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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성=보나파르트, 이름=나폴레옹 이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지중해 서쪽의 작은 섬인 코르시카 섬의
이탈리아 소지주 보나파르트 집안에서 8명의 자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이며 귀족회의 의원인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 였으며, 어머니는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였다.
처음엔 집안 살림이 어려워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브리엔느 유년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784년에는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군인 시절
16세의 어린 나이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발랑스에 주둔한 라 페르 연대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마르세유에서는 유복한 상인 집안인 데지레 클라리와 연인 사이가 되어 약혼식을 올렸다.
1795년 10월 5일 파리에서 왕당파의 봉기가 일어나자 시원스럽게 진압함으로써 사단장이 되었다.
1796년, 데지레와 파혼하고, 귀족의 미망인으로 바라스의 애인이기도 한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결혼한다.
같은 해, 바라스에 의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이때 나폴레옹의 나이는 27세였다.
그러나 혁명 정부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 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돌은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의 실패 후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에 의해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혼자서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정국을 지켜본 그는 동생인 오백인회 의장 루시앵과 시에예스, 탈레랑의 도움으로 1799년 11월 9일 의사당에서
자신의 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백인회는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오백인회를 해산시켜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들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통령 시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통령 정부가 3명의 통령으로 이루어졌으나,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모아졌다.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려 하였다.
알프스를 넘는 일을 당시 그의 부관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나폴레옹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외쳤다.
험준한 알프스를 넘고 1800년 6월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고,
북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했다.
나폴레옹은 내정 면에서도 일대 개혁을 실시했다.
또 국내 법 정비에도 임하여 1804년에는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다. 이것은 최초의 민법전으로
‘만민의 법 앞에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 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밖에도 교육 및 교통망 정비에도 진력하였다.
한편으로는 현 체제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그리고 1802년 8월 2일에 그는 종신통령이 되어, 자신의 독재권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나폴레옹의 황제 시절
1804년 7월의 국민투표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찬성하여 제정을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에 마침내 즉위식을 거행하여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프랑스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야심만만했던 나폴레옹은 역대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을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하였다.
대관식에서 조제핀에게 직접 황후관을 하사하는 나폴레옹, 다비드작, 베르사이유궁전과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한 나폴레옹
그를 공화제와 인민들의 영웅이라고 생각해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으로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예정이었던
교향곡 제3번을 작곡하고 있던
베토벤은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나폴레옹에게 곡을 헌정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목도《영웅》으로 변경했다.
황제 시절의 나폴레옹. 근위기병 대령 복장을 하고 있다.
프랑스 육군은 10월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빈을 점령한다.
나폴레옹은 이 날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유럽 대륙의 중앙부를 제압한 나폴레옹은 독일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거의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1807년, 나폴레옹은 폴란드로 진격하였다. 같은 해,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을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국왕 내쫓고 자신이 스페인을 통치하게 되었다.
스웨덴에 대해서도 프랑스 원수 베르나도트를 왕위 계승자로 파견하여,
베르나도트는 1818년에 즉위하여 스웨덴 국왕 카를 14세가 되었다.
몰락
그의 가정사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1810년 1월 10일 나폴레옹은 14년 동안 함께 살아온 황후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혼인하였다.
마리 루이즈는 이듬해인 1811년에 로마왕 나폴레옹을 낳게 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프랑스군은 점령국에서 갖은 횡포를 부려 원성이 잦아지게 되었다.
1808년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점령에 반대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게릴라전으로 저항하자,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탄압했는데,
그러자 점령국 사람들의 환호는 저항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골칫거리는 역시 영국이었다.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만다.
이것은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1814년에 정세는 한층 더 악화되어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연합군 25만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16만이,
남쪽에서는 웰즈 리 장군의 10만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강요당했다.
3월 31일에는 제국의 수도 파리가 함락된다.
나폴레옹은 결국 1814년 4월 16일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한 뒤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의 영주로 추방되었다.
백일천하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해 민중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 복위하는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은 결국 또다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승세를 거두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 공격으로 완패하여 백일천하는 끝났다. (실제로는 95일) 나폴레옹은 최종적으로 영국 군함에 투항하였다.
영국 정부는 아서 웰링턴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폴레옹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에 유폐시켰다.
그 저택 주위에는 많은 보초병들이 지키고 서서 나폴레옹의 행동을 실시간 감시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수행원에게 구술 필기시킨 방대한 회상록을 남겼다
(에마뉴엘 라스 카즈의 세인트 헬레나의 회상 등).
이것들은 그의 인생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관과 역사관, 인생관을 총망라한 것이어서
나폴레옹 전설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망
나폴레옹은 특히 섬의 총독인 허드슨 로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그는 무례하게도 자부심 강한 나폴레옹에게 보나파르트 장군이라고 부르며 썩은 포도주를 따라주는 등
나폴레옹을 철저하게 조롱했다.
또, 나폴레옹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를 본국으로 귀국시켰다.
그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 매일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세상을 떠났다.
암살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정식 사인은 위암이라고 발표되었다.
그 유해는 1840년 5월에 영국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에 반환되었으며,
현재 파리의 시파리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나폴레옹의 키
나폴레옹의 키가 155cm 가량의 왜소한 체격이 상식처럼 되었으나,
실제로 나폴레옹의 사망 당시 키는 약 168cm로 당시 프랑스 군인의 평균 신장인 약 164cm보다 컸고 전혀 왜소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나폴레옹의 근위대들 키가 약 190cm 정도였으므로 상대적으로 나폴레옹이 작게 보였고,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 키는 약 170cm 정도로 당시 유럽에서는 전혀 작은 체구가 아니었고
도리어 체격이 좋은 편에 속했었다.
[대관식의 방.]
이곳 베르사이유궁전 에는 그 유명한 나폴레옹의 대관식 그림이 있다.
파리 노틀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루는 장면으로 나폴레옹이 왕비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우려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나폴레옹이 다비드에게 그림을 두장을 그리라고 했다.
이곳 베르사이유궁전에 있는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도 걸려 있다.
두개 그림의 다른점은 조세핀 여왕의 뒤쪽에 서있는 여인들 중에
네번째에 있는 여인의 드레스색인데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그림에는 네번째에 있는 여인의 옷색이 핑크색인 반면에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그림에는 그 여인의 옷색은 다른 여인들과 같은 색이다.
다비드는 고전주의 화가
대관식은 1804년 12월 4일에 있었는데 다비드는 그 해에 이 작품의 제작을 의뢰 받아 다음해 12월에야 제작을 시작했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자기 스스로 대관 한 후에 황후가 되는 조세핀에게 관을 씌워 주는 광경으로
교황 비오 7세가 소심하게 그 대관을 축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화면 구상은 나폴레옹의 권력이 자신의 힘에 의한 것 이지 타인으로부터 수여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화면 정면에 별실로 만들어진 장소에는 나폴레옹의 어머니와 가족들이 모여 있지만 사실 그녀를 참석시킨 것이다.
다비드의 이 작품이 유명한 이유는 역사적 사실은 엄수하면서 그 내용을 더욱 강조했을 뿐 아니라 여기 참석했던 인물들의 성격과 심리적 반응을 이 예식을 통해 노출시켰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1810년 관전에 전시되었으며 작가는 나폴레옹의 10년상을 받기도 했다.
<출처: 다음백과 지식>
[조세핀]
조세핀의 본명은 마리 조셉 로즈로, 1763년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섬의 몰락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왕실 근위대 대장이었고, 어머니는 넓은 영지를 가진 귀족가문의 딸이었지만,
조세핀이 태어날 무렵 그녀의 부모는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조세핀은 부모님의 보살핌으로 큰 어려움없이 자유로운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그녀는 한 교회의 여학교에 입학해서 4년간을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공부를 받았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녀는 파리로 갔는데, 이모의 소개로 총독의 아들 보아르네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 조세핀의 나이는 15살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곧 조세핀에게 싫증이 나서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하게 되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조세핀은 이제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며 자기도취에 빠져 살았다.
그런 방탕한 생활을 하던 조세핀은 어느날 우연히 나폴레옹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그녀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바라스의 연인이었다.
얼마안가 나폴레옹은 조세핀에게 청혼을 했지만 조세핀은 이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세핀은 나폴레옹보다 6살이나 많았기 때문에 자신이 나이가 들어 늙고 초라해지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망설이던 조세핀에게 옛 연인이었던 바라스가 그녀를 격려했고,
결국 그녀는 나폴레옹과 결혼을 한다.
결혼 두달만에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났지만,
전쟁터에서도 그녀를 그리워해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조세핀은 나폴레옹과 결혼한 후에도 심한 남성 편력을 보였는데, 이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이 단걸음에 달려와
조세핀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조세핀의 눈물과 아양에 결국 그녀를 용서하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인맥을 이용해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의 성공을 도왔다.
그리고 몇년 후 나폴레옹은 마침내 황제가 되었고 조세핀은 황후의 자리를 차지할수 있었다.
황후가 된 조세핀은 사치와 방탕함이 줄어들지 않았는데,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서서히
다른 여자들에게 눈을 돌리면서 그녀와 정리를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원만히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엘리제궁과 마르메종 궁전을 내어주고 별거를 하면서
황후의 신분은 유지시켜주었다.
하지만 조세핀과 멀어지면서 나폴레옹은 점점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두 사람이 별거한지 얼마 안되어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 쫒겨나고 말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로 신흥세력에게 동정표를 얻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후 불행한 삶을 살게 되지만 그녀는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귀족들과 친분을 쌓고 지냈는 등 황후시절보다 더 화려한 인생을 보낸다.
1814년 조세핀은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인생은 초기는 평범했고 여자의 몸으로 혼란스러운 변혁의 시기를 살아가기 위해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지만 결국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매우 극적인 삶은 산 여인이었다.
[펌: 다음 블루노트님]
첫댓글 대단한 조세핀황후 멋진노르웨이 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 ㅎㅎㅎㅎㅎ
그러니 그녀를 버리지 말았어야... 부와 명예를 가저다 주는 신 같은 여인이었구만...
ㅎㅎ미모만큼 화려한여인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