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구름을 방목하는 언덕에서
도시의 소음이 등 뒤로 멀어진다. 빽빽한 빌딩 숲을 벗어나 강물을 끼고 달리는 길, 차창을 내리니 아직은 차갑지만 어딘가 눅눅한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들이친다.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 남짓, 양평으로 향하는 길은 계절의 경계선 위를 달리는 기분이다.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초입, 그 모호한 시간 속으로 나는 핸들을 꺾는다. 오늘 나의 목적지는 양평 양떼목장이다.
도착하자마자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이국적인 풍차다. 붉은 지붕을 이고 서 있는 풍차는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혹은 돈키호테가 돌진했던 라만차의 평원처럼 낯설고도 반가운 풍경을 자아낸다. 그 뒤로는 아직 잎을 틔우지 못한 나무들이 수묵화처럼 서 있다. 화려한 초록의 옷을 입기 전, 가장 정직한 나목(裸木)의 상태로 서 있는 나무들과 붉은 풍차의 조화가 묘하게 감성적이다. 채도가 낮은 겨울 풍경 속에서 풍차만이 홀로 생기 있는 색을 띠고 있어, 이곳이 꿈과 현실의 경계임을 알리는 이정표 같기도 하다.
매표소를 지나 언덕을 오르니, 드넓은 방목지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위를 수놓은 하얀 점들. 양 떼다. "메에-" 하고 울리는 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책이나 TV에서만 보던, 혹은 불면의 밤에나 세어보던 그 양들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본 양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순박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두툼한 털옷을 겹겹이 껴입은 녀석들은 사람을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건초 바구니를 든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녀석들의 털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을 떼어다 빚어놓은 것만 같다. 손을 뻗어 만져본다. 거칠면서도 푹신한 감촉, 그 안에서 느껴지는 짐승의 체온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그 온기가 꽁꽁 얼어붙었던 내 마음의 빗장을 스르르 풀어놓는다.
축사 안으로 들어서니 또 다른 세상이다. 갓 태어난 듯한 아기 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하얀 털, 아직은 다리에 힘이 덜 들어간 듯 위태로운 걸음걸이,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맑고 투명한 눈망울. 짚단 위에 턱을 괴고 잠든 녀석들의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저 작은 생명체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드넓은 초원을 달리는 꿈일까, 아니면 엄마의 따뜻한 품속을 파고드는 꿈일까. 서로의 몸에 기대어 체온을 나누는 아기 양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잊고 살았던 원초적인 평화와 사랑을 본다.
건초 주기 체험은 이곳의 백미다. 바구니를 들고 울타리 너머로 손을 뻗으면, 양들이 고개를 내밀고 오물오물 건초를 받아먹는다. '사각사각', 건초 씹는 소리가 경쾌하다. 욕심부리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주어진 먹이를 천천히 음미하는 그들의 식사 시간은 보는 이마저 차분하게 만든다. 도시에서는 밥 한 끼조차 전투적으로 해결해야 했는데, 이곳의 시간은 참으로 느리게, 그리고 순하게 흐른다. 양의 순한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눈 속에는 교활함도, 계산도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충실함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 무구한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부끄러워질 만큼 맑다.
목장 주변을 천천히 걷는다. 낡은 나무 수레와 벤치들이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인위적으로 꾸며진 세련됨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낸 투박한 멋이다. 아직은 황량한 들판이지만, 곧 봄비가 내리고 햇살이 따사로워지면 이곳도 연두색 풀빛으로 가득 찰 것이다. 양들은 그 풀을 뜯으며 살을 찌우고, 나무들은 잎을 틔워 그늘을 만들 것이다. 자연의 순환은 어김없이 이어지고, 그 안에서 생명들은 각자의 몫을 살아낸다.
양평 양떼목장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복잡한 생각과 묵은 감정들을 저 순한 양들에게 털어놓고 오는 해우소(解憂所)와도 같다. 몽글몽글한 양털 속에 내 안의 불안을 묻어두고, 대신 그들이 주는 따뜻한 위로를 한 아름 안고 돌아선다.
돌아오는 길, 차 안의 공기가 한결 부드럽게 느껴진다. 어쩌면 내 마음이 순해진 탓일 게다. 붉은 풍차와 하얀 양 떼, 그리고 아기 양의 평온한 숨소리가 잔상처럼 남는다. 다시 치열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 같다. 내 마음속에 구름 같은 양 한 마리를 키우게 되었으니까. 힘들고 지칠 때마다, 오늘 마주한 그 순한 눈망울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양평의 오후는 그렇게 내게 긴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