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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 설날 아침입니다. 집집마다 문중마다 세배를 드리고, 차례를 모신다고 부산한 시간입니다. 딸만 둔 우리 집에는 우리 내외만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제 오후에 시댁으로 갔다가 오늘 오후에라야 우리 집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딸만 둔 가정은 명절날 아침 나절이 항상 조용하기만 하답니다.
지금부터 60 년 전인 1950년 설날 아침입니다. 6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 밖이 아직 어둑어둑한 이른 시간입니다. 사립문 여는 소리가 납니다. 조금 있으니 따로 사는 오소형수님(큰 형수)이 단정하게 차린 모습으로 안방 문을 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 그릇을 부모님 앞에 차려 놓고 문 밖에서 세배를 드립니다. 그 다음은 둘째 형수님. 그 다음은 세째 형수님, 그리고 네째 형수님이 세배를 드리지요. 사촌 큰 형수님이 그 다음 차례이고, 역시 사촌 형수님인 광산형수께서 마지막으로 떡국을 끓여와 세배를 합니다. 어머님께서는 떡국의 맛을 보시고는 덕담을 합니다. 그 당시엔 떡을 집에서 디딜방아를 찧어 만들었기 때문에 솜씨에 따라 떡국 맛이 달랐습니다. 매끌매끌한 떡국도 있고 입에 쩍쩍 달라붙는 떡국도 있습니다. 떡국 기미는 모두 닭고기입니다. 아주 어려운 집에서는 멸치 다시 물로 끓이는 경우도 있었지요. 설날 아침 떡국 솜씨는 평소 음식 솜씨를 품평받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형수들의 세배가 끝나면 형님들과 사촌 형님들이 두두마기 차림으로 우리 집으로 와서 부모님께 세배를 드립니다. 우리 부모님이 집안의 어른이었답니다. 그러고 나면 차례를 모시기 전에 나와 같은 조무래기들이 아버지 어머님께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을 받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작은 아버님 댁으로 가서 세배를 드리고, 사촌 큰형님과 제일 큰 형님부터 차례로 형님댁을 돌면서 세뱃돈을 받습니다. 어렵게 사시던 자형댁도 빼 놓지 않았습니다. 세배를 드리는 것은 어른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는 것이지만, 그 때 우리 꼬맹이들에게는 1년에 한 번 공식적으로 용돈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답니다.
아침 햇살이 안산 중간 쯤을 비치면, 큰집에서부터 차례를 모십니다. 증조부님부터 조부님 제사를 모시는 제관들이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 가득합니다.우리 꼬마들도 뒤쪽에 서서 멋도 모르고 따라서 절을 합니다. 웬 절을 그렇게 많이 하는지 지루하기도 했답니다. 기독교인이 된 나는 지금도 제사를 지내는 형식이나 제물을 차리는 일에는 젬병입니다. 절도 몇 번을 하는지 예사로 보기 때문에 잘 모르지요.
큰 집에 제사를 모신 다음에는 제삿밥을 먹습니다. 추석엔 괜찮지만 추운 설날엔 방이 비좁아서 큰방, 작은방으로 흩어져 먹었지요. 차례를 모신 다음에 어른들이 음복을 할 때 꼬마들에게는 문어 다리를 하나 얻어 먹는 것에 가장 관심이 많았답니다.
그 다음엔 작은집에서 숙모님 제사를 드립니다. (한참 후엔 큰형님댁과 작은 사촌형님댁에서도 차례를 지냈던 것 같습니다.)
정월 초하룻날은,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하고, 조상님에게 차례를 모시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설날 아침에 세배를 다닐 적엔 설빔을 자랑하거나 설빔에 대한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그 당시엔 설빔이라야 시장에서 새로 산 양말과 어머님이나 형수님께서 손수 지어주신 한복이 전부이었어요. 광목이나 집에서 짠 무명베에 검은 물감을 들여서 만든 바지 저고리에 쑥색베로 만든 쪼끼를 입고었으니 시골에서는 거의 비숫비숫한 설빔이었던 고요.같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남자 아이들과는 달리 설빔이 조금은 화려햇던 것 같습니다. 색동 저고리를 입거나 빨간 치마 노랑색 저고리를 입고 갑사댕기를 한 것 같이 생각이 납니다. 집안이나 마을의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니는 일도 극히 드문 일이 아니었나 생각되고요.
(지금은 자물쇠가 달려 있는 고향집입니다.) 이튿날은 마을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닙니다. 이 때에는 또래끼리 같이 다니면서 세배를 드리고, 강정이나 떡을 대접 받는 재미가 쏠쏠했던 같습니다. 세배가 끝난 오후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얼음이 언 무논에서 얼음지치기를 하거나, 연날리기, 자치기나 딱지치기, 팽이치기나 구슬치기를 하면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널뛰기나 윷놀이 등을 하고 놀았지요.
초사흘부터는 삼십리길이나 되는 길을 걸어서 외가로 가거나, 고모님댁이나 이모님댁으로 놀러 갔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님댁으로 가서 생질들과 어울려서 놀기도 하였답니다. 워낙 집안이 너르고 친척들이 많았으므로, 같이 다니거나 친척집에서 만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외할머님과 외숙모님, 이모님과 고모님의 사랑을 받은 기억들이 아직도 머리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설 전후로 눈이나 비가 왔을 적에는 땅이 얼었다가 녹을 때에는 고무신을 벗겨지게 하여 양말을 버리거나 바지가랭이에 흙이 묻어서 곤난할 때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남강 건너 법수면 둘안에 살던 이모님댁에 놀러 갈 때가 더욱 심했던 같습니다. 그 때 같이 지내던 산촌들이나 고종사촌, 이종사촌, 외사촌들 중에는 벌써 유명을 달리 한 분들도 있고, 살아 있어도 자주 만나지 못하고 늘 마음에만 담아 두고 지낸답니다. 해동이 되면 내 고향 천락마을에서 외가인 정곡면 두곡마을까지 걸어서 한 번 가 볼까 생각하고 있답니다.
설탕이나 꿀이 귀했던 그 시절엔 홍시에 떡을 찍어 먹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가을에 딴 감을 지붕위에나 독 안에 넣어 두었다가 겨울에 꺼내 먹으면 별미였는데, 절편을 홍시에 찍어 먹으면 정말 일미였지요.
요즘은 세뱃돈의 단위가 높아져서 초등학생이라도 10,000원 이상 주어야 하고, 중고등학생은 2~30,000원, 대학생은 50,000원이상 주어야 된다고 합니다.(며칠 전 인터넷에서 읽은 글입니다. 씀씀이가 큰 어른들은 대학생에게 10만원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세뱃돈을 줄 대상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옛날엔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요즘 돈으로 1,000이나 2,000원 씩 주어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엔 봉급생활자가 아니고 농사를 주로 하던 시대라, 곡식이나 나무를 팔지 않으면 돈을 장만하기가 어려웠던 때입니다. 새벽에 십리나 떨어진 시장에 나가 나무 한 짐을 판 돈으로도 나누어 주기에 모자랐을 것인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때는 몰랐었지요.
벌써 11시가 넘었네요. 이제 60년 전 설날의 추억에서 현실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올 손자들과 이웃에 사는 종손자들에게 줄 세뱃돈을 챙겨야겠습니다. (2009. 1. 26. 기축년 설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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