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한수산의 까마귀란 소설을 통해 더 많이 알려진 군함도. 섬의 모양이 군함처럼 생겼다고
해 군함도라고 불린다. 좋은 품질의 강점탄이 채굴되어 인접한 다카시마 탄광과 더불어 일본의
근대화를 지탱해 준 탄광 중의 하나. 당시 미쯔비시 중공업은 근로자들을 위해 군함도에 아파트와
위락시설 등 도시의 기능을 갖추어 주었다. 그래서 전성기를 맞았던 1950,60년대에는 인구밀도가
제곱킬로미터 당 83,600명으로 도쿄시의 9배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요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면서 1974년 폐산되었다. 지금은 건물이 노후화, 폐허화되어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다.
2015년 7월5일 '메이지산업혁명의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하시마를 이렇게
산업화의 유산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강제징용의
현장으로 하시마를보고 있는 한국 등 주변국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태평양 전쟁시 온갖 감언이설로 군함도로 강제동원된 조선 노동자는 공식적으로 800명, 그 중
공식사망자가 134명. 노동자들은 해저 1천미터, 온도 45도가 넘는 갱도에서 12시간 이상의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조선인 숙소 주변에는 감시탑을 설치했고,전쟁 막바지에는 갱내 조선인
작업비율이 90%이상 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나가사끼가 피폭된 이후에는 도시정화작업에
차출됐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군함도가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일본산업화의 유산이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강제징용의 현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등재하라는 것이다. 유럽의 아우슈비츠수용소가 유대인학살의 부정적 이미지로
등재되었듯이...그래서 군함도가 2015년 세계문화유산 등재시 태평양전쟁때 나가사키 주변
23개 동원시설 가운데 7개 시설에서 조선인 5만7천9백여명 여명이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명시하기로 일본과 합의했으나 어느 정도 지켜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일본이 이곳을 일본산업화의 유산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관광명소화하려는 계획에 따라 2009년
4월 22일부터 섬 남부에 정비된 견학통로에 한해 관광객의 상륙ㆍ견학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견학시설 이외의 섬 전체는 아직까지 출입금지구역이다. 출금 해제 한 달만에 4천5백명이 넘는
인원이 섬을 방문했으며, 1년만에 약 59,000명이 섬을 방문했다. 상륙시 바람이나 파도 등
기상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나가사키 시에서는 상륙 가능한 일수를 연간10일 정도로
예측하고 있다. 우리도 높은 파고에 배를 접안시킬 수가 없어서 섬의 모습을 멀리서 보는데
만족해야 했다.
나가사키원폭 낙하 중심지
나가사키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이 된 지역이다. 17세기 이후 포르투갈,
네델란드와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아리타도자기들이 나가사키항구를 통해 유럽으로
많이 팔려 나갔다. 1945년 8월 9일 서태평양 마리아나 제도 테니안 기지를 출발한
원자폭탄 탑재기 B29기는 제1 공격 목표인 북규슈의 공업지대 고쿠라시 상공에 도착
했다. 그러나 고쿠라시 상공은 그 전날 미군 공습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제2
목표지인 나가사키로 방향을 틀었다. B29기는 당초 미쯔비시조선소를 목표로 했으나
8월9일 11시2분 잠깐 구름 사이로 원폭은 나가사키 북부 마쓰야마마치약 500미터
상공에서 도심지로 떨어졌다.폭풍과 열선과 방사선으로 시가지는 폐허가 되었고
15만명의 사상자가 순식간에 발생했다.
원폭이 떨어진 나가사키형무소 우라카미 형무지소에 있던 134명은 전원 사망했다.
그리고 그후 그곳에 원폭 낙하중심지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추모탑을 세우고,
1955년 그 형무소 자리에 평화공원을 세웠다.
그리고 1955년 나가사키형무소 자리에 평화공원이 세워졌다.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평화기념상이 세워졌는데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팔은 원폭의 위협을, 왼팔은 평화를,
지그시 감은 눈은 희생된 영령들의 명복을 비는 것을 상징한다.
평화의 샘
나가사키 원폭때 어느 소녀의 일기에서...
"물,물을 주세요. 물을 주세요. 너무 목이 말라 기름이 둥둥떠있는 물을 마셨어요."
그 기름이 무엇인지 그땐 몰랐겠지" 그들은 그렇게 물을 달라고 신음하거나 울부짖으며 죽어갔다.
나가사키 피해자들의 영혼에 물을 드리고 명복을 빌기위해 365일 마르지 않는 분수를 세워
'펑화의 샘'이라 한다.
폭격 당시 흔적도 없이 무너지고 남은 무라카미 성당의 기둥만 공원으로 옮겨놨다. 당시
무라카미 성당은 30여년에 걸쳐 1925년 완성된 동양 최고의 빨간 벽돌 성당이었다.
평화를 염원하며 종이학을 탑 위에 세워 놓았다.
당시 희생된 1만여명의 조선인을 위한 위령탑
수령 3천년이 넘는다는 녹나무. 일본에는 전쟁이 없어서인지 수령 1천년이 넘는 나무들이 곧 잘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전쟁이 많았던 탓으로 수령 5백년이 넘는 나무도 흔치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