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으로 태어나서 인생에 오욕락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출가를 해서 걸망을 짊어지고
선방으로 이렇게 돌아다녀.
주지도 안 하고,
무슨 일체 것을 다 버려버리고 이렇게 걸망을 지고
선방에 나온 것만 해도 참 장하고 기특하고 훌륭하지.
그러나
결제하고 해제하고 걸망을 지고 동쪽 서쪽으로 이 선방 저 선방으로 다니는 것도 생각해 보면 장하고 또한 멋진 인생이라 할 수가 있지마는,
어찌 그것만으로써 청풍납자(淸風衲子)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정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부모형제를 버리고 인생의
오욕락까지 다 버려버리고 출가해 가지고도 명예와 이익, 명리를 다 버려버리고 탁 걸망을 짊어지고 나왔다면
진발심을 해야겄더라
여기서 한 철 지내보고는
또 그저 또 저리 걸망지고 가고, 또 다른 선방에 가서
쪼끔 해보다가 또 해제하면 이 선방에 오고,
철새처럼—저 오리, 기러기나 저 두루미 또 황새처럼
그냥 무의미하게 철 따라서 저 시베리아로 갔다가
저 한강(漢江)으로 왔다 낙동강으로 갔다가,
저 중국 양자강으로 갔다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그렇게 왔다갔다하면,
하나의 일반 사람들이 볼 때에는 멋지게 사는
납자일런지는 모르나
그렇게 참 철새처럼 살아서 또 뭣 할 것이여?
그렇게 살다보면 내생에는 그런 황새 같은 것이 되어가지고 또 세계를 계절 따라서 날아다니는 황새 밖에는 더
될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가 출가(出家)한 목적,
부처님께서 이 출가 제도를 만들아 논 이 목적은
황새처럼 떠돌아다니라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말이여.
정말 진발심을 해야겄더라.
어느 곳이고 한곳에서,
기왕 이 용화사 법보선원(法寶禪院)에 왔으면
이 법보선원에서 그 간절한—녹음법문일망정,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살아계신 조사의 법문으로 알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정말 한바탕 아주 뿌리를 뽑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한 번 닦아 주었으면.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이 송담이 원력을 세우고 참 잘 외호를 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한철 겨우 나고 또 걸망지고 갔다가 이럴 것이 아니거든.
한번 들어왔다 하면은 여기서 아주 뿌리를 뽑아버려야 돼, 아주. '죽어서 송장으로 나갈지언정 이 자리를 뜨지
아니하리라'
부처님께서도 정각산(正覺山)에 들어가서 ‘
내가 여기서 성불하지 아니하면 이 자리에 뜨지
않으리라. 일어서지 아니하리라’
고봉 스님도
내가 여기에서 확철대오를 못하면은 여기서 내가 살아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는 이런 3년 사한(死限)을 하고.
이러한 대신심과 대분심이 아니고서는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3년을 사한(死限)을 하고
그 자나깨나 화두를 들고 했지만 조끔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지지도 않고 망상 아니면 혼침, 혼침 아니면 망상으로 3년을 그렇게 지내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안 된다고 한탄을 하고 다른 데로 떠날 생각을
하시지 안 했습니다. 고봉 스님이 만약에 한 철 해보고
안 되어서 다른 절로 가고, 또 거기서 안 된다고 이리
오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떠돌아다니고 말았다면
그러한 대각(大覺)을 성취하지 못했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진에 있어서는
‘이만했으면 되었다’ 한 그러한 한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화두가 순일하게 잘 들리고 성성적적하게 들린다 해도, ‘하! 참 공부가 잘된다. 참 기쁘다’ 그 생각 내면 벌써
정진이 아닌데, 어떻게 되어야 ‘이만했으면 공부가
잘된다’고 만족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금강경』에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多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 이런 사과(四果)에
성현이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한 생각을 내면 수다원이
아니요,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하면 아라한이
아니요, 내가 보살과를 증득했다 하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는 그 법문이 구구절절이 씌여 있습니다.
정진을 하다가 좀 화두가 순일하고 성성한 경계가 나타났다고 해서 어찌 그까짓 경계를 가지고 족한 마음을 내서야 어찌 그것을 참 납자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그만한 경계쯤이야.
무슨,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그 경계요,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봐도 하나도 의심할 것이 없고 모두가 그 소식 같지마는, 그까짓 것을 어찌 이사(理事)에 맥힘이 없는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라 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조사(祖師)의 경지,
불조(佛祖)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거든,
정진하다가 조끔 깨끗하고 고요한 경지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까짓 것을 족한 줄을 알고. 체, 한 생각에 천만
길 지옥구뎅이로 떨어지는 결과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공부가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서는 안 되지만,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화두가 들리지를 않고 의단이
현전하지를 않고, 들을 때뿐이지 금방 일 분도 안 되어서 딴생각이 일어나고, 딴 망상이 일어나고 번뇌가 일어나고 그렇지 않으면 혼침이 일어나고,
그런다고 해서 '아 이거...' 퇴태심을 내고
자포자기를 할 수야 더군다나 없는 일이여.
그럴수록에 악착같이 대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자가
새끼를 낳아 가지고 그놈을 따뜻하게 품안에 안고
젖을 먹이고 그런 게 아니라,
그놈을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뜨려서
수십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트려버리면 그놈이 떨어져
내려가지고 죽지 않고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에 한해서 젖을 먹여서 키운다 그 말이여.
그 떨어져 갖고 맥을 못 추리고 죽어버린 것은 그건 버려버린 거고. 올라오지도 못하고 뻐르적거린 것도 그런 것도 돌아보지도 안 해. 그놈이 애미 있는 데를 찾아서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이라야 되거든.
옛날,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는
오늘날처럼 이렇게 선방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먹는 거 입는 거 처소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을만한 그렇게 박한 상태에서 그래도 거기에서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해 가지고 그런 대도를 성취를 한 것입니다.
그동안에도 참 무던히 여러 가지 좋지 않는 여건에서
참 정진하니라고 애들 쓰셨지만 앞으로는 여건이
나쁠수록에, 수용이 박할수록에 더 대용맹심을 내서
결정코 대도를 성취를 해서
여러 단월(檀越)들에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의 몸뚱이를 낳아주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로 하여금 공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선방과
전통을 남겨주신 우리의 조사와 선지식과 부처님의 은혜를 보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활구참선 정법도량 용화선원
첫댓글 법문내용 없이 제목만 올려 져 있었네요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