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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컨 J. 와츠 <상식의 배반(Everything is Obvious)>
"만물의 진리를 꿰뚫고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과 같다"
Everything is Obvious < 상식의 배반 > : Once You Know the Answer
"우리가 그동안 믿고 있던 모든 상식은 옳은가? 비판적 프레임으로 세상을 통찰하는 순간, 새로운 진실이 열린다."
《여섯다리만 건너면 누구와도 연결된다(Six Degrees)》의 저자이자 21세기 사회학계의 데카르트라 불리우는
와츠 (Duncan Watts)가 상식도 무용지식(Obsoledge)이 될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몰상식과 비상식적인 언행과 언동으로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황상민 심리학 교수가 이 책의 해제를 쓴 점이 흥미
롭다.
사회학의 배반, 진리의 배반, 종교의 배반 그리고 상식의 배반.....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불확정적이다.
린 트러스 (Lynne Truss)의 베스트셀러 《먹고, 쏘고, 튄다(Eats, Shoots and Leaves)》의 발행인이 그 책의 성공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질문에 했던 대답이 유일하게 정직한 설명이 아닐까.
"그 책은 수많은 사람이 샀기 때문에 잘 팔렸지요."
이런 설명을 딱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할 때 다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어쨌든 영향을 받을 때도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이 때로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이쪽 혹은 저쪽으로 은근슬쩍 유도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렇게 때문에 작가나 회사의 성공, 예기치 못한 사회규범의 변화, 난공불락일 것 같던 정치체제의 갑작스
러운 몰락 등을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임을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어떤 흥미로운 결과를 특별한 속성 및 조건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없다는 의견에 부딪히면, 우리는 흔히 중요하
거나 영향력 있는 소수가 결정한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위안을 삼는다.
<모나리자>는 이 세상에서 인기가 있지만 다른 버전의 역사에서는 단지 걸작 중 하나일 뿐이고, 대다수가 이름
조차 들어본 적 없는 다른 그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해리 포터> 시리즈와 페이스북, <행오버>의 성공은 내재적 속성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우연과 타이밍의 산물로도 밝혀질 것이다.
2007년 11월 2일 이른 오후, 나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는 모나리자 앞에서 얼어붙은 채로
서 있었다. 나는 모나리자의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매력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예술 사학자 곰브리치(E. H. Gombrich)가 그의 유명한 저서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에 대해 얘기했던 대목이 떠올랐다.
"내가 가장 놀란 것은 모나리자의 생생함이었다. 모나리자는 마치 나를 보고 느끼는 듯했다. 모나리자의 모습은
살아 있는 여인처럼 계속 변했다. 내가 돌아볼 때마다 그녀는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나리자의 사진
에서도 이러한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하물며 루브르에 있는 오리지널 작품은......가히 초자연적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모나리자의 사진만 보고서도 감동을 받았다는 곰브리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품을 보면 그의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루브르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거기서 그의 말을 확인했다. 모나리자는 처음 보았을 때는 약간 슬프면서도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다른
그림들을 휙 둘러보고 다시 돌아왔을 때, 모나리자는 유혹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쳐보았을 때는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곰브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경험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이제 머릿속에서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모나리자의 얼굴이 마치 마법처럼 변화하면서 유혹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불확실성과 애매모호함의 효과를 가장 극적으로 활용해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대가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비밀단체 활동이나 종교적인 음모, 여러 가지 암호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떠나, 모나리자에는 다빈치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실마리가 들어 있다.
다빈치는 1400년대 후반 피렌체의 화가들이 고민했던 문제를 해결했다. 당시 피렌체의 화가들은 어떻게 하면
그림 속의 인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모나리자가 세상에 나오기 이전, 대부분의 작품들은 인물을 생생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 속에는 언제나 조각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사람들만이 있었다.
곰브리치는 화가들이 실제의 모습과 동작을 그대로 베껴서 세밀하게 표현할수록 관객이 작품 속에서 생생한
느낌을 받기 어려워진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은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안개처럼 사라지는' 느낌을 선사한다.
다빈치는 이 기법을 '뚜렷한 윤곽을 없애는' 방법이라고 정의했다.
다빈치는 스푸마토 기법을 바탕으로 대상의 윤곽을 다른 부분과 겹쳐서 흐릿하게 표현했다.
다빈치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생생함의 비결은 바로 이 스푸마토 기법에 있다.
모나리자의 얼굴 특징을 드러내는 눈과 입의 가장자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모나리자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
다빈치는 눈과 입의 윤곽을 일부러 흐릿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고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다빈치는 또한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전체 윤곽을 뚜렷하고 선명한 형태로 표현하지 말고 푸모소
(fumoso, 안개)가 피어나듯 그려라.......즉, 더 혼란스럽게 표현해라. 말하자면, 덜 분명하게 표현해라."
이처럼 다빈치는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곰브리츠는 다빈치가 정확하게 묘사를 하는 것보다 애매모호하게 표현함으로써 관객의 애를 태우는 기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다빈치는 제자들에게 밑그림을 세밀하게 그리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는 '마음속에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간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곰브리치는 스푸마토 기법이란 화가도 볼 수 없었던 것을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
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천재의 손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계속해서 무언가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500년이 지난 지금, 다빈치의 작품들은 여전히 토론의 주제와 출판 및 영화 산업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
매튜 메이의 <우아한 아이디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 (Mark Granovetter)는 아주 단순한 수학적 모형을 사용해 폭도로 돌변하기 일보 직전
의 군중, 이른바 '폭도 모형'을 통해, 그리고 저자 던컨 J. 와츠는 음악 '시장'을 모방한 웹 실험실인 '뮤직 랩' 실험
을 통해 다른 사람이 다운로드한 곡에 대한 정보가 있을 때, 사람들이 누적적 이점 이론이 예측했을 법한 방식
으로 그 정보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아냈다.
다시 말해 모든 '사회적 영향'의 세계에서 인기가 있는 곡은 독립적 환경에서 인기 있는 곡이 누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인기를 누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결정 과정에 사회적 영향을 투입하자 불균등뿐만 아니라 예측 불가능성까지 증가한 것이다.
예측 불가능성은 시장 자체의 역학에 내재한 속성이라는 것이다.
뮤직 랩 실험의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그라노베터의 폭도 모형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통찰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즉, 개인이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때는 비슷한 집단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단치 않은 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결과는 왜 어떤 것은 성공하고 어떤 것은 실패하는지, 사회규범은
우리에게 왜 어떤 일은 하게 하고 다른 일은 못하게 하는지, 심지어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설명할 때 우리가 제시하는 상식적 설명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상식적 설명은 집단의 자리에 대표적 개인을 놓음으로써 개인적 선택이 모여 집단행동을 이루는 방식에 관한
문제를 통째로 피해간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경우, 우리는 즉시 개개인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행동이 바로
그 허구의 대표적 개인('국민'이든 '시장'이든 뭐든)이 원했던 바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뮤직 랩 같은 실험은 미시-거시 문제를 파헤침으로써 이런 형식의 순환논리에서 생기는 오류를 폭로한다.
각 뉴런의 행동을 낱낱이 알아도 인간의 뇌에서 어떻게 의식이 생겨나는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인구집단에 속한 개인의 기호와 경험, 태도, 신념, 희망, 꿈은 알아도 그들이 집단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회적 과정의 결과를 허구의 대표적 개인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보다 훨씬 더
원인과 결과를 잘 구분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셈이다. (pp.110-111)
상식의 놀라운 재주
상식적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순환성을 시정하는 일이 중요한 까닭은, 그 순환성이 사회학 용어로 '미시-
거시 문제(micro-macro problem)', 즉 사회학에서도 중심적인 인식상의 문제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상황은 본질적으로 다수의 사람이 연관된다는 의미에서 '거시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림이나 책, 유명인이 인기를 누리거나 혹은 인기가 없는 것은 오로지 많은 사람이 보여주는 호감의 정도에
따른 일이다.
회사, 시장, 정부, 그밖에 정치조직 및 경제조직이 실제로 어떤 일을 실현하려면 다수가 그들의 규칙을 따라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결혼 같은 사회 제도와 사회규범, 심지어 원칙도 수많은 사람이 믿어주는 정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효력
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결과는 필연적으로 여러 유형의 개개인의 선택, 즉 '미시적' 행위로 촉발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개개인의 미시적 선택이 사회라는 세계의 거시적 현상으로 넘어가는 걸까?
다시 말해 가족과 기업, 시장, 문화, 사회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이 특유의 특징을 나타내는 이유는 무엇
일까? 이것이 바로 미시-거시 문제다.
알고 보면 미시-거시 문제는 과학의 모든 영역에서도 나타나며, 흔히 '창발(emergence)'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가령 어떻게 하면 원자의 무리를 모아 분자 하나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분자의 무리를 모아 아미노산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미노산의 무리와 다른 화학물질을
모아 살아 있는 세포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살아 있는 세포의 무리를 모아 뇌 같은 복잡한 기관을 만들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기관들을 모아 자신의 영구적 자아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지각할 줄 아는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사회학은 아원자 입자로 시작해 글로벌 사회로 끝나는 복잡성 피라미드의 한 귀퉁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 피라미드의 각 단계에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그런 문제가 존재한다.
어떻게 하면 한 수준의 현실에서 다음 수준의 현실로 넘어가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과학은 그 문제를 회피하는 쪽으로 최선을 다해왔고, 대신 그 전체를 이루는 각 수준을
분업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까닭에 물리학은 그 자체로 물리학적 사실과 법칙, 규칙성을 갖춘 독립된 과목이며 화학은 그와 전혀 다른
사실, 법칙, 규칙성의 조합을 갖춘 완전히 다른 과목이다.
생물학 역시 그 자체로 전혀 다른 과목이다.
어느 수준에서는 서로 다른 단계에 일관된 법칙이 적용되기도 하지만(물리학의 법칙에 어긋나는 화학은 있을 수
없다), 하위 단계를 지배하는 법칙으로부터 그 상위 단계에 적용되는 법칙을 도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예컨대 각 뉴런의 행동에 관해 모든 것을 안다고 해도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분자물리학을 완벽하게 알고 있어도 시냅스의 화학을 설명하는 데는 그다지 소용이 없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문제(유전체 혁명으로부터 생태계 보존과 전력망의 연쇄적 장애에
이르기까지)는 점점 더 동시에 둘 이상의 단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창발의 문제에 정면으로 마주
치게 한다.
각각의 유전자는 활성화와 억제의 복잡한 연쇄작용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어느 한 유전자의 속성
으로 환원할 수 없는 표현형적 특성을 나타낸다. 또한 개개의 식물과 동물은 먹이와 포식자의 관계, 공생, 경쟁,
협동 등의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까닭에 한 개별 종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생태계 수준
의 속성을 산출해낸다.
개개의 발전기와 변전소는 고전압 송전선을 통해 영향을 주고받으며 개별 구성 요소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체계 수준의 역학관계를 만들어낸다.
사회라는 체계 안에도 개인 사이의 상호관계, 개인과 기업 사이, 기업과 기업 사이, 개인과 기업 및 시장 사이
그리고 모든 사람과 정부 사이의 상호관계 등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로 가득하다.
개인은 다른 개인이 행동하고 말하고 입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기업은 개별 소비자가 원하는 것에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경쟁사가 생산하는 것이나 채권자의 요구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시장은 정부규제와 각 기업의 행동, 때로는 개인(워런 버핏이나 벤 버냉키를 생각해보라)의 행동
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정부는 기업의 로비스트로부터 여론조사와 주가지수까지 온갖 종류의 영향에 따라 요동친다.
사실 사회학자들이 연구하는 체계 안에서는 상호작용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는데다 그것이 상당히 중요
하기 때문에 사회학적 의미의 창발, 즉 미시-거시 문제는 다른 어느 학문에서보다 복잡하고 다루기 어렵다.
하지만 상식은 이러한 복잡성을 은근슬쩍 덮어버리는 놀라운 재주를 발휘한다.
창발이 어려운 문제인 이유는 전체의 행동을 그 부분의 행동과 쉽게 관련지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임을 잊으면
안 된다.
자연과학에서는 그러한 난점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게놈이 하나의 유전자로서 행동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뇌가 개별 뉴런으로서, 생태계가 개별 생물로서 행동하는 것처럼 말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그런데 사회현상에 관해 말할 때는 가족, 기업, 시장, 정당, 인구집단, 민족국가 등을 '사회적 행위자'로 일컬으며,
마치 그 단위가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과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말한다.
즉, 가족이 휴가 때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하고', 기업은 여러 사업 전략 중 하나를 '선택하며', 정당은 입법 안건
을 '추진한다'고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고업자는 '표적 인구집단'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말하고 월가의 트레이더는 '시장의 정서'를 분석
하며, 정치가는 '국민의 의지'를 들먹이고 역사가는 혁명을 '사회가 열병에 걸린 것'이라고 묘사한다.
물론 누구나 기업과 정당, 심지어 가족이 그 자체로 감정을 느끼거나 믿음을 형성하거나 개개인이 하는 것처럼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다.
심리적 기벽이나 편향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회적 행위자의 '행동'이라는 말이 사실은
수많은 개인행동의 총합을 편리하게 표현하는 약칭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는 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 약칭은 우리가 무언가를 설명할 때 꼭 필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
연합군이나 나치의 행동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이야기한다고 상상해보라.
마이크로소프트나 야후, 구글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의 행동을 말하지 않으면서 인터넷을 이해하려 한다고 상상
해보라. 미국의 의료서비스 개혁에 관한 논쟁을 분석하면서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 또는 '특별이익집단'의 이해
관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어떨까?
마거릿 대처 (Margaret Thatcher)는 "사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개개인 그리고 가족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대처의 이런 신조를 실제 세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하려 하면 어디서
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게 된다.
대처의 그러한 철학적 입장은 사회과학에서 '방법론적 개인주의
라고 불리는 것으로, 사회현상
(<모나리자>의 인기나 이자율과 경제성장의 관계 등)을 전적으로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 의도의 관점에서 설명해낼 수 있어야만 성공
적인 설명으로 간주한다.
개인의 심리적 동기를 기업, 시장, 정부 같은 집합체의 속성으로
돌리는 설명이 편리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철학자 존 왓킨스
(John Watkins)가 말했듯 "가장 근본적인" 설명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방법론적 개인주의자들이 구상한 방식으로 근본적인
설명을 하려다 보면 여지없이 미시-거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은 무언가를 설명할 때, 집단행동을 대표하는
허구적 개인을 뜻하는 '대표 행위자 (representative agent)'를 내세
운다.
중요한 예를 하나 들자면 경제는 무엇을 팔고 무엇을 살지, 어디에
투자할지 결정을 내리는 수천 개의 기업과 수백 만 명의 개인으로
이루어진다.
이 모든 행동의 최종 결과는 경제학자가 경기순환이라 부르는 것으로, 요컨대 주기적으로 상승과 하락을 반복
하는 것처럼 보이는 집단적 경제 행위다.
경기순환의 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거시 경제학의 중심 문제 중 하나이며, 그렇게 된 데는 정책입안자들이 경기
불황 같은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적잖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학적 모형에 의존하는 경제학자들은 경제의 어마어마한 복잡성을 제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단 하나의 '대표적 기업'을 상정하고, 경제의 나머지 부분에 관한 임의의 정보를 고려할 때 그 기업
이 어떻게 해야 합리적으로 자원을 할당할 수 있는가 따위를 묻는다.
그런 다음 그 기업의 반응을 개략적으로 전체 경제가 보이는 반응으로 해석한다.
대표 행위자는 수천, 수백만 명의 개인 행위자 사이에 오고가는 상호작용을 무시함으로써 경기순환 분석을 엄
청나게 단순화한다.
다시 말해 그 경제학자들은 개인행동 방식에 관한 제대로 된 모형만 있다면, 경제가 움직이는 방식에 관해서도
제대도 된 모형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셈이다.
대표 행위자 모형의 접근법은 복잡성을 모조리 제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미시-거시 문제의 가장 큰 난점을
외면하게 한다. 그것이야말로 애초에 거시경제 현상을 '거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핵심인데도 말이다.
흔히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 (Joseph Schumpeter)가 대표 행위자 접근
법에는 결함과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비판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실제로 싸움에서 졌고 그 패배는 경제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역사나 사회학, 정치학과 관련된 책 중에서 어느 것이든 한 권을 골라 계급, 인종, 사업, 전쟁, 부, 혁신, 정치, 법,
정부 등 '거시적' 현상을 다룬 곳을 펼쳐보면 대표 행위자가 득실거리는 세상을 목격하게 된다.
사실 사회과학에서는 현실의 공동체를 허구적 개인으로 대체하는 일을 따로 시인하는 과정조차 생략해버릴
정도로 그 개념이 흔히 사용된다.
마치 마술사가 관객이 다른 곳을 볼 때 모자 속에 토끼를 집어넣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일이 어떤 식으로 행해
지든 대표 행위자는 단지 편리한 하나의 허구일 뿐이다.
대표 행위자를 내세워 하는 설명은 아무리 수학이나 다른 멋진 것으로 치장해도 개인을 묘사할 때 쓰는 말로
기업, 시장, 사회에 관해 말하는 상식적 설명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오류를 범한다. (pp.91-97)
상식은 우리를 어떻게 배반하는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경험이 사회라는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자신의 사고 과정에 대한 내밀한 이해와 다른 사람의 말, 행동, 설명(개인적으로 경험한 것뿐 아니라 객관
적으로 관찰한 것까지)을 무수히 관찰해본 경험이 없으면 인간 행동의 어마어마한 복잡함을 이해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물론 사회에 대한 상식적 설명을 이끌어낼 때 우리는 의지하는 직관, 경험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지식의
조합은 모든 면에서 물리적 상식의 오류만큼이나 체계적이고 도처에 만연해 있다.
첫째 유형의 오류는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를 생각할 때 우리가 필연적으로 늘 의식하는 유도나 동기,
믿음 같은 요소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꽤 분별 있는 말로 들리긴 하지만 심리학과 인지과학에서 수십 년간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 행동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빙산의 일각에 해당한다고 한다.
가령 우리는 주류 판매점에서 틀어놓은 배경음악이 우리의 와인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나, 서체에
따라 어떤 진술의 신뢰성을 더 높일 수도 혹은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점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반응을 예측할 때 그런 세세한 사항은 고려하지 않는다.
외형상으로는 사소하거나 무관해 보이는 많은 요인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사항은 분명 중요하다.
주어진 상황과 관련된 의미 있는 모든 요소를 예측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
리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려고 아무리 신중하게 노력해도 '지금 이곳'을 벗어난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때는 심각한 실수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첫째 유형의 오류가 개인행동에 대한 모형 자체의 결함에서 생긴다면, 둘째 유형의 오류는 그 모형을 집단행동
에 적용할 때 그 결함이 더 심각해지는 데서 발생한다.
여기서 기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사교모임이나 직장, 자원봉사 단체, 시장 및 정당, 심지어 사회 전체 등의
집단을 형성할 때 항상 상호작용하고 정보를 나누며 서로의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소문 퍼뜨리기, 추천하고 추천 받기,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기,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교훈 얻기, 서로의
행동에 보상 및 처벌하기 등을 행하며 좋은 것과 나쁜 것, 싼 것과 비싼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에 관한 서로의
시각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학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처럼 이러한 영향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누적되다가 '창발적
(emergent)'인 집단행동을 창출한다.
여기서 창발적이라 함은 각 구성 요소의 관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다.
어쩌던 그러한 복잡성에 직면하면 상식적 설명은 본능적으로 개인행동의 논리에 의지한다.
우리는 군중이나 시장, 노동자 그리고 선거구처럼 다수의 행동과 상호작용을 대표하는 허구의 '대표적 개인'을
들먹인다. 때로는 지도자나 예지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을 개별적으로 거론하며 그들에게 모든 행위를 귀속시
키기도 한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집단행동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을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 유형의 오류는 우리가 실제로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생각보다 적다는 것이며, 그 오해가 다시 미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시킨다는 점이다.
흥미롭거나 극적인 일 혹은 끔찍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에 대한 설명을 찾으려고 한다.
가령 허시 퍼피가 다시 인기를 얻거나 무명작가가 쓴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될 때, 주택거품이 붕괴될 때,
테러리스트들이 항공기로 세계무역센터를 들이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든 설명을 해보려 한다.
그러나 일단 사태가 벌어지고 난 후에 하는 해명인 까닭에 우리의 설명은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은 모두 제쳐놓고 실제로 일어난 일만 지나치게 강조한다.
더구나 매우 흥미로운 사건만 설명하려 하기 때문에 실제로 일어난 일 중에서 극히 일부만 설명할 뿐이다.
인과적 설명처럼 보여도 결국 그저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는 일어난 일에 대한 묘사는 되지만 그 바탕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러한 설명이 인과적 설명의 형태를 취하는 까닭에 우리는 그 설명이 예언적 힘을 지닌 것처럼 다루
게 되고 그 결과 우리가 예측할 수 있다고 자신을 속이게 된다.
원칙적으로 그런 예측은 불가능한 것인데도 말이다.
결국 상식적 추론의 맹점은 포괄적인 한 가지 한계라기보다 서로 강화하고 심지어 서로 위장하기까지 하는 여러
가지 한계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상식은 세상을 의식하는 데는 훌륭하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그렇지 않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와 천둥소리에 깜짝 놀란 우리의 조상들은 신과 관련해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두려움을 달랬다.
그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지금 자연현상으로 이해하는 천둥, 번개가 인간을 닮은 신들이 벌이는 싸움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상하고 무서운 현상을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설명하는 것은, 아침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만큼은 세상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실제로 일어난 기상 현상을 의식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과학이론의 관점에서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그 고대의 신화를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로만 여긴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 역시 신화처럼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상식적 설명은 세상이 던져주는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 이미 준비된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하루하루를
잘 헤쳐 나가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또한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참인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믿게 된 것인지 걱정해야 하는 부담도 덜어
준다. 그 대가로 우리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얼버무린 것을 스스로 다 이해한 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착각 때문에 의학, 공학, 과학에서 문제를 다루는 방식으로 사회 문제를 다룰 동기는 약화되고 나아가 상식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저해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pp.48-51)
그들 역시 사람이다
물리학의 잣대로 사회학을 평가하는 이러한 경향은 꽤 오래된 것으로, 흔히 사회학의 아버지로 거론되는 19세기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콩트는 사회학을 수학과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함께 현실의 모든 것을 서술하는 여섯 가지 기본 과학
중 하나로 여겼고 심지어 '사회물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콩트는 사회학이 인간이 겪는 모든 경험의 '총체적 이론'이 될 것이고, 다른 모든 과학을 망라하는 동시에 문화,
제도, 경제, 정치 등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확장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내 물리학자 친구가 추구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일반이론이다.
콩트는 한 번도 이 이론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없지만 그의 실증주의 철학(사회적 존재 및 힘은 물리적
존재 및 힘과 같은 방식으로 서술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후에 나온 모든 통합이론을 위한 장을 마련해
놓았다.
콩트 이후 처음으로 그런 이론을 제안한 사람은 다윈과 동시대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 (Herbert Spencer)였다.
스펜서는 사회를 유기체처럼 이해할 수 있다는 개념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개개인은 세포이고 제도는 각 기관의 역할을 하며, 발전은 자연선택과 대략 비슷한 어떤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사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도 다윈이 아니라 스펜서였다.
스펜서의 개념은 유치한 발상으로 여겨져 무시되었지만, 사회는 어떤 전체론적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조직
된다는 그의 기본철학은 콩트의 실증주의와 함께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날 사회학의 거목 중 하나로 인정받는 에밀 뒤르켐 (Emile Durkheim)같은 사회학자의 사상을 형성
하는 데 일조했다.
'진화론적 자유주의의 선구자' 허버트 스펜서 _ 민경국 교수의 경제사상사 여행 _ 한국경제
통합이론의 절정은 20세기 중반 하버드 대학 사회학자 탤컷 파슨스 (Talcott
Parson)의 연구와 함께 찾아왔는데, 그는 나중에 구조기능주의라고 알려진
이론을 제시했다.
파슨스에 따르면 사회 제도는 서로 맞물린 역할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지며
그 역할은 합리적 목적이라는 동기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이 수행한다고 한다.
동시에 개인의 행위는 사회규범과 법률 그리고 그 개인이 속한 제도 속에
암호화된 다른 통제 기제의 제약을 받는다.
파슨스는 다양한 행동이 충족시킬 수 있는 여러 기능과 그 행동이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구조를 철저히 분류함으로써 사회의 모든 것을 서술
하고자 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장대한 체계였고 덕분에 파슨스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누구
보다 위대한 사회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스펜서나 콩트의 경우처럼 파슨스의 '일반이론'도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비판자들로부터 난도질을 당했다.
그의 이론이 말하는 바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은 그렇게 하기를 원
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이론이라고 할 수도 없고
'개념과 정의의 모음'일 뿐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기만 하다는 것이었다.
몇 년 뒤 로버트 머튼 (Robert K. Merton)은 파슨스 이론의 잔해를 돌아보며 사회이론가가 물리학자의 이론적
성공을 모방하려 하는 것은 성급한 행동이라고 결론지었다......
물리학에서는 코페르니쿠스와 브라헤 (Tycho Brahe)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가 수세기에 걸쳐 고되게 해온 관찰
이 쌓인 후에야, 케플러 같은 천문학자가 그들이 물려준 데이터를 설명하는 수학적 규칙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뉴턴 같은 둘도 없는 천재가 나타나 그런 규칙성을 진짜배기 법칙으로 정리했다.
반면 머튼이 말하는 그 사회학 이론가들은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처음부터 사상의 전체 체계를 상정
해두고 자신이 무엇을 측정해야 할지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머튼은 이렇게 탄식했다.
"아마도 사회학은 여전히 그들의 아인슈타인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아직 사회학의 케플러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물며 사회학의 뉴턴과 라플라스, 깁스, 맥스웰, 플랑크는 말해 뭣하겠는가."
머튼은 사회학자가 인간 행동에 대한 통합이론이나 보편적인 법칙 같은 것을 추구하기보다 '중거리 이론'을 만드
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거리 이론이란 고립된 개개의 현상 이상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은 범위가 넓되, 실제적이고 유용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이론을 뜻한다. 예를 들어 '상대적 박탈 이론'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난이 주변 사람
들의 고난보다 심한 경우에만 괴로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자기 집이 화재로 무너지면 충격에 빠져 허덕이지만,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수백 명의 이웃이 죽었다
면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일반적인 이론이 아니고 사람들이 역경에 반응하는 방식을 예측할 뿐이지만, 역경에 대한 인식
에 꽤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마찬가지로 '역할군 이론'은 각 개인이 여러 가지 역할(학교에서는 선생님, 집에서는 아버지, 주말 소프트볼 팀
에서는 포수)을 수행할 뿐 아니라, 그 각각의 역할은 그 자체로 관계(교사와 학생 사이, 자신과 동료 사이, 자신과
교장 사이)의 집합임을 강조한다. 이 이론 역시 어느 정도 구체적이긴 하지만(시장이나 정부, 사회라는 세계의
중요한 특징은 언급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이론에 가깝다.
중거리 이론에 대한 머튼의 주장은 대체로 분별 있는 것으로 간주되긴 해도 더 통합적인 거대 이론을 향한 열망
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실제로 머튼이 그 비평을 내놓은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경제학자 존 허샤니 (John Harsanyi, 1994년에 게임이론
연구로 노벨 기념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함)는 얼마 전 머튼이 터무니없이 때 이르다고 단정한 합리적 선택 이론
이 이런 류의 일반이론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었고 합리적 선택 이론가는 자신들의 노력을 뉴턴 식의 공학에 비유하는
한편, 그 이론의 비판자들은 이전 주기에서 합리적 선택 이론가들이 파슨스 등의 이론에 가했던 것과 동일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전의 다른 이론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선택 이론은 인간 행동의 보편적 이론을 제공할 수 없다는 인식이 점점
자리 잡고 있지만, 아직은 누구도 물리학 선망이라는 질투로 눈먼 괴물에게서 사회과학을 구해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내 물리학자 친구의 불평을 기준으로 판단해보건대, 사회학자들이 마침내 통합이론에 지쳐 모두 포기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긴 틈을 비집고 들어와 통합이론을 요구할 한 세대의 물리학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인간 행동의 순전한 복잡성을 생각해보면 사회과학에는 이러한, 즉 물리학을 닮고 싶어 하는 접근법은 좀 가망이
없어 보인다. 개인의 행동은 수십 가지 심리적 편향으로 더욱 복잡해지고, 그러한 편향 중 상당수는 우리의 의식
적인 인식 밖에서 일어나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개개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집단으로 행동할 때는 우리가 그에 대해 아무리 잘 알고 있더라도 단순히 그
개인의 속성과 동기에서 추론할 수밖에 없다. 개개인과 집단뿐 아니라 시장, 정부, 회사 그리고 우리 스스로 만들
어낸 제도라는 어리둥절한 여러 집합체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세계의 복잡성이 여기서 다 서술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떤 한 사람이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규칙을 서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는 이유가 오히려 궁금해진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내 대답은 사회이론가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도 계획가, 정치가, 마케팅 담당자, 기업 전략가와
똑같은 실수, 즉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의 어려움을 엄청나게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얘기다.
그뿐 아니라 계획가나 정치가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통합이론이 아무리 많이 실패하더라도 그런 이론을 세우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사람이 언제나 다시 등장한다.
아무튼 '그게 로켓 과학은 아니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사회학이 제시하는 것 중 상당 부분이 상식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것이 일단 답을 알고
나면 명백하게 보인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학자 역시 다른 모든 사람처럼 사회의 한 구성원이고,
따라서 단순히 '사회적 삶'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긴다는 것도 문제 중 하나다.
결국 많은 사회과학적 설명이 우리의 상식적 설명에 만연한 것과 동일한 약점(합리성의 사후판단 편향, 대표적
개인, 특별한 사람, 상관관계로 인과관계 대체하기 등)에 발목이 잡히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pp.301-307)
(leetho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