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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
성경본문: 계시록 14: 1-5
○ 어린양과 그에 속한 자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계1:15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무서운 환난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14장은 대답합니다.
십 사만 사천 명은 승리하신 어린 양에게 속합니다. 이 십 사만 사천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1)십 사만 사천은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의 환난 시대에 구원받아 복음을 전하게 될 유대인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2)십 사만 사천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고 상징적으로 보아서 모든 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전체라고 보는 것입니다.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 사도를 곱하면 144입니다. 여기에 많다는 것을 상징할 때 자주 사용하는 숫자인 1000을 곱한 것이 144,000이므로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서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숫자라고 보는 것입니다.
두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 차이를 보이는 것은 요한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접근하느냐 아니면 상징적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물론 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 문자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때로는 상징적으로 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144,000명은 역사의 환난 시대에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될 성도들 모두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14장은 13장과 많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13장은 짐승이 등장하고 14장은 어린 양이 등장합니다. 13장에서는 우상숭배라는 죄악을 폭로하고 14장은 어린 양을 향한 경배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13장 마지막 부분에는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666이라는 표를 받는 것이 나오는 데, 14장에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인 144,000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13장에 나타나는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거짓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자들, 짐승을 따라가는 자들, 그들의 종국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14장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자들이 나오는데, 어린 양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이들에게 이루어지는 가장 놀라운 사건은 구속입니다.
이와 같이 13장과 14장은 아주 놀라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체 내용 면에서 보자면 13장은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마지막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다루었고, 14장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다루었습니다.
1.시온 산에 서 있는 어린 양(1절)
첫째 예수님은 어린 양이십니다.
1절을 읽습니다.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예수님은 어린 양이십니다. 그것이 요한 계시록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어린 양이란 말이 27번 이상 나옵니다. 계시록 5장은 어린 양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5:6).
"어린 양이 나아 와서 책을 취하시니라"(5:7).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제일 먼저 부른 사람이 누구지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가에 나오시는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습니다(요1:29).
메시아를 가리켜 끌려가는 어린 양이라고 제일 먼저 예언한 구약의 선지자가 누구였습니까? 이사야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를 가리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사53:7)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이십니다.
예수님이 어린 양이란 말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속죄 양으로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가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속죄양으로 죽으신 분이십니다. 천국에 계신 예수님이 어린 양의 모습을 하고 계시는 이유는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이 그 사실을 영원토록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시온산에 서 계신 분입니다.
1절을 다시 읽습니다.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여기 시온산은 하나님이 계신 곳 즉 하늘에 있는 천성을 가리킵니다.
히12:22에 보면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했는데 여기 시온산은 하나님의 도성인 천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시온산에 서 계시다는 말은 주님께서 천성에서 승리하신 당당한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 보인다는 말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 갈 때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스데반이 보았다고 증언했습니다(행7:55).
예수님이 시온산에 서 계시다는 것은 승리하신 당당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그리고 순교자들과 성도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스데반과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와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그리고 여기 계신 구속받은 성도 여러분들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십 사만 사천과 함께 서 계신 분이십니다.
1절을 다시 읽습니다.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십 사만 사천은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십 사만 사천은 어린 양과 함께 서 있고 어린 양은 십 사만 사천과 함께 서 있습니다. 즉 주님은 성도들과 함께 서 계신 분입니다. 주님과 성도들과의 이별은 더 이상 없습니다.
성도들은 주님이 있는 곳에 있고 주님은 성도들이 있는 곳이 계십니다. 주님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495).
2.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십 사만 사천 명의 성도들(1-5)
첫째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써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마란 인격을 대표하는 부분으로서 요컨대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만이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이 무엇을 말합니까? 중생 곧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계 22:4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진 사람들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계13:16절에는 그 이마에 짐승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계 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어떤 표입니까?
666이라는 표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써 있습니다.
둘째 큰 뇌성 같은 소리로 어린 양의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축복인 동시에 거듭난 자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구속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 그 은혜에 감격해서 뇌성 같은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새 노래란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요, 구원의 노래를 말합니다. 이 노래는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사람들 144,000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배운다는 것은 모르는 노래를 그저 배워서 부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찬송가를 배워서 믿는 사람들을 따라서 할 수 있습니다. 성악가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찬송을 더 정확하게 부릅니다.
그러나 그 노래는 새 노래가 아닙니다.
신앙고백이 없는 찬송은 그 사람의 존재와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노래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특별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부를 수 없는 노래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노래를 하늘 나라에 가서 비로소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있을 때부터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구속함을 받은 그 순간부터 부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 악한 세대를 이길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것은 찬양에서 나옵니다. 이와 같이 큰 소리로 어린 양의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셋째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여기 여자는 세상주의와 향락주의를 말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여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신부들이 장가를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여자는 세상 혹은 세속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이 세상과 더불어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절은 신앙의 절개를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순결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는 구별된 존재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세상과 다르다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 된 정체성이고 독특성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좇아가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넷째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수가성으로 가자고 하면 수가성으로 가고 베다니로 가자고 하면 베다니로 가고 이른 새벽에 산으로 새벽기도에 가자고 하면 새벽기도에 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예수님의 인도를 따르는 자가 바른 성도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나 주님을 신뢰하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던 아브라함처럼, 주님께서 어느 길로 인도하실지 분명하게 알지 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바로 따라 가는 자가 바른 성도입니다.
요10:4에 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목자이신 어린 양의 음성을 알아듣습니까? 그분의 인도를 따르십시오. 결코 실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는 이것을 좀더 설명하기를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구속이란 노비를 속량할 때 지불하는 속전을 말하는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속량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로 표현한 것은 다가오는 마지막 큰 추수가 앞으로 있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여섯째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를 말합니다.
요일 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사실 거짓말은 마귀에게 속한 자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일곱째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뿔이 없다'(blameless)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믿고 어린 양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뿔이 없습니다. 뿔이 있으면 가는 데마다 들이박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도 입만 열면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 줄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분처럼 변하여, 있던 뿔도 다듬어져 둥글둥글해집니다. 흠이란 전체적인 결점이 아니라 부분적인 결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운 자들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어린 양이십니다.
우리 대신 속죄양으로 죽으신 분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시온산에 서 계신 분이십니다.
천국에 승리하신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계시면서 구속받은 성도들을 바라보시는 분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십 사만 사천과 함께 서 계신 분이십니다.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중심 천국 중심으로 사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