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광주 시민 다 죽이러 왔죠?”
[공수부대 장교가 체험한 光州사태 ①] 광주 시민들을, 무리하게 진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李正湜(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李正湜(1957~)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경 광주 금남로 전남도청 앞에선 수십 만의 군중과 1000여 명의 공수부대 간의 대치가 아침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철수 시간을 넘기자 폭도들은 화염병 투척과 동시에 차량으로 돌진해 군인을 깔아 죽이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1979년 봄, 저는 홍익대를 졸업하고 ROTC 17기로 임관 후 광주 보병학교로 갔습니다. 초급간부 교육은 여러 교관으로부터 배우는 군사 지식과 다양한 체험으로 유익했던 성장의 시기였습니다. 독도법 시간 중 야외훈련이 있을 때 分隊員(분대원) 전원이 푸릇푸릇한 보리밭을 지나며 가곡 보리밭(윤용하 곡)을 합창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본 南道(남도)의 봄 언덕과 밭 풍경들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3개월간 교육이 끝나는 마지막 주에는 自隊(자대) 배치가 이루어집니다. 공수부대는 自願(자원)과 差出(차출), 두 가지 경로가 있는데 보병 병과 1800여 명 중 약 90명이 선발됩니다. 이 중에 50명 정도가 차출되니 ‘운이 없으면 끌려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1개 분대가 8명인데 당시 이런 억울한 차출을 위해 보험을 만드는 게 관례였습니다. 즉 1인당 1000원을 내어 공수부대로 가는 장교에게 8000원을 만들어 위로금으로 지급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수부대 11여단 62대대에 전속 1979년 가을쯤 特殊戰(특수전) 교육을 마치고 11여단 62대대에 배치됐습니다. 전입된 지 채 한 달도 안 돼 4주간에 걸친 야외 유격훈련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일주일은 千里(천리)행군으로 부대에 복귀하는 것이었습니다. 천리행군 도중에 철책선 근처에 무장공비 출현이란 돌발 상황을 맞아 긴급복귀 명령으로 3일치 행군을 이틀 만에 끝냈습니다. 마지막 코스인 춘천에서 화천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도로가 아닌 계곡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날은 대대장님도 군장을 메고 앞뒤로 다니면서 행군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자정이 지나자 지친 병사들이 많아 隊伍(대오)를 유지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틀간 잠을 자지 못한 탓도 있고 좁고 어두운 길에서 부대원이 섞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몽사몽 길을 걷다 간신히 고개 정상에 도착했지만 내리막길에선 가도 가도 제자리걸음만 걷는 듯했습니다. 1980년 봄이 되면서 폭동 진압훈련이 시작되었는데 개인적으론 하루 8시간 태권도 하는 것보단 수월한 교육이었습니다. 전문 교관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각 지휘관이 敎範(교범)을 봐가면서 즉석 교육을 했습니다.
서울 근처로 이동하여 공수1여단에서 며칠 대기하다가 5·18이 확대되자 동국대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곳곳에 걸려있는 현수막엔 붉은 페인트로 전두환을 비난하는 큰 글씨들이 피 흘리듯 쓰여 있었습니다. 동국대는 학생들과 큰 마찰이 없이 조용하게 접수했습니다. 새벽에 광주에 도착한 후 조선大에 군장을 풀고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게 됩니다. 아침에 한 트럭 당 20여 명을 태우고 시내로 威力(위력) 시위를 합니다. 차가 여러 곳을 돌아서 충장로에 이르자 일단의 대학생들이 投石(투석)하기 시작합니다.
트럭에서 내렸지만 제가 저의 대원을 장악하기도 전에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고의로 2, 3명씩 조를 짜서 푼 게 아닙니다. 학생들도 군인들이 달려오자 도망을 갔습니다. 그들은 이곳 지리를 잘 아니까 쉽게 도피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시민들이 2층 창문에서 군인들에게 욕과 야유를 했습니다. 광주 시민 입장에선 전날 공수7여단의 과격 진압을 경험해 보아 분노를 숨기지 않았지만, 11여단은 오늘 새벽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투입된 지 10분도 안 되었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욕을 먹는 것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점심 시간쯤에 조선大로 철수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있을 무렵 시내에서 시위대의 방화로 건물이 불타오르자 밥도 대충 먹고 다시 출동하게 됩니다. 이때는 부대를 유지했습니다. 오전과 마찬가지로 저항하는 학생과 폭력을 휘두르는 시민들의 색출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밤은 조선大로 못 돌아가고 체육관에 모여 잤습니다. 당시 기록된 수첩을 보면 지휘관들의 무능한 대처를 탓하는 대목이 많지만, 저 자신을 포함한 장교들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敵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시민에게 총이 아닌 무기로 싸워 보긴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반 년 전에 있었던 釜馬(부마)사태는 해병대가 진압할 수 없었던 곳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과격한 폭력으로 진압에 성공했을 뿐, 그것이 광주에서도 통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해서 진압이 안 되었을 때 대비할 수 있는 차선책은 전혀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아울러 폭도를 敵으로 규정하거나 발포를 포함한 모든 조치에 책임감과 도덕적 비난을 감내할 만한 명령권자가 없었다는 점도, 무능한 작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공수부대가 전투경찰보다 못한 작전을 하게 된 배경은 목표도, 과정도, 책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광주를 손봐야겠다는 신군부의 계획이 없었음을 反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공수부대원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아스팔트 열기에 익어 버렸고…
[공수부대 장교가 체험한 光州사태 ②] 시민도, 군인도 죽고 다쳤지만 비난의 화살은 우리에게만 쏟아졌다.
李正湜(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공수부대의 도덕적 책임 저녁이 되었지만, 식사가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상황의 심각성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을 각자 해결해야 하니 밥을 사 먹는 대원도 있었으나, 어떤 식당은 판매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5월20일 저녁까지 시민군 측은 사망자 4명과 다수의 부상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5월18~19일까지 군인들의 일방적 구타에도 불구하고, 사상자가 적었다는 것은 머리가 터지고 칼에 찔렸다는 표현이 난무했던 것에 비하면 예상 밖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군인들이 着劍(착검)한 것은 보았어도, 시민군을 겨냥해 帶劍(대검)을 사용하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 이○○ 목사은 자신의 手記에서, 중사 한 사람이 20명을 찌른 뒤 자랑했다는 식으로 써놓았습니다. 그게 그렇게 흔한 일이었다면, 刺傷(자상)에 의한 사망자 수가 많이 나왔어야 할 것입니다. 5·18 全 기간 동안 刺傷으로 인한 시체는 10구 내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공수부대가 原罪(원죄)처럼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는 성공하지 못한 작전으로 인해 구타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을 施展(시전)한 것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입니다. 5월19일 공수부대원의 폭력 행위는 각자 의식과 판단에 따른 것으로, “강압에 의한 마지 못한 행위”였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폭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구타를 했을 것이고, 반대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누구에게도 구타 명령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구타하라고 명령을 내린 적도 없습니다. 이런 변명이 군인으로 책임 회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최소 학력이 고졸이며 같이 참가한 ROTC 16기 선배 이○○ 중위는 부친이 미국 대통령과 사진을 찍을 정도로 유수의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저와 미혼 장교 숙소(BOQ) 룸메이트였던 송○○ 중위는, 조선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와 조선대를 졸업한 단축 마라톤 선수였습니다. 그는 충장로에서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인사하고 다니기 바빴습니다. 조직적 학살 음모가 있었다면 이들 중 누구는 지금쯤 양심선언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례가 있다는 걸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5월21일 새벽이 됩니다. 광주사태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떠오릅니다. 5·18의 꽃이자, ‘東學(동학) 亂의 전봉준’과 대비되는 전 모 여인이 등장합니다. 확성기를 통해 가두방송을 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것은 공수부대가 떠난 탓도 있겠으나 전○○와 같이 시민을 모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주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마치 화약이 타들어 가도 뇌관이 없으면 폭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文人들이 즐겨 표현하는 ‘금남로에서 자유와 민주 시민 물결’은 전○○의 개인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군중을 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며칠 뒤 이 전 모 여인은 광주 시민들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격리,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전○○가 광주 시민이 생각했던 것처럼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이었다면, 북한의 특수군 침투를 사실로 볼 정황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5·18은 북한과 직접 연관이 없다고 보는 게 상식입니다.
새벽 무렵 시민들은 손수레에 태극기를 덮은 시체 두 구를 앞세우고 등장합니다. 장비라곤 보조하는 사람 몇 명과 앰프, 손에 든 마이크가 전부였습니다. 공수부대가 포진하고 있는 전면 10m 앞에서 광주 시민을 깨우기 시작합니다. 태극기를 덮은 시체를 보니 제 자신도 우리가 잘못한 것처럼 당혹스러웠습니다. 누가 애국자인지 누가 폭도인지 혼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전○○로 추정되는 여인은, “강릉으로 약혼여행 중이었지만 동생이 시위 도중 맞아 죽었다 해서 이렇게 나오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당시는 약혼여행 같은 걸 잘 가지 않을 때라 별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누나가 있기에 ‘만약 내가 죽었으면 우리 누나도 그랬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파트 5층에 애기가 우유를 먹다가 최루탄 연기에 질식했다”, “지금 공수부대원이 광주 사람을 다 죽이고 있으니 궐기하라”고 시민군이 만들어 내는 즉석 멘트(약간은 선동에 가까운)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는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활화산 같은 시위대의 에너지는 주저하는 자에게는, 시위에 참여해야 할 것 같은 욕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12시를 넘어서자 군중은 10만을 넘어 거친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전○○는 공수부대를 지켜주는 방파제가 되어 언제 넘쳐날지 모르는 쓰나미를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규모 群集(군집)의 우레와 같은 함성은 10만 개 이상의 축전지가 되어, 폭도라는 선풍기를 돌려 그 앞의 모든 것을 쓸어내려 하고 있었습니다. 폭풍과 쓰나미의 조합 앞에 공수부대원은 육체적·정신적으로 이미 지쳐 있었습니다.
당시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폭발하는 상태라 중압감이 많았을 텐데 당당하게 잘 대처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철수 문제를 상부에 전했지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철수 요구 시간인 12시를 넘기고 말았습니다. 계엄사령부는 진압을 포기하고 철수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현장이 얼마나 급한지 실감을 못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청 앞은 수 만의 시위대로 인해 헬기 이외엔 출입이 안 될 정도로 고립된 상황이라 단편적인 無電(무전) 정보로는 적절한 판단을 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대원들은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습니다. 폭도들은 트럭 위에서 얼굴에 치약을 바르거나 숯을 칠하고, 두건을 쓴 채 긴 막대기에 쇠갈고리, 낫, 식칼 등을 묶어서 눈만 뜨고 졸고 있는 공수부대원 머리 위를 향해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맞서 빈 총을 들고 있는 초라함은 상대방이 도발하도록 자극하는 꼴이었습니다. 약하게 보이면 용서를 하는 게 아니라 밟게 되는 인간의 야수성이 나타나는 건 당연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양쪽 편 건물에서 계속 던지는 돌멩이를 피하고자 뒤로 후퇴를 거듭하고 분수대 쪽으로 계속 밀리고 있었습니다. 광주 주변 도시에서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도착할 때마다 소개를 하고 군중들은 환호를 외쳤습니다. 드디어 아세아 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장갑차와 군용 트럭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정규 군인이 참여한 것으로 오해, 무척 당황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시민들과 공수부대와 폭도 사이에 앉아서 완충지대 노릇을 하던 대학생 그룹은 사라졌습니다. 1시가 넘어서자 도로 우측 나무 위에서 화염병이 날아와 우리 측 장갑차 상단에 맞아 불이 붙었습니다. 운전병이 장갑차 안으로 들어가 갑자기 後進(후진)을 했습니다. 그 빈틈 사이로 폭도들의 장갑차와 군용트럭들이 몰려왔습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 차례대로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파도가 흐르듯 자연스레 덮쳐들어 온 것입니다.
도청 쪽에서 갑자기 큰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하늘을 향해 쏜 후, 나중에는 직접 장갑차를 향해 쏜 것입니다. 곧이어 M-16 소리가 처음에는 두세 명이 쏘던 것에서 여러 명이 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 틈에 도로를 따라오다 보니 공수부대원 한 명이 장갑차에 머리가 반합 크기만 하게 눌려 있고, 그 주위로 피가 나와 검게 굳어져 있었습니다. 흘러나온 피는 금세 검붉은색으로 바뀌었고, 아스팔트 열기로 달걀부침 같이 두텁게 익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체를 치울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담벼락 아래로 피한 후 실탄 한 클립(10발)을 손과 손을 통해 전해 받았습니다. 무척 빠른 속도로 장전 후엔 마음속으로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그 사이 장갑차가 분수대를 돌아 다시 돌진했고, 트럭과 버스들의 돌진도 여러 차례 있었으나 차량에 대한 중기관총 사격이 있고 난 후 공격행위는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전방을 보니 63대대 대원들이 부처님 오신날 봉축 광고탑을 쓰러뜨린 후, 수십 명이 應射(응사) 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대 쪽으로 이동하여 분수대 물로 얼굴과 손은 물론, 군화를 벗고 발까지 씻었습니다. 누군가 지친 몸을 물가로 데려가 쉬게 하는 듯 시원하고 산뜻했습니다. 63대대 출신 이○○ 목사의 手記를 보면, 5월21일 도청 앞에서 장갑차가 돌진할 때 공수부대원은 서 있지 않아 다친 사람이 없었고, 죽은 공수부대원은 군인들의 장갑차에 당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반면 시민군이었던 이○○ 씨 手記를 보면 “왕창 밀었다”는 표현을 합니다. 밀려면 밀어야 할 대상이 있는 게 맞을 것입니다. 63대대는 後衛(후위)로 도청 쪽에 있어 前方(전방)에 있던 61, 62대대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증언 내용이 사실인 양 주장하는 것은 그 증언의 동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목사 手記는, 개인 감상이란 점도 문제지만 사실에 입각한 다른 증언을 무력화하는 데 종종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의 증언도 많이 있었음에도, 목사라는 직분이 주는 신뢰감 덕분에 手記 내용이 양심 고백을 넘어 진실처럼 각인된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폭도에 의한 교도소 습격이 당시 부대 日誌(일지)에도 기록된 사실임에도, 이후 교도소장의 否認(부인)이 있으면 사실 여부와 별개로 교도소 습격 사건은 軍에 의한 조작으로 치부되는 것입니다.
恐慌(공황)에 빠진 공수부대, ‘최후의 전투’에 임하다-
[공수부대 장교가 체험한 光州사태 (끝)] 거의 알려지지 않은, 5월21일 오후의 금남로 앞 대치상황을 직접 그려보았다
李正湜(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죽음의 소리’, ‘구원의 소리’ 전남도청 앞 발포사건도 그러합니다. 시민에 대한 무자비한 조준사격이라는 관점도 있고 갑작스러운 폭도들의 공격으로 국가에서 파견된 군인들이 죽어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그날 울린 총소리가 시민의 생명을 빼앗은 것일 수도 있지만, 저의 할머니 귀엔 외손자의 목숨을 구한 구원의 종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종소리에 점 하나를 찍으면 총소리가 되는 묘한 울림이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5·18에 대한 광주 시민의 심리적 자부심의 근거는 10만 이상의 군중의 결집해 시위한 점과 200여 명의 사상자에 대한 책임 요구로부터 나온다고 봅니다. 하지만 5월21일 발포사건에서 발포 책임자를 찾을 수 없다는 조사결과가 도청 앞 발포 사건의 정황을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달리 말해 對峙(대치)의 긴장을 깨뜨린 후 군인을 깔아뭉개고 사태의 판을 키운 건 폭도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즉, 200여 명 사상자가 발생한 직접 원인과 책임은 화염병을 던지고 차량 공격을 시도한 폭도들의 경솔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면 발포 책임자와 발포자를 찾아내 처벌하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궁지에 몰린 공수부대원의 이유 없는 총질에, 분노한 군중이 무장 대응으로 맞서는 용기’라든지 ‘어떻게 군인이 민간인에게 총질할 수가 있는가’하는 것들은, 시위대와 공수부대원 간에 최전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데서 오는 반응입니다. 의아한 것은 그 주위엔 제법 많은 수의 내·외신 기자가 있었는데, 중요한 현장인 5월21일 오후 1~2시를 담은 현장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후 1시 상황을 기억에 의존해 다음과 같이 그려봤습니다. 개략도이기에 생략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상상화는 아닙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전날(5월20일) 사진이나 5월21일 오전 사진보다 더 정확한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느꼈던 공포와 혼란에 대해 “이게 무슨 당나라 군대야?”라고 이 비웃을 수만은 없을 겁니다. 이와 관련해 상부에선 戰場(전장) 이탈이나 지휘 소홀에 대해 책임 추궁이나 처벌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군인들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불가항력적 상황을 참작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1시30분경 차량 돌진이 뜸해진 가운데 1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시위대 중 한 명이 두 팔로 욕을 만들어 하자 누군가 사격을 해 고꾸라졌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기어 나와 쓰러진 사람을 부축해 들어갔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누구는 그런 非이성적인 행동은 自衛(자위)를 넘어선 범죄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총을 쏘고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일입니다. 아버지뻘 되는 윤리 선생님이 저에게 묻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은 善하고 이성적이어서 그런 상황에서 객관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현실에 처하면 생각과는 달리 혼돈의 연속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모두는 그 자리에 각자의 맡은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5월21일 오후 공수부대는 수협 빌딩에서 조선大로 이동하면서 작은 골목길을 건너면서도 위협사격을 하며 철수합니다. 몇몇 대원들의 공포와 분노가 서린 총질이었으나, 막는다고 시민들이 들을 단계는 이미 지난 뒤였습니다. 그건 광주 시민을 시민에서 폭도, 폭도에서 敵으로 간주하는 순간처럼 보였습니다. 저녁을 먹고 조선大를 이탈한 후 안전지역을 향해 출발했지만, 목적지의 地名(지명)도 좌표도 몰랐습니다. 대대 작전참모가 지도 한 장 가지고 자기만 따라오라는 데, 그것도 밤에 산길을 1열 종대로 300여 명이 이동하는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단지 2~3시간 행군하면 도달할 거리라고 해서 군장도 대충 꾸려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습니다. 저녁 10시 쯤, 계획에 따르면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야 할 시간임에도 行軍(행군)이라기보다는 멈춰 대기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탓에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제 바로 앞의 병사가 총을 배낭에 걸어둔 채 앉다가 실탄이 장전된 총이 땅에 닿는 충격으로 발사되었습니다. 내 귀에서 1m 정도 거리에서 하늘로 발사된 총소리에 근처에 있었던 대원 모두가 놀랐습니다. 우리의 위치가 폭로되자 잠시 후 산 아래서 차량 소리가 나더니 우리 쪽을 향해 기관총을 무작위로 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멀리 있어 보이지 않았기에 應射(응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폭도들의 차량이 철수한 뒤 행군이 계속되었으나, 그건 행군이라기보다는 조별 각개 약진이었습니다. 목적지도 모르는 밤길 기차놀이는 작전참모와 대대장님마저 각각 분산되었습니다. 敵이 추적해오는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주변의 敵이 어디쯤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행동은 제약이 많았습니다. 또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이유는 낮에 있었던 발포로 인한 당혹스러웠던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탓인 듯했습니다. 대대장님도 본인이 월남전도 참전해 봤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 겪는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날의 철수과정이 광주에서 수행한 작전 중 가장 미숙하고 부끄러운 작전으로 기억됩니다. 결국 2~3시간이면 갈 수 있다는 길을 자정을 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물론 도착한 곳이 원래 계획한 곳에 제대로 온 것인지 누구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묘지 근처에서 눈을 붙이다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5월22일 아침이 되자 주변이 갑자기 소란해졌습니다. 두 명의 청소년이 멈춰 서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논을 가로질러 도망을 갔고, 대원 한 명이 따라갔습니다. 잠시 후 앞쪽에 숙영하던 대원이 한 발을 쏘았고, 달아나던 한 명이 쓰러지자, 그 바람에 놀란 나머지 한 명이 도망을 포기한 후 생포되어 대대장님 앞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고등학생이기에 대대장님의 간단한 심문이 있었던 후 제가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은 친구 사이로 광주가 안전치 않다고 판단해 친척 집에 피신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운이 없게도 야산의 군인들 숙영지 앞을 지나다 멈추라는 소리에 당황해 도망가다 당한 경우였습니다. 책가방 속에는 수학 연습장과 《정통 종합 영어》 책이 있었는데 가지런히 정리된 수학 연습장을 보니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생존한 학생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 같이 이동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로 금방 친해졌습니다. 학생이 자발적으로 군장도 들어주고 산길을 나온 후 오후 늦게 안전 지역인 헬기장에서 헤어졌습니다.
광주 비행장에 도착해서 며칠 간 휴식과 정비를 취했습니다. 비행기 격납고 속이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지붕이 있고 평평한 바닥에서 자는 잠이라 편히 있을 수 있었고 훈련도 간단한 구보 이외는 경계 근무조차 없었기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도청 진압이 결정되자 11여단에선 1개 지역대만 차출되었습니다. 참여 지역대는 명령에 의한 지정이 아니라 9개 지역대장 사이에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1개 지역대 100여 명 生死가 걸린 문제가 이런 식으로 정해졌다는 게 인생이고 현실인가 봅니다. 군악대의 합주가 울려 퍼지는 송정리역에서 해태종합선물을 1인당 한 세트씩 副賞(부상)으로 받고 서울의 국민대학교로 재배치되었습니다. 저도 면회 온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정강이에는 던진 돌에 까진 상처가 있으며 내 마음 속엔 광주에서 죽었던 대원이 운송 트럭 위에서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비를 맞으며 흔들리고 있었던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5월21일 도청 앞 그 긴장된 대치 국면에서 화염병 하나가 균형을 깼습니다. 이로 인해 차량 돌진과 발포가 시작됐고, 쌍방의 무력 사용이 5월27일 도청 진압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200여 명 희생을 줄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화염병 던지기 직전까지였다고 봅니다. 시민들이, 과격 진압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의 평화적인 철수를 허용했다면 대자대비한 사랑으로 충만한 ‘평화 민주화 운동’이라 불려도 어색치 않았을 겁니다. 그런 면에선 차량 돌진 때 피신해 들어간 공수부대원을 인도적 차원에서 몇 주씩이나 보호해준 따뜻한 마음씨가 광주의 진정한 자랑이 아닐까 합니다. 5·18을 치르고 35년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갖게 된 것에 공수부대의 일원으로서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과 동시에, 5·18이 광주의 恨으로 남아 대한민국의 화합과 발전에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리라는 말씀을 동시에 드려봅니다. 저는 광주가 민주화의 聖地(성지)로 자부하는 정치적인 도시보다는 南道(남도)의 멋과 맛을 간직한 예술의 本鄕(본향)으로 되돌아오길 바라는 맘이 간절합니다. (끝) |
출처: 鶴山의 草幕 舍廊房 원문보기 글쓴이: 鶴山 徐 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