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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제1독서 : 2코린 11,1-11
복 음 : 마태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계 역사 안에서 전쟁 패배의 상처는 매우 컸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일도 있지만, 책임자들이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패배로 인한 막대한 전쟁 배상금으로 그 나라가 다시 일어나기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계 역사를 보면 전쟁에서 졌지만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 전쟁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남북전쟁입니다.
60만 명의 사망자를 내며 4년간 전개된 남북전쟁은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북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전쟁 패배의 대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당시 북군의 총사령관은 ‘무자비한 학살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 장군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비 없는 처분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랜트 장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소. 반란군이 다시 우리 국민으로 돌아왔소.”
이 말을 하고는, 남군 장병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면서 식량도 제공했습니다.
이를 통해 남북의 분열을 막고 하나의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다지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처벌과 배상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이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화해와 용서가 더 큰 가치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빈말만 되풀이하지 말고 제대로 기도하라며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할 때마다 되새기게 되는 말씀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제 잘못을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맞습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자신은 나의 이웃을 향해 용서의 손길을 전혀 내밀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는 용서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였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바치면서, 주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 함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 용서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앞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주님 안에서 큰 가치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기도와 삶
- 주님의 기도 -
이수철 프라니스코 신부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해서 사람입니다.
기도 없는 삶은 공허空虛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盲目이요 맹신盲信이 광신狂信이 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입니다. 이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정말 살기위해, 참 사람으로 살기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에게 강론을 쓰는 밤시간은 기도시간이자 공부시간이자 회개시간입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혼자의 순례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together’의 여정입니다. 여기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이 아니라 세상 깊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세상의 중심입니다.
세상 믿는 이들과 더불어의 여정중에 있는 수도원입니다.
어제 저녁휴게 시간, ‘많은 분들이 배즙을 주문했어요!’
감격에 벅찬 농장수사님의 기뻐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가득했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함께 하는 더불어 여정중의 도반들에 대한 감사와 감동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저녁미사 중 감사미사 봉헌하려 합니다.
선물중의 선물, 특히 요셉 수도공동체의 선물이 다가오는 7월11일에 종신서원 할
요즘 배밭 부책임자로 배밭 육체노동에 맹활약중인 정 아브라함 수사입니다.
상본의 성구와 더불어 정성 가득 두 손으로 배를 봉헌하는 듯한 소박한 그림도 참 좋았습니다.
“아브라함아!”(창세22,1)
이보다 더 좋은 성구 본 적이 없습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 답이 생략되어 있어 더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더불어 떠오른 ‘3더3덜’에 대한 깨달음에 각오입니다.
‘1. 더 공부하고, 2. 더 기도하고, 3. 더 운동하기’와
‘1. 덜 먹고, 2. 덜 쓰고, 3. 덜 쓰레기내기’,
이런 생각 또한 기도의 열매이자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제 또한 시원한 바람에 참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하느님 선물의 하루임을 실감한 날이었습니다.
주님의 축복을 비는 마음에 아름다운 하늘길 자연 배경에
제 모습을 넣은 사진을 여러 지인들과 ‘단 하나의 소원’이란 시와 함께 나누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하늘이, 당신의 나무가, 당신의 그늘이, 당신의 바람이,
당신의 빛이, 당신의 길이, 당신의 모두가 되고 싶다”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영원하신 임이신 당신의 모두가 되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지난 삶의 뒤안길을 돌아다보면 굽이굽이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느낍니다.
작년 ‘대천사 축일’인 9월29일에 고속도로에서의 대형교통 사고에도 건재할 수 있었던 기적도
순전히 주님의 은총입니다.
바로 4년전 ‘공동체 나들이’ 때인 대천사 축일 날(1917.9.29.)
‘롯데 시네마’에서 어느 화가가 30분만에 그려준 초상화의 발견도 새로운 감동이었습니다.
작년에 교통사고 시 구사일생 생환生還 체험과 더불어 올해의 상반기 잊지 못할 체험은
사순시기 첫날 재의 수요일 아침미사 후 산책 시 발견한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성심상 바위판이 그대로 기도하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날마다 산책 시 ‘늘 거기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모습의 형상은
볼 때 마다 새로운 감동으로 와닿곤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은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제 뜻이 당신 뜻이 되게 하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바로 새벽 산책시 마다 예수 성심상 기도하는 형상의 바위 앞에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누구나 하느님 주신 이름이 있다면 ‘이 행복’일 것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살아갈수록 간절히 남는 생각은 끊임없이 기도해야 겠다는 것 하나뿐입니다.
이런 기도하고 싶은 청정욕淸靜慾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선물은 스승의 날 즈음에 방문했던
44년전 초등학교 6학년 때 제자들이 불러 줬고
이어 만들어 준 ‘스승의 은혜’와 ‘어린이 날’ 노래 동영상입니다.
거의 날마다 산책 시 동영상의 노래를 들으며 영원한 스승이신 ‘주님의 날’처럼,
영원한 동심童心의 ‘어린이 날’처럼 생각하고 지내려 노력합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 삶의 노하우가 압축 요약된 주님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군더더기가 말끔히 생략된 본질적인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성규20,4)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도 생각납니다.
바로 예수님의 평생 삶이 압축된 기도와 삶을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음으로 참 사람의 내가 되게 하는 참 귀한 보물 같은 기도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目標와 방향方向, 중심中心과 의미意味를 선명이 드러내 주는
생명과 구원의 기도입니다.
이런 주님의 기도와 삶이 요약 압축된 주님의 기도가
평생 예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과의 일치를 촉진합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제1독서의 ‘열정과 순수’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사도의 감동적인 다음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걸고 말하는데, 나의 이런 자랑은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 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하느님께서 아십니다!’
마지막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께서 바오로를 아시듯 바오로 또한 깊이 하느님을 알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이 나를 아시듯 나는 하느님을 얼마나 아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이런 바오로의 열정과 순수가 넘치는 고백들을 통해
그가 살아계신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지 깨닫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어떻게 우리도 날로 주님과의 깊어가는 일치의 체험을 할 수 있겠는지요.
답은 단 하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뿐입니다.
주님의 기도와 더불어 주님과의 일치 또한 깊어집니다.
우리 모든 인류 가족의 하늘 아버지입니다.
믿는 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믿지 않는 이들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들이요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이 심화深化되고 삶의 현장에서 복음 선포의 삶으로 실현實現될 때
아버지의 뜻도 이뤄지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것이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은총과 더불어 우리의 협력의 응답이 있어야 함을 자각自覺하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더욱 분발奮發, 분투奮鬪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헛된 환상幻像과 우상偶像에서 벗어나 거룩한 가난을,
자유로운 단순소박한 본질적 삶을 살게 하는 기도입니다.
내일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는 기도입니다.
날마다 일상에서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상호간의 용서와 하느님의 용서를,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악에서 구함 받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은총과 더불어 우리의 협력과 책임을 자각케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환히 계시되는 절정絶頂의 자리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모신 형제자매들이 함께 마음을 다해 주님의 기도를 바친 후,
오늘 일용할 양식의 결정체인 생명의 빵, 천사들의 양식인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예닮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 주님의 생명, 주님의 평화, 주님의 기쁨, 주님의 행복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할렐루야!
내 마음 다하여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에서, 집회에서.
주님께서 하신 일들 크기도 하시어, 그것들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친다.”(시편111,1-2). 아멘.
“너희는 이렇게 기도 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 안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주님의 기도”에는 주 예수님이 담겨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드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이 기도는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초청하는 것이요,
하느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삶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고,
하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우리의 눈이 바뀌어 가고, 삶이 바뀌어 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가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네."(복음 환호송)
기도는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 아버지와 주고받으시는 사랑의 호흡이고 내용입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지요.
성령 덕분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된 우리는
성령과 하나의 호흡, 하나의 숨, 하나의 바람으로 아버지와 연결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우리를 지으시고 눈길조차 떼지 않고 돌보시는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기쁨과 행복, 눈물과 절망, 갈망과 욕망뿐 아니라
어둠과 죄악까지 그분께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지요.
이런 구체적 실존들을 내용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허공을 붙잡으려 빈말로 허우적 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격앙된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2코린 11,11)
사도 바오로는 열정을 다해 섬긴 코린토 교회 신도들이
다른 예수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에 쉽게 넘어가는 것을 통탄하며
조목조목 따지다가 결국 모든 안타까움을 실어 이렇게 외칩니다.
결코 자신을 자랑하려거나 생색내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지향과 노력과 사랑은 하느님께서 다 아시니 그저 그분께 맡길 뿐이지요.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마태 6,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 번 바치는 이 기도 안에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깊이 머물러 한 구절 한 구절 진심을 다해 바치다 보면,
이 기도 말고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지 새삼 의문이 들 정도지요.
아버지의 이름,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이 이 세상을 채우면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사 21,3-4) 하는
새 하늘 새 땅의 모습이 펼쳐질 것입니다.
"용서하면 ... 용서하실 것이다."(마태 6,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과 악에서의 보호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뒤,
"용서"를 콕 짚어 다시 한 번 언급하시지요.
사실 주님의 기도 안의 청원들은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행사하실 영역이지요.
그런데 "용서"는 우리에게도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주도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만큼 사람 사이에도 절실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확실히
하느님을 닮게 해 주는 속성 월반 코스일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과 우리의 '이인삼각' 동반 달리기랑 비슷할 것 같기도 하네요.
그분과 한 호흡으로 그분 전공인 용서의 보폭에 맞추어 뛰다 보면
우리도 어느새 용서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정성을 다해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그 안에 깃든 아버지의 마음을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 기도밖에 우리가 더 바랄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도 반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통해 꿈꾸는 세상이 어서 완성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신문사의 업무는 3부분으로 나누어서 운영됩니다.
첫 번째는 편집입니다.
본사에서 오는 기사와 미주지역에서 오는 기사를 지면에 맞도록 배치하는 것입니다.
특집기사, 세계교회, 미주지역 소식, 한국교회 소식, 연재기사를 선택하는 업무입니다.
회의를 통해서 편집계획이 확정되면 신문이 만들어집니다.
두 번째는 취재와 광고입니다.
본당 홈페이지와 주보를 통해서 미주지역의 소식을 파악하고, 기사를 제공 받습니다.
직접 찾아가서 취재를 합니다.
요셉의 해를 맞이해서 본당 사목회장님들과의 인터뷰를 갖기도 합니다.
미주지역 한국학교에 대한 기획취재도 준비합니다.
광고는 장기광고와 단기광고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회계와 구독자 관리입니다.
신문사 전반의 회계업무를 담당합니다.
수입은 구독료, 후원금, 광고비가 있습니다.
작년에는 정부로부터 재난지권금도 받았습니다.
구독자들에게는 구독료를 낼 수 있도록 편지를 발송합니다.
배달이 지연되는 곳에는 따로 신문을 보냅니다.
2년 전부터 미주지역에 레지오 수첩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미주지역 각 본당으로부터 레지오 수첩을 신청 받아서
한국에 주문하고, 한국에서 수첩이 오면 각 본당으로 보내주는 업무입니다.
지금 일하는 직원들은 전에 있던 신부님께 이 모든 업무를 배웠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사제가 되기 전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였고,
미국에서도 언론에 대한 공부를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평화방송에서 사목을 하였고, 미주지역가톨릭평화신문에서도 사목을 하였습니다.
지금 일하는 직원들은 업무를 가르쳐 주었던 신부님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배울 때는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신문 만드는 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저의 업무는 신문사를 대표하는 일입니다.
미주지역을 다니면서 신문을 홍보하는 일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1년이 넘게 홍보를 다니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이 각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듯이,
저도 각 지역을 다니면서 신문을 홍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등대와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였고,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조직, 제도, 자본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또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자본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기도하기 전에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 나가듯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고난과 역경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
유혹에 빠지지 말며, 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치면 일어나는 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 중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는 장면입니다.
산상설교는 진복팔단, 즉 ‘행복’으로 시작합니다.
영원한 생명, 혹은 하느님 나라와도 같은 이 행복은
오로지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과는 다르게 당신을 믿어야 율법을 실천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믿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고,
오늘 하느님의 자녀만이 바칠 수 있는 당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우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안다고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레너드 빅먼 연구팀은 쓰레기통이 놓인 한 번화가에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경로를 따라 종잇조각을 구겨서 흩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길 건너편에서 쓰레기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는 사람들의 비율을 확인해보았습니다.
전체 보행자 중 쓰레기를 주운 사람은 몇 퍼센트일까요? 2%였습니다.
다음 단계로 연구팀은 쓰레기를 보고 그냥 지나친
보행자 수백 명을 멈추어 세우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시민들 모두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의무적으로 주워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청소부의 몫으로 내버려 두어야 할까요?”
여기서 쓰레기 줍기를 시민의 의무라고 답한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10%? 40%? 60%? 놀랍게도 종잇조각을 그냥 지나친
보행자 중 94%가 시민의 의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작은 실험에서도 인간이 알고 있다고 다 실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마 94%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2%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왜 알면서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또 다른 사례를 보겠습니다.
미국 국립 암연구소는 1980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500만 달러를 투자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대규모 흡연 예방 프로그램을 시행했습니다.
시애틀 지역에서 무작위로 선발된 4,000명의 흡연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 캠페인의 성공률은 28%였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돈과 노력이 투자된 이 그룹 외에도 또 다른 흡연그룹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그 그룹의 금연율도 조사하였더니 29%로 나타났습니다.
담배를 피우면 건강에 나쁘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등의 정보를 제공하는 이 캠페인은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번엔 부모들이 직접 아이들에게 금연을 설득하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지금 말하세요. 자녀들이 들을 겁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아이들은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전형적인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캠페인은 오히려 담배를 ‘더’ 피우도록 부추겼습니다. 하라면 더 안 합니다.
우리나라 보건복지부에서 했던 ‘6년 금연, 자동차 구입’이라는 캠페인도 생각이 납니다.
담배꽁초 20만 개로 자동차를 만든 캠페인입니다.
이 과정에서 작업하던 30명 모두 면역 이상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중 15명의 흡연자는 꽁초만 많이 만져도 면역체계의 이상이 온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로 금연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100% 모두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정보로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압니다. 하고 싶어도 안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요?
사람은 머리로 아는 지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정체성’대로 행동합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라고 결심한 사람은 끊지 못합니다.
하지만 ‘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반복한 사람은
담배를 더 많이 끊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나는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은
‘나는 담배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은 ‘내가 그것을 바라느냐, 바라지 않느냐’로 이어지고
삶은 그 믿음대로 흘러갑니다. 바라는 것을 바꿔주면 정체성도 바뀝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대로 사람도 변화됩니다.
사람은 정체성대로 행동하는데 그 정체성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더 굳게 믿어집니다.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졌더라도,
그것과 더불어 1달, 1년, 10년 금연한 사람과는 그 믿음의 정도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만큼 다시 담배를 피울 확률은 줄어듭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이불부터 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해도 매일 이불이 잘 정돈된 것을 보면
‘나는 허물어질 사람이 아니다.’라는 믿음이 생겨서 다시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승호 회장은 실패할 때마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해서 가슴이 나오게 했다고 합니다.
가슴이 펴지면 ‘나는 여기서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정체성대로 나중에 성공하게 됩니다.
반복되는 작은 말과 행동이 결국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조던 피터슨의 ‘바닷가재’의 경우와 같습니다.
한 번 싸움에서 이긴 바닷가재는 더 강해지고 한 번 진 바닷가재는 더 소심해집니다.
이를 ‘승자효과’라고도 합니다. 모두 믿음과 정체성에 관련된 이론들입니다.
사랑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모두 주님의 기도에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치면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확고해지고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고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어 세상에서 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자주 바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화 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믿었는데 물 위를 걷게 되었다는 섬나라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행위는 정체성에서 나오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
내가 청하는 것인데, 하느님의 자녀는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들만 청합니다.
그러니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칩시다.
그 바치는 자신을 보며 더욱 주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