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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를렌 디트리히가 부르는 <릴리 마를렌>, 맨밑은 독일 여가수 안데르센이 부르는 오리지널
'릴리 마를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당시 전쟁화면과 함께 즐감을...화면은 북아프리카 전선이
아니고 러시아 평원에서 벌어지는 독쏘전 모습입니다.
[ 북아프리카 전선 ]
* 북아프리카 전선(맨 오른쪽에 엘 알라메인이 있습니다)
“엘 알라메인 전투 이전에는 영국군은 독일군에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고, 그 이후에는 독일군에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 처칠(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에서)
그것은 거대한 피바람이었습니다. 1942년 10월, 멀리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군을 몰살시키기 위한 소련군의 일제 반격작전(천왕성 작전)이 착착 진행되고 있던 그 시각, 아프리카 전선에서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운명을 결정지을 일대 회전이 한발 앞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반전시켜 놓았다고 일컬어지는 <엘 알라메인 전투>의 혈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 몽고메리 원수
"싸움에 임할 때는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지만 승리를 거두는 순간에는 한없이 오만해지는 사람"
"가라앉은 부하들의 사기를 고무시켜 놓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동기유발의 명수, 비판적인 성격과 함께 지나칠 정도의 신중함, 오직 철저히 준비만을 신봉하는 완벽주의자, 그리고 때로는 다소 소심함"
이것이 1942년 8월, 계속되는 패배의 깊은 상처를 안고 '엘 알라메인'에 고립되어 있는 영국 8군의 신임 사령관으로 부임해온 '버나드 로우 몽고메리' 중장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였습니다.
* <엘 알라메인>에서의 영국군
흔히 말 재간있는 비평가들 중에는 각국 군대의 성격을 평하여 독일군이 뛰어난 천재라고 할 때 영국군은 착실한 모범생이라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제1차 세게대전의 잿더미 속에서 겹겹이 자신들을 옥죄고 있는 베르사이유 조약의 제한규정들을 요리조리 빠져 나가면서 불과 십수년만에 유럽 최강의 군대를 재건해 내었고, 개전 수개월만에 전 유럽을 석권해버린 독일군의 능력은 분명 천재의 그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영국인들은 이런 타고난 천재성같은 것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개전 초기에는 독일군에 밀려 패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덩케르크 철수의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그리스, 그리고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연거푸 고배를 마셨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의 진정한 강점은 독일군과 같은 번뜩이는 천재성이 아니라 지극히 교과서적인 원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들의 평범함 속에 숨어있다고 평해집니다. 1942년 8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던 양군의 지휘자인 독일군의 롬멜과 영국군의 몽고메리에도 이와 똑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 사막의 여우, 롬멜 원수
롬멜은 그야말로 천재였습니다. 상식적인 전술원칙을 무시하고 자유분방하게 구사하는 그의 전술은 한결같이 적의 의표를 찌르는 기발한 것이었고, 특히 실날같은 승기가 포착되기만 하면 지체없이 그것을 잡아채는 대담무쌍한 전술은 그의 군사적 천재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에 반해 영국의 몽고메리는 앞서 언급한 성격묘사 그대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혹시 일어날 수도 있는 우연이나 요행 따위는 전혀 믿지 않았고, 오직 교과서적인 철저한 준비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산술적인 결과만을 신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몽고메리가 주장하는 원칙은 단 한가지 뿐이었습니다.
"이길 수 밖에 없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싸움을 시작하면 반드시 이긴다."
엘 알라메인의 대승리는 결국 몽고메리의 이러한 ‘지극히 평범한 원칙의 고수와 부단한 노력’이 롬멜의 ‘하늘이 낸 천재성’을 꺾어 보인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진격하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
엘 알라메인에 착임한 몽고메리가 발견한 것은 롬멜에게 만신창이로 두들겨 맞아 사기가 바닥에 덜어진 제8군의 괴죄죄한 몰골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상급자 오킨레크 대장이 세워놓았던 작전계획-엘 알라메인 방어선이 돌파당하면 나일강 삼각주까지 철수한다-을 북북 찢어 내던져 버렸습니다.
“이 따위 계획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오늘 이후로 여기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다.”
몽고메리는 우선 최일선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소한 군기를 잡아나가는 일부터 착수했습니다. 병사들의 총과 장비는 언제나 반들거리는 상태로 잘 손질되어 있어야 했고 장교들은 항상 깨끗하게 다림질하여 줄을 세운 바지를 입고 있는 편이 신상에 이롭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군기가 빠진 군대는 이미 전투의 절반을 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죽더라도 깨끗하고 멋진 시체가 되는 것이 영국군의 자랑이며 전통인 것이다.”
* 격전지, <엘 알라메인>에서의 양군 대치 상황,왼편에는 독일군과 이태리군 진지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영국군,호주군,뉴질랜드군,남아연방군,그리스 군 진지가 보입니다
하루 종일 분주하게 숙영지 사이를 오가며 쉴새없이 부하들을 닦아세우고 군기를 불어넣는 그에게는 곧 ‘신병교육대 선임하가’ 혹은 ‘잔소리꾼 시어머니’ 등등의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곧 이런 불평을 내뱉을 시간조차 없어졌습니다. 눈만 뜨면 훈련소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혹독한 훈련에 내몰렸기 때문입니다.
불굴의 정열은 의기소침한 패배의식만큼이나 강한 전염성을 발휘하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몽고메리가 단순한 잔소리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제8군의 장병들은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다 매일같이 신규 병력이 증원되었고 엄청난 수의 야포와 전차들도 속속 보충되고 있었습니다.
공격개시일이 다가오자 마침내 제8군의 전력은 모든 면에서 주축군(독일군과 이탈리아군)에 비해 거의 두배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병력수는 19만대 10만, 전차는 1,029대 469로 앞서 있었고 야포와 대전차포 역시 이 정도의 격차가 벌어졌고 특히 탄약과 연료, 피복과 식량같은 소모품의 보급사정은 영국군 쪽이 훨씬 월등했습니다.
* 롬멜 원수
독일의 경우 독소전이 개시된 이래 히틀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이 아프리카 전선으로 배정되는 물자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다, 그나마 이 무렵부터 지중해상의 제공권마저 영국공군이 장악하는 바람에 독일군의 수송선단이 해상에서 공습으로 불타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독일군의 무기 및 물자부족은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의 대공세 직전에 독일군에 닥친 가장 큰 불행은 롬멜이 건강상의 이유로 본국에 가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계속되는 격전과 가혹한 사막의 환경 속에서 롬멜은 몸을 너무 혹사했던 것이죠. 대신 얼마 전 러시아 전선에서 부임해온 시투메 대장이 롬멜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 공격 개시 : 찢어지는 사막의 밤 >
1942년 10월 23일 밤 9시 30분
지축을 흔드는 거대한 포효가 사막의 하늘과 땅을 뒤덮었습니다. 900여문에 달하는 영국군 포대의 포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광은 동쪽 지평선을 어지럽게 명멸하고 있었습니다. 토막난 철조망과 포탄에 맞아 폭발한 지뢰의 파편, 모래더미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고 콘크리트 엄폐호는 가루가 되어버렸습니다.
* 진격하는 영국군
시투메 대장은 혼란에 빠진 상황을 직접 살펴볼 생각으로 지휘소를 나섰다가 타고 있던 자동차가 포탄에 맞아 모래언덕 아래로 구르면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독일군은 전투개시 두시간만에 지휘관을 잃어버렸습니다.
밤 10시가 되자 포격을 멈춘 영국군은 보병을 앞세워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전차부대를 투입하려면 사전에 지뢰밭을 정리해두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천신만고 속에 지뢰밭을 제거하는 보병들 뒤에는 전차들의 엔진소리가 우르렁대고 있었고 앞에서는 독일군의 대전차포들의 사격이 격렬해지고 있었습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구두수선공 출신 오스틴 긴간드 일병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싸늘한 밤이었지만 포탄의 열기로 온 대지가 뜨거웠고 진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포탄이 작렬하는 섬광으로 우리 눈 앞에 마치 거대한 흰색의 장막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고, 거기에 기대어 설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장막이었다. 나는 총검으로 찢어보고 싶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 찢어지는 사막의 밤
보병들의 지뢰밭 제거가 끝나자 전차들이 달려 나갔습니다.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던 전차의 전면 장갑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일어나면 전차는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몸을 움츠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탄 전차병들은 이미 그 충격으로 대부분 사망한 뒤였습니다.
때로는 이미 목이 달아나버린 운전병이 엑셀레이터를 꽉 밟고 있어 엔진과 캐터필러가 멀쩡한 전차가 계속 앞을 향해 내달려가는 으스스한 광경조차 벌어집니다. 포탄이 명중하는 순간 전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팔하는 경우는 십중팔구 전면 장갑을 관통한 대전차유탄에 의해 전차 안에 싣고 있던 포탄이 유폭을 일으킨 경우입니다.
이렇게 피아간에 격렬한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날 저녁 롬멜이 아직 완쾌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황급히 아프리카로 날아왔습니다. 모든 상황은 롬멜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차를 움직일 연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가까스로 영국군의 파상공세를 막으면서 일주일을 버텼으나 30여대로 줄어들은 전차로는 더 이상 버티기는 거의 절망적임을 깨달은 롬멜은 퇴각을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 지뢰밭을 뚫고...
만신창이가 된 독일 전차들이 서쪽 90킬로 밖으로 물러나서 후퇴에 필요한 연료의 잔량을 계산하고 있던 이튿날 새벽, 분노에 가득 찬 히틀러의 명령이 날아왔습니다.
"아프리카 군단의 장병들은 강철같은 의지로 현 진지를 사수하라.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다는 것은 본인도 잘 알고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불굴의 의지 하나만으로 적의 대부대를 격파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운운...."
명령서를 읽은 롬멜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고 옆에 있던 토마 대장은 좀 더 직설적이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미친 사람의 넋두리다. 나는 이따위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 토마 대장은 훈장까지 주렁주렁 매단 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포로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평소 히틀러의 보잘 것 없는 출신성분을 은근히 조소해오던 자존심 강한 프로이센 귀족출신의 장군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흔히 취하는 반발의 방식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 지뢰밭을 지나 진격하는 영국군 전차부대
롬멜은 히틀러의 명령에 반해 잔존병력의 즉각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탈린그라드에서 파멸이 눈앞에 닥아 왔는데도 미련하게 히틀러의 명령을 고수하다가 독일 6군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 파울루스와 롬멜과의 차이점이었습니다. 비록 히틀러가 후일 마지못해 추인했지만 롬멜의 후퇴 명령과 관련하여 롬멜이 자기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다고 마음 속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의 패전은 곧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독일군은 이듬해 5월까지 튀니스까지 밀려나면서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독일군의 근 일년 반에 걸친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찬란한 신화는 이제 끝난 것입니다.
* 독일군이 남기고 간 88mm포, 이 88mm포는 2차세게대전 내내 가공할 위력을 보였습니다.
* 독일군 포로들
* 몽고메리는 처음에는 아래쪽으로 치는척 하면서 독일군을 혼란시키다가 마지막에는 영국군,호주군,
뉴질랜드군으로 이루어진 혼성 주력군으로 하여금 위쪽에서 천신만고 끝에 돌파를 성공하면서
엘 알라메인의 대첩을 거둡니다
[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전투도 중지했다는 '릴리 마를렌' 이야기 ]
북아프리카 전투가 시작된 이후 엘 알라메인 격전시까지 모래 바람 속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양군 병사들에게 지친 심신을 달래주던 한모금의 청량제가 있었습니다.
황색의 모래 지옥 속에서 격전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독일군 병사들에게 먼 발칸반도의 베오그라드 방송국(유고는 이미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습니다)에서 독일군 병사들을 위한 위문 방송을 시작하였습니다. 고감도의 무전기에 주파수를 맞추면 거의 잡음이 없는 깨끗한 음질의 방송을 생생하게 청취할 수 있었습니다.
베오그라드의 한 방송기사가 먼지 쌓인 낡은 음반들 속에서 우연히 음반 하나를 찾아내었고 그것을 방송으로 내보냈습니다.
“외로운 병영에 어둠이 깃들고, 길 건너 가로등에 불이 켜지면 휘뿌연 안개 속에서 문득 혼령처럼 나타나는 나를 기다리던 너, 릴리 마를렌...”
독일 여가수 ‘랄레 안데르센’이 매혹적이고 우수어린 목소리로 불러주는 이 노래는 모래 먼지 속에서 악귀처럼 싸워야하지만 돌아서면 심약하고 외로움을 타는 젊은 병사들의 가슴 속에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밀려드는 전선의 요청에 따라 그때부터 라디오 베오그라드는 매일 밤 9시 57분이 되면 어김없이 이 노래를 내보냈고, 그 시간이면 병사들은 라디오 앞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고향집과 연인을 그리워하는 병사들의 심정에 국적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1차대전에 참전했던 독일 퇴역장교 ‘한스 라이프’가 쓴 짧은 시에다 곡조를 붙인 이 독일어 노래의 가사를 이해할 턱이 없는 영국 병사들도 애조 띈 이 노래의 가락에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그들은 곧 하나 둘, 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무전기 앞에 붙어 앉아 독일군의 무선통신 내용을 감청하던 무전병들이 그 선구자였습니다.
‘릴리 마를렌’은 사막에 싸우고 있는 영국군과 독일군 양쪽 병사들의 성가(聖歌)가 되었습니다.
< '릴리 마를렌' 가사 >
막사 앞의, 커다란 정문 앞에,
가로등이 하나 서있고 그녀는 아직도 그 앞에 서 있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그리워 하지 ,
가로등 옆에서 함께 서 있기를 원하지,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우리 둘의 그림자가 하나로 보이네,
우리가 서로 너무도 사랑한다는 것을 보는 사람은 금방 알겠지.
모든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가로등 옆에 서 있는 모습을,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벌써 보초병이 부른다
점호 나팔이 울린다(안들어오면)"3일 영창행일 수도 있어"
"전우야, 나 곧 갈께"거기서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지,
나 그대와 같이 가는 것을 얼마나 원했던가,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그녀는 그대의 발걸음을 알지,
그대의 멋진 발걸음을.매일 저녁 그녀를 애태웠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잊은지 오래됐지.
그래서 나는 고통을 느껴야 했지,
누가 가로등 옆에 서있을 것인가?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조용한 공간(무덤)에서부터,
이 세상 밖으로 나는 꿈꾸듯 떠있다,
사랑스러운 그대의 입술,
늦은 안개가 방향을 바꾼다면,
나는 가로등 옆에 서 있을 것이다 ,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 마를렌 디트리히 ]
* 마를렌 디트리히
독일 출신 여배우 겸 가수.1901년 베를린 쉐네베르크에서 태어난 디트리히는 그녀가 29세 때인 1930년 조셉 폰 스턴버그에게 발탁되어 <블루 엔젤> 캐스팅되면서 은막의 스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습니다.<블루 엔젤>에서 그녀는 요염한 작부역을 맡아 그녀 특유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면서 인기를 얻자 할리우드로 넘어갔습니다.
그 이후 스텐버그가 감독하고 게리 쿠퍼와 공연한 <모로코>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30, 40년대의 섹스 심벌로 각광을 받았으며 백만불짜리로 일컬어지는 당대 최고의 각선미 소유자로 유명했지요.
독일 출신의 그녀는 제2차대전 당시 독일과 미국 병사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의 양심의 상징이라고 일컬어졌던 명곡 <릴리 마를렌(Lilly Marlene)>을 불렀고 나치에 반대하며 미국 국적을 취득해 미군 위문공연에 나섰다는 이유로 오랜기간 고향인 독일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리고 히틀러와의 협력을 끝까지 거부하고 결국은 미국으로 망명을 택했고 1992년 5월 6일 파리의 자택에서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습니다. 신병을 비관해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안데르센이 부르는 오리지널 '릴리 마를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