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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묵상글 들 ( 부활 7주 목요일-사랑의 바람과 욕심의 바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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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7주 목요일-사랑의 바람과 욕심의 바람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아버지께 제자들을 위해서 비십니다.
곧 당신을 위해서 비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서 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빈다는 것은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 저는 우리도 빌고 주님도 비는데 그 비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우리가 바라는 것과 주님께서 바라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묵상케 됐습니다.
제 생각에 바라는 것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사랑의 바람과 욕심의 바람.
사랑의 바람은 오늘 주님처럼 충만함의 바람입니다.
당신이 누리는 사랑의 충만함을 당신의 제자들과
제자들의 말을 듣는 모든 이가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당신 안에 있는 모든 이가 잘 되기를 바라고,
심지어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일지라도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충만한 사랑은 첫째로 넘쳐서 자기만 아니라
남도 행복하기를 바라고 잘 되기를 바랍니다.
충만한 사랑은 둘째로 내공이 있어서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사랑이 충만하지 못하여
욕심이 가득한 사람은 결핍과 허기로 늘 불만입니다.
사실 욕심이란 것이 결핍과 허기를 채우려는 거지요.
배가 고프고 허기를 느낄 때 식욕이 생기고
허기를 채우고 만복이 되면 거짓말같이 식욕은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엄마처럼 사랑이 있어야 자기 배가 고파도
아이들 입에 음식 들어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허기진 사람은 자기 입에 음식을 허겁지겁 채우느라
다른 사람 입에 음식을 넣어 줄 여유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남이 나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기를 바라지요.
그리고 바라는 대로 채워주지 않으면 불만이고요.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음식 허기보다 더한 허기가
바로 사람 허기이고 사랑 허기입니다.
사람이 나의 마음에 들어 만족을 주기기를 바라고,
나의 사랑 욕심을 채워줄 사랑이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보통 자식한테는 사람 허기를 느껴 자식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고,
부모한테는 사랑 허기를 느껴 결핍된 애정을 채워주기를 바라며,
남편이나 아내한테는 사람 허기와 사랑 허기를 둘 다 느껴
상대가 내 마음에 들기도 바라고 사랑도 채워주기를 바라기에
제일 만족하기도 힘들며 당연히 불만도 제일 많지요.
아무튼, 이런 것이 욕심의 바람인데 이것을 다 채워줄 인간은 없고,
하느님만이 사람 허기와 사랑 허기를 둘 다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이것을 우리 인간이 믿고
다른 데서 허기를 채우려고 하지 말고 당신에게서 채우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당신 안에 있기를,
당신 안에 있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로 있기를,
당신 안에 공동체로 있기에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제자들을 두고 아버지께 가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언젠가 자식을 두고 하느님께 갈 때
우리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도 이것이고,
자식을 위해 하느님께 비는 것도 이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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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최후만찬 후에 아버지께 드린 “대사제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으로, 믿는 이들과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이는 당시의 믿는 이들이 “하나” 되어 있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음을 반증해줍니다. 그렇다면, “하나”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어울려 친하게 지내라는 것을 말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성격 좋고 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를 이루기에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하나”란 “우리” 곧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아들 됨’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가 부자관계로 “하나”를 이루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베드 1,4)하게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그것은 곧 ‘사랑 안’에서의 이루는 ‘믿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하나 됨”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곧 먼저 내적 결과로서 믿는 이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 세상에 하느님을 알리는 외적 결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를 이룬 이에게서는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그분 안에서 함께 세워져서 영 안에서 하느님의 거처가 됩니다.”(에페 2,22).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곧 우리도 당신 ‘안에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광을 받게 됩니다.’(요한 17,22 참조). 그리하여 세상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고(요한 17,21),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3). 이처럼,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 ‘대사제 기도’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바람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사실 당신께서는 <마태오복음>에서, “나와 함께 있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태 12,3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누구나 당신이 계신 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당신 ‘사랑 안’에, 당신의 진리 안에 ‘함께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곧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행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면, 당신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되고 ‘우리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을 보게 될 것’(요한 17,24 참조)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형제들과 ‘하나’를 이룰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그분이 ‘있는 곳’에 있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일치하여 있으면, 우리도 주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주님!
당신과 함께 하나가 되게 하소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을 받아들여 하나 되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을 실현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건네주게 하소서.
똑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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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이 사망했습니다. 1년이 지났고, 피의자인 경찰에 대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무죄를 주장했지만 배심원은 모두 유죄를 판단하였습니다. 유죄 판단의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과 현장을 담아낸 영상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판 결과를 지켜본 바이든 대통령도 인종차별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법정에 출석해서 증언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증언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불법과 불의를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1972년에 사이공의 작은 마을이 폭격 당했습니다. 미군은 살상력이 큰 화염 무기 ‘네이팜탄’을 투하했습니다. 당시 9살이던 소녀는 발가벗은 채 절규하며 도로를 뛰었습니다. 이 모습이 AP통신 사진기자 닉 우트의 카메라 앵글에 잡혔습니다. 이 사진 한 장은 베트남 전쟁을 멈추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이 무고한 시민들, 어린이들까지 죽음으로 내몬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그런 전쟁은 멈추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녀의 이름은 판티 킴폭이었습니다. 소녀는 신체 30%에 3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닉 우트는 소녀를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14개월 동안 17번의 피부 이식 수술 끝에 소녀는 살아남았습니다. 판티 킴푹은 이 사진이 싫었다고 했습니다. 사진을 볼 때마다 당시의 끔찍했던 고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과거라면, 이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엔 평화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자신의 경험담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있고, 1997년부터는 평화 자선단체를 만들어 전쟁고아를 위한 병원과 학교, 집을 지어주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분노 대신, 용서와 평화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녀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2월 독일 드레스덴에서 인권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미국의 한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인생을 사는 동안 갑자기 화염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저 또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드러낸 증거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순교한 사람을 증거자(martyr)로 부르고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은 '증인'을 뜻하는 그리스어(martus)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증인'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만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복음의 내용을 보증한다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며(사도 10:41) 스테파노(사도 22:20)와 바울로(사도 22:15)에게 적용되었고 묵시록에서는 예수님께서 증인이라 불립니다(묵시 1:5, 3:14). 그밖에 묵시록(6:9, 12:17, 19:10)에는 예언자의 신분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내는데 위험한 시대에 증언을 한 증인들이(묵시 2:13, 11:3, 17:6)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용감하게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구원의 열쇠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누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빵이 되셔서 우리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를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눔은 우리가 하나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신앙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면 그런 모든 것들도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이 증거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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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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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별사의 결론으로서 제자들 앞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신 장엄한 기도를 들었습니다.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이들을 통해 당신을 믿게 될 이들, 그러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지향으로 당신 자신을 봉헌하여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새로운 인류를 위한 대사제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만 알고 계시던 신비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공동체성입니다. 공동체이신 하느님과 새로운 인류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2-23).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우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새 하느님 백성도 하느님께서
우리로서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게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이며, 하나가 되는 것은 일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공동체를 이루고 계시듯이, 이것이 기준이 되어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가 되어서 일치하게 하는 것이 최고의,
그리고 최종적인 지향임을 드러내셨습니다.
평소에는 좀처럼 드러내시지 않던 매우 중요한 진리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우리’ 공동체성과 사람들도
일치시키고자 하는 보편적 지향성은 곧 강림하실 성령과 합하여
삼위일체의 공동체이심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이심은 창조의 때부터 존재하는 것이고
창조의 기록인 창세기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일컬어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이미 한처음부터 성자께서도 성부와 함께 계셨고,
성령께서도 창조의 영으로서 세상을 휘감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도 하느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서적입니다.
하느님은 단일신도, 유일신도 아니시고 삼위일체이신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참모습을 알게 되는 일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일이요 인생 설계에 근본적인 설계를 가능하게 해 주는 동시에
세상 일의 우선 순위까지 정해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세례를 받아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로 믿으며 같은 믿는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하느님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새로운 삶입니다.
이 새 삶이야말로 우리에게도, 하느님께도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일로서,
이는 부활의 신비와 통합니다. 새롭게 사는 삶이 부활입니다.
부활하는 삶이 하느님과도 우리가 되고, 믿는 이들과도 우리가 되며,
앞으로 믿게 될 이들과도 우리가 되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을 더욱 잘 알게 되고, 세상 사람들도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부활 신앙을 드러냄으로써 예루살렘에서 받게 된 박해를
오히려 발판으로 삼아서 로마에 진출하여 하느님을 증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러할 것입니다.
새롭게 맺는 인간관계로 부활 신앙을 드러내서 하느님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이렇듯 구체적이고 관계적인 양식으로
부활 신앙을 드러내면, 우리가 이루는 새로운 인간관계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증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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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7,20-26: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21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우리도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를 기도하신다. 일치와 평화를 해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며, 같은 뜻으로 조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 하나가 된 모습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인 관계에 참여하는 것이며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나게 한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22절) 주님께서 영광을 청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받고’ ‘주고’ ‘높이 들어 올려지고’라는 모두 우리와 관련된 말이다. 아들의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려는 뜻이었다.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이 세상에 사랑을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 다양한 모습의 당신의 사람들이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상반되는 성향과 욕망과 죄로 인해 그들 스스로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신 안에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사랑의 불길에 의해 한마음이 된다. 하나가 된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주님과 함께 살고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으려면 우선 당신을 통해 아버지와 일치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아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 그 영광은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아들이 누리시던 영광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광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아들과 같이 되어 그분을 닮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25절) 아들이 아버지를 아셨듯이,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을 받아들였고, 그분의 말씀을 따랐고 그분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아들을 알고 또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26절)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아드님을 모시며, 아드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한 몸을 이룬 우리 지체들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머리와 지체가 모두 포함된 한 몸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26절) 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항상 우리는 그분 안에 하나가 되고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될 때 우리는 모두 한 몸 그리스도가 되어 하느님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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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미사의 화답송에서 시편 저자는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라며 애절하게 기도합니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께 바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갖은 핑계와 불만으로 투덜대며 주님을 외면하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흔들릴 때도 있지만 하느님의 인도 없이 우리의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려움에 닥칠 때 피신할 곳은 결국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대단한 가문의 자손이며, 뛰어난 학식과 능력을 가진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힘들고 어려운 삶, 때로는 매 맞고 비난받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히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갑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삽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의롭고 거대하다고 느끼지만 예수님 앞에 서면 한없이 이기적이고 세상적이며 불행한 삶임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과 하나 되지 않으면 우리는 착각과 자기 합리화에 빠져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당신 안에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일치의 삶은 우리를 변화하게 하고, 기쁨으로 가득 찬 삶으로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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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들만이 아니라>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0-21).”
1)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이 말씀을 좁은 뜻으로 생각하면, ‘이들’은 사도들이고,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은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신앙을 갖게 된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이들’은 이미 신앙인이 되어 있는 사람들로,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은 신앙인들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새로 신앙인이 될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8,19-20).
‘모든 민족들’, 즉 ‘모든 사람’이 복음 선포의 대상이고,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미 신앙인이 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실상 모두 다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2)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말씀에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와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로 합해서 생각할 수도 있는 기도입니다.
두 기도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 ‘안에서’(함께) 살기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일,
즉 사람들이 갖춰야 할 자격 조건이 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됨으로써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두 기도를 하나로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기도는,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함께 살게 해 달라는 기도로 해석됩니다.
(“그들이 모두 우리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와 함께 살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와 예수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 아버지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그곳에서는
당연히 사람들끼리도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3)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일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치, 사람과 자연 사이의 일치를 모두 깨뜨린 일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난 일은(창세 3,23)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일치가 깨진 것을 상징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와에게 하신 다음 말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치가 깨진 것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다음 말씀은
사람과 자연 사이의 일치가 깨진 것을 나타냅니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창세 3,17).”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는
깨져버린 그 일치들이 모두 회복되어 있는 나라입니다(묵시 22,1-5).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하려고,
즉 죄로 인해 깨져버린 일치를 모두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4)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이 말씀은, 모든 일치의 회복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모든 일치가 회복되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먼저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분이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고,
죄로 인해 깨져버린 모든 일치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 때에 하느님과의 일치가 회복됩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의 일치가 회복됩니다.
<‘믿음’은 ‘사랑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랑 실천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야고 2,17).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랑 실천’을 해야만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는 일치도 없습니다.
어떤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서 사람들이 모이고,
모인 사람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는 일이 많지만,
사랑이 없으면 그 안에서 생기는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금방 다시 흩어져 버립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여기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만”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라는 뜻입니다.
뜻에 따라서 예수님 말씀을 풀이하면,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그래서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집에서 저와 함께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한다는
뜻이고,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고, 동시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
즉 우리 자신에게도 큰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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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빠, 아버지!”
-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 -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인간 물음에 대한 답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입니다. 아빠, 아버지이신 하느님과의 대화와 소통인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바로 사람의 정의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이며 기도는 우리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호흡呼吸같고 식食이자 약藥같은 기도입니다. 기도 없는 영혼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은 영혼입니다. 어제 수요일 교황님의 일반 알현 시간에 있었던 ‘기도에 있어 어려움을 극복하기’란 요지의 가르침을 나눕니다.
첫째, 분심(distractions)이다. 분심은 기도나 모든 일에 있어서 공통적 체험이다.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복음의 항구함의 가치를 껴안아야 한다. 언제 오실지 모를 예수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 하고 가까이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집중해야 한다.
둘째, 건조함(aridity)이다. 기도해도 좋은 것도 없고 기쁨도 열심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도중에 건조함은 분심과 다르며 언제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런 영적 건조함을 허락하신다. 이런 때 우리는 “순수한 믿음(pure faith)”에 의존해야 한다.
셋째, 무기력함(acedia)이다. 아케디아라 부르는 무기력함은 기도에 대한 진정한 유혹이며 믿는 이들 모두에게 일반적인 것이다. “느슨해진 수행생활, 깨어있음의 이완, 마음의 어수선함”이란 침체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일곱가지 치명적 죄중 하나로 자만심의 결과이며, 영혼의 죽음에로 인도할 수 있다.
넷째, 기도에 항구함(perseverance in prayer)이다. 기도중 열심과 좌절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항구해야 하고 언제나 걸어야 한다(always keep walking). 모든 성인들이 이런 어둠의 골짜기를 통과했다. 맛없는 삶, 무관심한 기도에 대한 그들의 투쟁에 관해 들을 때 좌절해서는 안된다. 바로 이런 때 우리는 기도중에 항구히 머물러야 함을 배워야 한다. 신자들은 결코 기도를 멈춰선 안된다!
비록 욥처럼 하느님께 불평하고 반항할지라도 우리는 이런 황량한 시간이 끝나갈 무렵 하느님은 대답을 주실 것을 안다. 하느님은 우리의 거칠고 쓰라린 체험들도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간주하여 한데 모으실 것이며 이들을 믿음의 행위, 기도로 여기실 것이다.
얼마나 위로와 격려, 평화를 주는 기도에 관한 교황님의 자상하고 다정한 가르침인지요! 그러니 심기일전 다시 일어나 초보자의 자세로, 초발심의 자세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고별기도의 마지막에 속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이어 오늘은 우리 믿는 이들 모두를 위한 기도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는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원래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호칭은 아람어 ‘아빠’입니다. 본디 어린이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데 이는 매우 정다운 호칭입니다. 유다인들은 예나 이제나 절대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그렇게 불렀고 그 영향으로 제자들이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아빠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께는 엄마 호칭만큼이나 친밀하고 정다운 호칭이 아빠였던 것입니다. 어제 읽은 글귀가 생각납니다.
“엄마,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단어가 또 있던가. 이렇게 오래도록 울림을 간직하고 언어가 있었던가. 대부분 사람들에게 ‘엄마’는 가장 친밀한 호칭이고, 가장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르게 되는 단어일 것이다.”
바로 이런 엄마 호칭 대신 아빠란 정다운 호칭을 하느님께 사용한 예수님은 얼마나 하느님과 친밀한 결속 관계에 있는지 짐작이 갑니다. 어느 동방 수도자는 주님의 기도중 아버지란 호칭만 나와도 목이 메어 더 이상 기도를 못했다는 데 저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마침 어제 제 형님들을 사랑했던 80대 초반의 순수한 감성을 지닌 사촌 형의 메시지를 받고 감동하여 울컥했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이제 순서대로 하느님께로 갔으면 하는데 가는거야 하느님이 부르시는대로 가겠지만 흑석동 국립묘지에 가면 20살에 전장에서 죽은 넷째댁 용철 형님이 생각나고 내가 좋아하는 일곱째댁 이철二澈 형님은 왜(?) 그리 일찍 가셨는지 갈 때 마다 운답니다. 일철一澈 형님은 6년을 같이 살았으니 친형님과 같고 너무 고생만 하다 갔기에 또 눈물이 납니다.”
저역시, 어머니에 이어 한없이 선량善良했던 형님들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고백한 예수님이십니다. 정많은 젊은 사제가 십자가 아래서 찍은 하느님의 재롱둥이 같은 자기 사진과 함께 제의를 입은 제 사진에 주님의 기도를 편집한 사진을 보내줬습니다. 유난히 “아빠” 칭호를 좋아하는 사제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 아빠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빠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아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고별기도 중 아버지를 아빠로 바꿔부르면 훨씬 다른 친밀감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예수님의 간절한 소망은 우리 모두가 아빠이신 하느님과 당신 안에서 모두 하나되기를 바라는 것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를 아빠로 바뀌 읽어 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빠, 아빠께서 제안에 계시고 제가 아빠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아빠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빠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빠, 아빠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빠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우리 위한 간절한 사랑이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예수님의 소원이 그대로 응답되어 주님 사랑 안에 하나되어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의 일치 공동체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일치의 사랑공동체를 만들어 주는 미사보다 더 좋은 하느님의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 어느 종교에 2000년 이상 면면히 거행되어온 이처럼 좋은 미사전례가 있겠는지요!
어제로서 사도행전의 바오로의 감동적인 고별사는 끝났고 계속되는 예루살렘에서의 시련입니다. 그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수난시 겪었던 일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바오로가 이런 시련과 고난의 와중에도 당당할 수 있었음은 순전히 항구한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에서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고백이지만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는 사두가이들과 이를 인정하는 바리사이들과의 격렬한 논쟁 싸움을 야기시켰고 그 덕분에 바오로는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납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늘 기도중에 늘 주님과 함께 살았던 ‘기도의 달인達人’,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주님과 일치의 관계는 헤아릴 수 없이 깊었을 것입니다. 즉시 연상되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ㄷ) 구절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友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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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미국 프로야구 선수인 유격수 라파엘 퍼칼이 FA 시장에 나오자 많은 구단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라파엘 퍼칼은 어떤 구단과 계약을 했을까요?
돈을 많이 제시한 구단이 아니었습니다. 집이나 자동차 등의 편의 시설을 제공하는 구단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조건을 제시했던 LA다저스 구단이 선택되었습니다.
퍼칼의 고향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소방차 한 대를 보내주겠다고 구단주가 제안한 것입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가난한 마을이었던 퍼칼의 고향에서는 소방차가 없어서 불이 났을 때 마을 전체에 큰 피해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늘 퍼칼의 짐이었는데 이를 구단주가 해결할 수 있는 제안을 한 것이지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줄 때 상대는 비로소 변화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알아주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시고 안아주십니다. 비록 돈도 안 주시고 높은 지위를 허락해 주시지도 않지만, 사랑을 통해 당신과 하나를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으며, 큰 기쁨과 행복을 갖게 됩니다.
문제는 이 주님의 사랑을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돈이 좋고 물질이 좋다면서 세상의 기준에서 높고 큰 것만을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믿는 이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치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충실히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알려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믿는 이들이 하나를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알아야 한다고만 외칠 것이 아니라(물론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워 두고 계실 정도로 모든 것을 당연히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주님의 뜻인 사랑을 세상에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나’를 벗어나, ‘우리’에 집중할 때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보면 ‘나’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신 ‘우리’만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서 일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만의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 이루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가장 큰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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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환경이 어둡고 괴롭더라도 항상 마음의 눈을 넓게 뜨고 있어라(명심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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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어느 꼬마 아이가 장난감 블록을 정성껏 쌓고 있었습니다. 온 정신을 블록 쌓기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실수로 이 블록을 쓰러뜨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긴장의 순간입니다. 아이의 반응은 과연 어떠할까요?
정성을 쏟아 쌓고 있는 블록을 쓰러뜨렸다고 펑펑 울고불고 난리가 날 것 같지만, 뜻밖에도 아이는 오히려 좋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블록을 쌓는 목적이 블록을 쓰러뜨리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블록 쓰러뜨리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으니, 누가 쓰러뜨려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놀이에 함께 하는 줄 알고 더 좋아했던 것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아이의 반응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모든 사람이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재정적 손실을 보면 큰 상처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목적에 ‘돈’이 들어있지 않다면, 재정적 손실은 중요한 걸림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세상 삶 안에서만 필요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 필요한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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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기도를 받고 또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기도하는 것은 방법이 다를 뿐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 상관없이 삶 안에 젖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생각해 보면 ‘무엇을 해 달라’는 기도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느님의 은혜로움에, 그분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막상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바람만을 쏟아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기도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침묵 없이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버지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는 것도 자녀의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증언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6). 하고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고 예수님께서도 그들 안에 머물러 사시게 됩니다. 결국 제자들을 통하여 믿게 된 이들,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믿는 이들은 사랑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 세상에 하느님을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17,24). 하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당신이 누리는 영광을 믿는 이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의 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믿는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정성어린 기도를 봉헌하되 이기적인 기도를 벗어나 사랑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기도는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요한 비안네는 말합니다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실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께 마음을 열며 거룩하신 하느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한없이 기뻐하는 것, 이것이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여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오리게네스). 이고,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더 많이 사랑하여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그 사랑의 일치를 이웃과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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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바로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계획이 드러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요한 17,20)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이어, 제자들을 통해 주님의 길을 걷게 될 모든 이들, 곧 우리들과 미래 신앙의 후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온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품고 계십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요한 17,23)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홀로 오시지 않고 성부, 성령과 함께 오시어 거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받아들인 이들은 모두 성삼위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니, 저마다의 시대롸 민족, 문화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인 이들은 가히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모신 하느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모든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는 사랑과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랑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그 사랑으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이 하나의 사랑이 퍼져나간 자리에 믿음이 자라나고 우리는 시대와 민족을 넘나들며 하나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특정 지역, 특정 민족에게만 향하는 편협하고 폐쇄적인 '선호'가 아니라 '보편적 사랑'이 탄생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시작된 그 사랑은 그래서 하나이고 완전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사명이 드러납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사도 23,6)
수석 사제들, 최고 의회 의원들을 향한 사도의 외침은 거센 논쟁을 촉발시킵니다. 그는 유다인 종교 기득권자들이 적대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하기보다 그분을 통해 인류에게 주어진 보편적 희망과 사랑을 선포하지요.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 23,11)
최고 의회와의 호된 만남이 있던 그날 밤 주님께서 친히 바오로 앞에 나타나셔서 이르십니다. 주님은 지금 바오로에게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잘 아십니다.
사도 바오로의 증언은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의 담장을 넘어 온 인류가 알아들을 보편적인 사랑의 언어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바오로는 총독에게 호송되고 판결이 미뤄지다가 결국 황제에게 항소하는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가게 되지요.
이 일련의 과정은 사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될 제자의 제자의 제자... 그렇게 우리에게까지 이어질 신앙의 계보로 엮일 겁니다. 온 인류는 한 민족, 한 문화에 갇힌 신앙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을 향하는 보편적 사랑으로 초대되어 한 하느님의 자녀, 곧 형제자매로 서로 연결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은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듯 우리도 하나되길 바라시지요.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지요. 한 분이신 주님을 모신 우리는 아무리 삶의 조건이 달라도 하나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안에 하나가 된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사랑으로 구원되었습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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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17,21)
'하나됨!'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말을 듣고 당신을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17,21)
'하나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쉽게 체험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장엄한 고별기도'에 이어서, '예수님의 수난 사화', 곧 예수님의 잡히심과 사형선고 받으심과 십자가의 못 박히심과 죽으심을 전합니다.
저는 어제 아침(08시)에 강진호(요셉/64세) 형제님을 위한 장례미사를 집전하고, 이어서 화장장으로 이동해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린 요셉 형제님을 제가 자주 가는 적석산 산기슭(요셉 형제님의 선영)에 묻어드리고 왔습니다.
믿는 가족들이 많지 않았고, 저를 통해 하느님의 세례를 받으시고, 짧게 믿고 신앙생활을 하셔서 요셉 형제님의 마지막 시간에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나의 강한 의지를 내려놓는 것,
나의 욕심과 탐욕을 내려놓고,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으로부터 '하나됨'은 시작되고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지만, 그것이 당신을 이 세상으로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23,11)
로마에서의 증언은 바로 사도 바오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바람인 '하나됨과 복음화'를 위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도 바오로처럼 죽으십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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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일치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일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하고 계시는 분인지? 오늘 예수님 작별기도, 혹은 대사제의 기도를 통해 명확하게 알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냥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고, 두손을 우리 머리 위해 펼치고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기도의 주된 내용은 우리 각자의 행복과 구원입니다. 성삼위께서 온전히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 모두도 아버지 안에 하나되기를 간청하고 계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복음 17장 19~21절)
언제나 분열과 반목, 분쟁과 혼란이 끊이지 않는 지구촌입니다. 극단적 자국 이기주의가 판을 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사상과 이념의 극한 대립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한 지붕 아래 살아가는 가족들조차도 일치와는 요원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기도 주제는 자연스레 일치인 것입니다.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일치와 통합의 모델이 성삼위를 바라봐야겠습니다. 하나되기가 힘겨울 때 마다 성삼위께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게도 당신의 직제자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의 제자들, 제자들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새로운 그리스도인들, 결국 오늘 우리들까지 포함해서 기도하십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직제자들뿐만이 아니라 직제자의 제자들, 그 제자들의 또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존속하는 한 계속 생겨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결코 끊이지 않고 세세대대로 탄생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웃 전교는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 모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예수님께로 인도한다는 것,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께서 예수님의 입을 통해 그토록 자주 일치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도 일치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본토 유다인들과 그리스계 유다인들 사이의 갈등의 골은 엄청 깊었습니다. 보수적인 유다인들과 진보적인 유다인들 사이의 대립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 갈등이 몇몇 바오로 서간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1 코린토 1장 11~12절)
초기 교회 공동체의 분열에 사도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보는 일도 중요합니다. 기회 닿을 때 마다 주님 안의 일치, 성령 안의 일치를 강조했습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소서 3장 3~5절)
“일치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일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안티오키오의 성 이냐시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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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사람을 미워하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이유>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장엄한 기도입니다. 먼저 당신 자신을 위해 기도드리시고 그다음은 당신 제자들, 그다음은 그 제자들에게 믿음을 이어받은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당신과 아버지, 또 당신과 제자들이 아버지 이름 안에서 하나인 것처럼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도 당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십니다.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뜻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먼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분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이는 큰 신비를 내포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방울토마토’(2008)는 가난의 참상을 보여주려 노력한 영화입니다. 아버지에게 버려진 6살 손녀딸과 철거 직전인 집에서 함께 사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는 폐지를 주워 손녀를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설회사 사장은 폭력배들을 동원해 할아버지의 손수레를 망가뜨리고 집까지 허물어버립니다.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그 사장의 집에 몰래 들어갑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들을 실컷 먹습니다. 그리고 몰래 나오려다 보니 개에게 준 갈비찜이 보입니다. 할아버지는 개밥인 갈비찜을 가져와 손녀에게 주며 먹는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봅니다. 손녀는 갈비찜을 먹으며 너무 맛있어합니다. 그리고 또 그 갈비찜이 먹고 싶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또 몰래 그 못된 사장 집에 들어가 개에게 손을 물려가면서 개밥을 가져와 손녀에게 먹입니다.
그런데 손녀는 계속 몸이 아파져 옵니다. 병원에 갔더니 그냥 영양제만 맞으면 나을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손녀는 더욱 약해지며 계속 갈비찜을 원합니다. 할아버지는 온몸이 물려가며 피를 흘리면서 갈비찜을 훔쳐 와 손녀에게 먹입니다. 그런데 손녀는 이유도 모른 채 갈비찜을 먹으며 죽어갑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실은 그 집의 집사가 사장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개보다도 못하게 취급하는 사장이 미워서 개밥에다가 약을 조금씩 타서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그것을 훔쳐서 계속 손녀에게 준 것입니다.
만약 할아버지가 그 사장을 미워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 집에 침입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독이 든 음식을 손녀에게 먹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보자면 할아버지는 가난과 고통의 이유를 그 사장에게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손녀를 사랑하려 하지만 그 사랑 안에는 미움의 독이 묻어 손녀와도 계속 관계가 멀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을 미워하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 사랑 밖에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랑의 방은 하느님 울타리 안입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는 사랑의 법을 지키는 사람만 머물 수 있습니다.
남편을 미워하면서 자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미 사랑을 공급받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이지만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어떤 사랑의 열매도 자녀에게 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결국엔 자녀와의 관계도 좋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신부님을 미워하면서 성당 소공동체 사람들과는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요? 점점 멀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교회 밖에 머물며 교회 안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미운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1시간이고 10시간이고 그리스도께 붙어있으며 사랑을 청해야 합니다. 그런후 미운 마음이 사라졌을 때 누군가를 만나십시오. 그전에는 누구를 만나 아무리 좋은 것을 주려고 해도 그것이 그 사람과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폼페이의 수도관을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폼페이는 수준 높은 상수도 시설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다 단명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수도관이 납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납중독에 걸려 모두 죽었던 것입니다.
행복은 사랑과 관계에서 옵니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관계가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그 행복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채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과도 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에게서 미움의 납이 내가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빨리 그 미움을 없애야 합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기도 안에서 나를 봉헌하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 살게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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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공동체에 속해서 살아가곤 합니다. 공동체라고 하면 신앙 공동체도 있을 것이고 또는 인간 단체 조직 중 하나인 공동체도 있을 겁니다. 공동체 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서울에 10년 남짓 살면서 몇 개월 고시원 생활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서울대 입구역 전철역에서 서울대 방향으로 가는 곳에 있는 고시원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근 25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같이 안면을 튼 사람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형 하나는 강원도 출신인데 그때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판사가 되는 게 꿈인 형이었습니다. 그 형이 판사가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또 한 분은 부산에서 올라온 아저씨였습니다. 그 아저씨는 감정평가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고시원에는 각종 공부를 하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모여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들로 모여진 하나의 건물이었던 것입니다.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과 고시원은 그냥 잠만 자고 공부는 인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형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평소에는 모르겠지만 공부를 하는 때는 다들 신경이 예민해져 있곤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공부를 하는 것에 자신의 인생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문을 여닫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서 문을 살살 조심해서 닫아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시험이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경우는 서로 다투는 경우도 있고 얼굴을 붉히기도 합니다.
서로의 개성이 저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이런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서로를 위해서도 기본적인 룰은 상대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서로 지켜야 서로에게 좋은 것이 됩니다. 바로 상대를 위해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집 같으면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한 번은 세탁을 하려고 세탁물을 세탁실에 가져갔습니다. 하나가 작동을 하지 않아서 하려고 문을 열었는데 탈수가 다 되었지만 세탁물을 회수해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보통 그럴 경우에는 빈 바구니에 세탁물을 옮기도 난 후에 세탁을 하는 게 하나의 불문율 같은 규칙입니다.
근데 세탁물을 보니 여성 원생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남자 것이었다면 그냥 했을 건데 여자 세탁물이라서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 설사 제가 세탁물을 옳겨서 놓았다고 해도 변태로 취급될 여지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한 시간 반 후에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그 여자 분은 성격이 털털한지 모르지만 세탁을 시작한 후에 외출을 하고 고시원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자기는 만약 늦게 들어온다고 해도 고시원 규칙대로 누군가 세탁물을 옮긴 후에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외출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세탁실 앞에 있는 벤치에서 그냥 잡지를 보면서 세탁물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여자 분이 죄송하다고 하면서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냥 규칙대로 옮기고 난 후에 하시면 되는데 하시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여자 분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거라고 편하게 생각했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가 미련스럽게 기다린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탁물에는 속옷이 있었습니다. 만약 일반 세탁물만 있었다면 제가 바구니에 옮겨놓고 했을 겁니다. 저는 눈으로 보긴 봤지만 그래도 만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탁물 주인을 위해 배려를 했습니다. 설사 그 여자 분이 그럴 경우에 누가 하더라도 괜찮다고 스스로 용인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 제가 생각했을 땐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그것도 동성이 아니고 이성이 그렇게 한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 배려를 했던 것입니다.
그 여자 분이 그냥 갔으면 될 일인데 그분 성격도 생각보다 쿨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분 역시 제가 왜 그분이 오실 때까지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지만 자기 입장에서는 약간 미안해서 그랬는지 이유를 물어본 것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그래서 그랬다고 하니 그 여자 분이 약간 감동을 하더군요. 아무튼 그걸 계기로 그분과 통성명을 나누고 몇 개월 동안 지내면서 누나 동생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누나도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누나는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는 여자라는 것을 포기하고 살겠다 생각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신경쓴다는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때 그걸 별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그 누나의 그런 생각이 감동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역으로 그 상황이 제가 그 누나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면 저는 제 성격으로는 상당히 민망해 했을 겁니다. 저는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시간이 아깝지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누나가 사실 감동한 것은 자기 속옷을 봤음에도 주인이 올 때까지 자기 세탁물에 접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를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 묵상글을 작성하면서 하나가 되는 것을 고시원 생활 체험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에도 나오지만 하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 당신이 성부 하느님께 속해야 하고, 또 성부 하느님도 아들 성자 하느님께 속해 있어야 하고 성자 당신께서는 또 우리 속에 속해야 하나가 된다고 역설하십니다. 속한다는 것은 그 안에 좌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개체가 두 개체로 존재하게 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 말씀 자체만을 놓고 묵상하게 되면 그렇습니다.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원리는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로 어느 분 속에 거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그분 속에서 녹을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녹는다는 것은 바로 희생입니다. 그 희생은 바로 사랑입니다. 결국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녹아준다는 것은 나를 생각하면 녹을 수가 없습니다. 상대를 생각하는 배려가 있을 때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제가 고시원에서 그때 그런 체험처럼 말입니다.
비누는 자기 몸을 녹여서 다른 존재를 깨끗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그 사랑과하느님의 사랑이 비누처럼 녹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깨끗하게 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만 이렇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다른 이에게도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되기를 오늘 복음을 보면 간절히 원하시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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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0. 부활 제7주간 목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22,30; 23,6-11)
"그 무렵 천인대장은 유다인들이 왜 바오로를 고발하는지 확실히 알아보려고, 바오로를 풀어 주고 나서 명령을 내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를 소집하였다." (22,30)
사도 바오로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 시민을 우대하는 조항이 많았던 로마법에 따르면, 정식으로 고소한 사람이 있어야만 비로소 로마 시민을 심문할 수 있었다. 사도 바오로의 경우 정식 고소자가 없었으므로 형사범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천인대장은 제일 먼저 사도 바오로의 결박을 풀어 주었으며, 그 후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소집하여 사도 바오로가 종교적 범죄를 행하였는지 알고자 했다.
'풀어주고 나서'라고 번역된 '엘뤼센 아우톤'(elysen auton)은 '속박으로부터 해방하다'라는 뜻을 지닌 '뤼오'(ly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형 '엘뤼센'(elysen)이 남성 3인칭 대명사 '아우톤'(auton)과 결합되고 있어서, 직역하면 '그를 석방했다'가 된다.
이 본문은 사도 바오로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안 천인대장이 사도 바오로를 자유롭게 풀어 준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즉 본절은 단순히 사도 바오로가 문자적인 의미의 결박에서만 풀려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유인의 신분으로 되돌아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둘러싸고 벌어진 소요가 있었으므로,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던 천인대장으로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규명해야만 했고, 바로 그 문제를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산헤드린'을 소집했던 것이다.
원문에는 '쉬네드리온'(synedrion)으로 나오는데,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말한다.
이 최고 의회는 71명의 의원, 즉 율법학자들(서기관들), 원로들, 수석 사제들 가문 중에 탁월한 구성원들, 그리고 이 집단의 의장인 대사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대지역을 관할하던 로마인 통치자들은 산헤드린 최고 의회 법정에 소송 사건을 심리할 권한을 부여하고, 또한 사형 판결을 내릴 권한도 주었다.
다만 산헤드린 최고 의회가 내린 사형 판결은 그것이 로마의 행정 장관(총독)에 의해 승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제한이 있었다(요한18,31).
천인대장이 이와같은 권한을 가진 산헤드린 최고 의회까지 소집한 것은 그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 사건을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산헤드린 최고 의회가 사도 바오로를 죽이려고 담합한 집단(사도23,12~16)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내리는 심리 결과가 사도 바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사도 바오로에 대한 천인대장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 즉 진실 규명을 위해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소집한 것은 사건을 또 다른 국면으로 전개시키는 원인이 된다.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바오로는 최고 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23,6ㄱ)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거슬러 가르친다는 혐의로(사도21,28) 이 자리까지 나오게 되었지만, 대사제에 대한 자신의 공격성 발언으로 인해 산헤드린 최고 의회로부터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없음을 직감하고, 의원들 간에 존재하고 있는 신학적 이견을 충돌시킴으로써, 자신이 처한 위기 상황을 돌파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사도 바오로의 기민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두가이나 바리사이가 가진 신학전 이견들은 무엇인가?
우선 사두가이들은 당시 수석 사제들과 산헤드린 최고 의회 회원 등 종교, 정치적 귀족들과 그 추종자들로 구성된 기득권층이었다.
'사두가이'(saddukaion; 사두가이온)란 이름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였던 '차독'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었다(2사무15,24; 1열왕1,34).
그들이 역사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것은 B.C.160년경 하스모니안 왕조때부터이다. 에제키엘 40장 46절 중에 차독 가문에게 성전 관리를 위임한 것에 착안하여 일부 수석 사제들이 차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기득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권위가 있는 것으로 받아 들이고, 다른 성경 및 전승 문서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께서는 일단 율법을 주신 후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으므로, 오직 인간의 자유 의지만 있을 뿐, 하느님의 섭리는 없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천사나 사탄등의 영계는 물론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등 내세도 부정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하느님의 위격과 내세는 인정하지 않았고, 오로지 현실 생활만을 인생의 전부로 보았기 때문에 극도의 현실 추구로 도덕성을 상실하였다.
즉 그들은 신성한 성전 제도까지 상품 거래 행위로 전락시켰으며, 백성을 기만하고 수탈하면서 자신들의 이권만 추구하였으므로 백성의 혐오를 받았다.
한편 '바리사이'라는 이름은 '분리하다', '구별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파라쉬'(parashi)에서 유래하여 '분리된 자' 또는 '구별된 자'란 뜻을 지닌다.
그들은 하시딤(Hassidim; 경건한 자들)이라고 불려지던 B.C.4세기 경의 종교 개혁 주장자들의 후예들이었다.
특히 하시딤이 주동한 마카베오 혁명 이후, 하시딤파 중에 더욱 더 조직화된 분파가 B.C.170년경에 바리사이파로 성장했다.
그들은 모세를 유대교 창시자로, 에즈라를 유대교의 중흥자로 존중했으며, 모세 율법은 물론 모세 율법을 해석한 자신들의 전승(Tradition)도 동일한 권위가 있다고 믿었다. 또한 수석 사제들이 유대교를 장악하는데 반대하여 일부 의식과 율법을 자유롭게 해석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인간의 부활과 내세 그리고 천사와 마귀같은 영적세계를 인정함으로써, 사두가이파와 큰 차이를 보였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닌 양자간의 이런 명백한 교리 차이는 늘 논란거리가 되었으며, 사도 바오로는 위기 타개책으로 이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그에게 이르셨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23,11)
산헤드린 최고 의회 회원들에게 큰 고초를 치른 날이 다 가고, 이제 밤이 찾아 왔음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한다. '밤'이라고 번역된 '뉙티'(nykti; night)는 문자적으로는 시간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요한6,17; 20,1), 또한 암울하고 어두운 상황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용법으로도 사용된다(마태4,16; 루카1,79).
사실 사도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그곳에서 발생될 여러가지 일들로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사도20,22~23; 21,13; 로마15,31). 아니나 다를까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받았고, 살해의 위협까지도 느꼈다(사도22,22.30).
더군다나 예전에 자신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산헤드린 최고 의회에서도 심한 고초를 당했다. 만일 일이 악화되기라도 한다면, 그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그의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지독하게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된 것을 루카는 객관적 묘사인 동시에 상징적 의미도 지니는 '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오로를 홀로 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놀랍게도 바로 그 밤에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사도 바오로의 인생에 어두운 그늘이 엄습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위로자로 나타나셨다.
여기서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오스'(kyrios)는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사도 바오로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시기도 한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잘 보여주는 단어이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여 있는 사도 바오로에게 친히 나타나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 대한 주님의 지극한 관심은 '앞에 서시어'로 번역된 '에피스타스'(epistas)가 잘 보여준다. '에피스타스'(epistas)는 어떤 것과 매우 가까움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i)와 '멈추어 서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로서 '바로 곁에 서 있다'라는 뜻을 지닌 '에피스테미'(ephistemi)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과거에도 그에게 나타나신 바 있는 사도 바오로의 주인이신 예수님 (사도16,9; 18,9; 22,17)께서 그가 가장 위급한 지경에 놓여 있을 때에 다시 나타나셔서 바로 그의 곁에 서 계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게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사도 바오로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사태를 바라보며 적지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 당혹스런 순간에 주께서는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로마 선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용기를 내어라'로 번역된 '타르세이'(tharsei)는 '용기가 있다', '내적으로 기운차다', '담대하다'란 뜻을 지닌 '타르세오'(tharseo)의 현재 명령법이다.
요한 복음 16장 33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별담화에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선포하신 주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담대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이것은 그 어떤 위협이나 난관도, 이제 곧 주님께서 바오로에게 부여하실 사명, 즉 로마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특히 주님께서는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여 어떤 일이 닥쳐올지라도 계속 담대해야 할 것을 사도 바오로에게 권고하고 계신다.
한편, 주께서는 이때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시어 담대하라고 명하시며, 새로운 로마 선교의 비전을 제시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해야 한다'로 번역된 '데이'(dei)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희랍어에서 '데이'는 일반적으로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필연성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도 이제 사도 바오로가 로마로 가는 것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사도 바오로의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에게 부여해 주신 필연적인 사명임을 사도 바오로에게 새롭게 각인시켜 주시 위해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복음(요한17,20~26)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1)
요한 복음 17장 11절에서 제자들간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7장 21절에서는 그 제자들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다.
원문에서도 문두에 나오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히나 판테스 엔 오신'(hina pantes hen osin; that all of them may be one)에서 '하나가 되게'로 번역된 '헨 오신'(hen osin; may be one)에서 '오신'(osin; may be)은 현재형이므로, '계속해서 하나가 되게'라는 뜻을 갖는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가 되는 것의 모델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뜻과 목적과 감정에서의 일치를 말한다.
하느님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분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예수님을 본다면, 그는 곧 하느님을 보는 것과 똑같다(요한10,30. 37.38; 10,9~11).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교안에서 파(派)가 다르고 활동 지역이 다르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뜻과 목적을 하나로 공유하고 진리와 사랑으로 묶여 있다면, 그들은 일치된 모습을 세상에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이러한 하나됨은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게 되는 근거'가 된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과 목적,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일치하지 못한다면,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도, 본질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안에 머무르지 않는 외교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됨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믿게 하십시오'로 번역된 '히나~피스튜에'(hina~pisteue; so that~may believe)는 목적을 나타내는 현재 가정법으로서 '계속해서 믿도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과 목적,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됨을 통해 당신 자신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임을 세상이 믿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요한3,16~17)에서 비롯되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죄인들의 멸망이 아니라(에제18,23; 2베드3,9) 모든 사람의 구원이다(1티모2,4).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로마5,6~8)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해당하는 '호 코스모스'(ho kosmos; the world)를 하느님 아버지의 관심 밖에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 '세상', 즉 '코스모스'(kosmos)가 반하느님적이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지칭하여 쓰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영혼들의 집합명사이며, 믿는 이들의 일터이기도 하다(마태16,26; 28,19~20).
우리는 이 세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귀한 일을 위임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요한 복음사가가 자신이 기록한 성경에서 강조하는 개념이기도 하다(1요한4,9~11).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 믿는 이들 또한 이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올 때에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안다면, 아무리 일이 바쁘다 할지라도, 잃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와 충고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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