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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니온 선교 14:1~7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루스드라 선교 14:8~18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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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말씀을 전할 때 주님이 표적과 기사로 말씀을 확증해 주십니다.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도착한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바울이 고칩니다. 이에 무리가 두 사도를 신으로 숭배하려 하자, 두 사도가 이를 말리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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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니온 선교 14:1~7
박해는 복음이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 도착해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고니온은 오래된 도시로 농업과 상업이 발달한 곳입니다. 그들은 주로 유대인이 많이 있는 큰 도시를 방문했는데,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이 계속 확산되자,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해 사도들에게 악감을 품게 합니다. 사도들은 그곳에 계속 머물며 이방인 새신자들의 믿음을 돕고, 주님은 표적과 기사로서 사도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을 확증해 주십니다. 대적자들이 돌로 쳐 죽이려고 하자 사도들은 다른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 오래 머문 이유는 무엇인가요?
방해자들이 있음에도 내가 더욱 열심히 감당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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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드라 선교 14:8~18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믿음을 가집니다. 바울이 성령의 권능으로 그를 고쳐 주자 이를 본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내려고 합니다. 이에 두 사도는 옷을 찢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들은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 결코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에게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구약성경을 인용해 복음을 전했는데, 이방인에게는 자연 만물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깨우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합니다. 그는 우상 숭배가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일임을 알리며 제사를 말립니다. 복음을 전할 때 대상에 알맞게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은 구약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내용으로 복음을 전했나요?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유연성을 발휘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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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이 필요한 이유
중세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을 조심하라.”라고 경고한 바 있다. 편향된 이념에 사로잡히면 진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파한 말이다. 이를 ‘앵커링 효과’ 혹은 ‘닻 내림 효과’라고 한다. 이것은 프린스턴대학 심리학 교수 대니얼 카너먼 등이 제시한 개념으로, 닻을 내린 배가 움직임을 제한받는 것처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 합리적 사고를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생각의 틀이 고정되어 버리면 누군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 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혹은 본뜻을 왜곡해 받아들여,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무작정 적의를 드러내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집단 지성도 부정확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은 기계가 아니므로 판단 과정에서 일시적 감정 등 여러 상황의 영향을 받고 판단을 내린다.”라며 “군중은 생각만큼 지혜로운 집단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결국 인간의 제한된 시각으로는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안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진리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은 거짓된 다수의 세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 있는 한 사람과 반드시 함께하신다.
갈렙처럼 온전하게 / 강정훈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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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14장 9~10절
장애로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믿음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선포함으로 그를 고쳐줍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기적을 행하십니다. 믿음 앞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설자리가 없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작은 소망조차 찾을 수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그 모든 어둠의 길을 뚫고 기적의 '새 길'을 엽니다.
복음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편안함의 보상보다 고난의 대가를 치를 일이 더 많이 따른다. - 데이비드 플랫
오늘의 기도
하나님, 복음이 전해지는 지역의 특성과 필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의 역동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때로는 부드러운 가르침으로, 때로는 직접적인 교훈으로, 때로는 기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게 하소서. 복음의 생명력으로 가정과 교회가 살아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25 예수가 함께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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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해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먼저 회당을 찾아갔습니다(1절). 두 사도는 담대히 말씀을 선포했고, 주님은 그들의 손으로 표징을 행하게 하셔서 그들이 선포한 말씀을 확증해 주셨습니다(3절). 한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처럼 이고니온의 유대 지도자들도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려고 했습니다(2, 4절).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와 더베로 피했고, 거기서 얼마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6, 7절). 그곳에서 그들은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고쳤는데, 이 일을 본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라 부르며 제물을 가져와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8~13절). 두 사도는 그들을 급히 제지하며, 헛된 신을 버리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합니다(14~18절).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우리 마음을 구원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어디를 가나, 어느 곳에 있던지,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자
-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시는 땅에서도 주님께서 친히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충실하 하고, 겸손함을 잃지 않고, 늘 낮은 마음을 갖고 온전히 주님만을 높이고, 주님만을 드러내도록 하자
- 우리가 가는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잘 전하기 위해 더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함은 물론이고,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고,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날을 기대하면서 그 땅으로 나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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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와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바울의 설교를 경청했는데,
바울이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외쳤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행14:10)
그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고치시니 즉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무리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신들에게 영광을 돌려, 자기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와 기적을 행했다며
바나바는 제우스 바울은 헤르메스라 부르며 제우스 신당의 사제들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와서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나바와 바울이 옷을 찢고 외치며 무지한 무리를 겨우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바나바와 바울은 자기 옷을 찢었을까요?
일반적으로 큰 슬픔을 당했을 때, 큰 민족적 위기가 닥쳤을 때, 옷을 찢으며 애통함을 표현합니다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삼하1:11~12)
바나바와 바울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함을 보고 큰 슬픔을 느꼈고, 거짓된 우상을 온 힘을 다해 섬기는 그들의 헛된 믿음에 큰 좌절을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옷을 찢고 애통하는 자들의 말을 들으십니다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대하34:27)
그러나 아직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는 지식이 전혀 없는데도 저들의 무지에 대해 그 어떤 슬픔도 느끼지 않습니다 지금도 온 힘을 다해 헛되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데도 그 어떤 좌절감도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지 않습니다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렘36:24)
그러나 우리는 옷을 찢는 심정으로 마음을 찢고 오늘부터라도 기도하기 원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2:13)
그리하면 오늘부터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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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시는 일을 하셔야만 고백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순간부터 사탄은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전에는 사탄의 종이었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어도 세상 속에서 잘 살았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사탄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지속적으로 중상모략을 하며 유혹을 합니다.
심지어 나와 상관없는 자들까지도 선동하여 우리를 미워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되어야 합니다.
혼자서 사탄과 싸우기 어렵기에 함께 힘을 모아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위하여 사랑을 나누며 함께 기도함으로 힘이 되어주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헤롯왕처럼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채고 있습니까?
아니면 바울과 바나바처럼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알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쫓습니다.
그리고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을 신이라 칭송하며 경배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겐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을 경배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을 섬기는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 속에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교회 공동체 안에 있다는 사실로 기쁨이 넘치는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바울의 삶에는 수많은 고난이 따랐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매도 수없이 맞았다.
오늘 본문에서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고, 돌에 맞은 바울이 죽은 줄 알 정도로 심하게 돌로 쳤다. 그럼에도 바울은 다시 안디옥과 이고니온으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유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려고 그런 것이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의 삶은 환난의 삶이었지만 바울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맞섰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거의 죽을 뻔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안디옥으로, 이고니온으로 가서 제자들의 믿음을 든든히 세웠다.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며 그들의 믿음이 견고하게 세워지도록 도왔다.
바울은 이고니온에서는 핍박을 받고, 루스드라에서는 신적 존재로 오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오해를 넘어 복음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며 계속 전진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5b~17절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도, 창조와 그 세계를 자비로 운행하시는 것을 통해 존재를 알리셨습니다. 시대마다 달랐고, 대상에 따라 전달 방식이 달랐을 뿐 누구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 지나간 세대에 대한 묵인이 불신에 대한 허용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한(헛된 일) 인류의 죄에 대해 아무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2절 비시디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에게 호되게 당했음에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인 회당은 ‘핍박의 온상’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선교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도 유대인들이 반감을 조장하며 훼방했지만, 그들을 전도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았습니다. 전도만큼 원수를 사랑하는 관용의 표현이 또 있을까요?
3,5~7절 바울과 바나바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오직 복음을 위해 ‘오래 머물기도’ 했고(3절), 때로는 핍박을 피해 ‘급히 떠나기도’ 했습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서 떠나는 것은 비겁한 도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마태복음 10장 23절)에 대한 순종이고, 새로운 사역지로의 이동일 뿐입니다. 나의 머묾과 떠남, 사역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8~10절 바울이 주목한 것은 걷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태였지만 바울은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네 발로 일어서라”(3장 6절)고 명령하여 걷게 해줍니다. 복음에 대한 그의 ‘믿음’에 하나님은 기적(치유)으로 응답하십니다. 신비한 현상만 좇지 말고 말씀을 사모함으로 믿음을 더욱 키워가야 합니다.
11~15,18절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우상숭배의 헛됨을 알리며,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촉구합니다. 박해의 위협에 주저앉아서도 안 되지만, 교묘한 자기우상화의 유혹에 빠져 제 본분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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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적인 인생을 살라 -
두 사도는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의 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급기야 유대인들은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듭니다. 이에 그들은 루스드라로 피하게 되고, 그곳에서 걷지 못한 사람을 고칩니다. 루스드라의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들로 믿고, 제사하고자 하자 두 사도는 겨우 그들을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_ 주님을 힘입고 살아가는 삶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1~7절).
바울과 바나바는 늘 상 하던 방식대로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먼저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유대 사람과 헬라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1절). 복음은 생명력이 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염려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기를 거부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두 사도를 향하여 악감을 품게 합니다(2절). 급기야는 그들은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기(5절)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도는 이고니온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3절).
.주를 신뢰하지 않는 믿음이 결국 헛된 방법을 찾게 되고, 주님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의 삶이 흘러가게 되는 것을 봅니다. 표적과 기사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 복음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도록 합니다.
이고니온 지역에 수많은 백성들이 믿을 만큼 복음이 전파되었기에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을 피해 루스드라와 더베로 사역지를 옮겼습니다(6~7절). 주님을 힘입고 살아갈 때 담대할 수 있고, 맞닥뜨린 삶의 문제 역시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주님을 힘입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_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8~10절).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사도들은 좌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기회를 복음을 확장시키는 기회로 삼아 더욱 열심히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8절). 그 사람은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경청했습니다. 바울은 그를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그의 병을 고칩니다(9~10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여 말씀의 터전 위에 굳게 설 때, 우리에게 견고한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생기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은 성공적인 인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여전히 나를 주목하여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_ 헛된 일들을 버리고 살아가는 삶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11~18절).
루스드라에 적잖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한 일을 보고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절)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12절)로 알고 이들에게 제사하려고 모여 들게 된 것입니다(13절). 이에 놀란 두 사도는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습니다. 그들이 외쳤던 말은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곳에 온 것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이 헛된 일들에서 돌이켜,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15절, 쉬운성경)라는 내용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 하는 가장 큰 목적은 헛된 우상을 버리고 회개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전도자로 살아가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마치 내가 앉은뱅이 고친 것처럼 착각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헛되고 헛된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에 자리에 서도록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 나에게 있는 능력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결코 잊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 근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힘입는 믿음을 가지고,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1.복음 전파의 사명
바울과 바나바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두 사도는 복음증거하는 삶을 가장 우선의 자리에 두고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를 쉬지 않았습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은 이러한 목적에 철저하게 순종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이 두 사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 모두가 행해야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항상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
2.루스드라의 기적
바울사도는 루스드라에서 또 하나의 기적적인 일을 이루게 됩니다.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의 삶에 들어갈때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능력을 덧입혀 주십니다.
[단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우리의 삶이 기적적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면 영혼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전도의 사명을 다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묵상하기
복음의 집요한 관심으로 기적을 경험하는가?
3.영적인 무지로 오는 잘못된 신앙(11-13절)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을 고친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람들은 그들을 쓰스와 허메라고 하며 신으로 모시게 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신에 대한 상식으로 말을 하는 바울에게 허메 즉 헤르메스로 보았고 바나바는 쓰스 곧 제우스로 섬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도 자신들의 잘못된 영적 상식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지식이 풍성해야 하는 것도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도 무지하여 잘못된 신앙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바른 영적인 지식을 가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삶을 사는가?
4.높임 받기를 거절함(14-15절)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높여 섬기려고 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랜만에 전도를 행하면서 이례적으로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문제가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이기에 아주 단호하게 자신들이 옷을 찢으면서까지 그일에 대하여 만류하게 됩니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조금이라도 가로채서 누리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를 이루고 나서 마치 자신들이 그 일을 이룬 주인공 처럼 영광을 받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오늘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높여서 신처럼 대우하는 사람들 앞에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좋은 결과가 있을 때 영적으로 더욱 긴장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내가 가로채는 불경을 범하게 됩니다. 신앙 사역을 세상의 기준을 따라서 성공적 개념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부분도 아주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은혜에 사로잡혀서 그 은혜를 갚을 길 없어서 믿음으로 사역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온전히 돌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내가 이룬 사역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믿음에 따르는 환난을 피하지 말라.
14장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에서의 전도 사역을 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중심으로,
먼저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곤 하였습니다(1).
이고니온에서도 그 결과로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적과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섬기는 도구임을 분명히 가르쳐줍니다(3).
하지만 두 사람의 전도사역은 이고니온에 분열과 큰 다툼을 가져왔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분쟁이 일어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마 10:34~36).
결국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두 사도를 돌로 쳐 죽이려하자
그들은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렇다고 복음 사역을 중단하거나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루스드라에서의 전도사역은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그 사람 안에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본(9) 바울은,
일어서라고 그에게 명했고 그는 뛰어 걷게 되었습니다.
이방신화에 젖어 살던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 일을 보고서,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부르며 숭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나바와 바울은 헤롯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지 않고, 이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였습니다(15~17). 이 설교는 구약성경에 전혀 무지하고 이방신화에 젖은 순수 이방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구약성경보다 하나님의 일반은총과 자연에 바탕을 두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경은 루스드라에서의 사역에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침묵합니다.
다만 여전히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쫓아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선동하고 있으며,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던져버렸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결과를 말하고자 하기보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핍박이 거세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일차 선교여행 중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일차 선교여행의 후반부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지금까지 구브로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제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고난의 십자가 길임을 가르쳤습니다.
[이고니온에서 사도로 불리는 바울과 바나바]
1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13장 42절에 이어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도라는 표현을 두 번째로 쓰고 있습니다.
사도는 열두 사도에게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울과 바나바에게도 사도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복음을 핍박하는 바울이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요, 예수님의 표적이 나타나는 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였고 그들을 통하여 바예수가 소경이 되는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은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순서를 영접하고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임을 전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일하셨습니다. 유다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통하여 바울이 사도임을 증거하였습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율법주의자들)
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그러나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믿은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습니다. 악감은 나쁜 감정,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같이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이 복음 역사를 시기하여 방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예수님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율법주의 신자들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원수가 됩니다.
사도들은 유대주의에 물든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습니다.
(주를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두 사도)
3절을 보십시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두 사도는 핍박 속에서도 오래 이고니온에 있었습니다. 이고니온은 지금의 터어키 코냐입니다.
두 사도는 핍박자를 볼 때 힘이 많이 빠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힘입어 살아갑니다.
밥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살아계신 주를 힘입어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힘입었다는 말은 의지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두 사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힘을 주시고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다윗이 블레셋 시글락에 머물 때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는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왔습니다. 돌아와보니 동네는 아멜렉에 의해서 불에 타고 처자식은 아멜렉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부하들은 다윗이 그들의 길을 잘못 인도하였다고 다윗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은 큰 절망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힘입어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다윗은 기도하고 도전하여 빼앗긴 가족들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힘입어 윅기를 극복해야합니다.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신 하나님)
바울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자 하나님은 친히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병을 치료 받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표적을 통하여 친히 자기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하는 행위의 복음이 잘못되고 은혜의 복음이 바르다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증거하여 주셨습니다. 복음은 은혜의 복읍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고 은혜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도 없고 숨을 쉴 수도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두 가지 반응)
4절을 보십시오.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이고니온 시내의 무리가 두 패로 나뉘어졌습니다.
유대인을 따르는 무리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무리도 있습니다.
이고니온 성의 반은 두 사도를 따를 정도로 놀아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항상 두 무리가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따르는 무리가 있고 행위의 율법을 따르는 무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복음을 핍박하는 무리가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때도 두 무리로 나뉘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따르느냐에 따라서 영생과 영벌이 갈라집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 사도를 따라야 합니다.
(도망하여 복음을 전하는 두 사도)
5-7절을 보십시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였습니다. 돌로 쳐서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두 사도는 이를 알고 이고니온에서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은 핍박이 있으면 피하여 다른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핍박이 전도의 영역을 넓혀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진 무리가 사마리아와 시리아 선교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은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굴하지 않고 계속하여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앉은뱅이로 태어난 한 사람)
8 절을 보십시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루스드라에 갔을 때입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삶은 운명적이고 슬펐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앞에서 만난 40대의 사람과 비슷합니다. 디모데도 이런 사실의 목격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긴 앉은뱅이)
9,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바울은 앉은뱅이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바울에게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으면서 그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생깁니다.
바울은 주목하여 그의 눈을 보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큰 소리로 그에게 네 발로 일어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바울과 그의 믿음이 합하여지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도 같은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돈을 달라고 하는 그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씀하시고 믿음을 심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생기자 그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하고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바울을 신으로 경배하는 사람들)
11-13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을 보지 못하고 바울과 바나바만 보았습니다 그들은 바나바는 리더이므로 제우스 신이라고 하고 바울은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루스드라 시와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가지고 대문 앞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바울에게 제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쓰스와 헤르메스 신전이 있습니다. 이 지방에는 일찍이 쓰스와 허메신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찾아 왔으나 두 사람만 환영하고 아무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은 홍수로 잠겼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이런 전설 탓인지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극진히 대접하기 위하여 쓰스 신당에서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제사 지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핍박보다 더 큰 사단의 시험입니다.
(영적으로 분노한 두 사도)
14절을 보십시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사람들은 다 명예심이 있습니다. 칭찬을 받으면 다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그들의 말을 듣고 옷을 찢었습니다.
조금 경배를 받다가 옷을 찢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옷을 찢었습니다.
큰 슬픔과 분노를 표현하였습니다. 뛰어들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아니요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자신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높이고 결코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면이 바울의 위대한 점입니다.
여기서 옷을 찢지 않으면 이단 교주가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신격화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신격화하지 말아야합니다. 자신을 높이지 말아야합니다. 두 사도들은 표적을 행한 후에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교만해지면 사도로서 생명은 여기서 끝납니다.
박태선 장로는 표적을 행한 후에 교만하여져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표적을 행하기보다 더 나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들은 찬양을 받을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높일 때 옷을 찢을 수 있어야합니다. 복음 역사의 장애물이 핍박으로 나타날 수 있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단이 이것을 통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넘어뜨리고자 하였습니다. 헤롯이 죽은 것도 숭배 받을 때 즐긴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라고 전한 복음)
15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두 사도들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경배하는 일을 하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도 그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이 죄악된 사람이라고 전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들이 헛된 우상숭배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표적을 통하여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보고 천지와 바다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비를 통해서 자신을 증거하신 하나님)
16,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을 가도록 방임하셨습니다. 내버려 두셨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알아서 심판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심판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이 자신을 증언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로 자신을 증거하였습니다. 음식과 기쁨을 주어 마음에 만족을 주시고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때도 자연을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자연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에 경배를 합니다. 고목이나 대천이나 명산에 경배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직 자연을 만드신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표적을 행했다고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직 그들을 통하여 표적을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듣는 신앙, 보는 신앙(행14:1-18절)
오늘 묵상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고니온에서는 함께 고난을 이기는 사도들의 모습이 눈에 가득히 들어옵니다.
우선 1절의 두 사도가 함께 라는 구절부터 시작해 봅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主)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1-3절).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에게서 지도자로서의 위대한 잠재력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로 하여금 일하게 하고,
자신은 서서히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본문에서 그들은 여전히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기자(누가)는 “바울과 바나바”라고 바울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던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주(主)의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느냐?
누가 일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이 좀더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전파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함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의 하나 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함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본문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함께 고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그럽니다. 악감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반대하는 장면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그랬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기적이 함께 했습니다.
3절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아주 놀라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主)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그랬습니다.
많은 핍박과 반대와 능욕이 있었지만 구원의 드라마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주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3절은 두 사도가 오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함께 그 도시에 오래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래 이방인의 사도로 택하심을 입은 것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디옥 교회에 역사 하실 때 바울만을 구별하여 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뒷날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할 때도 바울은 실라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동역자로 삼고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시키실 때에도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보내셨습니다(눅10:1절).
만약 바울이나 바나바나 혼자 이런 고난을 당했더라면 그것을 잘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하나님께서 능력주시면 가능이야 했겠지만 훨씬 힘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둘씩 함께 고난을 받도록 보내신 것입니다. 함께...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하는 동역자들
결국 그들은 이고니온에서 도망칩니다. 그리고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갑니다. 루스드라에서도 티끌을 털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왔는데 이고니온은 더했던 것입니다. 공통분모는 유대인들의 시기였습니다. 가장 큰 전도의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루스드라 전도
8절부터는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고니온에서 도망쳐 나온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현장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앉은뱅이가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앉은뱅이가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그랬습니다. 여기서 들었다는 말 아쿠오(ἀϰούω)는 그냥 듬성듬성 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다해서 들었다는 말입니다. 열심히 들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지속적으로 들었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일어서라고 말할 때 그 말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들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듣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마음을 써서 주의를 집중해서 들은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누구를 보고 있었습니까? 말씀을 아주 열심히 듣고 있는 앉은뱅이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그랬습니다. 한참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 말씀을 아주 열심히 하나라도 놓칠세라 듣고 있는 앉은뱅이를 바울은 주목하면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속에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향해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외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뒷날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절) 그러므로 듣는 신앙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곧 생명입니다. 특별히 앉은뱅이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으면서 깊이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아멘! 아멘! 하면서 말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주목한 바울이 그에게 일어서라 소리칩니다. 앞 뒤 전후를 계산할 겨를도 없이 그저 말씀듣기를 계속하다가 그 말씀 따라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무슨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는데 어떻게 일어나라는 말이냐? 당신 미쳤느냐?” 등등의 논리적인 개입이 있기 전에 그전 말씀을 계속 듣다가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일어나라고 소리치니까 그 말씀을 받아서 일어서려고 무의식적으로 힘을 쓴 것입니다. 이것이 듣는 신앙입니다. 순종의 신앙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듣는 신앙은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갈급합을 가지고 말씀 앞에 반응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 결과 본능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을 말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기적! 모든 삶의 능력은 말씀을 잘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은 잘 성장합니다. 삶이 힘이 있습니다. 생활이 변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큽니다. 오늘도 잘 듣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보는 신앙의 위험성
그런데 옆에서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앉은뱅이처럼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는 아주 열심히 전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말씀에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뛰어 걷습니다.
그런데요? 한참 상념에 잠겨서 말씀을 잘 듣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 수준이 안 맞아서, 관심이 없어서, 세상 정신 노이즈 때문에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듣는 사람들도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을 볼 수는 있었습니다. 본문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그랬습니다.
본다는 말은 흔히 결정적인 증거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내가 보았다”는 말은 결정적인 말입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된 과정! 선포된 말씀은 잘 듣지 못하고 일어난 결과, 현상만 보는 사람들이 흥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사람들이 바울의 일어서라는 소리를 듣고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서는 것을 보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들은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학자들은 최소한 이들이 세 개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첫째는 라틴어입니다.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라틴어가 공식적인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헬라어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헬라어는 당시 거의 공통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자신들만이 사용하는 모국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가오니아 방언이란 바로 자신들만의 방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말하면서 바나바는 쓰스, 즉 제우스, 로마식으로는 쥬피터라고 하고 바울은 좀 작고 못생긴 연고로 허메, 즉 헤르메스라고 합니다. 허메는 제우스의 대변자로서 신의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하는 신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허메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를 하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특별히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쓰스와 허메가 변장을 하고 지상에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고 사람들의 집에 손님으로 묵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들은 짚과 습지에 사는 갈대로 지붕을 엮은 아주 초라한 오두막에 묵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묵어가게 했던 사람들은 빌레몬과 바우시스라는 늙은 농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손님들을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쓰스와 허메는 돌아가서 그 마을 모든 사람들을 진멸했습니다. 다만 그 농부 부부만을 살려 주었고 그들에게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집은 신전이 되었고 그들은 제우스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뒷날 그들이 죽은 후에 그들의 무덤자리에 두 그루의 나무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두 그루의 나무에 대한 전설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설을 가지고 있는 루스드라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쓰스와 허메처럼 보이는 바나바와 바울을 신처럼 모시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보는 신앙의 위험성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불상을 보고, 자연 현상을 보고,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이적과 기사를 보고 그것들을 신격화합니다.
보는 신앙은 뭔가 눈앞에서 펼쳐질 때 흥분합니다.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움직임일 때가 훨씬 많습니다.
마치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 중에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던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주님이 베푸시는 기적을 보기 원했습니다. 이와 같이 보는 신앙은 말씀이 선포될 때는 하품하고 졸고 있다가, 딴 생각에 가득히 잠겨 있다가 자신들의 눈을 현혹시킬 무엇이 보이면 흥분해서 움직이며 그를 신격화하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신앙은 지극히 감정적이며 수시로 자기감정이 조절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국면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목하고 믿는 자들은 복 않고 믿는 것이 복되도다”(요20:29) 보는 신앙은 늘 불안하고 보는 신앙은 캄캄한 어두움이 닥쳐왔을 때 감당하지 못합니다. 왜요? 보이지 않으니까......
나도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
.이와 유사한 상황을 세례 요한도 만났고 베드로도 만났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인 것으로 착각하고 질문 공세를 퍼부을 적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이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으로 사람들이 흥분하면서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들었을 때 베드로는 이들을 보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그리고 오늘 우리의 주인공 바울과 바나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나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지 사람이라”(15절)
여기서 성정을 가졌다는 말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당신들처럼 죄인입니다. 나도 연약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헛된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버리라고 하는 일이라고 소리칩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을 만족하게 하셨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어떻게요? 겨우 무리를 말려서 자신에게 제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확신, 분명한 목적의식은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확신과 내가 무엇 때문에 존재한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은 그 어떤 유혹과 어려움도 이기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고난을 이기는 모습이 눈에 가득히 들어옵니다.
함께 교회를 이루고 함께 이겨나가는 우리 신앙생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신앙과 말씀은 듣지 않고
현상만을 보는 신앙이 얼마나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루스드라 사람들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설득하는 바울과 바나바에게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은 쓰스나 허메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도 발견합니다.
함께 교회를 이뤄 함께 하는 믿음의 길입니다.
함께 좁은 문 좁은 길을 헤쳐갈 귀한 동역자들이 주변에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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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못 지내게 한 두 사도)
18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발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이때 자신에게 제사를 드리게 하면 거짓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단의 괴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나 자신을 하나님으로 숭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자신을 경배할 때 분노해야합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좋아할 때 분노할 수 있어야합니다.
지금까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하여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전도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여 앉은뱅이를 걷게 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만을 높였습니다.
자신들은 겸손히 죄악된 인간으로 낮추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증거하고 자신에 대해서 부인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흥하고 우리의 이름은 쇠해야합니다.
요절 사도행전 14장 15절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오늘 본문은 바울 일행이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1.은혜에 대한 말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나온 바울 일행은 이고니온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고니온은 해발 1000m 되는 높은 고원지역에 위치한 오랜 전통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농업과 양모산업이 발달한 도시로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라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그곳에는 일찍이 유대인들이 들어가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그곳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습니다.
그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145km 떨어진 곳이기에 그곳에 가는데만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이고니온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메시지의 중심 주제는 은혜였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Ac 14:3)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전할 때 당연히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전하였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의 설교를 '표적과 기사'로 진리임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그렇게 은혜가 선포되었을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
.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Ac 14:1–2)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을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에게 악감정을 품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일들은 참으로 커서 결코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들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놀라운 은혜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이렇게 먼 곳까지 온 것도 이고니온에 있는 사람을 향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기는 커녕 오히려 악감정으로 대하였습니다. 은혜가 그러합니다.
어떤 이들을 받아들임으로 그 놀라운 것을 소유하게 되고 어떤 이들은 거절함으로 그 놀라운 것을 저버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어려움속에서도 게속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2.창조자에 대한 설교
이고니온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감정이 커졌을 떄 바울 일생은 또 이동하여 루스드라에 갔습니다. 그곳은 비교적 작은 도시였기에 회당이 없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로스드라에서 특이한 일을 겪었습니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Ac 14:12–13) 바울이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고쳤는데 그로 인하여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들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오해하여 그들 앞에 와 제사를 드리는 헤프닝이 일어났습니다. 루스드라에는 신화가 전해져 오는데 이전에 제우스와 헤므메스가 사람으로 변장을 하여 마을에 내려와 잠잘 곳을 청하였는데 수천 명에게 요청하였지만 모두가 외면하였는데 한 가난한 노부부가 그들에게 거처를 제공하여 제우스는 그 노부부의 집을 신전으로 변하게 해 주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에게 홍수를 내려 심판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제우스가 사람으로 변장하여 왔다고 생각하고 바울 일행에게 제사를 드리려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 일행은 깜짝 놀라면서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Ac 14:15)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방인들로 구성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맞춤형 설교를 하였습니다.
회당에서는 예수님이 성경에서 약속된 메시야가 되심을 설교했다면
이번에는 하나님이 창조주되심을 설교하였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다신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천지를 창조하신 한 하나님이 계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Ac 14:17)
창조하신 그 분이 또한 비와 음식과 기쁨을 주시는 분임을 이야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한 것을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바로 창조주이시여 만물의 통치자이신 그 분을 전하는 것임을 설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만물이 어디에서 왔는지르 알지 못하고 단지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자연의 변화와 자신들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것들이 어디에서 공급되는지 모르고
단지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그냥 단지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창조하신 분이 있고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오늘날 사람들이 잘 들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역경속에서도 이것을 전하기 위해 힘을 다하였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고니온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설교하고
루스드라에서는 창조자이시여 공굽자 되심을 설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전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먼 거리까지 갔고 힘들여서 전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하나님 창조자시며 공급자되시는 하나님을 그가 알았고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것을 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은혜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 먼 거리를 가고 핍박속에서도 그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도 은혜를 베풀면서 전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자이시며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진심으로 믿으며
그 안에 거하며 그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울과 다른 상황에 있지만 오늘도 여전히 바울이 전한 그 설교가
오늘날 시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결국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그들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며 기도하며 살아갈 때
영적인 공격과 핍박을 감사와 기쁨으로 감당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높임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복된 발걸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