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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천막을 친 세상
출 25: 1-9
1. 육신의 장막에 거하는 자들
(1) 인생은 영혼이 육체의 장막에 거하는 존재이다
사도 바울은 그 자신도 육체의 장막에 거한다고 했고 어느 땐가는 이 낡은 장막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장막을 덧입을 것이라고 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1-9)
사도 베드로도 동일한 장막에 대해 말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3,14)
(2) 장막은 잠시 있다가 다시 걷는 임시 처소이다
우리 영혼이 장막에 거한다는 말은 이 땅의 삶은 영원히 머무를 삶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5)
도대체 인생의 하는 일이 다 그림자 같은 데 그 몸체는 어디 있는가? 무엇을 잡으며 살아야 덧없는 인생이 아닌 보람찬 인생이 될 것인가?
<야훼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39:4-6)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태양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해 그림자도 잠시 일영표 위를 스치며 사라지는데 견고치도 않는 인생이 어찌 영원히 머물 수 있겠으며 그림자와 같다는 인생의 한 일이 어찌 영원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시 90:6-3)
하나님의 눈에 천년이 밤의 한 경점 같은데, 잠깐 깼다가 영원히 잠드는 것 같다는데, 하루살이도 되지 못하는 인생이다(욥 4:19; 사 51:6). 들판에 있는 인생이든 왕궁에 있는 인생이든 그 인생의 신속히 지나감에는 차이가 없다.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겼고 내가 내 생명을 말기를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하였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나의 명이 조석간에 마치리이다>(사 38:12)
이 사람은 베틀에서 천을 짜고 거기서 베를 끊어낸다. 그것과 같이 어느 순간에 잘려지는 게 인생이다. 그것으로 장막을 짓고 또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양떼와 장막은 흔적없이 사라진 것을 볼 때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래서 야고보는 인생이 아침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라 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一息)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9-12)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은 영원히 있으니 그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이 참된 것을 잡는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5)
(3) 장막은 약한 것이고 허술한 것이다
장막집에는 잘 꾸며 놓고 살 만한 공간이 없다. 금방 걷어서 이사갈 터인데 거기다 무엇을 견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기도원에 텐트를 치고 단 며칠을 기도하다 올 사람이 텐트에다 수세식 화장실 만들고 목욕탕 만들고 응접실, 서재 등을 만들 사람이 있는가? 옮길 때 번거롭지 않게 가능한 짐은 줄여야 한다. 무슨 보험, 무슨 보장, 아무리 많이 준비해도 영원을 참되게 보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는 동안에 하나님 잘 섬기며 본향을 향해 가는데 지장이 없으면 족한 삶이다(딤전 6:6-12).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지나치게 덧붙이고 늘리고 하지 말라. 어느 날인가 텐트 걷어야 하는 날 그것 다 버리고 가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부자가 되었고 얼마든지 튼튼하고 큰 집을 지을 수 있었지만 장막에 거했고 그의 아들도 장막에 거했고 그의 손자도 그랬다(히 11:8-16).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 11:8-10)
그들이 본향집을 그리며 장막에 거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시며 위해 성을 예비하셨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레갑의 후손들은 그의 조상의 유언을 받아 대대로 장막에 거했다(렘 35:7).
<거처할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두지 아니하고 장막에 거처하여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ㅍ대로 다 준행하였노라>(렘 35:9-10)
2.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 계실 장막을 치셨다
(1) 모세의 성막이 아닌 다른 장막을 자기 백성들 가운데 세우겠다고 하심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 중에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실 장막을 치게 하신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장막에서 임시로 기거하며 여행을 계속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장막들의 중앙에 성막을 세우셨다.
그러나 이 장막은 하늘에 있는 그것의 그림자요 모형이다(히 8:5).
하나님은 언젠가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자신이 거하시며 그들을 위해 일하실 장막을 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1,12)
그 장막은 모세의 장막과는 다를 것이다. 그것은 모세의 장막의 실체일 것이 분명하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말씀의 원문에서 '거하시매'는 '장막을 치시매'이다. 정확히 레위기 26장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것도 그와 같다(겔 37:26-28).
돌로 지은 전을 허물라. 산돌로 지은 돌 아니, 장막으로 짓는 성전을 세우겠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이 성전은 중심이다. 성도들의 장막들이 그 장막에 연결되어 전체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로 지어져 가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주할 곳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 땅에는 함께 여행하시기 위해 장막을 치셨다.
(3) 서로 다른 장막 안의 사정
백성들의 장막이 하나님의 성막이 되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숙영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백성들의 장막 안에서 나는 소리와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 나는 소리는 달랐다(롬 3:10-20).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명령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의 육체의 장막 안에는 사망이 가득 차 있다. 육체에 선한 것이 없다. 그 안에는 온갖 독과 악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막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는 그것이 해결된다. 하나님의 장막은 영광스럽고 강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장막에 들어오셔서 함께하신다면 하나님은 자기 집을 새롭게 관리하실 것이다. 우리의 장막을 그분이 쓰시도록 그분의 명의로 이전을 해 드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큰 성으로 돌려주실 것이다. 땅에 심는 것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하물며 하늘에 심는 것이 어찌 그것만 못지 않으랴!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막다운 모습을 보일 것인가?
3. 성막의 겉모습은 볼품이 없었으나 내부는 아름다웠다
(1) 성막의 울타리는 세마포였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성막의 문은 넓었으나 문으로 통하여야 들어갈 수 있다. 그 문은 반드시 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하게 한다. 이는 진실한 회개와 물침례를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물두멍은 육체를 씻었으나 새언약에서의 물침례는 영혼을 씻고 선한 양심이 되어 하나님을 찾아가게 한다(벧전 1:22; 3:21).
(2) 지붕을 덮은 것이 성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①해달의 가죽이 제일 바깥의 덮개이다. 해달은 몸길이가 약 1m인 족제비과의 바다짐승이다. 겉모양은 잿빛이나 검고 칙칙한 모습이다.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방인들의 신전은 외부나 내부가 너무나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그러나 그 신전 안에는 참신이 없다. 성막의 내부가 정말 아름답다. 거기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다.
이 성막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 똑같다. 그는 육체대로 볼 때 흠모할 만한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님은 외모만을 보지 않으신다(삼상 16:7; 고후 5:16; 10:7; 약 2:1). 하나님이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만 보신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외모만 볼 수 있고 마음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외모뿐만 아니라 중심도 보신다. 그의 외모가 초라했으나 그의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는 것이다.
②붉은 물을 수양의 털에 들인 것이 해달의 가죽 아래 덮개이다. 수양은 화목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졌다. 피흘림이 있어야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 예수께서 우리 대신 죽으셨다(고후 4:19-21).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산제사를 드리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죽이지 못하면 하나님과 화평이 없고 하나님을 보지도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박힌 사람은 삶 가운데 그것이 보인다(갈 5:24).
③염소털로 짠 앙장이 그 아래의 덮개였다. 염소는 속죄 제물로 드려졌다. 속죄란 대신 죽는다는 말이다. 염소는 대신 죽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야곱이 이삭에게 축복을 받으려고 나갈 때 염소털로 자기 몸을 감쌌다(창 27:16). 대신 죽은 염소의 털은 아버지에게 맏아들인 줄 알게 했고 장자가 받을 권한을 축복받게 했다. 그가 염소가 준 털로 몸을 가리지 않았다면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아사셀의 두 염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속죄 제물로 드려졌다(레 16:8). 한 마리는 죄를 지고 광야 무인지경으로 나아갔다. 한 마리는 머리에 안수를 받고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스라엘은 대신 죽은 염소 때문에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오셔서 심판하실 때 염소를 왼쪽에 두고 양을 오른 쪽에 두신다고 했다(마 25:33). 그들이 염소로 여겨져 왼쪽에 둔 것은 대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염소는 대신하기 위해 있다. 형제에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형제 대신하시기 때문이다. 형제를 예수님처럼 대우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대신하신 것으로 여기게 한다.
④흰 세마포에 청, 홍, 자색으로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는 것이 속 덮개였다. 날금과 씨금으로 정성껏 수를 놓은 것이다. 색채를 가미한 것이다. 지혜로운 여인들이 실을 낳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세마포를 짰듯이 속사람이 장성한 사람은 이것이 그의 속모양일 것이다. 누에가 입에서 실을 내듯이 성도의 입에서 나온 고운 실들, 예수를 증거하고 이웃을 위로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실로 속덮개를 만든다.
4. 하나님께 장막을 빌려 드리면 성으로 갚아 주신다
(1) 새장막을 덧입혀 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 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5-17)
(2) 약한 것으로 지으셨다는 말씀
하늘에 새예루살렘성이 내려온다. 이 성은 장막 안에서 거하며 나그네와 외국인이라고 했던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하늘의 성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그 성 가운데 다시 하나님의 장막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장막이다. 모든 비바람을 그가 그 백성들 중에서 함께 맞아 오셨다. 슬픔을 아셨고 고통을 친히 겪으셨으며 시험을 받았으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을 얻었다. 잠깐을 심고 영원을 얻는다. 땅에 심은 식물의 씨도 30배 60배 100배를 얻는데 하늘에 심은 천국의 씨가 어찌 더 낫지 않으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
성막 건축 준비
25: 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5.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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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의 절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실 수 있는 집을 짓는 일입니다. 그 집이 바로 성막입니다. 이스라엘이 과거 애굽에서 살 때에는 애굽 사람들처럼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 우상은 사람들이 작은 집을 만들어서 거기에 넣어둘 수가 있었고 가지고 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하던 우상과는 영 달랐습니다. 그분은 너무 크시고 소멸하는 불이십니다(히12:29)
그분 앞에 서는 자가 티끌만한 죄만 있어도 태워버리는 분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갔을 때 산 아래서 보니까 온 산이 불붙는 것 같았고, 천둥번개가 온 산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불에 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화산이 터지는 불 속에 들어가서도 죽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너무 두려워했고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굉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로 와서 계시겠다고 하면서 그 집을 지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지어야 그 두려우신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가 있을까요? 철로 지어야 할까요? 아니면 돌로 피라미드같이 지어야 할까요? 그런데 예상외로 하나님은 텐트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지금 여행 중이어서 텐트 속에서 자고 아침이면 그것을 거두어 짊어지고 또 여행을 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집도 텐트 형식으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출25:-27: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을 어떻게 지을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그 성막을 짓는 자재와 그 조달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신 부분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지어야 하는 성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자재는 어떻게 조달하였으며, 그것으로 성막을 지을 때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이 성막은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성경은 66권이고 신구약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실상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책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5:39) 라고 하신 말씀은 구약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기다리게 하는 책입니다. 히1:1“옛적에 우리 조상들로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로 친히 말씀하셨으니” 라고 하여, 계시가 점진적으로 구체화되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발전했지요? 구약성경을 한번 더듬어 보십시다.
구약에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예고하는 그림자들이 너무나 많지만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생각해 보십시다.
창세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그림자 중에 대표적인 것은 가죽옷입니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께 죄짓고는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나뭇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었지만 금방 말라 부스러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가서 책망하시고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주셨습니다. 짐승 한 마리를 죽여 그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가죽 옷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서는 죄 없는 희생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민수기에서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은 광야에서 높이 들렸던 놋 뱀인데, 원망하는 죄 값으로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처방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한 그 뱀 모양을 만들어 높이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방법은 죄인 모습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계시하지만, 상징과 그림자들로 하시기 때문에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대가 지나며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시대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 활동했던 사사들과 선지자들은 구체적인 말씀으로 예언하였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 22편이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이사야7장이나 53장 등은 그리스도가 짊어지실 십자가에 대하여 얼마나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몇 구절만 읽어볼까요?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리스도가 남자를 모르는 처녀를 통해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직접 예언입니다.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실 절규를 그대로 예언하였습니다.
시 22:15-18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이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이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부끄러움과 고통을 당하실 것이라고 천년 전의 다윗이 자세히 예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분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들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요 희미한 그림자이며 예고편이지만, 신약은 그 예고대로 이루어진 분명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 신구약은 동일한 그리스도에 관한 책,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 중에서 성막보다 더 분명한 예언은 없습니다. 성막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분과 그 사역에 대하여, 얼마나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예언하는지 놀랄 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성막은 회막, 증거막 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거룩한 천막이라는 뜻에서 성막, 하나님과 만난다는 의미에서 회막, 거기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다는 의미에서 증거막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 성막의 양식과 재료와 규격과 등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동식 텐트인 회막은 나중에 고정식 건물인 성전으로 바뀌었고, 그 성전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성되었는데, 성막, 혹은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혹은 방법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하나님께 인도하러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고,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이 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라고 하신 것은 자신이 참 성전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주님을 예언했는데,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인간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이시고, 인간을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려고 오신분이 그리스도 이십니다. 임시 건물을 짓고 잠시 찾아가 하나님을 만났던 성막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제사만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막의 재료와 모양과 배치까지도, 모든 것이 어쩌면 그렇게 그리스도를 잘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음주일부터 이 성막을 배우면서 신약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막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헌납 받아 준비하는 과정을 공부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재를 지정해 주시며 그것으로 지으라 하셨는데,거기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즐거움으로 헌물을 내는 것만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러 저러한 물건들을 바치라고 명령하게 하셨고,
명령을 받은 자 중에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것만 받으라 하셨습니다.
3절부터는 성막을 건설하기 위하여 백성들로부터 받아야 할 물품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입니다. 7절까지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위에서 읽은 대로 하나님은 성막을 짓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일러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진귀한 보석도 있고 별로 진귀하지 않은 실도 있었습니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어디에 쓰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막이 다 완성되었을 때, 자기들이 바친 그 작은 것들이 얼마나 귀하게 쓰였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들이 바친 색실로 지성소와 성소의 천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자기들이 낸 금으로 법궤를 감쌌습니다. 그들이 작은 조각들을 바칠 때는 그것이 무엇에 쓰일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것들이 하나씩 제 위치를 찾게 되었을 때 상상할 수 없는 귀한 용도로 쓰였습니다.
우리도 가진 것이 별것 아니고 아무 쓸모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재능도 지식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순종하면 아주 아름답고 거대한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집을 지으라 하시면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것처럼, 최고급 자재를 내려주시고, 그것으로 지으라고 하시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선 생각할 일은 은혜를 받으려면 무언가 봉사를 해야 합니다. 주님은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만날 처소, 자기들이 죄 사함 받을 장소를 짓는데 자기들의 물질을 들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으려면 당연히 돈을 낼 줄은 알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데는 공짜 의식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좋은 것을 기쁨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을 해 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이 바치라 하신 그 금이나 은이나, 혹은 다른 보물과 물건들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지요? 그들이 돈으로 산 것인가요? 애굽에서 해방되던 날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너희들에게 보물을 주면서 나가라고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보물을 주는 것은 고사하고 해방되어 나간다는 것조차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대로 유월절날 어린양 한 마리씩 잡아서 그 피를 바르고 고기를 구워먹고 있노라니까, 애굽의 장자들이 몽땅 죽었고, 애굽 왕이 항복하면서 어서 나가라고 명령했고, 애굽사람들은 자기 패물을 가지고 와서 이것을 가지고 어서 나가라고 재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얼떨결에 자기들의 주인들이 애지중지하던 보물들을 받아가지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 보물들은 사실 그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보물을 왜 그들에게 주셨을까요?
그들이 광야에 나와서 성막을 지을 때를 대비해서 가지고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가지고 있는 보물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막을 지을 때 쓰라고 맡겨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지요?
여러분에게는 그런 물질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너무 가난해서 우리의 것을 달라고 하실 분인가요? 그분이 여러분의 것을 달라고 하실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주제파악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까워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고, “아, 이때 쓰라고 우리에게 맡기셨구나, 참 신기하네, 하나님은 참 위대하시다.” 라고 헌납하면서 찬양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그러셨나요?
그동안 종살이하던 자기들이 만져볼 수도 없는 보물을 그동안 가지고 있게 하셨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건을 내어 성전을 짓는다는 것 자체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뿐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어 애굽을 이겨 주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의 백성을 삼아주시고 가나안에 그들을 위한 땅을 준비해 놓고 인도하신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축복이 아닙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도, 그들이 겪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도, 그들이 가지게 된 담대함도 계산 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닙니까? 죄인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보다 더 복된 특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쓰신다고만 하시면 자기 목숨이라도 내어놓아야 하는 것이 그들이었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 4:7절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너를 구별 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으면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처럼 자랑하느뇨”
저는 평신도로 봉사할 동안 세군데 예배당 건축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여사교회와 홍성중앙교회는 아주 어릴 때 벽돌 몇 장 날라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도 제게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년 때 서천읍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게 되었는데, 저는 목사님 다음으로 책임을 맡았고, 일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성전건축에 참여하여 헌신한 것이 이렇게 귀한 상을 받을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봉사가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것이 틀림없다고 나는 믿습니다.
두 주 전에 태국에 다녀왔습니다. 프라왔자나교회 헌당식을 하고 왔는데, 대부분의 태국교회는 한국교회가 다 지어주고 사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기분도 좋고 그들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열 살 넘도록 밥 먹여주고, 옷 입혀주고, 화장실 데리고 가고, 학교 데리고 가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태국선교를 하면서 지난 25년 동안 그렇게만 했습니다. 그들은 헌금할 만한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엇을 하든지 필요한 경비는 다 대주었습니다. 그 결과 태국교회는 선교사라면 돈 갖다 주는 사람으로 알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 탓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와 한국 선교사 탓입니다.
우리는 예배당 구입비용의 절반은 그들이 내라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낙담했고 성도들은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고, 태국교회를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선교사가 이해하고 힘껏 설득했고, 그들이 이해하고 참여했습니다. 그들이 자기네 교회라는 인식과 책임을 갖고 힘겨운 헌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나는 태국에서 일어나는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마 앞으로 큰 기적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자기 성전은 자기 돈을 내어서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돈 낸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이미 맡겨 두신 것입니다. 그것 알고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이고 그 일이 대단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가끔 국립공원에 갔다가, 절에서 기왓장에 이름을 써주면서 헌납하라고 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건축은 그렇게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성막을 짓는데 누가 금을 내고, 누가 판자를 냈다고 기구들과 천막에 새기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유도 할 것이 아니라, 너는 당당히 명령만 하고, 그 말씀에 감동되어 자원하여 내는 사람의 것만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과 나 자신 사이에 하는 것이지 누가 하라고 부추기거나 체면 때문에 해서는 안 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바라야지, 사람의 칭찬을 바라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평생을 살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대하고 그렇게 바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알려주신 대로만 지어야 했습니다.
9절을 보면,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재나 모양이나 치수나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일러주신 대로 해야지, 단 한 가지도 사람의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가져오는 물건들을 받아서 성막과 기구들을 제조하게 하였는데, 한 가지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여 주시고 그려주신 도안과 설계도대로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만든 것은 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용납되지 않으며, 우리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왜 모양과 치수까지도 다 정해주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멋진 의식을 가진 종교라 할지라도, 인간이 고안하여 만든 종교는 사람을 구원하는데 이르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을 마취시켜서 정치인이나 사기꾼에게 이용당하게 되어있습니다. 태국에 가서 불교와 정권이 어떻게 결탁되어 있는지 보시고, 영국에 가서 성공회와 영국왕실이 어떻게 결탁되어 있는지 모시면 알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보여 주신대로 그들이 만든 나뭇잎 옷으로는 부끄러운 몸을 가릴 수 없었고, 거친 환경으로부터 그들의 몸을 보호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가죽옷만이 필요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실 인류의 구주는 사람이 고안하여 세워놓은 조각품도 아니고, 사람들 중에 누구를 뽑아 세울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주는 오직 하나님만이 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죄 없는 분이 어디에도 없고, 인류를 대신할 만큼 존귀하신 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반역한 것이 근본이므로, 하나님께서 사하셔야 사함을 받으며, 그가 길을 열어주셔야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하인간에 우리를 구원할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일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주셨습니다.(행4:12)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것을 분명히 각인시키려고 성막도 하나님이 명하신 자재와 모양과 치수대로만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에 약속한 그리스도를 믿되, 말씀대로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여기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성막의 건조과정을 배우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구체적으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서 그분의 모습과 약속을 발견하면 그대로 믿어야만 그의 영이 우리 안에 역사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마다 거기서 우리 구주의 모습을 찾고, 그 약속을 발견하려 해야 하고, 진리를 발견하면 내 보배로 삼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축복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