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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춥고 지리했다
단기 3958년(1625) 초겨울 프라하
프라하를 거점으로, 보헤미아인들의 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한스는 자신의 부관
네로와 함께 프라하를 떠나는 스웨덴 군을 배웅하기위해 말에 올랐다. 구스타프는 여름에 있었던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스웨덴 군대를 발틱해 연안으로 철수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일보 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라고 생각하는 구스타프와는 상황이 다른 한스는
스웨덴 군의 철군이 불안하기만 했다.
“정녕 가시는 것 입니까 ?”
어떻게든 스웨덴의 철군을 막고 보헤미안 지역을 발렌슈타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한스는 공연한 것인 줄 알면서도 다시금 구스타프에게 확인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네.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 많은 신구교가 연합을 했는데 그들과 싸울 도리가 없는 것
아닌가 ? 작센공이 한스장군을 도와준다고 약조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그대들에게 얼마간의
자치를 허용한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 말게. 그리고 난 스웨덴으로 돌아가지만, 군대는 뤼베크와
주변에 그대로 놓아둘거야. 프라하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도울 수 있도록 하겠네.”
“발렌슈타인 공작은 폐하께서 프라하를 떠나면 바로 프라하를 공격할 것입니다. 폐하의 길목을
가로막고도 남을 위인입니다. 보헤미아인으로는 발렌슈타인 공작의 용병들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 ”
한스는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푹푹 내뿜었다. 또다시 광란의 보복전이 보헤미안지역에 벌어지면
보헤미안인들의 전멸을 각오해야만 했다.
“아무리 발렌슈타인이라도 황제의 명을 거역하지는 못 할 거야.
정 걱정이 되면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좋을 텐데. 여전히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나 ?”
공의회가 보헤미아인들의 자치를 수용한 것은 구교도와 일부 신교도들을 말한 것이지 한스 같은
후스파 신교도들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점을 잘 알고 있는 구스타프는 차마 그 일을 한스에게
말하지는 못하고, 궁여지책으로 자신과 함께 뤼베크로 가자는 제의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스는 그런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보헤미안 내란 중에 수만 명의 사람이 발렌슈타인
용병대의 창칼에 죽어나갔고 그 수 만큼의 사람들이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이제 그들마저
땅을 버리고 떠나면 이 지역은 발렌슈타인에게 완벽하게 넘어가는 꼴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한스로서는 죽더라도 이곳에서 죽어야만 후손들에게 면목이 섰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전멸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그래야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지 않겠습니까 ?
폐하께서 남겨주신 아돌프 소총이라면 쉽게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해방군으로 들어왔다 도망가는 자신을 비난하기는커녕 이렇게 배웅까지 해주는 한스가
고마울 따름이었지만 구스타프는 프라하를 다시 온다는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유럽에 들어와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한스 장군을 사지에 남겨놓고 떠나야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구스타프는 아돌프 소총 200정을 한스에게 넘겨주기는 했지만
발렌슈타인 군대를 막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발렌슈타인을 항상 경계하십시오.”
“알았네. 잘 가게”
프라하에서 대략 2킬로미터를 배웅 나온 한스를 비롯한 보헤미안 기병대가 구스타프 진영에서
멀어져 갔다. 물끄러미 멀어져 가는 기병대를 바라보던 구스타프는 초겨울 대륙성 혹한이
몰려오기 전에 발틱해 항구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부대를 이동시켰다.
“비록 이렇게 철군을 하지만 아주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냐.
하지만 십자군에 낄 방도를 찾아봐야 하는데.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합류해야 되는데...”
라히프치이 근처를 지나가는 스웨덴 군대는 베를린이 가까워지자, 발렌슈타인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설레임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구스타프는
앞으로의 일을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한자동맹 소속 항구 도시들이 스웨덴에 충성을 맹세하고 신성로마제국에서도
그것을 묵인했으니, 대륙으로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입니다.
루이 13세에게 손을 좀 쓰면 십자군 원정에 참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걸립니다. 터키와 대한제국은 동맹국 아닙니까 ?”
카를스타드 재상이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대한제국의 중압감은 항상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게 손에 넣기를 원했던 러시아와 폴란드 대부분을 너무도 손쉽게 점령해 버린곳이 대한제국이었다.
“대한 제국. 유럽전체가 힘을 합쳐도 이기기 힘든 나라가 대한제국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우리 스웨덴이 언제쯤이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지… 휴”
구스타프는 대한제국을 생각하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위험하고 멀리 하기엔 더욱더 위험한 나라가 대한제국 이었다.
지금은 동맹을 맺고 있지만 언제 깨질지 아무도 몰랐다.
“이자벨 공주님을 대한제국 황제에게 시집 보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이자벨을 ?”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제안에 구스타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군.
하지만 대한 제국 황제는 이미 황후가 있지 않는가 ? 하긴 그래도 괜찮지.
스웨덴으로 돌아가면 재상이 한번 이 일을 은밀히 추진하도록 하게. 하하하”
재상의 기발한 제의에 가슴이 시원해진 구스타프가 모처럼 기분 좋게 웃음보를 터트렸다.
지금껏 유럽 각국의 왕들은 공주는 다른 나라 왕자나 국왕에게 아니면 유력한 가문의 장자에게
시집가서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그 존재 이유가 이었다.
그럼에도 구스타프가 대한제국과 혼인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막연하게 마음 저편에 깔려있는
동양인에 대한 우월감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아시아인들과
남미 유럽 원주민들을 동일시 하고 있었고, 말하는 원숭이 쯤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발렌슈타인은 구스타프가 프라하를 떠났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마자 모든 병력을 뤼첸으로 집결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는 황제의 특명을 무시하고 구스타프를 공격하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의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빠져나가는 구스타프를 조용히 보낼 수는 없었다.
그를 고이 보내면 발렌슈타인은 재정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용병들과 함께 모집 된 그의 군대에게 지급된 비용은 누군가가 대신 만들어줘야 했고,
그 누군가는 작센공과 구스타프 그리고 보헤미아인들이 되어야 했다. 이미 제국내의 모든 병력을
지휘할 권한을 확보한 그에게 황제의 특명은 명령으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발렌슈타인은 구스타프보다 한발 앞서 요한 장군의 흑기사단과 페르난데가 이끄는 용병기병대를
뤼첸에 모아놓고 크리스티안 폰 일로 장군이 이끄는 보병사단과 케플러와 함께 움직이는 포병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캐플러가 라이프치이에서 개량된 야포로 무장한 포병연대와 발렌슈타인이
합류할 무렵 구스타프의 선발대가 그들의 정면에 나타났다. 자신의 길목을 발렌슈타인이
막고 있다는 소식은 긴 행군에 지쳐있던 스웨덴군을 곤혼스럽게 만들었다.
“기병만 삼만 명은 되어 보인다는 거냐 ?”
“그렇습니다. 폐하”
“발렌슈타인 공작이 페르디난트 황제의 명령을 무시할 만큼 컸단 말인가 ?”
구스타프가 생각하기에 이번 일은 황제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황제는 공의회의 결정을
파기할 만한 일을 벌일 위인이 못 되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신성로마제국 영토에서 철군한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뻐할 사람이었다. 설사 황제가 자신을 공격할 마음이 있었더라도 수십명의 선거후
선제후들의 동의를 얻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모든 상황으로 판단하면 이번 일은 발렌슈타인이
독자적으로 벌인 일임이 확실하고, 프라하도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많았다.
“폐하.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이번 싸움은 이겨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만약 패한다면 더욱 큰일이고 말입니다.”
토르스덴손은 뤼첸으로 가지말고 드레스덴으로 방향을 바꿔 베를린으로 향하길 바랬다.
그의 말대로 이미 끝난 싸움을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모든 것이 스웨덴에게 여의치
않았다. 뤼첸이나 드레스덴이나 북부 지역은 대부분 평원지대로 발렌슈타인의 기병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스웨덴 군을 앞질러 갈 수 있었다.
“포대장님은 한가지를 간과하셨습니다. 대평원 지대에서 우리가 움직일 곳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빌헬름 2세의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한바탕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
피할 수 없는 전투라면 일단 이겨놓고 보는 것이죠. 나중 일은 나중에 따져 보고 말입니다.
이럴 시간에 좀더 유리한 위치로 이동하는 것이 더 현실적입니다.”
전방에 출현한 적을 뚫고 지나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지휘부의 토론을
묵묵히 듣고 있던 구스타프는 주변 지형도를 펼쳤다.
자신의 군대에게 가장 유리한 곳이 어디인가를 살피는 그는 한참동안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흔한 숲조차 모두 농지도 개간 되어서 드문 드문 작은 숲들이 주변에 있을 뿐이었고,
포병대를 배치할 만한 언덕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드레스덴 주변에 아주 휼륭한 지형을 발견하고는 얼굴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레스덴으로 방향을 바꾼다. 대열 전방에 포대를 배치하고 후미는 빌헬름경이 맞도록 하시오 ?”
“폐하 ?”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구스타프를 바라보았다.
공격진형을 갖추라는 명령이 있어야 했지만 그 반대의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싸움은 유리한 곳에서 해야 이길 확률이 큰데, 이곳은 너무 불리해.
더군다나 명당자리를 다 잡아놓고 기다리는 놈들에게 내 목을 들이 밀수는 없지.
발렌슈타인이 정 싸우겠다면 장소는 우리가 정한다. 추격을 해오지 않으면 더 좋고.
지금 즉시 최고 속도로 이곳까지 이동한다. 기병대는 맨 나중에 천천히 뒤따라 오도록”
당대 유럽 최고의 전략가이자 전술가로 평가 받는 구스타프의 설명에 제장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구스타프의 예상대로 된다면 최악의 상황이 최상의 상황으로 바뀔 수 있었다.
“구스타프가 방향을 바꿨습니다. 아무래도 피해갈 모양입니다.”
요한 장군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흑기사, 기병 정찰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정리해서
발렌슈타인에게 보고를 올렸다. 아담 트로츠카 연대의 주 활동무대가 이곳인 점을 감안하여
그의 연대 전부가 정찰임무에 투입되어 있었다.
“일로 장군은 언제쯤 도착한다 하던가 ?”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메르세부르그를 통과하고 있다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발렌슈타인은 모든 계획이 조금씩 어그러지자 불안감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구스타프는 뤼첸으로 들어와 자신과 한바탕 격전을 해야 했다.
평원에서 보병을 이끌고 기병대의 추격을 뿌리친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었다.
“일로 장군이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다.
일로 장군에게 행군속도를 높여 가능한 빨리 우리 뒤를 따르라는 전령을 보내라 그리고
페르난데는 즉시 적을 추격한다. 요한장군은 적의 예상진로를 막아라.
구스타프가 다른 길을 잡을 생각이라면 리에사난 마이센에서 다시 한번 방향을 틀 거다.”
뤼첸에 모여있던 기병대 병력이 먼지를 휘날리며 흩어졌다. 포병연대와 발렌슈타인이 가장 늦게
뤼첸을 떠나자 삼만여명의 군대로 북적대던 주변이 조용해졌다. 구스타프가 최고 속도로 움직였지만
체 하루가 지나지 않아 페르난도의 기병대에 의해 뒷덜미를 물리게 되었다.
리에사까지 움직이려던 당초 계획을 변경한 구스타프는 오차츠 부근에서 행군을 멈춰야만 했다.
“주변에 제법 높은 산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토르드덴손은 평원지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해발 315미터를 자랑하는 산을 바라보며 약간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포대는 평지보다 높은 곳이 제격이었다. 발렌슈타인이 이렇게 빨리 뒤쫓아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구스타프는 서둘러 유리한 지역을 선점하기 위해 병력을 산개 시켰다.
적보다 유리한 거라고는 위치 밖에 없었던 구스타프는 단 한번의 공격을 저지시키고
바로 역공으로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차츠 부근에서 스웨덴군의 발목을 붙잡는데 성공한 발렌슈타인은 빈에서 온 손님 때문에 구스타프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적이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에 공격했어야 했지만 칼 혼 하라흐는
구스타프를 그냥 보내라는 황제를 칙령을 내세워 더 이상의 전투를 하지 말 것을 종용하고 나섰다.
“총사령관. 그만 하시오. 황제께서는 지금 그대의 군대를 터키로 보내고 싶어하시오.”
“안됩니다. 거의 다 잡은 쥐입니다.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 다음에 겁을 상실한 이교도놈들을 혼내주겠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 황제는 자네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네. 지금도 각 제후들이 자네의 해임을 건의하고 있어. 당연한 일이지만 제국을 위협하는
세력이 사라졌는데 어떤 제후가 자네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
그건 황제 속마음도 마찬가지일거야.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이쯤에서 물러나게. 바티칸에서도
이번 일을 주시하고 있네. 자네와 구스타프를 중재하기 위해 사절단이 빈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빈을 떠났으니 지금쯤이면 빈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을 거야.”
구스타프라는 걸출한 인물이 지휘하는 스웨덴이라는 위협적인 적이 사라진다면 발렌슈타인의 입지는
그만큼 약해질 것은 자명했다. 그래서 발렌슈타인은 이번 싸움을 꼭 해야만 했고 이겨야만 했다.
그렇다고 구스타프를 제거해서는 안되었다. 발렌슈타인은 단지 구스타프로부터 발틱 연안이나
대서양에 있는 항구 하나 정도는 얻어내야 했고 얼마간의 배상금과 프라하에 대한 확실한 권리를
받아내야 했다. 구스타프는 발렌슈타인에게는 아직까지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전투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번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이미 모든 것은 끝이 났습니다. 기다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바타칸이 이번 일에 개입하기 전에
일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장인어른을 뵙지 못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장인어른은 어제가 아니라 모레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
하라흐는 총사령관이자 자신의 사위인 발렌슈타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총사령관이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하니 마음이 약간 움직이기는 했다.
제국의 영토를 유린한 침략군을 그냥 보낸다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했다. 하라흐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알아챈 발렌슈타인은 하라흐의 마음을 완전히 바꿀 당근을 은근히 제시했다.
“적당한 선에서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구성될 대서양 함대의 운영을 장인어른께 드리겠습니다.”
“대서양 함대라니 ?”
하라흐는 금시초문인 대서양 함대라는 말이 나오자 의문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신성로마 제국의 취약점이 무엇입니까 ?
바로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처럼 강력한 함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는 대서양 건너 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제국은 비좁은 대륙 안에서 움츠려 들고 있습니다. 이번에 구스타프에게 그걸 받아낼 가 합니다.”
“그런가 ? 그런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니. 알았네. 하지만…
아니야 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하겠네. 그 사이에 승전 보와 협상내용을 알려주어야 하네.”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한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하라흐는 일단은 이틀이라는 시간을 주기로 했다.
자신은 이곳에 오는 도중 마차 바퀴가 고장 나서 한 이틀 늦었다고 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설사 발렌슈타인이 진 다해도 자신은 손해 볼 일이 없었다.
“저를 믿으십시오”
“알겠네. 그럼 난 이만 사라져야겠군. 이틀 후에 다시 오겠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하라흐가 자리를 뜨자 발렌슈타인은 칼 폰 하라흐의 뒷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실룩거렸다.
가까이 있었다면 들었을 욕설들이 입술을 비집고 빠져 나왔다.
“늙은 곰탱이 같은…. 부관”
짜증섞인 목소리에 부관이 황급히 지휘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전 부대에 당장 공격준비를 갖추라는 명령을 하달하도록. 준비되는 즉시 공격한다.”
“네 사령관님”
‘구스타프가 나의 제안을 거절하고 싸우길 원한다면 콧대를 꺾어 버리고 협상 의자에 앉히면 된다.’
부관이 뛰쳐나가자 그는 혼잣말을 해댔다. 하라흐 때문에 공격 시간을 잃어버리자 그는 하라흐에게
말했던 협상조건을 담은 서신을 구스타프에게 보냈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담하기만 했다.
구스타프는 그 중 단 하나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단기 3958년(1625) 초겨울 북부 평원
해양성 기후와 대륙성기후가 교차하는 평원지대는 수테덴 대간으로 이동할수록 기후가 급격히
대륙성기후로 변해가 겨울에는 연이어 눈발이 계속되곤 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대륙성 기후는
점차 대서양으로 확장되어 온 대지를 얼어붙게 했다.
곧 닥쳐올 추위를 걱정하던 구스타프는 발렌슈타인의 군대가 움직인다는 소식에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했다. 발렌슈타인이 공격을 하지 않고 자신을 이곳에서 묶어두려고 했다면
다음해 봄에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해야만 했을 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에서
혹한은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적이기도 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작전대로 움직이라고 다시 한번 전해라”
이번 전투에서 끝장을 봐야만 하는 구스타프는 가용 병력 전부를 대기시켰고 자신도 직접 말을 타고
전투에 참가할 생각이었다. 비록 처음부터 이곳에서 싸우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발렌슈타인보다는 훨씬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적 기병대로 인해 진영에서 왼쪽으로 한참 떨어져 산자락에 매복하고 있는
빌헬름 기병대와의 연결이 단절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만일을 대비해서 이중 삼중의 신호체계를 약속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참호선을 뚫고
통신로를 장악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포병 준비”
지휘 막사를 걷어버리고 몸소 마상에 올라타 언제라도 돌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던 구스타프가
적 기병대가 돌진해 오는 모습이 보이자 큰소리로 외쳤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포병대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리 만무하지만 이심전심이 통했는지 포성과 함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토르드덴손은 적 기병대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약속대로 포도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시우웅 꽝”
포도탄이 페르난도의 기병대를 덮쳐갔지만 넓게 산개해서 돌진하는 기병대를 저지시키기에는
토르드덴손이 가진 포대의 숫자가 부족했다. 직격탄을 맞은 적 기병대원이 말과 함께
조각나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지만 적의 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포신을 닦아라. 재장전”
화약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포병대원들은 헝겁뭉치가 달려진 막대기로 포신을 열심히 닦고
다시 포탄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서너차례의 포격이 더 가해졌지만 페르난도의 선봉이
참호선에 근접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조준”
참호선 중앙에 배치된 아돌프 소총 중대장이 참호선에 들어간 제1렬을 향해 사격 준비 명령을 내렸다.
그사이 2렬 3렬은 장전을 마치고 중대장의 명령을 기다렸다. 8렬 순차사격이라면 전방으로 쇄도해 오는
적기병대의 돌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격”
“탕탕탕”
중대장의 명령에 참호선 1렬이 사격을 가하자 주변에 있던 다른 중대에서도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최고 100야드의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는 아돌프 바퀴식 소총이 불을 뿜자 기병들이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땅으로 쳐박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2렬 조준”
중대장의 명령에 참호선 밖에서 대기중이던 2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 쏴 사격자세를 취했다,
“사격”
“탕탕탕탕”
“3렬 조준”
2렬이 뒤로 빠져 재장전하는 사이 3렬이 앞으로 나와 사격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착검”
8렬의 사격이 끝나고 재사격을 준비중이던 병력들이 착검이라는 명령에 서둘러 대검을 꺼내 총에
장착하기 시작했다. 100여미터를 눈깜짝할 사이에 달려온 기병대로 인해 중대장들은 재사격을 포기하고
착검을 지시했다. 상비군답게 절도 있는 스웨덴의 아돌프 소총연대는 페르난도 기병대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앙에 배치된 아돌프 소총으로 무장한 연대에
해당되는 이야기 였고, 구식 화승총으로 무장한 다른 연대는 페르난도 기병대와 혼전을 펼치고 있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총사령관님”
모토르 박격포와 그외 다수의 85미리 야포를 보유하고 있는 하일리히 홀크만 포병연대장이 숲속에서
포격을 하고 있는 스웨덴 포병을 제압하기 위한 대포병사 격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왔다.
발렌슈타인이 신식 케플러 소총으로 무장한 보병사단을 투입하지 않은 이유가 적 포병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페르난도 용병대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중앙과
측면을 공격하는 사이 일로 장군이 이끄는 보병들과 포병은 적 포병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럼 바로 포격을 시작하도록”
“네 사령관님”
그로부터 몇분 후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던 토르스덴손의 포병대를 향해 대포병 포격을 시작했다.
고각 공격력을 갖추고 있던 포병대가 스웨덴 야포의 사각으로 들어와 포탄을 하늘 높이 날렸다.
스웨덴의 야포는 생산되어 질 때부터 포신의 각도가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포대의 위치가 높으면
그만큼 사거리가 늘어나는 대신 사각도 커졌다.
“꽈과과과광”
토르스덴손의 포병대 엄호와 기습 돌격작전에 투입되기 위해 포병대와 같이 움직이던 메클렌부르크
공작은 갑자기 주위에 포탄이 떨어지자 깜짝 놀라 토르스덴손을 바라보았다. 공작이 듣기로
발렌슈타인의 포대는 자신을 직접 공격할 수 없었다. 사거리가 3마일이 넘지 않는 그들 대포로는
사정거리와 포각이 만들어내는 사각에 위치해 있다고 있다.
“어찌 된 일입니까 ? 지금 황제군 놈들의 포탄이 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
메클렌부르크공작은 과거에 덴마크 크리스찬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발렌슈타인에게 영지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는 알거지 신세가 될 판이었다.
누구보다도 절실한 심정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던 공작은 철썩같이 믿고 있던 스웨덴의 자랑
토르스덴손 포병대가 적의 대포병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 같아 좌불안석이 되어있었다.
그건 토르스덴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신형 야포를 개발한 것 같습니다.
일단은 몇 문 안되니 공작님께서 움직여 주십시오. 전령을 급히 폐하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 하지만 불안하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비로 돌려진 포대를 뒤로 움직여서 적 포대에 포격을 실시하겠습니다.
장군께서 조금만 시간을 벌어주시면 됩니다.”
둘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산 중턱에 포탄이 산발적으로 떨어져 내렸다. 메클렌부르크 공작이
서둘러 신교도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는 산 아래로 내려갈 무렵 정상에서 사방을 주시하던 관측병이
헐레벌떡 달려와 적 보병이 이곳으로 오고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어느 방향이냐 ?”
“네. 남서쪽 입니다. 대략 오천입니다. 아무래도 기병대의 매복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다시 올라가서 적 보병의 진행을 세세히 살펴라.”
관측병이 어설픈 예측을 하려하자 토르스덴손이 주의를 주었다. 관측병이나 통신병은 보고 들은
사실만을 지휘관에게 전달해야만 했다. 쉽사리 자신의 의견을 정보에 집어 넣어 전달하면 혼선만
빚어 낼 가능성이 높았다.
“간신히 산등성이를 넘어갈 수 있겠군. 좋다. 예비포대를 뺀 전 포신을 돌려 적 보 병의 머리에
선물을 선물한다. 너는 서둘러 폐하께 이 사실을 알려라”
토르스덴손의 명령을 받은 전령이 말 위에 올라타 쏜살같이 본대로 말을 몰았다.
예기치 않은 변수였지만 적 기병대를 먼저 상대한다는 전술에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서둘러라. 포탄을 날리고 서둘러 이동해야 한다.”
토르스덴손의 목소리가 포성에 묻혀 간간히 들려왔다.
“신호탄을 쏴라”
구스타프는 적 보병 대부대가 토르스덴손을 공격하기위해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에 산밑에 매복하고
있는 기병대를 움직일 생각이었다. 적기에 적 보병이 출현하면서 구스타프는 회심의 미소를 짖고
있었다. 모두들 머스켓을 소지하고 있는 그들이 합세한다면 쉽게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우우웅”
야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길게 꼬리를 매달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이 신호탄은 곧바로
토르스덴손에게 관측되었고 토르스덴손 역시 신호탄을 발사했다. 두 개의 신호탄은 빌헬름 2세에게
그대로 구스타프의 공격명령을 전달했고, 빌헬름 2세는 예하 연대장들에게 돌격명령을 하달했다.
“돌격. 적 기병을 뭉개버린다.”
“우두두두두”
팔천여기가 순식간에 산자락에서 벗어나 평원을 내달렸다. 빌헬름 2세의 부대의 출현은 곧바로
발렌슈타인에게 관측되었지만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페르난도는 중앙을 제외한다면
이미 거의 전 참호선을 무참히 유린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 역시 아직 내보이지 않은 카드를 쥐고 있었다.
“예비포대를 새롭게 나타난 적 기병대에 집중시킨다. 전 병력 앞으로 진군.”
중앙에 남아있던 보병 삼천과 기병 이천이 천천히 앞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뒤에 처져있던 포대에서
연신 포탄을 쏘아올렸다. 고각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모토르는 포대의 위치를 변환시키지
않아도 다양한 사거리를 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고각 40”
포대장이 캐플러가 만들었다는 포병 고각대비 사정거리 표를 들고는 초탄을 수정해 나갔다.
여기저기서 복명이 이루어지며 포대의 고각이 조정되었다. 박격포의 고각이 조정되고 일제 포격이
이동중인 빌헬름 기병대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두번째 포탄이 날아와 폭발하는 사이 선봉대가
페르난도 기병대가 사격 가능거리까지 다가가 있었다.
“조준. 발사”
선봉을 맡은 중대에서 일제 사격이 이루어 지고 곧이어 계속해서 단발 총성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수천기의 기병들이 박격포탄에 직격 당해 대열에서 이탈하는 전우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달려나가며
머스켓을 쏘아댔다. 돌격대형에서는 재장전 자체가 불가능한 머스켓이였기에 대원들은 총알을
발사하고는 모두들 칼이나 석궁을 집어 들었다. 페르난도의 공격진형 좌측을 파고드는
빌헬름 기병대의 일제사격에 좌측이 빠르게 허물어져 갔다.
“와와와”
피차 경기병인 양 기병대는 장전된 총과 석궁을 다 써버리자 칼을 들고 혈전을 펼쳤다.
처음 일제사격으로 피해를 보긴 했지만 여전히 숫적 우세를 점하고 있던 페르난도는 전열을
재정비해 좌측을 포기하고 적 기병대와 정면으로 맞서나갔다.
그 사이 스웨덴의 보병들이 썰물처럼 뒤로 빠져나갔다.
“총병들은 서둘러 재장전하고 명령을 기다려야”
“으악”
총병 대대장과 중대장들의 고함치는 소리와 비명소리들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중앙에 약간의 시간이 주어지자 아돌프 소총병들이 서둘러 재장전에 들어갔다.
놀라울 속도로 재장전을 한 병사들이 총을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대열을 맞춰라. 10렬 종대”
모든 병사들이 재장전을 마치자 연대장이 연대병력 전체를 중앙에서 빼내 우측으로
이동하려 하고 있었다. 일사분란하게 대열을 형성한 일천여명의 병력이 혈전을 벌이고 있는
기병들의 전투에 끼여들려 하고 있었다.
“돌격”
“와와와와”
수백명이 동시에 함성을 지르며 난전이 펼쳐지고 있는 전장으로 파고드는 순간 수백발의 총성이
울려퍼졌고, 일순간 주변이 화약 연기로 가득 찼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구스타프는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애마를 몰아 전장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자신을 겹겹이 호위하고 있는 근위기사단과 더불어 전장을 응시했다.
“우측에 새로운 드라군 출현. 흑기사단 같다는 보고입니다. 전방에서 적 보병이 돌격해 옵니다.”
“흑기사단 ?”
“그렇습니다.”
“토르스덴손이 이동한다는 전갈입니다.”
시간차를 두고 나쁜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구스타프는 두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이미 페르난도의 기병대는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거나
다름없어 보였다. 곳곳에서 고립된 기병들이 보병과 기병의 합동공격으로 말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쏘고, 찌르고 베느라 정신없이 전장을 누비던 페르난도는 사방이 적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요한 장군의 흑기사단이 조만간 공격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만에 가까운 자신의
부하들 중 기수와 수십명의 기병만이 눈에 들어오자 페르난도는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페르난도와 함께 움직이던 깃발을 든 기수가 따라 움직였다. 넓게 퍼져서 죽고 죽이는 혈전을
펼치던 용병대들은 지휘기가 전장을 빠져나가고 있자 하나 둘씩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적이 후퇴합니다.”
“좆아가서 끝장을 낸다”
“전군에 돌격명령을 내려라”
신호수가 채 신호탄을 날리기 전에 구스타프는 발로 말 옆구리를 찼다. 그가 근위기사들 속에서
화살처럼 달려나가자 근위기사들이 서둘러 구스타프를 뒤쫓아갔다.
“돌아오십시오. 폐하 ?”
한순간 멍하니 있던 카를스타드 재상이 고함을 치며 구스타프를 따라갔다.
하지만 구스타프를 태운 말은 재상과 거리를 점점 더 벌리고 있었다.
그렇게 불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후퇴명령도 없이 페르난도가 갑자기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하자
발렌슈타인은 상황파악이 재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의 명령도 없이 전장을 이탈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용병과 상비군과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런 저놈을 당장….”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발렌슈타인은 말을 잊지 못하고, 돌격하던 보병들을 멈춰 세우고
대기병 방어전으로 진형을 바꿔나갔다.
“중앙을 비워두고 서둘러 진영을 만들어라. 포대는 포격준비.
기병대는 나가서 쫓아오는 놈들을 모조리 척살하라.”
돌격해가던 보병들이 갑자기 내려온 명령에 허둥대는 사이 페르난도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뒤를 구스타프와 근위기사단 100여기가 빠른 속도로 뒤따라왔다. 뒤를 보지 않고 달려온 구스타프는
눈앞에 대규모 기병부대가 나타나자 순간 말을 멈추고 도망가려 했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멈칫 멈칫하던 사이 일천기의 기병들이 자신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져 일백대 일천의 싸움이 벌어졌다.
한편 우측을 공격하던 요한 장군의 흑기사단은 갑자기 페르난도의 기병대가 전장을 이탈하면서
스웨덴군에 겹겹이 둘려 쌓여 전멸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요한 장군을 구출한 것은
아군이 아니라 구스타프가 무모하게 적을 추격해가자 그의 안위가 걱정된 카를스타드 재상이었다.
“장군 서둘러 폐하 뒤를 뒤쫓아 가시오.”
한참 전투 지휘를 하던 빌헬름 2세는 갑자기 뛰어든 카를스타드 재상의 말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 지휘를 하고 있어야 할 폐하께서 직접 전장에 끼어 든 것도 문제였는데
지금은 위급하기까지 했다.
“이곳은 옥센세르나 장군에게 맡기겠소”
빌헬름2세는 당장 수습 가능한 삼천기를 전장에서 빼내어 구스타프를 뒤쫓아갔다.
그 틈을 타 요한 장군은 자신의 부대를 뒤로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전멸을 각오했던 그는 갑자기 서쪽의 벽이 얇아지자 그곳으로 병력을 집중시켜 포위망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의 부대역시 반수 이상이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폐하”
빌헬름2세가 목놓아 구스타프를 부르며 달려오는 와중에도 구스타프의 근위기사들은 10배나 많은
적의 공격에 하나 둘씩 죽어나가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우뚝 선 구스타프는 자신과
등을 맞대고 서있는 근위기사단장의 체온을 그대로 느끼며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적 기병들은 섣불리 공격해오지 않고 주위만을 맴돌고 있었지만, 이 많은 기병들을 물리치고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귀에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분명 모든 것이 예정대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이 적에게 둘려 쌓여 있었고 생사를 장담하지 못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미안하네.”
“아닙니다. 폐하. 폐하를 모신 것은 저의 축복이었습니다.
조금만 버티면 됩니다. 힘을 내십시오 폐하 !”
군데 군데 생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온몸이 피빛으로 물들어갈 무렵 석궁에 걸린 화살
수십 개가 두 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양손으로 쥐고 있던 칼로 대여섯 개를 쳐냈지만
모두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윽”
팔과 다리에 화살이 들어와 박혔다. 또다시 화살이 날아왔지만 구스타프는 칼을 들어 가장 가까운
말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구스타프의 칼에 맞은 말은 머리에서 피보라를 뿜으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그와 동시에 병사 하나가 땅으로 굴렸다. 근위기사단장은 잽싸게 몸을 날려 구르고 있는 자의 목에
자신의 칼을 꽂았다 뺐다. 목에서 뛰어오른 피분수가 온몸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초롱초롱했다.
“창을 던져라”
누군가가 소리치자, 수십 개의 창이 날아와 두 사람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완전 고슴도치가 되어
버린 그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지자 주위를 애워쌓던 기병들이 쏜살같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폐하 !”
“폐하 !”
한발 늦게 도착한 빌헬름2세는 구스타프의 처참한 모습에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를 따라온 기병들의 눈에서 복수의 불꽃이 피어올라 온 마음을 활활 불태웠다.
“복수하자 !”
“복수하자 !”
구스타프의 시체를 수습하는 사이 빌헬름2세의 기병들과 보병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지금 박격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안중에 두지도 않고 있었다.
주변에서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구스타프의 용맹한 최후를 전해들은 스웨덴 병사들은
적에게 처절한 피의 복수를 하기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포성을 삼켜버린 복수심이 마침내
빌헬름2세의 돌격명령과 함께 거대한 쐐기가 되어 발렌슈타인이 급조한 방어선으로 날아갔다.
“돌격”
“피의 복수를”
“피의 복수를”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과 함께 돌격해오는 빌헬름 2세의 기병들은 일로 장군이 이끄는 보병들에게는
악마처럼 보였다. 그들의 손에 들려진 케플러 소총만이 그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개개인의 병사들이 캐플러 소총을 꽉 잡았다.
“조준”
“발사”
일시에 일만정에 가까운 총탄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참호선을 파지 못한 발렌슈타인 보병들은
적 기병들이 마상에서 쏘아대는 총탄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막아내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온갖 구식소총과 아돌프 소총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달려들었다.
홀크만이 쏘아대는 포탄에 적잖이 피해를 보긴 했지만 두려움을 상실한 스웨덴군은 전멸할 각오로
앞을 보면 달려들었다. 근접전이 벌어지자 근소한 차이로 숫적 우위를 차지하던 발렌슈타인군의
진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발렌슈타인을 잡아라”
빌헬름 2세는 총검을 찔러오는 병사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으며 소리쳤다.
너나 할 것 없이 복마전에 뛰어든 양쪽 병사들은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었다.
“페르난도 그 비겁한 놈의 목을 잘라라”
발렌슈타인은 일을 이지경으로 만든 페르난도 용병대장을 즉결처분 해버리고는 도망쳐온 기병대를
수습해서 전장에 투입시켜려 했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포병대원들을 우측에 투입시켜.”
“저 놈들 막아”
포병대를 투입시켜려던 발렌슈타인은 중군을 뚫고 자기에게 직선으로 다가오는 기병 수백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초겨울 날씨에 양쪽 콧구멍에서 뜨거운 콧김을 뿜어대며 성난 물소처럼
달려오는 피빛 기병들은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전율스러웠다.
“타타타탕”
발렌슈타인을 보호하기위해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친위대에서 발포를 시작했다. 초당 400미터를
날아간 총알이 흉장갑을 뚫고 들어가 스웨덴 기병들을 말에서 떨어뜨렸다. 두어 번의 일제 사격과
친위대의 돌격으로 스웨덴 기병의 기습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발렌슈타이인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적들이 왔다는 자체가 문제였다. 요한 장군은 아주 멀리 후퇴했는지, 절대절명의 위기임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포병들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우측에 새로운 부대입니다.”
급히 빠져 나오던 포병대가 산 언저리에서 달려오는 보병부대에 쫓겨 도망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힘겨운 판에 새로운 부대는 적어도 삼사천은 되어 보였다.
“공작전하. 뤼첸으로….”
여기저기서 피어 오르는 화약 연기가 무성한 전장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던 캐플러가
발렌슈타인에게 후퇴를 조언하고 나섰다.
“다 잡은 구스타프를 놓아줘야 하다니. 으윽. 그 멍청한…..”
구스타프가 자신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에게 처참히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발렌슈타인은
이미 목과 몸통이 따로 뒹굴고 있는 페르난도에 대한 분노로 그의 입술이 부르르 떨려왔다.
우세한 병력과 우세한 무기를 가지고도 그는 구스타프를 패배시키지 못했다.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전장에 새로운 부대가 합세한다면 그의 완패는 자명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세상 천지가 다 내 적으로 바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아직 황제는 총사령관님을 필요로 하십니다.
지는 게임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지금이라도 병력을 수습해야 합니다.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그래. 그게 좋겠지. 프라하에서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 ! 후퇴한다.”
마침내 총사령관이 후퇴를 결정하자 난전을 펼치고 있는 전장에 후퇴를 알리는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발렌슈타이인의 지휘부가 뒤로 물러나자 병력들이 뒤로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원래 진지로 돌아온 발렌슈타인은 어제 파 놓은 참호선에 병사들을 투입시키고는 적의 추격을
대비했다. 그 사이 토르스덴손의 포병대를 추격하던 일로의 보병사단이 후퇴해 돌아왔다.
일로 장군의 얼굴에는 생채기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
일로 장군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적 포병대를 다 따라잡아 전멸시킬 수 있었는데
갑자기 후퇴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처음 돌격에서 포격에 피해를 보긴 했지만 그의 병력을
대부분 큰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산을 돌아가느라 시간을 좀 허비하기는 했지만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페르난도가 전장을 빠져 나오는 바람에 전선이 이동하지만 않았어도
그의 병력은 스웨덴군을 완벽하게 궁지에 몰 수 있었다.
“일로 장군은 서둘러 전방에 병력을 배치하시오. 젠장 독 안에 든 쥐에게 발목을 물리다니.”
“아아아악”
갑자기 발렌슈타인이 괴성을 질러대자, 일로 장군은 깜짝 놀라 자신의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괜히 옆에 있다가 불똥이 자기에게 튀지나 않을 까 하는 마음에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고립된 패잔병들을 완전히 소탕한 스웨덴군은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치고 나자 승리했다는 생각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지도자가 허망하게 죽었다는 사실에,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들뜬 환희의 물결은 지휘부에 다다르자 어둡고 칙칙한 침울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만 전장을 수습하고 베를린으로 속히 이동합시다.”
구스타프의 어이없는 행동을 제지하지 못한 재상은 고개를 떨구며 말을 했다. 어깨가 축 쳐진 채
주위에 서 있던 고위 장교들이 해너미 전에 베를린으로 출발하기위해 병사들을 수습하러 움직였다.
“휴. 큰일이군”
카를스타드 재상은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 되었다.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본국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구스타프의 죽음이 몰고 올 파장을 생각하니 난감하기만 했다.
행여 차기 왕위 쟁탈전이라도 벌어지면 그나마 어려운 스웨덴 왕국은 더욱더 빠져 나오기 힘든
구렁텅이로 밀려 기나긴 동면을 할 수도 있었다.
구스타프와 발렌슈타인간의 전투가 이렇게 끝나 갈 무렵 프라하는 마티하스 갈라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총 일만의 병사로 프라하를 공격하던 마타하스 갈라스는 한스 장군의 노련한 지휘와 네로가
이끄는 소총병들의 내선을 이용한 방어전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체 고전하고 있었다.
“또 온다. 준비”
네로는 200정의 아돌프 소총을 가지고 40명씩 다섯부대로 나누고 각각 8명으로 구성된 다섯개의 분대를
만들어 분대별 사격을 실시했다. 총 25렬로 이루어진 부대는 일사분란하게 사격을 해대서 일단 일렬이
사격을 시작하면 사격 중지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쉴세 없이 사격이 이뤄졌다.
보통 재장전 시간이 일분 내외로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20렬이 사격할 때 쯤이면 최초 사격렬이
재장전을 마친 상태로 대기했다. 네로는 다시금 몰려드는 적을 향해 발포 준비를 명령했다.
엄폐물에 차분히 숨어서 좁은 통로로 몰려드는 적들을 보면서 네로는 사격 명령을 내렸다.
“발사.”
“탕탕탕”
“14 조준”
“발사”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달려오던 병사들이 가슴팍에 총탄을 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열번의 사격이 계속되는 동안 네로의 부대는 뒤로 50미터이상 후퇴에 있었지만
그들이 지나온 길에는 부상으로 신음하는 소리와 총상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가득했다.
백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적들이 뒤로 물러나자 네로는 부대를 앞으로 전진시켰다.
그러는 사이에도 프라하 곳곳에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장군. 카렐다리가 위험하다는 전갈입니다.”
“벌써 카렐다리까지 밀렸단 말이냐 ?”
프라하를 흐르는 볼타바강을 위에 세워진 최초의 다리인 카렐다리는 동쪽의 상인지구와
서쪽의 왕궁지구를 연결하는 다리로 그곳이 위협받고 있다면 벌써 상인지구는 넘어갔다고 봐야 했다.
카렐다리 동쪽이 적들에게 넘어갔다면 큰일이었다.
“아니다. 직접 그곳으로 가봐야 겠다. 여기는 한 개 소대만 남겨놓고 모두 칼렐다리로 이동한다.
서둘러라.”
긴 아돌프 소총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병력들이 서둘러 카렐다리로 뛰어갔다.
그들이 빠진 자리는 프라하 시민들로 구성된 자원병들로 채워졌다.
“서둘러라”
다리 동쪽을 힘겹게 방어하고 있던 창병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적 기병은 벌써 동쪽을 점거하고 점차 범위를 확대시키고 있었다.
“부대 정지. 1,2,3,렬 동시 조준”
“발사”
“탕탕탕”
“앞으로 일보 전진”
네로는 적 보병을 상대할 때와는 반대로 사격을 하면서 분대를 한걸음씩 앞으로 내보냈다.
이것은 방어가 아니라 공격대형으로써 초기에 20여명의 동시사격이 이뤄진 후 사격렬이 재장전하는
사이 후위렬이 앞으로 몇걸음 나와 사격 조준을 했다. 창병들과 검을 섞던 오파비오 피콜로미는
갑자기 들려온 총소리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허연 연기 속에서 네로의 총병부대가
나타나자 피콜로미는 칼을 높이 쳐 들고 네로 부대를 가리키며 외쳤다.
“길을 뚫어라. 저 놈들을 박살 낸다.”
“두드드드드”
쇠사슬이며 온갖 잡다한 것들로 자신들을 막아서던 프라하 시민군을 무시하고 피콜로미가 기병대를
네로 부대에게로 몰고 갔다. 시민군은 언제라도 전멸시킬수 있었기에 피콜로미는 새롭게 나타난 총병을
우선적으로 없애버리고 싶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교육을 받은 정규군 같았다. 그의 명령에 여기저기서
시민군을 학살하던 기병대 수백기가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동쪽에서는 꾸역꾸역
마티아스 갈라스의 군대가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조준. 발사. 발사한 후 바로 착검하라”
자신들을 말발굽으로 밟으려는 듯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기병대에게 조금도 주늑들지 않고
총병들이 차분히 소총을 들어 올렸다. 조준선 안에 말머리가 들어오자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운동에너지는 바퀴를 타고 화약을 거쳐 총탄에 수백 배의 에너지로 변해
잔뜩 허리를 숙이고 달려드는 기병들에게 날아갔다.
“8렬 발사”
“탕탕탕”
“착검”
모든 렬이 재장전 할 시간이 없었다. 한 병사가 극도의 두려움으로 칼을 소총에 결합시키려다
떨어트렸다. 다시 집으려는 그의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그가 착검을 다시 시도하기도 전에
이제는 백 여기로 줄어든 기병들이 그의 부대 바로 눈앞까지 달려들었다.
“드드드드 와아아아아”
“쉬시시시익”
죽을 각오로 총을 꼬나 쥔 네로는 갑자기 달려오던 기병들이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을 맞고 픽픽
쓰러지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 양 옆으로 세워져 있던 건물 창에서 누군가가 석궁을 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재장전을 해주는 보조자가 있는지 사수는 연속해서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막아라. 여기가 뚫리면 프라하는 끝장이다.”
다시 고개를 돌린 네로는 비장한 목소리로 부하들을 독려해 나갔다. 그의 말대로 이곳이 넘어가면,
지금도 곳곳에서 시가전을 펼치고 있는 병사들의 후위가 차단되어 프라하는 더 이상 보헤미아인들의
도시가 아니었다.
“윽”
갑자기 왼쪽어깨에 통증을 느낀 네로는 눈을 살짝 아래로 내려 어깨에 박혀있는 화살을 보았다.
왼손에 힘을 줄때마다 짜릿한 통증이 뒷목 신경을타고 전달되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죽어라”
무릎과 허리를 최대한으로 굽혀 달려오는 말 다리를 오른손에 쥔 칼로 긁어 버렸다.
발목뼈에 칼날이 걸리는 것이 손목을 타고 전해졌다.
네로는 마상에서 내리치던 칼날을 막아내며 몸을 빼 뒷걸음질 쳤다.
앞쪽 발목이 나가버리자 중심을 잃은 말이 그대로 엎어지면서 자신의 주인을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화살을 박은 체 달려간 네로는 머리를 처박은 체 바둥거리는 자의 복부에 칼을 깊숙이 박았다.
“와아아아”
뒤에서 갑자기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한스 장군이 직접 지휘하던 병력이 이곳으로 지원을 온 것
같았다. 한스장군의 등장과 더불어 카렐다리를 두고 벌어진 전투도 거의 끝이나고 있었다.
카렐다리 서쪽을 공격하던 황제군은 썰물처럼 동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보헤미아 병사들이 다리 동쪽을 점령하기위해 다리를 넘어가고 있었다.
500여미터에 이르는 다리 주변을 흐르는 강물은 빨간색으로 점점이 변해갔다.
단기 3958년(1625) 겨울 민스크
4군을 이끌고 있는 김상태 대장은 원정군 위원회에서 내려온 명령문을 서너 번 읽어나갔지만
도저히 위원회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봄이 오기 전에 바르샤바를 점령하라니 ! ”
민스크의 겨울은 전투는 차치하더라도 걸어 다니는 것 조차 힘든 날씨의 연속이었다.
이런 날씨에 대병력을 움직인다는 것은 자칫 강신승 장군의 전철을 밟을 수 있었다.
생각이 강신승에 미치자, 김상태 대장은 문득 그의 아들 이름을 지난 전투 보고서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눈여겨 보지 않았던 사령관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비서관 ?”
“네. 사령관님”
수화기 저편에서 젊은이의 생기가 전화선을 타고 넘어왔다.
“사망자와 실종자명단을 다시 보고 싶다. 가능한 한 빨리 가져오도록”
“어떤 전투를 말씀하시는 것 입니까 ?”
“어. 1군단 아니 전체를 다 가져와 ? 분실장비 목록도. 그리고 참모진을 소집하도록”
“알겠습니다.”
소복이 쌓여있는 눈 위로 또다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민스크의 겨울은 모스크바만큼은 못해도 살인적인 추위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끔찍했다.
이런 날씨에 수만 명의 군대를 움직이라는 것은 상식이 결여된 명령임이 틀림없었다..
“아직 안되었나 ?”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10분내로 올리겠습니다.”
갑자기 가랑잎 불붙듯 마음이 조급해진 김상태 대장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비서관 닥달하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사령관의 행동에 비서관마저 허둥대고 있었다. 5분마다 확인전화를 하는 통에
다른 일을 못 할 지경이 되자 비서관은 애꿎은 부하 직원들을 다시 달달 볶았다.
서류철에서 꺼내오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었지만 최고사령관의 이상한 행동에, 행여 빠진 게
있나 하는 노파심때문에 15분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비서관은 사령관이 원하는 것을 올릴 수 있었다.
“여기 명단과 분실 장비 목록입니다.”
가나다 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를 집어 든 김상태 사령관은
서둘러 강으로 시작되는 곳을 손가락으로 집어나갔다.
‘강삼호 소령 실종, 리가항 수색 중 사라짐.
최종 목격자 진술 : 항구에 접안 되어 있는 네덜란드 상선 로테르호 수색을 마치고 나오는 중
행방이 묘연해짐. 로테르호를 철저하게 수색했으나 강삼호 소령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함.
로테르호는 한달간 리가항에 억류되어 있다가 출항함.'
“비서관”
“네. 사령관님”
“이 사건에 대해 좀더 자세한 자료를 수집해서 열흘 안으로 올리도록.
이번 사건을 맡은 법무관 조사자료부터 시작해서 강삼호 주변 인물들 동정까지,
필요하면 모스크바에 연락해서 협조를 얻도록. 그리고 참모들은 다 모였나 ?”
“아직 입니다. 사령관님”
“아까는 미안했네.”
“네 ? …. 아닙니다.”
“그럼 나가보고, 회의 준비가 다 되면 연락하게 ?”
비서관이 경례를 하고 나가자 사령관은 책상에 앉아 다시금 서류들을 차근차근 읽어보는 동안
회의실에 하나 둘씩 보여 든 참모들은 사령관이 들어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에 놓여진 회의 자료들을 들쳐보던 참모들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벽난로에서는 장작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공기를 훈훈하게 데워대고 있었지만
좀처럼 냉랭한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사령관님 이십니다.”
비서관이 회의실 문을 열고 한발 앞서 사령관의 입실을 참모진들에게 알리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상태 사령관은 빈 의자로 다가가 빈자리가 있는지를 살펴본 다음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모두들 얼굴을 돌려 사령관의 눈과 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앉읍시다.”
사령관의 말에 총 15명의 각분야 참모들이 자리에 앉았다.
“다들 배포한 자료는 읽었으리라 보고, 작전참모는 지금 원정군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가 ?”
“외람된 말씀이지만, 우크라이나에 진군한 3지대 4군단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단시간 내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이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본대는 보급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가용병력은 리가에 주둔중인 1군단 예하 병력이 전부입니다만 겨울을 감안하면
그것 역시 쉽지만은 않습니다.
“보급로가 그렇게 심각한가 ?”
사령관이 4군의 보급을 책임지고 있는 군수참모장을 바라보자 곧바로 답변이 들려왔다.
“주둔지를 벗어나지 않으면 겨울을 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부대 이동을 상정하면 때에 따라서는
상황이 심각하게 돌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총포탄의 재고량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닙니다.
단위 부대별로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볼 수 있기에 보급로가 기상악화로 언제라도 끊어진다거나,
행군 중 전투가 발생한다면 급속도로 재고량이 바닥을 보일 것 입니다.”
“그 외 다른 문제점은 ?”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위원회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에 불복종할 수도 없었다. 뭔가 절충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고심하는 얼굴로 의자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사령관은 답답한 마음에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시리면서도 달착지근한 끝만이 혀뿌리를 타고 넘어갔다.
“봉황을 통한 장거리 통신이 장애를 받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같은 기상에는 봉황을 띄울 수가 없습니다.”
“장거리 행군에 따른 체력저하와 개인 위생 불결로 인한 독감 같은 겨울 전염병이 우려됩니다.”
통신참모가 의무감실장이 차례로 예상되는 문제점을 제기하고 나섰다.
작전참모와 기획참모 역시 발언을 하려다 사령관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사령관의 눈은 약간 부릅떠 있었다.
“민스크에서 바르샤바까지 직선거리로 딱 500킬로미터입니다. 중간에는 브레스트를 빼고는
그렇다 할 대도시가 없습니다. 이는 본대가 움직일 경우 브레스트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야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허허벌판에서 혹한을 견딘다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분석 평가실장이 불가론의 수위를 높여 발언하자
사령관이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끼여들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 되는 쪽으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은 위원회에서 내려온 명령을 무시하자는 겁니까 ? 지금.”
무거운 침묵 속에서 몇 분이 흘렀다.
“위원회에서 갑자기 바르샤바를 공격하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
위원회에 바보들만 모여있는 것도 아닌데 말야 ?”
“최근에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지난 달에 발렌슈타인과 구스타프가 대규모 접전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 전투에서 어이없게도 구스타프가 적 기병대에 돌진해서 전사했다는 소식입니다.
이 일로 인해 위원회에서는 폴란드를 서둘러 점령하려는 것 같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폴란드와 스웨덴 왕조는 한 뿌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스웨덴 왕이 타국에서 전사했다면 스웨덴에서 권력암투와 내전이 발생할 조짐이 크다고 보여지며,
그로 인해 폴란드가 스웨덴 정국에 관여할 수 있지 않을 가 ? 내지는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쪽이든 향후 대한제국의 유럽진출이 어렵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에 스웨덴 정국이 어떤 식으로든
안정되지 전에 폴란드를 접수해서 주도적으로 스웨덴과의 관계를 재정립을 해 나가고자 하는 것으로
판단 됩니다. 어쩌면 스웨덴 다음 왕 옹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유럽 각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취합하고 있는 정보참모가
사령관이 원하는 점을 집어나갔다.
“아울러, 유럽에 연합군 결성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봄에는 스페인에 연합군을 파병할 가능성이
많으며, 프랑스 로리앙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4군이 신성로마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싶어하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국내 문제가 있습니다. 정현우 천인단장의 임기가 올해로 끝나기 때문에
이미 3대 천인단이 구성되었습니다. 자동적으로 초대 단군자리에 신기철 천군부 장관님께서
오르시게 됩니다. 그 전에 유럽에 발을 들여 놓으실 생각이지 않을 까 합니다. 국내와 국외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이번 결정이 내려진 것이라고 저희 정보부에서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정보참모의 발언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회의실에는 활기가 찾아 들지 않았다.
설령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위험천만한 작전에 자신들의 부하들을 내몰고 싶지는 않는
심정 때문에 작전참모조차 발언을 삼가고 있었다.
“대규모 병력이동이 어렵다면 소규모 병력이동은 어떻습니까 ? 과거 폴란드는 단지 삼천 명으로
모스크바를 3-4 년 동안을 장악하고 유지한 전례가 있지 않습니까 ?”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 바르샤바에만 적어도 오만명의 병력이 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수비대라고는 기껏해야 오백 명 수준이었습니다.”
“발틱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1군단을 먼저 움직입시다.”
“발틱함대의 지원은 겨울동안에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항구가 얼어버릴 가능성이 다분하고 겨우내 유빙이 출몰하는 해역입니다.”
이런 저런 대안과 비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바르샤바 점령 불가라는 중심축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지리한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민스크 주변은 점점 하얗게 눈 속에 덮여갔다.
프랑스 파리
바티칸 특사로 프랑스를 방문한 마자랭이 리슐리외경의 안내로 루이 13세를 만나기 위해
루브르 왕궁 초입에 들어섰다. 왕궁 입구에 다다라 마차에서 먼저 내린 마자랭이 리슐리외경이
내리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위엄이 느껴지는 왕궁은
바티칸 못 지 않게 웅장했다.
“들어가시지요 !”
리슐리외가 앞서 나가자 마자랭이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루이 13세가 알현장에서 마자랭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독실한 카톨릭 교도인 루이 13세는 바티칸 특사를 최대의 예우로 대접하고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그래 성하께서도 안녕하십니까 ?”
“그러하옵니다 폐하. 성하께서 폐하께 축복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 황송할 일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서로의 인사말이 오고 간 후 세 사람은. 옮겨 서로의 관심사를 논의 하기 위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밀실로 자리를 옮겼다. 앙리4세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밀실은 햇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으로 수십개의 촛불로 만든 샹드리에가 정중앙에서 흔들거렸다.
“성하께서 저와 어머니와의 화해를 주선해 주시기로 하셨습니까 ?”
자리에 앉아 마자 루이 13세가 마자랭에게 가장 묻고 싶은 말로 말문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또 다른 특사가 지금쯤 태후폐하를 접견하고 있을 것이오니 그 점은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도 벨라르미노 추기경께서 저에게 특별히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불손한 발렌슈타인이 공의회의 명령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명령을 동시에 어기면서까지 스웨덴군을 공격해서 많은 병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애석하게도 구스타프가 전사하고 말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그를 제국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한다고
공표했지만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대한제국이 폴란드의 절반을 장악하고
바르샤바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그로 인해 연합군 편성에 지장이 초래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하와 벨라르미노 추기경께서 프랑스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마자랭의 말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리슐리외는 다 알고 있는 사실말고 요점을 간단히 말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자랭은 자신의 말이 리슐리외에 의해 중단되자 머뭇거리다 말을 이어갔다.
“네. 그렇습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께서는 프랑스가 페르디난트 황제를 지지한다는 성명과 함께
프랑스 남부에서 일고 있는 반 바티칸 세력을 제거해 주셨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위그노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루이 13세는 바티칸이 프랑스 내부문제를 들고 나오자 불쾌한 심정이 들었다.
그는 일전에 알아보라고 했던 것을 말하라는 눈빛으로 리슐리외경을 바라보았다.
리슐리외가 루이 13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마자랭이 부언 설명을 해 나갔다.
“지금 말씀 드리는 것은 프랑스에서 다시 확인해야 될 상황이지만, 스페인 대주교님이 바티칸으로
보낸 문서에 의하면 로리앙에 있는 한 교회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어느 교파에도 속해있지 않은 이 교회는 바티칸의 통제를 무시할 뿐더러 그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설교나 행위들이 기이하고 망측해서 도저히 하나님을 믿는 교회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존 위그노들이나 농노들이 그 말에 현혹되어서 하루가 다르게 세를 확장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어린 로리앙 영주의 암묵적인 협조가 뒤따르고 있습니다만,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한제국이 이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대한제국이란 말이 마자랭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루이 13세는 무척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더불어 프랑스 내부 일은 자신보다 외부인이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리슐리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더 강해졌다.
“리슐리외경 ?”
“네 폐하”
“에드몽 영주에게는 그 일로 경고장을 내려보내지 않았소 ?”
“특사를 보내 답을 받았습니다. 에드몽은 폐하의 경고장을 받고 자체적으로 조사해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이단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전해 왔습니다만 영주가 자신의 약속을 지켰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이 일에 관련되었는지는 지금 조사 중에 있습니다.
최우석 공사와 그가 가끔 출입하는 몽블랑이라는 샬롱을 특별관찰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리슐리외경에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대한제국은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 아니라
로리앙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경께서 사람을 보내 그곳에 새로 지었다는 성을 감시하거나
에드몽 주변 사람을 관찰한다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리슐리외는 루이 13세 면전에서 새파랗게 젊은 놈이 자신에게 면박을 주는 듯 한 말을 거리낌없이
해대자 심기가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루이 13세는 마자랭이란 젊은이에게 대해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리슐리외경은 지금 당장 마자랭이 언급한 대로 시행하고 보고를 올리도록 하시오.
아니 그대가 직접 로리앙을 다녀오도록 하시오.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내일 당장 떠나시오.
만약 마자랭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린 안방에 발톱을 숨긴 호랑이를 키우고 있는 것 아니었소 ?”
“알겠습니다. 폐하. 소상히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시고. 마자랭 ? 어디 그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한 번 들어봅시다.
그래 무슨 말로 나의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거요 ?”
“말씀드리기 송구스럽게도, 그들은 하나님아래 만민이 평등하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하나 황제도 무지랭이 촌놈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착취하라는 권능을 주지 않았으니,
뼈빠지게 일하고도 굶주림에 떨어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부와 귀족이라는 말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호기심 가득 찬 목소리에 마자랭이 기억하고 있던 몇 가지를 루이 13세에게 말을 했지만,
루이 13세의 반응은 마자랭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나타났다.
“푸하하. 그런. 완전히 미친놈들 아니오. 신부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거늘 그리고 태어나기 전부터 왕과 귀족은 결정되어 진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거늘
그런 허무맹랑한 말에 속아넘어가 교회의 권능과 나의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마음이 생긴단 말이요.
하하하. 지금까지 무지랭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한 번이라도 성공한 적이 있소 ?
하나님의 권능을 부여 받은 자의 칼날에 죽어가지 않았냔 말이오. 푸하하하. ”
“하지만 폐하 ?”
“되었소. 내 교황청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행하리라 어머니께서 저와 화해를 하시고 파리로
돌아오신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번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어느 나라에서 맡기로 하였소 ?
누가 맡든 잡음이 일어나기는 마찬가지 일 것 같은데?”
마자랭이 뭔가를 더 말하려고 하자 루이 13세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화제를 돌렸다.
벌써 두 번씩이나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자 마자랭의 입이 실룩거렸다.
“교황청에서는 토스카나대공이 맡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실례가 되는 줄 알지만 이제 좀 쉬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폐하 ?”
“아. 그래요. 그렇게 하시지요. 어디 거쳐 할 곳은 정했습니까 ? ”
“고맙게도 리슐리외경께서 저에게는 과분한 거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까 ? 잘 되었습니다. 리슐리외경도 먼 길을 가야 하니 그만 일어납시다.
기회가 닿는다면 프랑스에서 일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
전혀 예상치 못한 루이 13세의 제안에 마자랭과 리슐리외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리슐리외경의 얼굴이 경직되어갔다. 루이 13세가 빙그레 웃음지으며 마자랭을 바라보자
마자랭이 당황하여 선뜩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시구려. 리슐리외경은 되도록 빨리 돌아와서 짐을 도와주도록 하시오”
루이 13세가 밀실을 나가자 리슐리외와 마자랭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한참 동안 밀실을 떠나지 못했다.
루이 13세이 남기고 간 말의 여운을 곱씹던 리슐리외는 마자랭을 대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속이 편하지 않았다.
서울 세종로
경복궁 복원공사를 시작한지 만 3년이 지난 올 겨울 근정전이 본 모습을 되찾았다.
세종로와 광화문을 일직선으로 바라보는 근정전이 복원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행사인
신기철 천군부장관의 단군 임명식이 조촐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경복궁의 정전이 근정전 앞에
깔려있는 박석에는 주요 천인단원들과 천군부 장성들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단군 임명식은 금강천황의 축사를 시작으로 신기철 장관의 단군직 수락 연설로 끝이 났다.
형식적으로 금강천황의 임명을 받아 단군직에 오른 신기철은 향후 5년동안 단군이라는
천인단과 천군부의 쌍두마차를 통솔하게 되고 5년 후에는 천군부 장관직을 물러남과 동시에
3대 천인단장인 백흥한에게 단군직을 넘겨주어야 했다.
금강천황 자리 앞에 마련된 단상에는 지혜의 상징인 광채에 휩쌓인 여의주를 입에 물고 승천하는
용이 양각된 천인단인(印)과 용맹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양각된 천군부인(印)이 좌우에서
호위하듯 서있고 그 중앙에 전설의 동물 봉황 암수 한 쌍이 조각된 단군인(印)이 놓여져 있었다.
“단군 이리로 오시오”
금강천황이 신기철을 가까이 오도록 명하자, 신기철이 금강천황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옥좌에서 일어난 금강천황이 주위의 부축을 받으며 단군인을 들고 신기철에게 다가가자,
신기철이 두손을 머리위로 높이 쳐들어 단군인을 받아 가슴에 끌어 안았다.
“그만 일어나시오. 부디 대한제국을 만대에 걸쳐 번영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시길 바라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단군인을 신기철에게 넘겨주고 금강천황이 근정전 안으로 들어가자, 조정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황공하옵니다’를 외쳤다. 금강천황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신기철은 세개의 인장을
조심스럽게 상자에 각각 넣고 백흥한 천인단장에게는 천인단인을 천군부 최고위원회에게는 천군부인을
나눠주었다. 3598년의 마지막 행사를 끝으로 대한제국의 일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서울 북대문 근처 수정관
북한산 자락에 내려앉아 음식점에 들어간 신기철과 백흥한 그리고 임기가 불과 6시간 밖에 남지 않은
정현우가 원탁을 중앙에 놓고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연말 연시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
시각이었지만 수정관은 한산하기만 했다. 가끔 음식 시중을 들기 위해 들락거리는 여인들의 치맛자락이
바닥을 끄는 소리만 텅 빈 홀을 채웠다 비우곤 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 한 잔 하시지요 ?”
“시원 섭섭합니다. 신임 단장도 한 잔 하지 ? 앞으로 1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해야 할 텐데.”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정현우가 백흥한에게 술을 따라주기위해 주전자를 들어
올리자 백흥한이 잔을 두손으로 들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나야 초대 천인단이 추진해 놓은 것을 추스리기만 했으니 별로 힘들지 않았지만 자네는
그렇지 않을 거야. 주변 상황도 많이 바뀌었고 새롭게 해야 할 것들도 많고.
그리고 이건 천인단장에게 물려주도록 되어있는 거네. 업무를 시작하고 나서 열어보도록 하게”
그러면서 정현우는 백흥한 손바닥에 두툼한 열쇠를 하나 올려놓았다. 주석에 은도금을 한 열쇠는
제법 무거워서 백흥한의 손에 잔떨림을 만들었다. 백흥한은 이 열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현우는 열쇠만 주고 정작 열쇠로 무엇을 열어야 할지는 말하지 않고 있었다.
신기철이 있어서인지 정현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신임이 알아서 하겠지만, 4군에서 엄청난 보급물품을 요청했다고 하더군요. 모스크바에 있는
민정관이 확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런 엄동설한에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하소연을 해 온 적이
있었는데 제가 모르는 일을 계획하셨던 가 봅니다 ?”
신기철은 정현우를 말을 듣고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만, 단군 조직이 출범했으니 내년 초에 천인단과 협의해서 재조정 하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도 위원회에서 조금 무리를 한 듯 합니다.
이미 한단계 완화된 조정 명령이 내려갔습니다.”
신기철은 위원회로부터 4군 출동명령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노발대발 한 적이 있었지만
그런 속내를 모두 내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습니까 ?”
정현우와 백흥한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더 깊게 알려고 하지 않았다.
4군 지휘부는 위원회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고 이행할 할 수도 없어서 우회적으로 천인단의 힘을
빌어 명령 철회를 요청했던 것 같았다. 그 요청이 공식적인 절차를 밟기 전에 천군부에서
이례적으로 자신의 명령을 미리 수정하고 나섰다.
단기 3959년(1626) 이른 봄 폴란드 남부 로지
4군 사령부 직속 4600 특수여단 전 병력이 새해가 시작되면서 폴란드 각지로 흩어졌다.
그 중의 한 개 팀이 로지에 나타나 사방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하얀 색 옷에 하얀색 신발,
장갑, 모자를 착용한 열명의 무리들이 시에라츠로 통하는 길목에서 멈춰 섰다.
“부팀장. 여기서 헤어진다. 무사히 귀환하기 바란다.”
“팀장님. 살아서 뵙겠습니다.”
부팀장의 말에 입술을 굳게 닫은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팀원들에게 손짓을 했다.
팀장은 남서쪽으로 30킬로미터에 있는 바르타강 연변 도시 시에라츠에 작전시간내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로지에 도착한 팀은 뻐꾸기 팀이라 불리며 4600여단에서 가장 우수한 팀으로
인정 받고 있는 팀중 하나였다. 기지를 가장 먼저 출발한 뻐꾸기 팀이 신성로마제국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바르타강까지 내려와 작전개시를 기다린다는 것은 폴란드 전역에 수천명의 여단 병력이
침투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다음날 시에라츠에 도착한 팀장과 4명의 대원들은 자신들의 목적지인 시에라츠 외곽에 도착해
밤이 되길 기다렸다. 강변에 있는 도시 시에라츠는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의 하나로
육백년 전에 새워진 작은 요새가 그 기원이 되었다. 오랜 역사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시에라츠의 조악하고 허술한 모습에 팀장과 대원들은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누워서 떡 먹기 보다 쉽겠습니다.”
“누워서 떡 먹어본 적 있나 ? 나중에 시간 나면 한 번 먹어보라고,
인절미 같은 거 먹으면 바로 목이 메어서 바로 일어나야 될 걸 ?”
망원경으로 주변을 정찰하며 야간 침투로를 탐색하고 있던 팀장이 대꾸를 했다.
먼저 말을 꺼낸 대원은 동료들이 킥킥대는 웃움소리에 무안해져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바탕 눈이 오려는지 하늘은 잔뜩 흐려있었다.
“이번에 귀환하면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그나 저나 눈이 오려나 봅니다.”
“그래. 지금 오면 안 되는데. 일 끝나고 나서 오면 몰라도.”
팀장은 망원경을 내려놓으며 걱정되는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동”
잠시 쉬던 대원들이 팀장의 말에 서둘러 짐을 챙기고 자리를 떴다.
어둠이 찾아들기를 기다릴 만한 양지바른 그러면서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곳을 빨리 찾아야 했다.
추운 지방은 어디나 그렇듯 대체로 사람들은 화주를 즐겼다. 시에라츠를 경비하는 경비병들
역시 시간이 자정을 넘기자 피워놓은 모닥불로 모여들어 커다란 술병을 돌려가며 한 모금씩 들이켰다.
시에라츠 영주의 특별명령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새벽을 기다리는 자들이 따뜻하게 데워진
술 한잔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챙”
“무슨 소리지 ?”
금속과 성벽이 만들어낸 소리가 들려오자 술병을 입에 대다 말고 볼레스와프가 귀를 쫑긋 세웠다.
“바람 소리겠지. 빨리 마시고 돌리라구 ?”
한참을 귀 기울여도 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동료들이 볼레스와프에게 술병을 돌리라고 성화였다.
바람소리와 모닥불 위에 올려진 사슴고기에서 떨어지는 기름 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성벽을 타고 넘은 5명의 검은 그림자들이 영주가 잠들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건물 안으로
빨려 들었다. 숙련된 몸놀림으로 경비병들의 동선을 피해 잠입하는 데 성공한 뻐꾸기들이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갔다. 벽으로 바짝 붙어 움직이던 대원들은 갑자기 복도 끝에서 불빛이
다가오자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뚜벅. 뚜벅”
작지만 또렷하게 들려오는 발소리는 지금 다가오는 자가 성인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긴장감으로 양손에 쥔 총에 힘을 주던 대원들은 문소리가 들리며 불빛이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안으로 삼키며 복도로 올라섰다. 2층은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영주가 어디에 있는지 알리 없는 대원들은 2명을 2층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3층으로 올라갔다.
팀장은 3층에 올라가자 첫번째 방문 고리를 조심스레 돌렸다. 방안 주인이 잠그지 않았는지 손잡이가
가볍게 돌아갔다. 한 사람은 방문 앞에서 엄호를 하고 팀장과 다른 한 명이 방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방안에는 남자 아이 하나가 새근새근 단잠을 자고 있었다.
어린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팀장은 허리춤에서 원통형 마취 가스통을 커내 잠들어 있는
아이의 코에 살짝 뿌렸다. 방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팀장은 조심스레 다음 방으로 옮겼다.
3층에 있는 모든 방을 수색한 대원들이 계단을 내려왔다. 2층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대원들을
바라보며 팀장을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불행하게도 3층에는 영주가 잠들어 있지 않았다.
복도 양쪽으로 흩어진 뻐꾸기팀이 2층을 수색하며 영주를 찾기 시작했다.
“딸깍”
3층과 2층을 수색하면서 처음으로 잠겨있는 방문이 나타나자 모두들 긴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자신들의 목표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팀장이 눈빛으로 부르자 누군가를 부르자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교문학 중사가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열쇠구멍에 조심스레 집어넣고는
주사기로 액체를 흘려보냈다. 강력한 황산에 자물쇠를 이루는 철들이 찰나에 스스스 녹아 내렸다.
방안에는 40대 후반의 건장한 남자와 젊은 여자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을 취해 있었다.
먼저 마취약을 뿌린 팀장이 안쪽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고는 얼굴을 대조했다.
작은 손전등으로 얼굴을 훑던 팀장이 뒤에 있는 부하에게 눈짓을 보내자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강력한 마취제의 영향으로 고개가 축 늘어졌다. 언제 꺼냈는지 팀장의 손바닥 위에는 작은 환단을
올려져 있었다. 한 남자가 목을 뒤로 젖히고 목 젓을 어루만지며 목구멍을 식도와 일직선으로
개방하자 팀장은 조심스레 입안으로 환단 두 알을 밀어 넣었다.
‘꼴깍’
무의식 중도 환단은 식도에 강력한 연동작용을 받으며 위장으로 내려갔다.
“가자. 신속하게 철수한다.”
각 방을 돌며 영주의 친척으로 보이는 자들에게 골고루 환약을 나눠준 뻐꾸기들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조용히 시에라츠를 빠져 나왔다.
“우리가 왔다는 걸 알겠는데요 ? 문고리를 미처 처리하지 못해서…”
“괜찮아. 죽을 놈에게 새문고리 달아줄 이유도 없고. 악마가 다녀갔다고 생각하던가 ?
한바탕 마녀사냥을 벌이던지 그러겠지.”
성 외곽을 벗어나자 조금 여유로워진 뻐꾸기들은 서둘러 귀향 루트를 밟아 나갔다.
영주에게 죽음의 약을 먹여 주려고 오는 데만 한달 가까이 걸렸으니
갈 때도 그 정도는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는 괜시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동창이 밝은 지 두어 시간이 흘렀지만,
남편과 아이들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시끌벅쩍 할 3층이 너무 조용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들 방문을 열어보았지만, 새근 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깨우지 않고 2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남편의 늦잠은 보고 있을 수만 없었다.
“일어나세요.”
열심히 흔들어대고 나서야 남편이 힘겹게 눈을 떴다.
“크리스티나 ?”
“어제 밤에 일찍 주무셨으면서 오늘따라 웬 늦잠이에요 ?”
“응. 머리가 무겁군. 창문 좀 열어 주겠소 ?”
“네. 어서 일어나세요”
크리스티나가 창문을 열어 젖히자 찬바람이 방안을 한 바퀴 돌더니 침대 위를 지나갔다.
찬바람을 폐부 깊숙이 들이킨 영주는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직도 머리가 띵한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세수 하시고 얼른 내려 오세요. 하인들이 당신 내려오길 기다린지 오래라구요.
오늘은 이상하게 애들도 그렇고 삼촌도 그렇고 다들 늦잠꾸러기가 되었다니까 ?”
뾰루뚱해진 크리스티나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 들으며 대충 옷맵시를 매만진 영주는 서둘러
아내 뒤를 쫓아갔다. 시장기가 많이 들지는 않았지만 사는 즐거움 중 하나인 먹는 것을 잃어버리고
싶진 않았다. 한번 놓친 아침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다는 신념으로 생활해온 그는
맛깔스러운 음식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저절로 즐거워 졌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 앉은 레오폴트는 하녀가 내온 따끈한 야채 스프를 다 마시고,
어린 송아지 뒷다리 바비큐 한 덩어리에 후추를 쳤다.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
듬성 듬성 자른 고기를 입에 집어 넣으려던 레오폴트는 포크를 손에 쥔 채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좀 늦잠을 잤더니 몸이 찌뿌둥 하지만 특별이 아픈 곳은….
왼손에 쥔 포크에 메달려 있던 고기덩어리에서 소스 한방이 곧 떨어질 것 처럼 매달려 있자,
레오폴트는 말을 하다 말고 서둘러 입 속에 포크를 집어 넣다 뺐다.
고기 한 점을 먹으니 없던 시장기도 생길 판이었다.
“속이 이상한테”
잘 놀리던 포크와 나이트를 양손에 쥔 레오폴트는 갑자기 속이 부글거리며 거북해지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목구멍으로 튀어 오를 것 같은 기분에 의자에 벌떡 일어난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쫙 벌렸다.
“펑”
작은 폭음이 들리더니 레오폴트의 복부가 터져나가며 뒤로 주르르 밀려갔다.
사방에 핏물과 내장이 흩어지며 같이 식사중이던 크리스티나를 덮쳤다.
레오폴트의 갈비뼈가 그녀를 스치듯 지나갔다.
“아아아악”
길게 비명을 질러대던 크리스티나는 그 자리에서 실신해 쓰러졌다.
바르샤바
대한제국군이 민스크를 점령하고 호시탐탐 바르샤바를 노리고 있고, 황금알을 낳던 우크라이나마저 빼
앗겨 버리자, 지그문트의 입지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영주회의에서는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영지를
유지하기 위해 대한제국과의 협상을 종용하고 나섰다. 이런 저런 일로 심란한 지그문트는 민스크에서
돌아온 이래 도통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 계속되자 얼굴이 몰라보게 헬쓱해져 있었다.
“전하 ! 전하 !”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 영주들이 대규모로 반란이라도 일으켰답니까 ?”
지그문트의 냉소적인 반응과는 달리 헐레벌떡 들어온 재상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냐니까요 ? 대한제국 놈들이 쳐들어 오기라도 한답니까 ?”
“라둠 영주가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그래요. 나이가 있으니… 하지만 이렇게 빨리 하나님께서 부르실 줄은 몰랐는데”
“토른 영주도 죽었습니다.”
“뭐요 ?”
별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지그문트는 스체르바츠끼가 계속해서 죽은 자의 이름이 거명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 털썩 주저 앉았다.
“어떻게 죽은 겁니까 ?”
“시에라츠 영주를 빼고는 특이한 점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라둠 영주는 잠자리에 든 모습 그대로 아침에 발견되었고 토른 영주는 복상사 했습니다.”
“시에라츠 영주는 ?”
“아침을 먹다가 갑자기 복부가 터져나갔답니다.”
“그래요 ? 재상은 누가 그런 것 같소 ? ”
비슷한 시간에 여섯명의 영주가 죽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었다.
폴란드를 와해시키기 위한 외부의 음모가 작용하고 있다면 대한제국이 유력했다.
“시에라츠를 빼고는 외부 침입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내부 소행이라는 생각에 일단 당시 죽은 영주와 같이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빌뉴스 영주회의 의장를 비롯한 북부 영주들의 소행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대한제국과의 화친을 다른 영주보다 훨씬 강력하게 주장했지 않습니까 ?”
재상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죽은 자들은 모두 남부 영주에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영주를 내세울 때까지 영주회의는 북부 영주들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아니야.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폴란드를 배신할 사람들이 아니야.
너무 들여다 보이는 짓을 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들도 아니고, 하지만 이번 일로 북부 영주들을
핍박할 수는 있겠지. 남부 영주의 죽음에 북부의 개입했다는 이유로 영주회의를 해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요 길목에 병사들을 배치해서 이방인들을 검문검색 하도록 하게.
만약 대한제국이 자객을 보냈다면 아직 벗어나지는 못했을 테니 단 한 놈이라도 잡아드리는데
총력을 기울려. 날이 풀리면 대한제국과 일전을 벌이던 화친을 하든 양자선택을 해야겠군”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이번 일을 교황청에 알려 유럽에서 결성되고 있는 연합군의 도움을
요청했으면 합니다.”
“연합군 ?”
다른 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기위해 또 다른 나라의 군대를 불러들인다는 것이 내키지 않은
지그문트는 잠시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 정도로 폴란드가 허물어지고 있는가 ? 라는 자문에
지그문트는 그렇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언제라도 철회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 그리고 겨울이 가지전에 소치니 그놈을 따르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농노들을 징발하는데 주력하도록 하시오.
영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시고”
“네”
“그리고 왕궁 경비를 더욱 강화하시고 그만 물러가시오.”
지그문트는 왜 자신에게는 자객을 보내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을 의구심에, 재상이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점점 깊어만 가는 이마에 패인 골에 힘이 들어갔지만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그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놈은 잘 있는지 ?”
대한제국이 폴란드를 침공한 이래 단 한차례의 소식도 받지 못한 둘째 아들 걱정이 밀려왔지만
아버지로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한제국은 자신을 살려둔 이유가 둘째 아들 바쟈와
관련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흘러갔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유럽 최대의 항구인 암스테르담은 암스텔강에 만든 댐을 기준으로 거미줄 같은 수로로 이어진
부채꼴형 도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댐 광장 앞에는 네덜란드 왕궁이 세워져 있다. 암스테르담은
70여개의 운하에 걸맞게 곧곧에 벽돌로 만든 아치형 다리들이 섬과 섬 사이를 연결했다.
바타비아를 대한제국에게 빼앗긴 이래 잠시 주춤했던 암스테르담의 활기는 식민지 건설단이
정식으로 발족하고 이주민들을 모집하면서 예전의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1612년에 신대륙 동안에
건설한 뉴암스테르담으로 가는 식민지 이주민과 물자들을 가득채운 범선들이 열흘에 한 척 꼴로
암스테르담을 출항하고 있었고, 매일 이주선을 타기위해 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고 있어서 부채꼴의 도시형태가 하루가 다르게 반원형으로 넓혀져 가고 있었다.
이름모를 운하 하구에 자리잡은 5층 한 창문에서는 암스텔 강변에 있는 풍차가 훤히 내다보였다.
말없이 돌아가는 풍차를 바라보던 한 동양인 사내가 중절모를 눌러쓰고 옷걸이에 걸려있는 외투를
걸쳤다. 보기만해도 고급스러운 천연 모피 코트는 이 사내가 꽤 부유한 상인 출신이거나
귀족 출신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해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