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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8일(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마가복음 1:35~45
감출 수 없는 기쁨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4페이지 형식
*설교 주제: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히 치유하신다.
*설교 목적: 우리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야 한다.
1페이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하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전날 밤늦게까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 들렸던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날 밤, 피곤에 지치신 예수님은 곤한 잠을 청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매우 이른 새벽 아직도 어둑어둑할 때, 예수께서는 일찍 일어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제자들 사이를 빠져 나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신 곳은 인적이 드문 광야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른 새벽에 한적한 광야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참을 기도하시던 예수님께 제자들이 나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 모든 사람이 주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베드로의 말을 들으며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저는 베드로에게서 다급함을 느낍니다. 지금 베드로는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의 치유가 절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지금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수님께 알려야 할 책임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의 요구대로, 예수님은 지금 당장 기도하시는 일을 멈추고 마을로 들어가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처럼 수많은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한 음성으로 베드로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병자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혹시 당혹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의 치유를 외면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사는 모든 병자를 고치신 후에 다른 마을로 자리를 옮기셨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요?
한 나병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나병 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진영 밖에 나가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레 13:45~46).
어느 날,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율법을 어기고 사림들 앞에 나왔다가 발각된다면, 그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자신의 질병을 치유 받기 위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는 과정에서 제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신 장면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시체와 다름이 없는 부정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면서까지 율법의 규정을 어기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지 않고 다만 말씀으로만 치유하셔도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예수님께서 치유가 필요한 많은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시고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셨던 일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몰려 들였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어기면서까지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의 몸에 대셨던 일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혹시라도 바리새인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큰 문제로 삼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를 치유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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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빛나교회를 섬기셨던 유재명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의 아내 되는 사모님이 결핵 판정을 받고 나서 겪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세수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아내는 기력이 없어 송장처럼 누워만 있었습니다.
제가 세수하다 말고 나와서 전화를 받으려는데, 갑자기 속이 너무 상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어 벽에 던져버렸습니다. 도대체 아내가 왜 아픈지 원망이 생겼고, 어느 사이엔가 미운 마음도 싹텄습니다. 목사인 제가 말입니다.
-출처: 유재명, 「은혜는 더 낮은 곳으로 흐른다」 (두란노, 2016); 「생명의 삶」 (두란노, 2017년 3월호), 59에서 재인용.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에 박경임이라는 분이 「슬픔은 발효 중」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을 지으신 분은 ‘자살 유가족’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자살 유가족이란 딱지는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 책을 지으신 분은 엄마와 오빠 두 가족의 자살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겠습니까? 이분은 자살 유가족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자라야 했을 것입니다.
김치나 막걸리가 발효 중이라면 금방 이해가 될 텐데, ‘슬픔이 발효 중’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발효’란 효모나 세균 같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미생물에 의해 유기물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유익한 물질이 만들어지면 그 과정을 사람들은 ‘발효’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 몸에 해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그 과정을 ‘부패’라고 부릅니다.
과연 우리의 슬픔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도록 발효될 수 있을까요?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13756311667018&id=100090979547421&mibextid=Nif5oz
우리 다시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베드로의 말에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제가 이야기 초반에서 현실의 다급함이나 수제자가 지녀야 할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말했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베드로의 말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느낍니다.
그는 지금 수많은 문제를 안고 찾아오는 사람들 앞에 서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 앞에도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목받을수록, 베드로의 주가도 올라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성취에 도취해 있었습니다.
어젯밤에도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각종 병든 것을 고쳐주셨고, 귀신들을 내쫓아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밤늦게까지 사역하셨지만, 모든 사람의 병을 고쳐줄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열광했고, 그럴수록 예수님의 희소가치는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까이에서 보필하던 제자들은 일종의 희열감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마치 예수님의 승리가 자기들의 승리인양 승리의식에 도취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는 베드로의 말속에 자신이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 인정받는 사람으로 서 있다는 일종의 승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환호하고 있는 군중들 속으로 다시 들어가자고 예수님께 요청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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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에 무엇 때문에 온 지 너희들이 아느냐? 사람들에게 인기와 환호를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전도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사이, 자신이 부름을 받은 목적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이른 새벽 한적한 곳에 나가 기도하시던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칫 사람들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느라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 버릴 수도 있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기서 “전도”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다른 여러 성경에서 “전도”를 “말씀을 전파하는 것” 혹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우리말 성경, 표준 새 번역).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에 다니시면서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쫓아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예수께서는 더 많은 지역을 다니시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 치유하시기 위해 한적한 기도의 자리로 한걸음 물러나셨습니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을 찾으셨던 이유는 더 많은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 사건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전인적 치유에 집중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전인적 치유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나병 환자는 율법의 규정을 거슬러 자기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나병 환자의 행동과 고백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치유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과 겸손으로 예수님의 치유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에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졌습니다. 나병 환자의 소원과 예수님의 소원이 만나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에게 엄히 경고하시되,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같은 명령이 내려진 이유는 나병 환자의 치유를 제사장을 통해 공식적으로 선언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제사장이 나병 환자의 몸을 살펴 그가 치유되었다는 것을 선언한다면, 치유를 경험한 나병 환자는 율법이 정한대로 제사를 드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의 전인적인 치유를 원하셨고, 그것을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의 전인적인 치유를 위해 그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물론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행위는 율법을 어기는 행위였습니다. 율법은 누군가가 부정한 자에게 손을 대 자신도 부정해지지 않게 하려고 이것을 규정했을 뿐입니다.
율법의 목적이 정결이라면,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부정한 자로 취급당했던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 그를 고치심으로,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부정함을 깨끗함으로 바꾸시는 분은 누구실까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시고, 부정함을 깨끗함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과거에는 부정한 자였으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깨끗함을 받은 나병 환자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는 기쁨을 참지 못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지만, 나병 환자에게는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존재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나가서 자신이 경험했던 치유 사건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이 소문이 갈릴리 모든 지역에 널리 퍼지게 했습니다. 비록 이 일로 예수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셨지만, 사방에서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의 기쁨은 감출 수 없는 기쁨입니다. 억누를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정했던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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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러분에게 유재명 목사님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사모님이 결핵 판정을 받고 이 목사님은 너무나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목사님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3주 동안 금식 기도를 하러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이 분 안에 원망과 미움이 가득한데 무슨 기도가 됐겠습니까? 그저 자기 신세가 처량해서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며불며 기도하는데, 순간 하나님께서 이 분의 마음을 깊이 만지기 시작하셨습니다.
“네 아내가 왜 아픈 줄 아니? 너 대신 아픈 거다. 너를 위해 아내가 희생하는 거다. 그런데도 아내가 미우냐?” 순간 이분의 자아가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이 분이 집에 돌아와서 아내를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 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 아픔이, 실패가 그냥 있는 것 같습니까?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확실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 구원 계획을 이루시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출처: 유재명, 「은혜는 더 낮은 곳으로 흐른다」 (두란노, 2016); 「생명의 삶」 (두란노, 2017년 3월호), 59에서 재인용.
저는 여러분에게 「슬픔은 발효 중」이라는 책을 쓴 박경임 씨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이분은 자살 유가족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지금 필리핀 루손섬 공동묘지 마을로 알려진 ‘샤몰로그’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분은 선교사입니다. 박경임 선교사는 바다 저편 낯선 공동묘지 마을로 건너가, 그곳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슬픔이 발효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분한 애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책을 통해 상실로 인해 아파하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껏 슬퍼하라.”라며 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상실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상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실 앞에서 충분히 애도하며 슬퍼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슬픔이 발효되는 충분한 애도가 필요합니다.
팀 켈러는 그의 책 「죽음에 관하여」에서 상실의 아픔과 애도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소망에 절인 슬픔'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소금에 절인 고기가 썩지 않듯, 슬픔도 소망이라는 소금에 절이면 그 슬픔은 상하지 않고 오히려 지혜와 긍휼과 겸손과 애정이 싹튼다고 합니다.
우리에겐 슬픔을 절일 수 있는 소망이 필요하고, 우리에겐 슬픔이 발효될 충분한 애도가 필요합니다. 발효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비틀거리는 당신에게 슬픔의 눈물일랑 어서 닦아버리고 웃으라 재촉하지 맙시다. 힘겨워하는 당신에게 어서 빨리 일어나라 뛰어라. 밀어붙이지도 맙시다. 상실로 인해 슬퍼하는 당신을 결코 다시는 정죄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슬픔도 발효 중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13756311667018&id=100090979547421&mibextid=Nif5oz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제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출 수 없는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어 ‘충분한 애도가 필요한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 많이 당황하지 않으셨나요?
갓난아기의 울음과 웃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복잡한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웃으며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감출 수 없는 기쁨’과 ‘애도가 필요한 슬픔’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때로 우리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발효 중인 슬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을 우리가 감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가 느꼈을 기쁨은 인위적이거나 조작된 기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움직이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기도하셨고, 한 나병 환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되, 온전히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의 소원과 여러분의 소원이 만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가진 기쁨은 감출 수 없는 기쁨입니다. 만약 우리가 슬픔을 겪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슬픔 역시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기에, 우리가 겪는 슬픔의 감정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애도해야 합니다.
우리 기쁨의 근원이 되시고, 슬픔 중에도 하늘 소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기쁨을 사람들에게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