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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수월] 자신을 비운 땅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탈출 20, 1 - 17
† 복음 : 마태 13, 18 - 23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는 다윗 가문의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 성녀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서방 교회에도 널리 퍼졌다.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탈출하였기에 더 이상 종의 신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려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종에서 자유로운 백성으로 신분이 바뀔
때에는 그에 맞는 삶의 방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따로 풀이해 주신다.
여기서 ‘씨’는 하늘 나라에 대한 복음 말씀이며, ‘열매’는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당신께서 선포하신
복음이 사람에 따라 받아들여지거나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씨를 뿌리십니다. 그분의 은총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좋은 땅인지 그렇지 않은 땅인지
하는 점입니다. 좋은 땅에는 열매가 맺히나, 좋지 않은 땅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과 좋지 않은 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좋은 땅으로 일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돌을 치우고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돌과
잡초는 무엇입니까? 좋지 않은 습관과 그릇된 사고방식입니다. 이러한 것을
없애는 과정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마치 얼굴이나 몸에 있는 잡티를
제거하려면 불편함과 아픔을 감수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 거름이나 영양분을 자주 뿌려 땅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보통 땅의
질을 높이는 거름과 영양분은 냄새가 그리 향긋하지 않습니다. 아니, 실은
고약합니다. 그렇게 역겨운 것들을 땅이 잘 흡수해야 토질이 좋아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것들, 역겨운
것들, 불편한 것들을 잘 받아들일 때 우리 자신이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우리의 밭은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고자 땅을 잘 일구고 있습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열매맺는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7월26일 연중 16주간 금요일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마태13,18-23)
열매를 맺으려면
몇 개의 화분을 작은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 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 놓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곧 죽을 것 같던
거실의 화초가 거짓말처럼 생기를 찾았습니다. 저는 물 한 모금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서
그대로 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히브4,12).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한 모금의
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13,8)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능이 가까워 오면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 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언제든지 채울 수 있습니다.
저는 스마트폰이라고 불리는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스마트폰으로
참으로 많은 것을 합니다. 전화와 문자메시지 발송은 기본이고, 여기에 인터넷이
연결되어서 웹 서핑과 함께 E-Mail 확인 그리고 각종 SNS 활동을 도와줍니다.
또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일상 삶 안에서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해서 그럴까요?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아 버립니다.
그래서 보통 저녁때가 되면 ‘배터리가 10퍼센트 미만입니다.’ 식의 경고 메시지를
보게 됩니다. 이 메시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제 배터리가 없어서 쓸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따라서 얼른 충전하라는 메시지인 것이지요.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경고는 자주 주어집니다. 특히 여러 가지 일들을 쉬지
않고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죽어라 앞으로만 달리는 사람은 마치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방전되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 방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좀 쉬라고 몸이 아프기도 하며, 우리의 바쁜 일상 삶 안에서 또 다른 식으로
살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주님께서 제시해 주십니다.
그 쉼의 시간, 자신의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충전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로 주님 안에서 채워야 합니다. 문제는 그 충전의 시간을 단순히
세상의 기준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하루 종일 자고 있으면 충전이 될까요? 또 요즘이 극성수기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이 휴가를 가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보내는 곳에 함께
할 때 충전이 될까요?
많이 잔다고 해서 피로가 꼭 풀리던가요? 어떤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쉬어야 한다면서 주일 미사에 참석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나
완벽하게 자신의 피로를 잠으로 완전히 지울 수 있었습니까? 또 사람들 많은
휴가지에 가면 피로가 풀릴까요? 어쩌면 사람들에 치여서 오히려 피곤함만
안아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또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우리
삶을 충전할 수 있으며 더욱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씨 뿌리는 사람 비유 설명을 해주시면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고 말씀하시지요.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언제든지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부족한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으며,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부분을 채우는데 항상
유념해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오늘이
되십시오.
깊게 뿌리내리는 만남이든지, 가볍게 스쳐 지나는 만남이든지, 모든 만남은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이며 인생의 사계절을 가르쳐 주는
지혜서다(이해인).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그리고 성모님.
언제 기도해요?
신앙생활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어떤 청년이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날은 언제에요?”
이에 할아버지는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날은 네가 죽기 전이야.”라고
대답하십니다. 이에 청년은 놀라며 대답하지요.
“할아버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죽는 날을 알 수가 있어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변을 해주십니다.
“그래. 네 말대로 아무도 자기 죽는 날을 알 수 없지. 그래서 매일 기도해야
하는 거야.”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자기 죽는 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매일 꾸준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도를 소홀히 하시겠습니까?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2013년 다해 7월26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오랜 만에 아이들과 캠프를 함께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예수님의
12제자들의 이름으로 12모둠으로 나누었습니다. 아이들은 시간을
잘 지키는지, 율동을 잘 따라하는지,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잘
듣는지, 이동할 때 질서를 잘 지키는지, 발표를 잘하는지에 따라서
은총의 열매를 나누어 줍니다. 참 신기하게도 어떤 모둠은 은총의
열매를 많이 받는데, 어떤 모둠은 받은 은총 열매를 빼앗기도 합니다.
모두들 여름캠프를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온 것인데, 모둠은 여러
본당의 아이들을 임의로 나눈 것인데도 차이가 납니다. 어제 잘
못했던 모둠은 오늘 칭찬을 해주고, 격려를 해 주니 모두 신나서
함께 했고, 어느덧 은총 열매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처럼 좋은 날씨를 주셨고,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보니, 제 마음이 다 시원해집니다. 수련장에 온 아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약간씩 찰과상을 입는 아이들은 있지만 모두들 건강하게 잘 지내다
집으로 가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3번 더 아이들을 만나야 합니다.
처음이 긴장되고 어렵지, 다음 차수부터는 저도 여름캠프를 함께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둠을 맡아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선생님,
뒤에서 물품을 준비하고, 진행을 도와주시는 선생님, 캠프 전체를
진행하시는 선생님, 아픈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선생님이 있기에
캠프는 좋은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보니, 저의 어릴 때가 생각납니다. 어릴 때 학교 가는 길은
2가지 였습니다. 하나는 길게 뻗은 대로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별로
재미는 없지만 빠른 시간에 학교에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어린이,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어린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게들이 즐비한 동네길입니다. 어린학생들에게 동네 길은
커다란 유혹입니다. 우선 먹을거리가 많았고, 다음은 볼거리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게임도 많았습니다. 동네 길을 선택하면서 한눈팔지
않고 학교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팥빙수, 색소를 넣은 냉차가 있습니다. 늘 있는 것은
국화 빵, 떡볶이, 오뎅입니다. 설탕을 녹여서 각종 모형물을 만들어서
뽑기를 하는 것도 있고, 물방개를 이용한 게임, 구술을 이용한 게임,
주사위를 이용한 게임, 판을 돌리고 화살을 던지는 게임도 있습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재미있는 것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학생들을 유혹하는 것은 만화가게입니다. 만화는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 보다 훨씬 재미있고, 쉽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잠시 머물다가 학교로 발길을 향합니다. 늦으면 선생님한테
혼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수업시간이 다 되도록
골목길에서 놀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많은 아이들이 길게
뻗은 대로를 이용하지 않고, 놀 거리가 많은 골목길을 이용합니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들은 불량식품이
즐비한 골목길을 이용하지 않고 대로를 이용해서 집으로 갑니다.
어른이 되면 쉽게 유혹을 이겨낼 것 같지만 어른들에게는 또 다른 유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욱 아름답게, 더욱 현란하게 포장된 유혹들이
어른들의 마음을 사로잡곤 합니다. 가정에 충실하고, 신앙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유혹들 앞에서 잠시 머물기는 하지만 그곳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회식이 있더라도 집에 꼭 연락을 하고 다음 날을
위해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돌아옵니다. 주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어른들은 어린이가 골목길에서 오래 머물듯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기도 합니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기도 하고, 게임에 빠져서
힘들게 번 돈을 탕진하기도 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하기보다는 주말에는
하루 종일 자거나 텔레비전 앞에 있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3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첫째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일미사를 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주일 미사에
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다음날 출근할 때 힘들고, 때론
결근을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오늘도 술집에서 12시까지 술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운동을 하고 책을 읽는 것이 몸과 마음에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일로 미루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개선을 하지만 ‘작심삼일’인 사람들입니다.
책을 읽어도 처음 몇 장만 읽고 마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쓰기를 시작해도
앞부분만 겨우 쓰는 사람들입니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 거금을 들여
러닝머신을 사지만 나중에는 빨래를 너는 기구로 변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영어 공부한다고 학원에 등록을 했지만 한 달에 겨우 몇 번 가기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은 있지만 의지가 약한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꾸준히 개선하는 사람입니다. 목표를 정하면
그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절제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든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사람입니다. 수영을 시작하면 빠지지 않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책을 읽으면 끝까지 다 읽는 사람입니다. 소중하고 중요한 일들을 미리
하기 때문에 언제나 여유가 있고, 자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3번째 유형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지혜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메말라서 황폐하게 되는 것도 우리 선택의
결과입니다. 작은 씨앗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도 우리 선택의
결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강물에 떠밀려가는 나뭇잎처럼 살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기를 바라십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참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7월26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마태오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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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도 그러니까 9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주임으로 있던 성당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심어진 복음의 씨가 열매를 맺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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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전날까지 몸이 불편하여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고해성사와 봉성체를 마무리 지으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빴다.
사제관이 있는 시부까와(澁川)에서 3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누마따(沼田)라는 성당이 있는데 이곳 역시 본당 관할이다.
그 성당에서 또 20킬로 정도 떨어진 외진 곳에 '베르지오제'라는 사설
복지시설이 하나 있다. 사설 양로원과 비슷한 형태이나 그렇게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고, 연령에 상관없이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들어갈 수 있는
시설이다. 그곳에 우리 신자가 세 사람이 있고, 성공회 신자가 한 사람이
있다. 워낙 눈이 많이 오는 곳이라 겨울철에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보통 한 달에 한 번 미사를 드리러 가곤 했는데, 요즘은 미사를
위해 사용하던 방의 주인이던 할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와 방을 구할 수
없어 봉성체만을 다니는 상황이기도 했다. 하여간, 성탄이 오기 전에
이들에게 고해성사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으로 차를 몰아
도착했다.
그 세 분들 중에 한 분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성명: 다께이찌 히로꼬 (武市 博子)
연령: 63세
뇌성마비로 신체를 거의 움직일 수 없고, 오른 손의 두 손가락만을 어렵게
사용할 수 있음.
발음이 극히 불분명하여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어려움.
두뇌사용에는 전혀 문제가 없음.
시설에 함께 생활하시는 비교적 건강하신 92세의 신자가 아닌 어머니가
돌보고 있음.
이상이 내가 알고 있는 그녀에 대한 전부이다. 다만 짧지 않은 시간을 이
시설에서 보내고 있고, 늘 신부인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두 분의 고행성사와 봉성체를 마치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와 함께 낮잠을 자고 있는 중이었나 보다.
"신부입니다." 하는 소리에 두 양반이 놀라 어쩔 줄을 모른다.
잠시 준비할 시간을 주면서 문 바깥에서 기다린다.
이내 방이 열리고 어머니가 환하게 맞이해주신다.
"너무 오래 동안 오지를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딸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고 고해성사를 집전한다.
고해성사를 끝내고 어머니를 불러 함께 봉성체 예식을 진행한다.
너무 기뻐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잘 왔다는
안도의 마음을 갖게 된다. 전례를 다 마치고 어머니가 내놓는 차 한 잔을
마시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바라본 벽에 걸려있는
한 장의 종이를 보게 된다. 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간다.
“私は お世話になりました.
今、私は幸せです.
すべてに感謝の心です.”
------------------------ 武市 博子
“저는 신세를 졌습니다.
지금, 저는 행복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 다께이찌 히로꼬
"히로꼬쨩이 쓴거에요?" 놀라며 묻는다.
그녀는 무척 수줍은 모습으로 수긍을 한다.
그의 어머니가 한 마디 거둔다.
"글쎄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움직이지도 않는 몸으로 몇 일간
워드프로세스를 배우더니 저렇게 써놓았다니까요. 너무 대견합니다."
감동이었다. 전율을 느낄 정도의 감동이었다.
그녀가 불편한 몸으로 워드프로세스를 사용했다는 것에 대한 감동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감동이었다.
태생 몸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여인, 63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인생을
온갖 장애와 어려움 속에서 보내야 했던 여인,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였다.
어쩌면 인간이란 가진 것이 많을 수록 감사할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온갖 감정의 세계에서 시작해 자신을
꾸미고 있는 숱한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감사의 마음을 그분께 전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유심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나이에 가려진 그녀의 젊음은 사라졌지만,
그녀는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리도 찾던 감사의 마음을 그녀를 통해서 배울 수가
있었다니......
기쁜 마음으로 방을 나선다.
아스팔트가 하얀 눈으로 덮여 전혀 보이지 않는 길을 달려오면서도 주변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그녀의 어머니가 수줍은 미소와 함께 던진 말 한마디가 떠오르며 가슴
뭉클해지는 순간이다.
"神様って本当に不思議な方ですよね"
"하느님이라는 분, 정말 신비한 분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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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꼬씨의 마음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고 그녀를 지켜
주었으리라 믿는다.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였다.
히로꼬씨도 70중반이 된 상태일 것이고, 그의 어머니가 아직 건재하시다면
백 살을 넘었을 것이다. 너무 쉽게 잊고 있었다.
시간을 내서 한 번 찾아가봐야겠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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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깨달음의 행복
2013년 다해 7월26일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마태 13,18-23
<깨달음의 행복>
이 한세상 살아가다보면 뜻밖의 행운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러
행운들 가운데 가장 큰 행운은 아무래도 ‘깨달음’이란 행운이 아닐까요?
삶의 전환점, 삶의 기폭제가 되는 깨달음, 새로운 진리에 눈을 뜨게
해주는 깨달음, 그간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게 해주는
깨달음,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깨달음, 우리 삶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이끌어주는 깨달음...이런 깨달음은 돈 주고도 못사는 정말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아무에게나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 절대로 아니더군요.
깨달음이란 내 인생 안에 새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새 집을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허무는 일입니다. 낡고, 비좁고, 비새고, 배관도 엉망이어서 냉난방도
안 되는, 그래서 더 이상 거처할 수 없는 낡은 옛집을 과감하게 허무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기존의 그릇된 사고방식, 오류와 아집, 교만으로
가득 찬 옛집을 허무는데서 깨달음은 시작됩니다.
깨달음을 통해 소중한 인생의 진리 하나를 발견했다고 다 끝난 것은
또 아닙니다. 발견한 진리를 통해 우리 앞에 펼쳐진 새로운 길, 새로운
삶의 원칙을 살아내는 일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저 좋다 좋아, 하고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진리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투신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길, 새로운 이정표,
새로운 삶의 대원칙을 발견한 행운아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은 그분이 사신 것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자취를 하나하나 밟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행한 바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으로 그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은총에 도달한 사람으로서의 자세이며,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뒤따르는데, 삶의 폭,
삶의 지평이 광대해져,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놀라울 정도로
관대해집니다.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고통 앞에서도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크게 깨달은 만큼 큰 그릇이
되어 삶의 모든 국면들을 관대하게 수용합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문제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습니다. 미움덩어리인
사람도 그저 안쓰럽고 측은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인생의 역풍 앞에서도,
먹장구름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 지을 여유가 생깁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하늘나라가 내 안에,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기에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힘겨운 삶의 순간들도
사랑으로 엮어갈 줄 압니다.
깨달음은, 하느님의 은총은 때로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때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십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셔서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으십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우리의 노력은 마음의 빗장을 푸는 일입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신을 비운 땅
2013년 다해 7월26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
복음 : 마태오 13,18-23
< 자신을 비운 땅 >
가톨릭 뉴스, 2012년 8월 31일자 기사에 타이페이 대교구 주보에 실렸던
타이완 산궈스 바오로 추기경의 편지 전문이 실렸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산궈스 추기경의 편지 내용은 그가 돌아가시기 몇 주 전, 그의 질병이
어떻게 하느님의 선물이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이 마음으로 깨닫고 싶었던 것은 십자가의 비움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비움(필립 2,7)’으로서 하느님과 더 친밀해지는 신비였습니다.
하느님은 이 비움을 통한 하나 됨의 신비를 질병으로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셨고, 기도와 묵상
중 죽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종종 나타났다고 합니다. 동시에,
“자신을 비워라, 그러면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자신을 비운 예수와
가깝게 지낼 수 있게 골고타 언덕 꼭대기 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젠 그분의 편지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이 환영은 나를 깨우쳤다. 나는 내가 입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직자의 장백의, 주교반지와 주교관, 추기경의
진홍색 수단, 이런 것들은 과다로 포장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원래 자신을 잃게 했다. 하지만 이런 옷들은 내 일상의 하나가
됐고, 이런 옷들을 벗어던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할 수 있으시다.
지난 6월 말, 가슴에 찬 물을 빼기 위해 입원했다. 의사는 내 허파에
고인 물을 빼기 위해 이뇨제를 처방했고, 나는 이 사실을 몰랐다.
미사를 드리는 중에 약효가 나타났다. 독서를 할 때쯤에 화장실에
가야 했다. 화장실로 가는 동안 오줌을 지려 심하게 젖었고 마루에
자국을 남겼다.
사제품을 받고 57년 동안 미사를 드릴 때 이런 적은 없었다. 나는 내
권위를 잃었다. 수녀와 의사, 간호사들 앞에서 숨을 곳을 찾지 못했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나의 허영심을 고치기 위해 어떻게 시작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얼마 뒤, 타이베이에서 나는 이틀 동안 대변을 보지 못했고 의사는
완화제를 줬다. 약효는 한밤중에 나타났다. 나를 돌보던 남자 간호사를
깨워 샤워실로 데려다 달라 부탁했다. 샤워장으로 다 가기 전에, 내 속이
비워졌다. 대변이 나와 바닥에 떨어졌고, 이 간호사가 내 똥을 밟았다.
그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신고 있던 슬리퍼와 바닥을 닦으며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 똥 묻은
파자마를 벗기고 나를 화장실 변기에 앉혀 내 다리에 묻은 똥을 닦으며
어른이 아이를 꾸짖는 것처럼 나를 꾸짖었다.
그는 ‘두세 발짝만 더 가면 변기였는데, 그것도 참지 못했느냐? 이것
때문에 내가 고생했다. 다음에는 더 일찍 말해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내가 한 살짜리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그의 말은 날카로운 칼로
나에게 다가와 내가 90년 동안 갖고 있던 모든 존경과 명예, 직함, 직위,
권위, 위엄을 난도질했다. 나를 다 씻기고 나서 그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바로 잠이 들었다.
나도 잠에 들었지만 곧 깨어났고 아주 편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비운’
예수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자고 초대했다.
세 번째 당황했던 순간은 2주 전이었다. 나는 그때 막 예수회의 병원으로
옮겼다. 발에 부종이 생겨 의사들은 강력한 이뇨제를 처방해주면서 또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방사선치료를 하러 가던 도중에 약효가 나타났다.
의료진과 기술진은 내 바지가 완전히 젖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위엄도 잃었다.
이런 당황스러움이 죽을병에 걸려 고생하는 이 90대 노인에게 원기를
회복시켜줬다. 며칠 만에, 이 당황스러움은 어릴 적 순진함을 다시
가져다줬고 오랫동안 쌓여왔던 도움 되지 않는 습관을 없애줬다.”
외적인 지위와 존경, 사회적 위치 등으로 둘러싸이면 또 그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족쇄들을
하느님 앞에서도 풀지 못하고 어린이처럼 순박하게 재롱떨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만드는 것이 자아이고 우리가 솎아 내야 할 돌들입니다.
그 자아 때문에 생기는 세상 걱정이 가지덤불이고 그것들이 하느님께서
뿌리신 씨앗을 숨 막히게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멸시와 고통’을 달라고 그렇게 매달렸는지 모릅니다. 내가 커지면, 내가
높아지면, 내가 더 가지면 그 땅에서는 어떤 열매도 맺힐 수 없음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무릎을 꿇고 뻣뻣한 고개를 숙일 때 찾아옵니다. 그렇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마음으로 느낄 때 그 순수한 땅에서 하느님의
열매가 송이송이 맺히게 될 것입니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 우리도 고
산궈스 추기경님처럼 우리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좋은 땅을 가진 사람이 느끼는 것은 아마 산궈스 추기경님이
느끼게 되었던 이런 감정일 것입니다.
“내 몸이 아주 작은 캥거루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 나는 주님께 내 영성적
질병을 낫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했고, 이로 인해 나는 아이처럼 생기를
되찾고 단순해지며 겸손해졌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람의 심성을 하늘 맛이 듬뿍 들도록
2013년 다해 7월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씨앗을 뿌려 새 싹이 나왔는데 밟아버리면 여지없이 죽고 맙니다.
사람이 다니지 않고 밟지 않는 곳에 씨앗을 뿌리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걸 보면 참 미련하고 돈 사람 같아 보이지요.
사람의 근본은 교육시키지 않고 훌륭한 기술만 익히게 하는 것이나,
사람의 심성은 생각 않고 성형으로 예쁘거나 돈만 있으면 좋다하지요.
사람의 심성을 하늘 맛이 듬뿍 들도록 하라는 주님 말씀 참 좋습니다.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마태오 13,19)”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기타] 말씀을 깨닫는 것?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이들은 같은 말씀을 들었으나 받아들임이 각기
다르다. 내 안에는 이 네 부류의 사람이 다 들어 있다. 단단한 길가.
이물질이 잔뜩 들어 있는 돌밭. 아무것도 못 들어오게 가시로 방어진을
쳐놓은 가시덤불이. 그리고 좋은 밭도 있다.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것은 어떤 것일까? 씨알도 먹히지 않는 단단한
길가인 마음을 괭이로 파내고, 호미로 긁어내고, 비지땀을 흘리며 단단한
마음을 어루만져서 부드러운 흙으로 만드는 과정, 바로 그 과정이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좋은 밭을 만드는 ….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무거운 짐들이 있어 뿌리를 내리기에는 어려운
돌밭인 마음 안의 돌멩이를 다 들어내는 것. 크고 작은 돌멩이를 다
들어내어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비워내는 과정. 뿌리에서 새로운
싹이 올라오고 이파리가 나고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빛을 차단하는
가시덤불들을 다 걷어내는 과정. 물론 이러한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가시덤불에 찔리고 피가 나고 상처가 날 것이다. 당연히….
내게 필요한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이다. 씨앗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씨앗이 다른 세계를 품을 수 있도록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충분한 수분과 따스한 열이 단단한 씨앗을 부드럽게 녹여내어 씨앗이
죽고, 새로운 싹이 흙을 뚫고 올라올 때 열매 맺는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주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늘 깨어 있게 하소서!’
- 박후임 목사(봉곡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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