서로의 길인줄
수줍은 아이/70
초승달 속에 숨은
맑은 눈망울
복이 담긴 야무진 콧날
두툼한 붕어 입술까지
수줍은 아이
열네살 적 내가 보인다
눈길을 홀로 걷는 일/71
눈길을 홀로 걷는 일은
눈의 속도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눈의 방향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
눈의 굵기와 눈의 깊이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는 것
느릿느릿 사선으로 비스듬히
이내 폭풍우처럼 수직으로 낙하
허공을 누비는 그 눈을 물끄러미 지겨보는 일
눈길을 홀로 걷는 일은
쌓이는 눈에 그리움 한 점 새겨넣는 일
눈 날리던 옛일 하나 더듬어보는 일
눈에 밟힌 눈물자국, 다시 지워보는 일
눈으로 고독한 이, 눈으로 감싸주는 일
눈길을 홀로 걷는 일은
그길은 결코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는 것
위로의 밥/72
불특정 다수의 방문객에게 내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 털린 하루
방문객이 바라보는 나는 오롯이 특정된 1인 생존의 갈림길에서 나를 찾아온 그들,
거멓게 손때 묻은 민증을 건네는 순간 기쁨의 어제와 고난의 오늘이 흑백 영화처럼 흐른다 실낯같은 희망의
끈을 찾아 온 방문객 원하는 곳도 바라는 것도 많을 터, 어떤 이는 대화도중 인정사정없이 나를 후려친다
가슴뼈가 비틀거리고 영혼이 철로를 탈선하고 입 밖으로 마른 거품이 고인다 이내 깊은 침묵이 흐르고 고통의
깊이가 내 발밑을 적실무렵, 서서히 슬픔이 밀려온다 꾸역꾸역 슬픔의 밥을 울컥 삼킨다 그들의 슬픔을
어루만져주기에는턱없이 부족한 시간적 한계
오후 5시 대기석이 아직도 만석이다 칼바람에도 노동의 현장에서 계절을 탓하는 것은 죄악이다 기다리는
계절이 오는 처럼 올 사람은 반드시 오고냐 마는 것처럼,
마지막 종이 울릴 때까지 인내심을 부여잡고 임무를 완수해야한다 그들이 나를 두드린 종소리 크기만큼 내
성숙의 울림도 커질테니까,
마침내 긴 하루가 또 막을 내렸다
그들로 인해 힘들었던 날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깊은 메아리이었다는 것을 안다
메아리가 빌딩넘어로 사라져간다 그들은 내 몸안의 위로를 채워서 가고
하룻새 깡통이 되어버린 텅 빈 몸에, 위로의 밥을 채우러 나는 다시 가족 품으로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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