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족영원
신해욱
깊은 잠을 자는 개의 규칙적인 숨소리 옆에는
음을 영원히 놓친
가수의 표정만이 허락된다고 하지.
그런 표정을 연습한 적이 없으니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애국가보다 재미있는 노래를 하나라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족영원의 순간이라 중얼거려봅니다.
열대에 서식하는 백여 종의 눈먼 생물이
양서류 무족영원목 무족영원과에 속한다고 합니다.
파훼
삼복염천에 누가 삼각자를 들고 무더위의 모서리를 찾아 헤매는 것 같습니다.
가자. 가까운 데로. 가장 가까운 데로. 더 가까이. 맨발로 스텝을 밟고. 턴을 하고.
골목이 있다. 문이 있다. 문턱이 있다.
벽은 없다. 산은 높다. 들판은 넓다.
발끝으로 서서. 누가. 삼각자로 잰 높이. 무릎걸음으로. 삼복염천에. 삼각자로 잰 길이. 삼각자에는 갓이 있다. 눈금이 있다. 닮은꼴이 있다. 원점의 원점으로부터. 높이의 높음. 넓이의 넓음. 삶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영혼은 무기질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는 단단하다. 에테르는 투명하다.
넘어지는 것 같습니다. 누가. 삼각자로 재야 하는 기울기. 두 번. 세 번. 네 번. 삼각자가 더듬는 깊이. 힘을 준다. 다시 두 번. 다시 세 번. 짚이는 데를 짚고. 각은 날카롭다. 눈금은 치밀하다. 찾지 못한 깊이. 들킬 수 없습니다. 삼 복염천에. 잘못 찾은 깊이. 삼각자에 깔려 경험론자의 경험이 대신 찢어지고 경험의 틈이 벌어지고
벌어진 틈으로 미지의 액체가 콸콸 흘러 흙이. 숲이. 습함이. 병듦이.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여름은 비참하게 길고 병듦이. 붉음이. 시듦이. 슬픔이.
보잘것없는 상념이. 건조불멸의 시름이. 어지러운 빈혈의 마음이.
깜부깃병에 휩쓸린 보리밭이. 개구리밥에 뒤덮인 연못이. 향토색에 찌든 자연이.
바람이 분다. 삼복염천에.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바람.
나무가 있다. 삼복염천에. 이글이글 타 죽은 나무.
타 죽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누가. 머리를 식히는 것 같습니다. 삼각자를 이마에 대고. 목을 꺾고. 흙은 붉다. 살갗은 얇다. 껍질은 떫다. 연못은 깊다. 잘못 깊다. 부러진 삼각자에 찔려. 흥청망청 쏟아지는 것들. 곤드레만드레 흘러내리는 것들.
삼복염천에. 누가 잡초를 움켜쥐고. 통곡을 하는 것 같습니다.
⸺시집 『무족영원』 (2019년 12월)
첫댓글 음을 영원히 놓친
가수의 표정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