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
싸락눈 몇 됫박 들판에 안치는 저녁이다.
작년에 끌고 간 줄 토막토막 끊어 오는 기러기 울음 굴풋한 어스름.
부메랑 날갯죽지들 붐비는 공중을 바라보며 한 철 들러 갈 것들에게 또다시 가슴을 앗긴다.
어느 추운 고장의 습속일까, 바닥을 짚기 전 몇 번이나 파닥거리는 뜨내기들.
제 기척에도 놀라는 것들은 저런 식의 설은 기억법을 가지고 있어서 한 곳 정들지 못하고 떠도는 것일 게다.
공중을 건널 때와 바닥에 내리는 울음이 설핏 다름을,
가뭇없는 작은 애비 기별인 양 초저녁잠 설치는 서당집 노모 가는 귀 섧도록
주인 바뀐 논배미에 주둥이를 박는 것들의 발목이 붉다.
-김유석 「이력」 전문 『붉음이 제 몸을 휜다』 (상상인, 2020)
거미 죽이기
처마를 턴다.
하루살이나 나방, 제 몸통 하나 겨우 들고 파닥이는 것들의 길목에 줄을 치고
느긋이 허공을 즐기던 거미들 빗자루에 쓸린다.
날개 단 것들을 먹고 산 탓일까
필사적으로 기던 기억 다 잊은 듯
날개 뜯긴 족속들처럼 바닥을 어기적거린다.
건드리면 죽은 척, 죽은 것보다 더 흉측하게 웅크리는 모습
물컹 짓밟는다, 끈적끈적한 감정 속에서
바닥에서 공중으로 기어오른 거미의 내력이 잠깐 바르르 떤다.
흘러간다. 2
빗방울들이 그리는 게 아니야
말랑한 동그라미들
강물이 제 살 위에 물 보조개를 띄우는 거야
큰물이 작은 물방울들을 받는 저 섬세한 통증
빗방울이야 모르지, 강물도 그새 잊고
비꽃 진 이 편 저 편 개개비 울음만 붉어
미필적 감정. 2
사마귀에게 붙잡힌 잠자리를 달아나게 해 준 후
며칠은 곰곰 잠을 설친다.
사마귀는 안중에도 없고
마당 한 바퀴 곡예 하듯 사라진 잠자리 다친 날개를 달고 뒤척인다.
약자의 편에서 며칠은 공연이 부풀던 기분
내 몸 어디 아직 남아있다는 증거가 불편하다.
잠자리보다 배고픈 사마귀로 살아온 터,
사마귀보다 잠자리에 애착하는 이 어설픈 마조히즘
사마귀한테 먹히는 일이
찢긴 날개로 며칠 더 견디는 것보다 나을까, 의심하는 잠을
조등弔燈 같은 눈을 켠 사마귀
당랑권螳螂拳 자세로 돌아 뉘고 간다.
미필적 감정. 3
박주가리* 넝쿨이 소나무를 칭칭 감아 오르고 있다.
한 철 푸름이 사철 푸름을 연모하듯
뾰족한 바늘 감싸 속궁합 맞추는 넓죽한 이파리들의 창연
한눈팔지 않을 수 없겠다. 시샘 많은 솔새 눈 참 붉었겠다.
그렁저렁 세월 슬고 푸름도 지치고
소나무 살 틈 박주가리 힘줄 뻐근하게 늘어진다.
청청하던 솔바람 붉게 여윈다.
공생이었는지 공멸인지
소나무의 무고誣告는 알 길 없고
드난살이 한 평생,
박주가리 갓털이야 바람 따라 날리면 그만이지
그렇게 들러 가는 생들 아름답다 중얼거리는 나의 허물, 하물며
* 소나무와 같은 교목에 얽혀 사는 기생식물
3초
낚이기보다 물어 주고
조금은 엄살스럽게 파닥거리고
툭 튕기고 달아나다
금방 돌아서 다시 미늘에 꿰이는 건 물고기의 몫
3초면 충분하다.
물고기의 기억은 그뿐이란 속설,
그 찰나마저 지워버리려고
빈 낚시를 물고 끌리거나
공연히 수면을 박차기도 하는 물고기들은
같은 곳, 같은 상처를 여러 번 입으면서
오랫동안 기억을 버려왔다.
3초 만에
다시 바늘을 무는 그 물고기를 두고
놓친 고기가 더 크다는 말은 말짱 허사虛辭,
미련인지 홀리는 것인지
밑밥 한 알 달아두고
물속 같은 세상 들여다보며
기억을 부풀리는 조사釣師들은 알 리 없다.
흐르는 물에 살기
3초도 버겁다.
칠월 한낮
비꽃,
소나기 들기 전 후두두 지는 방울 비, 제 울음에 가는귀먹은 매미 울음 사이
뜨거운 적요를 지나는 여우비
비꽃, 진다
양철지붕이나 토란잎, 그늘 얇은 것들 위에 소리만 남기고 사라져버리는 물꽃
비꽃을 맡는다.
화약 냄새 같고 마른 흙에 번지는 물비린내 같고, 달아오른 숨결처럼 훅 끼치는
더운 냄새가
비꽃처럼
‘진다’ 이르던 저버린 일들 안동眼同하고 소나기에 쫓긴다.
부드러운 힘
뚝방 밑에 버려진 토관土管을 호박넝쿨이 그러안고 있다.
벌겋게 드러난 철사 가닥을 연두의 입술로 감아 핥고 있다.
잉잉거리는 벌 소리 꽃봉오리에 싸 가만히 들려주고 있다.
몇 덩이의 알몸 잎사귀로 가리고 딴전 피우듯 살랑대고 있다.
남사스럽게 밝히는 호박 넝쿨의 외사랑 법
뚝뚝한 토관에 푸른 힘줄이 도드라지고 있다.
천형天刑
네 쌍의 눈을 달고도, 공중거미는 먹이를 직접 사냥하지 못한다.
형체가 흐릿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공중에 줄을 치면서부터
또렷하던 그의 홑눈은 여러 겹 상을 맺는 겹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냥 대신 기다림이 생긴 그 후, 진화와 퇴화가 동시에 멈춰버린 공중에
거미는 거꾸로 매달려 살게 되었다. 거꾸로 보면
세상이 잠깐 또렷해지거나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기 때문 일거다.
<산문>
패러디 혹은, 패러독스
팔아먹을 게 어디 그것뿐인가.
폭염이 내리는 이런 날은 마당귀 느릅나무를 베끼기 좋다. 백지장 찢듯 공중을 쏘는 매미울음 고스란히 쓸어내리는 그늘이 섬세한 나무, 촘촘히 붙은 자잘한 이파리들의 그늘이 찰밥처럼 차지다 해서 어떤 고장에선 찹쌀나무라 불리기도 하는 느릅. 매미의 것인지 나무의 것인지, 마당에 고이는 한낮의 그늘을 오독해보기 좋다. 충분히 물릴 만큼 많은 비유가 귀에 익었고 나 또한 두어 번 베꼈던 오래된 소재일 것이나 여전히 느릅나무 풍경에 끌리는 것은 이맘때면 막연히 달궈지는 뜨거운 기억 때문이라기보다 좀 더 절절한 그 무엇이 거기 있는 까닭일지 모른다.
감나무가 낫겠다던 어머니를 우겨 얻어 심은 느릅은 오직 그늘뿐이다. 약으로도 달여 쓴다지만 그보다는 마을 초입이나 문간 밖에 내어놓고 들러 가는 것들 잔등이나 잠시 쓸게 하면 더 없을 품새라 여겨지는 교목쯤이다. 아무런 땅이 건 이물 없이 자라고 어깨높이까지만 가지를 골라주면 스스로 중심을 잡아 세우며 공중을 거느리는 모습이 술명한 수종이라 하겠다. 그것을 굳이 마당에 들인 후 칠월부터 늦서리 다 질 때까지 매미울음이나 어머니 성가신 비질에 얹혀 쓸리는 그늘을 얻었다. 땡볕을 받기엔 느티나무가 제격이겠지만 그보다 느릅의 그늘에 애착하는 건 뭔가 조금 다른 질감이 있다 여기는 내 별난 취향 탓일 것이다.
이번 여름은 서둘러 울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울음 또한 유난히 길다 싶은 매미들이 느릅나무에 붙었다. 갈수록 빨리 와서 오래 나는 뜨거움 때문이리라. 매미가 울 때쯤 들놓고 돌아와 한갓진 시간을 맞는 농투성이 생, 평소엔 눈 한 번 마땅히 주지 않다가 매미가 울면 그제야 흘깃거리는 것이 느릅에 대한 나의 예우이자 허물이다. 딴엔 매미에 끌려 나무를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한철 그렇게 밖에는 지울 수 없는 생이란 듯 자지러지는 매미의 절창과 그 울음 받아 삼키며 자잔히 떠는 나무그늘을
“느릅나무가 많이 아픈가보다/ 저렇게 우는 걸 보니// 얼마나 아픈지/ 온몸이 흠뻑 젖었다”라고 받아 적으며 젖는다. 매미의 오랜 유폐의 시간을 떠올리며 젖고 공명하는 나무가 되어 또 젖는다. 번지는 듯 쌓이는 듯, 들마당의 뜨거움을 조금씩 끌어 적시는 울음에 귀먹다 보면 홀연 오종종 그늘을 둘러앉은 것들이 있다. 꽈리들이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좀 전엔 안보이던 것들이 앙증맞게 눈에 든다. 그전 날엔 토담 밑이며 뒤울안에 썩 흔했던 것들이었지만 요즘은 찾아보기 여간 귀하지 않은 꽈리가 그늘자락을 두르고 익어가고 있다. 조그만 지등紙燈을 켠 듯 발그레한 저 빛은 필경 그늘을 쏘여 물드는 중일 터, 다 익어 터트리면 혹 매미울음 한 소절 쏟아질 것 같은 열매들이 그늘에 밝다. 꽈리를 잘 불던 어릴 적 고 계집애 잔망스런 실 웃음이 어리는가 싶더니 얼핏, 지금쯤 세상 어디메 매미울음소리를 내고 있을지 모를 모습으로 겹친다. 익어갈수록 꼭 다물리는 입술이 붉은 꽈리들 ……, 그 밖에 뜨거움과 그늘 사일 드나드는 메밀잠자리 몇과 마당을 달이는 고추 빛깔 까지가 그늘의 영역이다. 익히 어디선가 들었지 싶고, 한편으론 온전히 나만의 것인 느릅나무 정경일 것인데
이런 식으로 그동안 필사해 온 것들 얼마나 많은가.
들판에 살면서 들판에 살아가는 것들을 숱하게 훔쳐 베낀 것 같다. 뱀 너구리 개구리 염소와 같은 동물들과 거미 하루살이 잠자리 등의 하찮은 곤충들, 게다가 개망초, 돼지감자꽃, 보리밥나무, 탱자 등등의 식물들 할 것 없이 참 무던히도 써먹었다. 어떤 것은 자연한 모습 그대로를 본떴고 어떤 것들은 그들의 편에 서서 나를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그보다 다른 많은 것들을 부조리와 모순, 미망, 욕망, 소외나 중우衆愚 따위 사람의 허물을 함부로 씌워 팔았다. 뱀과 거미는 그 중 유별나다. 그들의 생태를 제멋대로 곡해하거나 아예 부조리하고 파렴치한 인간의 탈로 여러 번 망가뜨렸다. 이를테면 뱀은 그림자를 몸에 두르고 다니고, 그림자로부터 독이 나오며, 그림자를 밟는 순간 치명적이다 썼다. 소름 돋치는 생김에 그 옛날 ‘하와’를 꼬여낸 죄질을 덧입혀 가슴에 독사 한 마리쯤 기르며 살아가는 인간을 빗댄 것이다. 각설
이처럼 나의 비유는 치졸하고 옹색하다. 도무지 엉터리인 구석이 있는데다가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나는 베낄 것이다. 본질과 오류 사이의 긴장을 담아내지 못하고 섣불리 그것들을 팔아먹은 죄 크지만 빈약한 촌부가 그것 말고 무엇을 답사할 수 있겠나.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랄지 좀약 냄새나는 기억들, 그리고 사실이 허구처럼 들리는 이야기들을 나의 사유에 갇혀 때론 불화하고 때때로 동화하면서 살아가는 미안하고 기특한 자연들을 빌어 팔겠다. 다만, 유연한 상상에 좀 더 팽팽한 긴장이 있기를
소 몇 마리 들여 먹이며 열심이 베끼는 중, 생각 같아선 한 백 마리쯤의 비유를 팔아먹고 싶다.
김유석 전북 김제 출생. 1990〈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놀이의 방식』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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