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아] 232
■1부 황하의 영웅(232)
제 4권 영웅의 길
제 29장 이오(夷吾), 군위에 오르다 (9)
신생(申生)의 묘를 개장한 지 며칠 후,
이번에는 호돌(狐突)이 진혜공(晉惠公)의 명을 받아 곡옥(曲沃)으로 내려가 신생(申生)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진혜공(晉惠公)이 특별히 호돌(狐突)을 지명하여 제사를 올리게 한 것은 그가 신생의 어릴 적 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
호돌(狐突)이 곡옥 서쪽 고원으로 나가 신생을 위한 제사를 마치고 성내로 돌아갈 때의 일이었다.
별안간 시커먼 구름이 몰려들며 당장에 비라도 쏟아부을 듯 하늘이 어두워졌다.
사방을 둘러보니 모래바람이 화염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서둘러라!"
호돌(狐突)이 마부에게 재촉했을 때 저편 산모퉁이에서 홀연 일지군마가 나타났다.
호돌은 어떤 군대인지 몰라 황급히 길을 피하려 했다.
그때 군대의 행렬 속에서 병차 한 대가 달려나와 호돌 앞에 멈춰섰다.
수레 위에 탄 사람은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정결한 옷을 차려입고 단정히 홀(笏)을 들고 있었다.
백발 노인은
조용히 수레에서 내려 호돌에게 읍하며 말했다.
"세자께서 잠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여 모시러 왔습니다. 청컨대 국구(國舅)께서는 저와 함께 가주셨으면 합니다."
호돌(狐突)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이게 누구인가. 그는 다름 아닌 신생의 태부 두원관(杜原款) 이었다.
호돌은 정신이 황망해졌다. 그는 두원관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세자는 어디 계시오?"
두원관(杜原款)이 뒤편의 휘장 수레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수레에 계십니다."
호돌(狐突)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정신 없이 두원관을 따라 휘장 수레 앞으로 갔다.
과연 수레 위에는 황금
색 관(冠)을 쓰고 허리춤에 칼을 찬 세자 신생(申生)이 버젓이 앉아 호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래간만이구려. 그간 잘 계시었소?"
"세자............"
노련하고 경험 많은 원로대신 호돌(狐突)도 이 지경이 되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을 쩍 벌린 채 바라보고만 있는 중에 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국구(國舅)께서는 어서 수레에 오르지 않고 뭘 그리 쳐다보기만 하시오?"
호돌(狐突)은 그제서야 정신을 수습하고 얼른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대관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세자 신생이 하늘나라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것일까.
호돌(狐突)이 종자들의 부축을 받아 수레에 올랐다. 신생(申生)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 앉아 빙그레 웃음지으며 호돌을 맞이했다.
"설마 국구(國舅)께서는 그 동안 나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그런데 세자께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어인 일로 지상으로 내려오셨습니까?"
수레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신생(申生)이 손수 고삐를 잡고 있었다.
"천상의 옥제께서 나의 인(仁)함과 효(孝)함을 어여삐 여기시어 내게 교산(喬山)의 주인이 되라는 명을 내리셨소.
아울러 이오의 흉악하고 무례한 행동을 벌주라는 명을 내리셨소.
이오(夷吾)는 나의 아내인 가희(賈姬)를 욕보였으며, 나의 묘를 마음대로 개장하였소.
나는 그의 소행이 괘씸하여 이번 이장(移葬)을 거절하려 했으나, 백성들을 위하여 참았을 뿐이외다."
"................"
"내가 보건대, 진(秦)나라 군주인 진목공(秦穆公)은 매우 어진 사람이오. 따라서 나는 이제 진(晉)을 떠나 진(秦)으로 가서 그 곳 백성들의 제사를 받을까 하오.
이 뜻을 국구와 의논하기 위해 이렇듯 내려온 것이오."
신생(申生)의 음성은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신생이 진(秦)으로 가겠다는 것은 곧 진(秦)으로 하여금 진(晉)을 멸망 시키겠다는 뜻이었다.
호돌은 황망한 가운데서도 정신을 바로하고 두 손을 모아 간곡히 말했다.
"세자께서 아무리 이오(夷吾)를 미워하신다고 하더라도 진(晉)의 백성들에게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신(神)은 올바르지 못한 자의 음식을 먹지 않고, 민(民)은 다른 종족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법입니다.
세자께서 진(秦)으로 가신다고 했지만, 진(秦)이 어찌 희성(姬姓)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진(晉)을 멸망시키면 결코 세자를 위해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것입니다."
호돌(狐突)의 말을 들은 신생(申生)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후 대답했다.
"그런가? 민(民)이란 그런 것인가?"
"진(晉)에 계속 머물러 계십시오."
"국구의 마음을 잘 알겠소. 그렇다면 내가 다시 천제께 청하여 보겠소.
국구께서는 이대로 강성으로 올라가지 말고 곡옥에 7일간 머물러 계십시오.
곡옥성 서편에 무당 하나가 살고 있는데, 7일 후에 그 무당의 입을 통해 나의 뜻을 알려주겠소."
신생과 호돌이 여기까지 얘기를 주고받았을 때 수레 아래서 기다리고 있던 두원관(杜原款)이 말했다.
"이제 두 분은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호돌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호돌은 수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땅바닥에 자빠지는 순간 세자도, 수레도, 두원관도 간곳없이 사라졌다.
호돌(狐突)은 정신을 잃고 그대로 혼미한 상태로 빠져 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곡옥성 외관(外館)에 누워 있었다.
호돌은 크게 놀라 좌우 시종에게 물었다.
"내가 어째서 이 곳에 누워 있느냐?"
"국구(國舅)께서 수레가 돌멩이에 걸려 덜컹거리는 바람에 수레 위에서 굴러 떨어져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주무르고 불러도 깨어나시지 않기에 급한 김에 그대로 수레에 싣고 이 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천만다행으로 다친 곳이 없으시니 저희들은 마음을 놓겠습니다."
호돌(狐突)은 속으로 짐작했다.
'내가 꿈을 꾸었구나. 참으로 이상하다.'
그러나 호돌은 아무에게도 꿈 이야기를 하지 않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곡옥에 그대로 머물렀다.
7일이 지났다. 호돌(狐突)은 곡옥성 서편에 있는 마을로 나갔다.
과연 그 마을에는 하얀 옷을 차려입은 무당 하나가 살고 있었다. 그 무당은 호돌이 묻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저는 귀신과 말이 통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교산의 산신(山神)은 지난날 진(晉)의 세자 신생(申生) 입니다.
세자께서는 국구께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세자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던가?"
"세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상의 옥제께 다시 아뢴 결과 그자의 몸을 욕되게 할 것이며, 그 자손을 참함으로써 그자에 대한 벌을 내릴 것이다.
국구(國舅)의 청원대로 진(晉)에는 아무런 해도 없을 것이니 안심하라.'
그러고는 오늘 국구께서 이 마을에 오실 터이니, 그대로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호돌(狐突)은 모른 체하고 물었다.
"그자란 누구를 말함이냐?"
"세자께서는 이 말만 전하라 하셨습니다. 저는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늘의 일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라."
호돌(狐突)은 무당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나서 강성(絳城)으로 귀국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부터 진(晉)나라 에서는 이상한 노래가 유행했다.
역사서 <국어(國語)>는 그 노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올바르게 예를 갖추어 개장한다 해도 좋은 보답은 없을 것이네.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냄새나게 하였던가.
올바르게 하고자 해도 들어주지 않았고
신실하고자 해도 정성을 보아주지 않았네.
나라에 법도가 서지 않으니
자리를 훔친 자가 요행히도 살아남았구나.
바르게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의 운명은 기울어지리.
지금을 두려워하며 신생을 그리네.
각자 뜻을 모아
귀의할 새 군주를 바라고 있네.
아아, 지금의 군주는 물러나야 한다네.
나라를 생각하니 마음이 슬프다.
14년의 세월이 흐른 뒤
후사(後嗣)가 끊어지리.
적(翟)에 있는 공자 돌아오는 날
우리는 그에게 의지하리.'
백성들 사이에 이런 노래가 유행하자 호돌은 태사 곽언(郭偃)을 찾아가 물었다.
"14년의 세월은 무엇이고, 적(翟)의 공자란 누구를 말함이오?"
곽언은 점을 칠 필요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진(晉)나라는 14년 후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입니다. 지금의 주공이 패망한다는 뜻이지요.
아마도 진(秦)에 의해 곤욕을 치를 것입니다. 그 장소는 한(韓).
그 뒤 적(翟)땅에 머물고 있는 중이(重耳) 공자가 돌아올 것입니다. "
호돌은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진(晉)과 진(秦)이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진(晉)은 진(秦)에 의해 패할 것입니다."
"그 장소가 한(韓)이라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한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함이오?"
"한의 들판, 곧 한원(韓原)에서 진(晉)은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호돌(狐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그는 곽언(郭偃)의 예언을 군주인 진혜공(晉惠公)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한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진혜공(晉惠公)은 그 무렵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