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병선건조
삼별초의 병선은 기본적으로는 강화도에서 남쪽으로 옮겨갈 당시 동원한 병선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남하한 선박은 1천 척에 이른다고 하였고 이에 의해 개경의 고려정부는 해상력에 큰 타격을 입는 어려움을 겪었다.
진도 거점 당시의 삼별초는 남하시 동원한 군선과 서남해안 연안에서 새로 확보한 병선을 기반으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제주로 거점을 이동한 이후에는 제주에서 새로 확보한 병선 이외에 상당량의 군선을 새로 조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몽항쟁기 고려는 연안에서의 입보 정책과 수운로의 확보 등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일정한 조선 작업을 지속했다. 1272년(원종13) 9월 제주 거점의 삼별초가 서해상의 고란도(보령시)를 공격하고 고려 전함 6척을 소각하고 조선 기술자들을 살해한 것도 이 같은 조선작업의 진행을 말해준다.
당시 고란도의 조선장에는 홍주 부사 이행검 이하 결성과 남포의 감무가 주재하여 있었다. 아마 여기에서는 삼별초 정벌을 위한 대규모 조선 작업이 진행 중이었던 것 같고 홍주, 결성, 남포 등 인근 지역으로부터 사람들이 동원되어 부역(賦役)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몽골)의 일본 동정을 위하여 2차에 걸쳐 대량의 군선이 제작되었던 곳은 전북 부안의 변산과 전남 장흥의 천관산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 원종세가 15년 정월에 허공을 전주도 변산, 홍녹주를 나주도 천관산에 파견하여 재목을 준비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들 두 지역은 예로부터 질좋은 목재의 산출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해안의 산지이다. 가령 변산의 경우는 ‘국지재부(國之材府)’라 칭해질 만큼 목재 산출지로 유명하였고, 이 때문에 궁궐 건축과 같은 특별한 용도에 사용하기 위하여 관리되고 있었다.
이들 두 지역에서의 목재 벌채는 확실하지만, 군선의 제작이 벌채된 선재를 다시 특정지역으로 옮겨져 제작된 것인지, 아니면 현지에서 작업을 한 것인지 다소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장흥에서 일본 정복용의 군선 제작이 있었던 사실이 분명한 만큼 두 지역이 모두 조선작업이 이루어진 곳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원감국사 충지는 그의 시에서 군선 제작이 ‘3산’ 즉 세 곳의 산에서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변산과 천관산이 이 ‘3산’ 중에 포함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1산이 어느 곳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혹은 이 1산이 전북 군산지역 금강 하구의 ‘공주산’이 아닐까 추측이 있으나, 공주산의 지리적 조건이 충분한 목재의 공급에 적합한 조건이 아니라는 점에서 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
변산과 천관산 이외에 군선이 제작된 다른 1산이 있다면, 그것은 제주도(한라산)이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이다. 원(몽골)에서 고려에 군선 제작을 요구하였을 때의 서장에 의하면 “대선 300척을 전라도와 탐라 두 곳에서 만들도록 하라”고 전라도와 함께 제주도에서의 건조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주도에서의 군선 제작이 과연 이루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혹 군선의 출항지였던 마산지역에서 일부가 건조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제반 사정을 검토하면 특히 제주 거점 시기 삼별초의 활발한 활동에는 제주에서의 조선 작업이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제주에서의 조선 작업이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진행되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지속적인 관심과 현지 조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 윤용혁 ]
- 몽골제국의 이름은 ‘몽골’로 통일해 표기했다. 단, ‘인용문헌 내용’과 ‘참고문헌의 제목’ 등은 원문에 충실했기 때문에 ‘몽고(蒙古)’로 표기되기도 했다.
- 몽골사람 이름은 처음 나올 때 ‘현 몽골발음표기(일반적인 발음표기, 한자표기, 알파벳표기)’로 표기했고, 두 번째부터는 ‘현 몽골발음표기(일반적인 발음표기)’로 표기했다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