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같이 읽는 두번째 발제글입니다.
우리가 수요상담모임에서 말하는 틀을 바르게 하는 내용입니다.
읽고 모여서 얘기나눠요!
줌주소는 당일에 올리겠습니다!
심리학 이론: 우리 눈에 맞는 안경 맞추기
문은희_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 심리학박사, 계간 「니」 편집장
우리는 자기 시력에 맞는 안경을 써야 뭐든 제대로 볼 수 있다. 나의 오랜 친구가 눈이 나빠졌는데도 안경을 잘 쓰려 하지 않았다. 그의 해명은 “안경을 쓰면 더러운 것이 잘 보이는데, 안경을 쓰지 않으면 모두 깨끗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던 그 친구가 소녀 적에 한 말이다. 좋은 말 같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현상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고 외면하듯 고개 돌리고 살고 있기에 그냥 좋게 들어넘길 말이 아니다. 그 친구는 훗날 어떤 일들로 견디기 어려워졌을 때 내가 쓴 글조차 읽기 힘들어했다. 달마다 우리 단체의 소식지를 내면서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보고 성찰하며 바로잡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글을 실었는데 그 친구가 그 글을 읽기 힘들다며 소식지를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더러움?)를 있는 그대로 볼 줄 모른다면, 아니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르게 고치며 살 수 있겠는가? 그냥 덮고 지나치며 “나는 문제가 없다, 세상은 모두 깨끗하고 아름답다”고만 하며 지나치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그런데 아무도 다른 사람의 시력이 되어 대신 보아줄 수 없다. 그러기에 아무리 아끼는 친구라도 그가 보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고, 읽으려 하지 않고,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면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자신을 보고,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신을 제대로 알고, 생각하여 판단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모두 자기 시력에 맞는 안경을 쓰고, 보청기를 달고, 마음의 온도를 재는 체온기를 가지고, 심장의 박동을 듣는 청진기를 갖추어야 한다. 모두 의사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진단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진단’이라는 말은 원체 ‘안다’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러기에 모두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포함한 행동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안경을 쓴 심리학도들이다. 좋은 심리학도인지 아닌지는 얼마나 정확한 안경(이론)을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의사들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고 오진하는 경우가 있듯이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잘 모르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마음을 나도 몰라!”는 대중가요 가사로 등장할 만한 말이다. 우리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으니 그만큼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인기가요의 구절이 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려니 하며 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평생을 살 생각이 아니라면 정확히 자기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정확한 도수의 안경이 필요하듯이 좋은 심리학 이론을 갖추고 있을 필요가 있다. 심리학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심리학을 공부하려 하면 우리는 보통 심리학서적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도서관이나 책방에 가보면 심리학서적들이 아주 많다. 우리의 마음을 끄는 매력있는 제목의 대중심리학 책들이 잘 팔려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곤란한 것은, 너무나 많아 고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수많은 심리학도들 수만큼 많은 이론이 있다고 할 수 있어서 어느 것을 택할지 곤란에 빠지게 된다. 마음이 혹하도록 아주 잘 쓴 책을 읽게 되면 우리는 글쓴이의 논리에 빠져들게 되기 쉽다. 어떤 한 사람의 이론에 빠져서 그 이론(안경)으로만 자신을 보려고 하게 되면 그 이론(안경)으로 볼 수 없는 자신의 면을 놓치게 된다. 보기를 들어 사람을 동물의 요인만으로 본다면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책들이 흔히 그렇게 만들어져있기 쉽다. 개미를 연구해서 사람을 유추하는 것 같은 것이나, 단순하게 유전인자만으로 사람의 이타성이나 이기성을 단호하게 말해주려는 책들이 그런 것이다.
균형잡힌 인식의 틀을 갖는 것이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려면 제대로 분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고 분류해보면 그 많은 이론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심리학도가 가지고 있는 인간관에 따라 심리학의 이론이 만들어진다. 그 말은 세 가지 인간관으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되면 우리를 치우치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철학이나 신학 등 다른 학문영역에서 다루는 인간관과 달리 심리학에서는 ‘사람(개인)’이 ‘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가 하는 견해의 차이로 나누어볼 수 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환경에서 떨어져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가정, 학교, 동네, 종교, 문화, 정치, 역사, 지역, 날씨, 나라, 국제사회 어느 것 하나도 개인의 삶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 가까이에 있는 부모는 아이의 환경이고 아이는 또한 부모의 환경이 된다. 그런데 그 관계에서 개인이 환경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세 가지 각도로 보자는 것이다.
첫째로 개인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에 초점을 두는 인간관이 있다. 개인의 타고난 특성과 자질이 거침없이 자라고 꽃피는 것을 환경이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J. J. 루소의 소설 『에밀』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우리같이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일률로 줄서기를 기대하는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보아야 한다. 내가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심리학공부를 하고 싶어지게 만든 책이 바로 『에밀』이라는 책이었다. 루소가 사람을 고운 눈으로 보았다면 유명한 심리분석가 S. 프로이드는 사람의 본능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억눌리어 자란 우리네 여성들의 피어나지 못한 행동과 삶에 대해서 프로이드가 잘 설명해주는 게 아닐까?
둘째는 환경이 사람을 주름잡고 만들어낸다고 여기는 인간관이다. 우리에게는 훨씬 익숙한 생각이다. 교육으로 일정한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기는 의도를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행동주의 심리학이 이런 인간관에 터해서 발전해왔다. 아이들을 백지장 같다고 여겨서, 교육하는 어른이 어떤 그림을 그리려 하든지 그 의도대로 아이를 교육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환경의 조건을 조절함으로 목표하는 행동을 학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잘 알려진 B. F. 스키너가 자기 딸을 유리상자에 넣어 기른 것은 극단의 경우이나 많은 교육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학도들이 행동주의를 수입해서 우리나라 교육을 이렇게 만들기도 했지만 우리의 유교적인 인간관이 이에 적합하기도 하여 짝짜꿍이 맞았던 것이기도 하다.
셋째는 사람과 환경이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교섭의 관계라는 견해이다. 나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다. 연년생이라 거의 딱 붙어 지낸 셈이다. 그러나 얼굴 모양서부터 둘은 아주 다르다. 그 아이들이 다르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각자 나에게는 아주 다른 환경이 된다. 따라서 내가 그 아이들에게 또한 각자 다르게 대하게 된다. 나는 분명 문은희라는 한 사람인데도 그 아이들의 특징에 따라 다른 환경(엄마)구실을 하게 된다. 남편은 하나라서 그 하나의 환경에 대해 비교적 균일하게 행동하지만, 둘 이상 아이가 있는 어머니의 경우 편애해서가 아니라 아이의 다른 요구에 따라 다른 짓을 하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심리학이 그런 뜻에서는 사회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의 세계 안에서 서로 환경이 되어주는 관계를 밀접하게 가지는 것이 교회의 구실이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여러 가지 행동을 심리학의 안경으로 들여다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