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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자료]
양자물리학의 코펜하겐 해석과 수필시학의 형상적 체험
- 파동-입자 이중성과 관찰자 효과에 기대어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양자물리학은 파동-입자 이중성 및 양자 얽힘과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개념으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이해에 도전합니다.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은 실험에 의한 결과로써 과학계가 이미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의 매력과 그것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미치는 심오한 영향을 밝히는 작업을 본격수필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과정으로 전환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더욱 흥미진진하겠지요. 여기서 분명히 누군가는 저 분이 영문학과 나오고 국문학을 전공한 문도리인데, 공도리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과에 속하는 물리학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려고 하나 하고 의아해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고등학교를 부산 해운대 언덕에 있는, 박 대통령이 여섯 번이나 방문한 국립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나왔습니다. 기계과는 물리와 친숙하지요. 궁금증 하나가 떨어져 나가 시원할 겁니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 말해줍니다. 오늘은 먼저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합니다. ‘본다는 것’은 대단히 철학적인 문제입니다. 윤정희가 주연으로 나오죠, 일상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영화 이창동 감독의 ‘시詩’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윤정희는 ‘미자’로 나옵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외손자 종욱과 둘이 삽니다. 국가보조금으로 살고 있지만 형편이 어려워 중풍에 걸린 강 노인(김희라 역)의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한 미자는 동네 문화센터에서 시창작 강의를 듣게 됩니다. 영화 속 시인 김용택은, 사과 한 개를 들고 나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봐야 돼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보는 거예요.”하면서 시를 가르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미자는 너무나도 시를 잘 쓰고 싶었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압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동네 한 소녀가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외손자 종욱이 가담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미자는 죽은 여학생의 발자취를 따라 강 근처도 가보면서 손자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여학생을 위한 시를 씁니다. 아름다운 것만 찾으려 했을 때는 찾아오지 않던 시마가 죽은 소녀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찾아옵니다. 그 시가 바로 <아네스의 노래>입니다. 이 시는 ‘존재했어야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말, 즉 죽은 자 혹은 타자의 언어를 탐구하는 주체의 집요한 노력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말해줍니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한가요 //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은 받아볼 수 있나요
윤정희는 영화에서 양미자로 나오는데, 윤정희의 본명 손미자를 염두에 두어 그렇게 작명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자는 영어로 번역하면, beauty itself가 됩니다. 바로 미자가 써낸 시와 관련이 있는 작명이라는 것이지요. 배우로서의 윤정희와 미자 할머니로서의 불일치에 대해 프랑스아 줄리앙은 인간과 예술의 근원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탈합치:예술과 실존의 근원>라는 책 서문에서 예술가는 안착된 합치를 해체할 때 새로운 가능성들이 출현할 수 있다고 썼습니다. 한 예술가는 예술로 인정된 예술로부터, 더욱이 자기 스스로 이미 작품으로서 창출한 것으로부터 탈합치할 때 비로소 예술가일 수 있다고 합니다. 알츠하이머, 즉 치매 초기에 시를 배우는 설정에서 우리는 감독의 예술적 간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 <시>의 시학은 말을 잃어버리는 순간 시가 창조된다는 것입니다. 예술적 언어는 욕망의 언어를 상실하는 순간에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인공의 이름이 ‘미자, beauty itself가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양자물리학은 영화 ‘시’에서와 같은 ‘관찰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전통물리학이론에 따라 거시세계의 물질만 관심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보인다고 생각하고 살지만, 미시세계 물질의 변화와 움직임을 연구하는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줍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본 것은 본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어불성설이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양자물리학에 대해 공부를 하면 곧 수긍하게 됩니다. 영어로는 보는 것에 두 가지 ‘시’와 ‘찰’이 있습니다. ‘see’는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니라 보이니까 그냥 보는 것이고, ‘watch’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의도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한자에는 보는 것에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이를 ‘견시관’이라고 합니다. 한자로 말하면, see는 보이는 겉표면을 보는 볼 시에 가깝고, look은 볼 관에 가까우며, 사물을 무심코 시각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서 자세히 응시하면서 뚫어지게 보는 것입니다. watch는 살필 찰에 가깝습니다. 견시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견시관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실재하는 실체인 한 존재를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찰’에 가깝지만, 이런 개념은 미시세계의 입자인 양자를 이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이야기는 거시세계의 물질을 보는 것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산림에도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녀 멋쟁이 할머니로 불리며, 젊어서부터 꽃을 좋아하고 엉뚱한 말을 잘하던 미자에게 시를 써보는 도전은 사실 늘그막에의 소박한 허영이었다고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가끔 사치와 허영도 필요하지요. 일상의 삶은 허영을 받아들이지만 진정성을 요구하는 예술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이런 허영심 속에서는 단 한마디의 시구도 떠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름답고 멋진 말을 채집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그녀를 자신의 진실과 대면하고 만듭니다. 피해자 엄마를 만나고 와서 고통에 빠진 인간에게 자기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깨닫는 순간 자기가 써온던 텅 빈말이 타자의 고통에 무심했다는 것은 물론 자신의 진실마저 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녀는 멋쟁이 이면의 공허한 자신을 대면합니다. 이때부터 말을 찾는 장소가 달라집니다.
저는 양자역학을 공부하면서 파동과 입자 모두로 행동하는 빛의 이중적 특성과 같은 개념을 탐구하고 우리의 지식에 한계를 부과하는 불확정성 원리나 관찰자 효과를 밝히는 것이 수필의 이중구조와 수필시학의 형상적 체험과 연결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제가 왜 수필시학을 설명하면서 양자물리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빌려왔느냐 하면, ‘본다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창작에 중요하다는 입장이 작용한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실재하는 실체인 존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잘 보이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잘 안 보이는 것입니다. 예술이 보이는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차원에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양자의 세계를 다루는 양자물리학은 우리 문인들이 뇌과학, 생리학, 심리학 등과 함께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자 영역의 비밀을 밝히고 이 매혹적인 과학 분야의 경이로움을 수필시학의 영역으로 치환해 수필의 창작원리를 이해하는 이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뉴턴 역학에 기초한 고전 물리학이 양자물리학의 새로운 영역에 자리를 내준 양자혁명 동안 발생한 패러다임 전환을 ‘사실을 사실대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전통수필’에서 수필은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한다’는 본격수필로의 전환에 견주어보면 어떨까요. 서울시립대 물리학과 박인규 교수는 우리 문인의 전유물이기도 한 ‘비유’를 지극히 물리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유는 사람을 현혹하는 법칙으로 설명을 못 할 때 둘러치는 것으로, 깨우쳤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현혹법이라고 말합디다. 이를테면, 철새들이 왜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먼 남쪽 나라를 날아가는지 물으면,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그냥 ‘귀소본능’이라고 둘러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유로는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상학적 관점으로 주관세계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인문학자로서 저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지만, 참으로 과학자다운 발상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네 가지가 특히 많다는 거 아십니까? 시인, 모텔, 노래방,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왜 많을까 생각해봤습니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말씀에 비유가 많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인식의 아버지이자 설득의 어머니입니다.
마술이 왜 신기하고 놀랍습니까? 거시세계를 지배하는 결정론적 인과율을 깨기 때문입니다. 이 인과율을 따르지 않는 세계가 바로 미시세계이며, 그 세계를 다루는 것이 양자물리학입니다. 양자물리학의 세계관은 결정론만 뒤업는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의 세상 보는 척도 이분법도 이원론도 깨부숩니다. 빛에 관한 뉴턴의 알갱이론에 이어 맥스웰의 파동설, 다시 아인슈타인의 입자론을 거치면서 지금은 파동이면서 입자라는 이중성이 정설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전환은 오랜 결정론적 세계관에 도전하고 파동 입자 이중성, 불확실성 및 양자 중첩과 같은 개념을 양자역학이 도입했습니다.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 여섯 가지, 양자도약, 양자얽힘, 양자중첩, 관찰자 효과, 불확정성 원리, 상보성 원리 등 양자 혁명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놀라운 과학적 발전과 기술 혁신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거시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말이 안 되는 일을 양자역학의 이해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격수필이론도 양자역학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교술이라는 전통수필 이론에 도전하고, 기존 수필에 대한 개념에서 전환하여 사실론 경험론 허구론을 거쳐 형상적 체험론을 바탕으로 한다는 새로운 시학의 전환으로 우리는 수필에 현대수필의 옷을 입힐 수 있었습니다.
Ⅱ.
이 장에서는 빛의 이중성을 강조하는 ‘파동-입자’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제1회 권대근문학상 수상자인 박소현의 수필 <내성행상불망비>에 적용해서, 빛이 ‘파동과 입자’의 특성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여 그 동작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도전하였는 바, 양자역학의 원리를 통해 수필의 구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과 다른 이해를 통해 더 나은 해석에 도달해 보겠습니다. 파동-입자 이중성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이중 슬릿 실험과 같은 유명한 실험을 했습니다. 이 실험은 빛이 어떻게 동시에 파동과 입자로 행동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촘촘하게 간격을 둔 두 개의 슬릿을 통해 빛을 통과시키면 파동과 같은 행동을 암시하는 간섭 패턴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자가 어떤 경로를 택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검출기를 배치하면 간섭 패턴이 없는 입자와 같은 동작을 관찰하게 됩니다. 이는 빛이 파동-입자의 이중적 성질을 띤다는 사실과 세계의 모든 물질은 보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 또한 말해줍니다.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 여섯 가지는 양자역학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의 하나로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에 의한 정통 해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 논의의 중심이었던 코펜하겐의 지명으로부터 이름이 붙여진 것이며, 20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영향력이 컸던 해석으로 꼽힙니다. 쉽게 말해서 전자를 예로 들면 전자의 상태를 서술하는 파동함수는 측정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상태가 확률적으로 겹쳐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관측자가 전자에 대한 측정을 시행하면 그와 동시에 '파동함수의 붕괴'가 일어나 전자의 파동함수는 겹침상태가 아닌 하나의 상태로만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실험값이 나왔고, 이를 통해 공식이 세워졌고, 해석이 나왔으니, 이론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나는 지금 실험에 의한 여섯 가지 해석이 과학적 진리다라고 말하려거나 양자역학의 본질을 설명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고 양자물리학의 코펜하겐 해석이 과연 우리가 문학하면서 봉착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줄까, 그 원리 중 어떤 것이 시학시학 원리와 맞는지 그 적절성을 찾고자 합니다.
1.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
물리학에서 혁명적인 시대인 20세기 초에 당대의 수많은 천재적 과학자들은 고전역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많은 사례들을 접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양자역학의 태동되었다면, 본격수필론의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수필도 사실대로 쓴다는 전통수필론에서 벗어나 수필적 허구를 수용하면서 주제와 제재 중심의 문학이란 본격수필시학이 완성되었습니다. 양자역학 연구도 일맥상통합니다. 그 이후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양자역학 연구는 하나의 동역학 체계로서 자리잡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초기에도 양자역학이 충분히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양자역학의 완전성을 부정했던 학자(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포함한)들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작은 입자들에 대한 물리적 실험의 결과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법칙들이 개발되었고 여러 법칙들의 일반화를 통해 양자역학의 체계가 구축되었습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개인에 의해 전반적인 구조가 다져진 것과는 다른 것으로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결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20년대에 구축된 양자역학의 체계는 현상의 예측과 적용에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의 해석적 측면에는 직관적이지 않은 면이 있어서 뛰어난 물리학자들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물리학자들 중에는 양자역학의 성립에 기여한 물리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일련의 실험결과와 이를 토대로 물리학자들이 구축한 수학적 결과물들을 설명하기 위한 양자역학의 다양한 해석 방법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코펜하겐 해석은 보어,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한 해석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모든 양자역학의 해석에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보어는 원자의 양자적 본질에 대한 연구로 유명해졌는데, 이로써 1918년 덴마크 정부로부터 이론 물리학연구소를 설립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고 코펜하겐에 연구소를 설립합니다. 전 세계로부터 많은 젊은 물리학자들이 이 코펜하겐의 연구소에 수년씩 머물면서 연구하였습니다. 코펜하겐은 양자론이 성장하는 시기에 양자역학 연구에서 세계의 중심이 되었는데 여기서 연구한 하이젠베르크 등의 과학자들과 정기적인 과학모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양자론의 코펜하겐 해석이라 불리는 것을 창안했습니다. 양자역학은 많은 물리학자들의 저항을 수반했는데 1927년과 1930년에 브뤼셀에서 열린 솔베회의에서 보어는 자신이 제창했던 상호보완성의 원리(Complementarity principle)에 기초를 둔 양자역학의 해석을 당시의 물리학자들에게 설파하였습니다. 이때 벌어진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으로 대표되는 코펜하겐 해석은 보어의 상보성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Principle of Uncertainty)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들은 1927년 무렵부터 코펜하겐에서 함께 양자역학을 연구하였습니다. 다양한 조건에서 빛이 방출되는 주파수를 연구하면서 그들은 그 이전에 플랑크, 아인슈타인, 그리고 보어 자신의 연구에서 가정하였던 광자 에너지의 양자화 조건을 더욱 일반화시켰습니다. 그들은 고전역학에서 물리적 대상을 입자나 파동 둘 중 하나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입자이면서 파동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보어의 새로운 이론들은 당시의 많은 실험들과 물질이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띤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하이젠베르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이 둘 다 매우 정확하게 국소화될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였습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발전하게 된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은 사건에 대한 인간의 관측 활동이 사건의 현실을 변화시킨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 핵심은 어떤 물리량의 값이 측정이라는 행위 이전에는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고전역학에서는 수식으로 나타난 물리량은 인간의 측정 행위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양자역학이라는 이론은 관측자와 대상 한쪽이 아닌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은 물리학계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미시세계 물질의 작동원리로부터 과학적 진리를 말하려는 게 아니고 이 물질의 이중성이라는 관찰자 효과를 수필시학과 관련해서 창작원리로 풀어내려고 합니다. 코펜하겐 해석의 여섯 가지 원리는 거시세계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수필이 인간학이란 측면에서 양자역학의 원리를 불러올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관찰자 효과가 수필시학과 어떻게 축이 맞아가는지 살펴보면서 작품분석을 해나가고자 합니다. 따라서 빛이 파동-입자라는 성질은 이제 명백해졌습니다. 수필의 구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중구조 이상의 중층구조로 되어야 문학적 성취를 드높일 수 있습니다. 수필의 창작이나 이해에 있어서 필수인 ‘이중성’ 효과의 이론적 배경은 1. 예술의 복합성 원리, 2. 토도로프의 중층구조이론, 3. 언어학의 이중부호원리 4.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란 문학의 개념에 의해 그 근거를 확보한다고 하겠습니다.
2. 이야기의 파동성과 수필의 서사구조
- 박소현 수필, <내성행상불망비>를 중심으로
아인슈타인은 물질에 빛을 때리면 전자가 튀어나온다는 사실, 전자가 알갱이라는 광전효과 설명으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상대성이론이 아닙니다. 빛이 파동인 줄 알았는데, 입자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걸 실험으로 증명했습니다. 파동은 입자와 다릅니다. 파동은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동이라고 알려졌던 빛에 더 센 에너지를 쏘았는데도 거기에서 나오는 전자의 에너지는 같더라는 겁니다. 여기서 빛이 알갱이라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이를 수필시학에 견주면, 양자역학이 태동할 무렵만 해도 수필은 형상적 체험의 글이 아니라 사실 체험의 글로 이해되었습니다.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몽테뉴에서 베이컨 수필까지는 사실적 토의의 글, 즉 비문학성을 띠었고, 베이컨에서 찰스램까지는 사실적 토의와 문학적 토의가 혼재되다가, 즉 비문학성을 띠기도 문학성을 띠기도 하다가 찰스램 이후부터 따라서 에세이가 문학적 에세이로 자리를 잡아나갑니다. 수필의 파동성은 전이, 치환, 변용의 미학이 적용이 안 된 1차원적인 화자의 체험에서 직접적으로 나오는 감정의 표출로, 플롯화되기 전 상태의 진술이라 하겠습니다.
박소현의 <내성행상불망비>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수필이 문학적 성취가 높은 이유는 민초의 삶을 서사로 펼치고 있는데, 그들 민초를 이중구조로 짜서 행상의 생존무늬에 어머니의 눅눅한 삶을 포개어 이중구조로 그려내었고, 그들 서사가 하나의 파동이라면, 이를 입자의 형태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겠습니다. ‘불망비’는 잊을 수 없는 보부상의 공적과 값진 삶의 흔적이지만,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은덕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형상의 불망비는 양자역학의 원리로 보면 진정으로 보고자 했을 때 견자 앞에 나타나는 입자의 형태요, 수필시학으로 보자면, 불망비는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잊을 수 없는 것이란 작가의 결의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 수필은 체험이 아니라 형상적 체험으로, 양자역학 원리에 의하면 파동이 아니라 입자의 형태로 주제의식을 나타내었으므로 작가가 진정으로 대상의 본질을 보고자 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는 보부상 십이령길 답사하던 날, 1구간 초입에서 오래된 비석 두 개를 만났다. 몸체는 낡았으나 글씨는 양각으로 또렷하게 새겨져 세월의 더께에도 의연하다. 길 위에서 발견한 비석 두 개는 조선 말기, 이 십이령을 넘나들었던 보부상들은 봉화 사람 접장 정한조와 안동 사람 반수 권재만의 공덕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다가 바로 양자도약을 하듯, 작가는 김주영의 소설 <객주>에서 정한조가 이끄는 소금장수 행수 상단의 거친 숨소리를 들숨날숨으로 의미화하면서 열두 고개를 넘었던 상인들의 험난했던 삶을 이야기로 잘 펼칩니다. 이들이 이렇게 생사의 길을 넘나들었던 이유는 단 하나, 식솔들을 위해서라 표현하면서 고백합니다.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이 지나갔던 골짜기마다 고달픈 삶의 곡절들이 파르르 고개를 들고 있었고, 민초들의 피와 땀이 땅 속 깊이 눈물로 새겨진 십이령길. 작가는 저 오래 묵은 나무들의 나이테에도 보부상들의 서러운 상처들이 옹이로 남았을 것이라 썼습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거친 생존의 무늬들이 있다고 합니다.
◎ 발이 짓물러 짚신을 적실 정도로 피가 흘러도 채 닦지 못한 채 ->쪽지게를 벗지도 못하고 선 채로 잠시 한숨 돌릴 뿐 ->첩첩산중에서 산적들을 만나 물건을 다 빼앗기기도 하고 ->발을 헛디뎌 수십 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친 이도
◎ 고달픈 삶의 곡절 ->피와 땀이 눈물로 ->생존의 무늬 ->나이테 ->서러운 상처 ->옹이
3. 수필의 입자성과 수필의 플롯화구조
양자역학 이론에 따르면 물질은 작아지면 질수록 파동의 성질을 띤다고 합니다. 공기 중의 산소 분자까지는 입자로 보면 되고, 산소 분자보다 더 작아지면 파동 성질이 더 강해집니다. 원자 주변의 전자들은 파동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전자 입자설을 깬 드 브로이는 모든 물질은 파동성을 지닌다는 연구로 노벨상을 받습니다. 두 개의 슬릿에 전자를 쏘니 파동의 성질이 나타나는 입자간섭실험으로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를 수필시학에 적용하면, 일반화된 이야기나 소재들을 더 작게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하나의 제재로 좁혀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수필에 입자성을 주려면 작가는 마지막에는 원소와 같은 제재소로 지배적 정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필의 입자성은 전이, 치환, 변용의 미학으로 빛나는 시적 언술의 양상에서 도출되는 성질입니다. ‘이것’을 ‘저것’으로에서 ‘저것’에 해당하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에서 ‘보조관념’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감정’보다 ‘미적 정서’요, ‘이야기’보다 ‘플롯’에 해당하는 화자의 ‘전략적 표현’입니다.
십이령길에서 오래 전 기억 속의 어머니를 만났다. 새벽부터 이 마을 저 마을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생선을 팔러 다녔던 40대의 젊은 어머니를. 생선이 가득 담긴 고무 함지박은 돌덩이처럼 어머니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암으로 오랫동안 투병하시느라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던 우리집 살림살이. 집안일밖에 몰랐던 어머니는 슬픔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생선 행상을 나서야만 했다. 나와 동생을 중학교는 보내야 한다는 절박감이 어머니를 거리로 내몰았으리라.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이중구조에서 나오는데, 그 시작점이 십이령길에서 오래 전 기억 속의 어머니를 만나는 지점에서 문학성이 싹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만약에 ‘어머니’ 서사가 나오지 않고 보부상 행상들의 서사만이 이야기의 줄기를 이루었다면, 이야기 그 이상의 의미, 즉 문학적 효과는 이중 구조화했을 때보다 덜했을 겁니다. 원래 예술은 복합성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에 구조의 이중성은 수필의 예술성을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어머니의 굴곡진 삶이 보부상의 고난과 헌신 못지 않습니다. 파동성의 제1서사에서 보부상들이 식솔을 굶길 수 없어 십이령을 넘었다면, 작가의 어머니는 40대 젊은 과부가 된 몸으로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험난 행상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돌덩이처럼 머리를 짓누르는 고무 함지박 ->아버지의 암투병 -> 생선 행상
4.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와 귀납추론을 통한 의미화
◎ (A)보부상들이 무거운 짐을 진 채 위태위태 산길을 걸어갔듯 (B)어머니는 생선을 머리에 이고 거리를 떠돌았다. 생의 긴 겨울이었다. 어머니가 종종걸음쳤던 그 신작로에는 수없이 많은 어머니 발자국들이 화석 되어 굳어 있을지도 모른다.
양자역학이 문학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 그리고 양자의 이중성이 수필시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와 불확정성 원리는 원자 주변을 도는 전자의 파동성에서 온 것입니다. 미시세계에서 원자는 파동처럼 행동하는데, 고전물리학의 법칙으로는 위치나 속도를 알면 운동량을 알 수가 있는데,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이 파동이 되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위치나 속도를 파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산소도 알갱이로 돌아다니지만, 절대온도보다 더 세게 온도를 낮추면 운동이 느려지며 파장이 크지면서 파동의 성질을 나타냅니다. 파동은 두 개의 상태로 존재하다가 측정하면 한 군데만 나타납니다. 수필시학에 견주면, 이야기가 이중으로 나타나도 주제는 하나로 집약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미시세계의 원자 주위를 도는 파동 상태의 전자도 우리가 보고자 할 때 하나의 입자로 나타나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 주제가 하나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A)와 (B)의 얽힘은 결국 보부상과 어머니는 다른 삶의 길을 걸었지만 ‘생의 긴 겨울’이라는 차원에서 동일성을 갖습니다. 지금까지 보부상의 이야기 서사1은 결국 어머니의 이야기 서사2를 객관화하기 위한 전략적 구조화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공부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기라!”
그때 그 어머니의 비장한 모습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리 속에 죽비처럼 각인되어 있다.
보부상들의 울타리가 되었던 접장 정한조와 반수 권재만. 그 둘은 보부상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땐 사발통문을 돌려 그들의 상행위를 철저히 보호했다. 산길에서 만난 행려병자나 실족한 동년배는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목숨 걸고 구급했다는 보부상들. 그들에게는 송진같이 끈끈한 정과 결코 끊을 수 없는 의리가 있었다.
저들은 나와 무슨 인연의 고리로 얽혀 이 길에서 만나게 된 것일까? 겹겹이 쌓인 따뜻하고 징한 삶의 굴레가 안개처럼 온몸을 파고든다.
“가노가노 언제 가노 열 두 고개 언제 가노
소금 미역 어물 지고 내성장을 언제 가노”
보부상 십이령길을 걸으며 그들이 불렀던 타령 한 자락 읊조려 본다. 마음속에는 어머니를 위한 공덕비 하나 세우고 있다.
전개부 마지막으로 와서 담론층인 결말부에 와서 작가는 이 수필의 주제가 ‘어머니의 자식을 위한 헌신과 희생’이라는 것을 구체적 사건으로 드러냅니다. 그 첫 번째 구체화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공부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기라!” 고 했던 어머니의 어록을 직접화법으로 처리한 부분입니다. 어머니의 의지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라는 부사구에 확고하게 놓여 있습니다. 작가는 어머니의 이 비장한 모습의 강렬성을 ‘죽비’로 이미지화해서 작가의 의도와 의미를 감각화해서 깊은 울림을 주도록 했습니다. 이 담론층에서 다시 이중구조가 나타나는데, 어머니를 기억하다가 작가는 전략적 차원에서 보부상들의 의리와 정을 다시 두둔합니다. 여기서도 ‘그 의리와 정’을 ‘송진 같은’이란 직유법을 써서 이해 대상에 ‘신선감, 강렬성, 환기력’을 등을 제시합니다. “가노가노 언제 가노 열 두 고개 언제 가노” 라는 보부상의 노래는 바로 ‘어머니를 위한 공덕비’라는 지배적 정황을 제시하기 위한 전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시된 ‘공덕비’는 어머니에게로 전어되어 모정의 위대성에 대한 미적 감각과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게 됩니다.
결말부에 닿기 전에 보부상과 어머니의 헌신을 이중구조로 짜서 주제의식을 보다 구체화하고 난 다음에 작가는 다시 ‘인연론’을 펼칩니다. 수필은 대체적으로 삼사로 짜여집니다. 사람, 사연, 사상입니다. 인연론은 불교적인 사상과 관련이 있지요. ‘저들은 나와 무슨 인연의 고리로 얽혀 이 길에서 만나게 된 것일까?’ ‘고리로 얽혀’에서 더 나아가 ‘겹겹히 쌓인’에서도 보통 인연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연을 필연화하는 전략입니다. 문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역학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양자역학을 공부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수필은 이야기를 보부상 이야기에 어머니 이야기를 중첩해서 이중구조화하고, 양자역학 원리의 입자성에 해당하는 문학의 형상성을 나타냄에 있어서, 보부상의 불망비를 변용하여 자신을 위한 죽비로, 다시 어머니를 위한 마음 속의 공덕비로 의미화한 데서 더욱 지배적 정황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자식 위한 희생과 헌신을 ‘불망비’로 시작해서 마지막에 가서 그 국면을 ‘공덕비’ 이미지로 재현해서 보다 더 울림이 큰 감동을 전달할 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Ⅳ.
양자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파동-입자 이중성이라면, 수필시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와 제재의 이중층위입니다. 박소현 수필은 파동과 입자란 양자역학의 이중구조를 통하여 문학적 성취를 견인한 전략이 돋보인다고 하겠습니다. 보이는 것만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양자역학은 증명합니다. 제재 속에 주제가 있고, 주제 속에 제재가 있다는 것은 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 여섯 가지 중 ‘양자 얽힘’에 해당합니다. 수필은 주제와 제재를 나누어 생각하면 잡문이 됩니다. 박소현의 수필은 주제와 제재가 얽혀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 양자얽힘이란 플러스 마이너스 전자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원자가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어 이 둘을 절대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이 주제와 제재를 떼어놓고 수필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는 수필이 주제나 제재의 문학이 아니라 주제와 제재의 문학이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 양자의 속성, 미시세계 물질의 속성이라는 것은 결국 모든 물질의 속성이 그러하다는 것이고, 우리 인생 또한 그런 원리로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은 인간학인 수필도 그렇게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만약에 보부상의 1차원적인 이야기로 풀어내었거나, 어머니의 헌신만으로 1차원적으로 희생적 헌신의 가치를 파동성으로 풀어내었다면, 단순구성에 따른 단순한 서사가 우리 독자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불망비’의 의미를 ‘공덕’의 이미지로 묘사했기에 미적 감각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 작품의 우수성은 바로 전이미학과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주제의식을 하나로 형상화한 것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지배적 정황으로 제시된 ‘공덕비’는 ‘보부상의 생존 무늬로 의미화된 옹이’와 ‘김주영의 소설 <객주>에서 정한조가 이끄는 소금장수 행수 상단의 거친 숨소리’에 의해 입자화된 까닭으로 우리는 주제의식을 연상과 상상으로 사유하게 되면서 기존의 언어가 제시하기 힘든 미적 사유와 감정을 경험한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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