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오는 7월 1일 대통령과 의회, 사법부, 지방정부간의 권력 분점 등 권력구조 개편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옐친 전대통령의 의회 건물(국회 의사당) 포격을 촉발할 정도로 '보혁(보수와 개혁) 대결'이 최고조에 이른 1993년에 개정된 헌법을 2000년대 시대정신에 맞게 고쳐야 한다며 푸틴 대통령이 지난 1월 제안한 개헌안에 대한 마지막 절차다.
개헌 작업은 어느 나라나 쉽지 않는 일. 우리나라의 1987년 헌법이 개정을 향해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번 개헌은 기존 대통령의 임기를 백지화하는 부속 조항이 추가되면서 푸틴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위한 '셀프 개헌안'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친푸틴' 집권세력에겐 신종 코로나(COVID 19) 사태로 야당 세력이 '개헌 반대' 대규모 가두시위에 나서지 못한 것은 다행이나, 감염 위험으로 투표율이 기대에 못미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적지 않다. 러시아 각 지방 정부가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총력전을 펴는 이유다.
수도 모스크바에서는 100억 루블(1천700억원) 상당의 할인 쿠폰(상품권)을 투표 참가자에게 내놓은 '밀리언 프라이즈' (Миллион призов) 행사를 진행하고,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주에서는 아파트 10채를 참가자 경품으로 내걸었다고 한다.
이같은 후진적인 선거 캠페인 행태를 제외하면, 러시아의 이번 국민투표는 신종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사태와 제 4차 산업 시대에 '선거가 어떤 식으로 진화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측면도 없지 않다. 더불어민주당은 얼마 전 러시아 집권여당 통합러시아당과 '신종 코로나 시대의 총선' 경험을 공유했다고 보도자료를 냈지만, 오리혀 우리 정치권이 러시아의 이번 국민투표 진행 과정을 잘 지켜볼 필요가 있다.
국민투표는 25일부터 사전 투표에 들어가 7월 1일 본투표가 진행된다. 사전투표는 신종 코로나 방역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한 디지털(전자) 투표다. 전자투표는 모스크바와 니즈니노보고로드에서 시범 실시된다. 모스크바의 경우, 전자투표 희망자는 지난 21일 마감됐다.
전자투표는 러시아에서 이번 국민투표를 시작으로 오는 9월 13일 실시되는 지방선거를 거쳐, 내년 9월 총선에선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위해 러시아 의회는 지난 4월 선거법을 개정한 바 있다. 러시아 선거법은 그동안 부재자 투표의 일종인 우편투표는 허용했으나 전자투표는 허용하지 않았다.
선거법 개정에 맞춰 러시아 선거관위는 "블록체인 기술(분산 원장 기술)을 적용한 전자투표는 네트워크 참여자 다수의 승인을 얻어야 정보를 변경할 수 있기 때문에 해킹이나 정보 조작이 불가능하다"며 "투표의 보안과 투명성이 보장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관위는 "모든 투표는 암호화된 뒤 익명으로 처리된다"며 "투표에는 두 개의 암호화 키가 사용되는데, 하나는 유권자가 보유하고, 다른 하나는 다수의 네트워크 참여자들에게 나뉘어 보관된다"고 설명했다.
모스크바시는 홈페이지(mos.ru)를 통해 블록체인 기술을 '학생들의 학교 성적표'를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각기 성적표의 사본을 디지털로 하나씩 받는다면, 학생이 성적을 조작하려고 해도 교사와 학부모에게 다른 사본이 남아 있어 불가능하고, 곧 들통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부정행위 우려는 완전히 불식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기기 조작에 서투른 노년층을 대상으로 정보를 받고 저장할 '심카드'를 공급한 뒤, 그 사람 명의로 대신(부정) 투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된 것이다. 한 언론의 특종 보도에 보안당국이 나서 수사한 결과, 그같은 움직임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만약 이같은 부정 투표 기도가 현실화하고, 이름을 도용당한 (노년층) 유권자가 투표 당일 투표소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면, 부정투표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모스크바시는 그러나 지난해 이미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한 전자 투표를 2차례 시행한 바 있다며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시에 따르면 2019년 9월 8일에 치러진 모스크바 시의회 7차(보궐) 선거에서는 3개 선거구 주민 1만여명이 전자투표를 하겠다고 등록했고, 등록자의 92.3%가 전자투표에 참여했다. 또 지난 해 12월 지하철 역의 위치를 결정하기 위한 주민투표에서도 해당 주민 5천명이 등록했고, 96.3%가 투표했다고 한다. 참여율이 상당히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역으로 모스크바의 전자투표 시행 역시, 국민투표의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라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모스크바시가 시행하기로 한 상품권 제공행사 '밀리언 프라이즈'가 전자투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최대 4천 루블(6만8천원)짜리 쿠폰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 젊은 층들이 대거 전자투표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푸틴 대통령이 투표율에 신경을 쓰는 것은 국민의 지지를 받은 개헌안이라는 명분을 얻기 위해서다. 더욱이 새 헌법 규정에 따라 차기 대선에 출마하고, 정통성을 유지하려면 높은 투표율과 찬성률이 필요하다.
옐친 전 대통령이 주도한 1993년 12월 헌법 개정안은 투표율 54.8%에 찬성 54.5%였다.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60%를 넘기는 게 목표가 아닐까 싶다.
이를 위해 푸틴 대통령은 계획된 시나리오에 맞춰 대 국민 홍보에 나서는 느낌이다. 당장 투표 시작 전날인 24일 제 2차대전 승전 기념 군사퍼레이드가 열린다. 승전기념식으로 고조된 애국심을 투표 열기로 연결할 심산이다.
푸틴 대통령은 14일, 21일과 23일 잇따라 국영TV에 얼굴을 내비치면서 개헌의 당위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14일 회견에서 "신종 코로나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이 미국보다 우월했다"며 그 이유를 '정치 시스템'에서 찾았다. 정파적 이익을 따지는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한 팀처럼 움직였다는 것이다.
또 21일 회견에서는 개헌안 통과를 전제로 2024년 대선 재출마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만약 헌법 개정이 없으면 2년쯤 뒤에는 여러 권력기관이 일을 하기 보다는 (나의) 후계자를 찾으려고 나설 텐데, (이렇게 어려울 때 국민을 위해) 일을 해야지, 후계자를 찾아선 안 된다"고 개헌의 명분을 강조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23일 대국민 연설에서 신종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에 대한 정부 지원책을 발표하고,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소득세 차등 부과(부자세 도입)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헌안의 명분을 아무리 포장한다고 해도, 푸틴 대통령은 집권 연장을 위해 개헌을 추진한다는 비판에서 자유스로울 수 없다. 이번 개헌으로 푸틴 대통령은 최장 12년(6년 임기 2번)을 더 집권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대통령직에 머무를 수 있다. 오는 2024년 4번째 임기를 마치는 푸틴 대통령이 대선에 다시 출마할 수 있도록 기존 임기를 백지화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