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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저항 (시2-116)
2026년 5월 14일 (목요일)
찬양 :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
본문 : 시 116:1-19절
☞ https://youtu.be/_6FLVqqXtmE?si=yO5o3jCDHoejnzKt
오늘은 목회사관학교 11주차 강의가 있는 날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주님의 기름 부어 세워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첫 번째로 다가오는 것은 <내가>라는 단어의 반복이다. 히브리어 원어 기준으로 보면, 1인칭 단수 대명사(나, 나의, 나를)와 1인칭 동사 변화형이 무려 약 37번 등장한다. 영어 성경 번역본들에서도 I, me, my가 35~38회 가량 등장한다. 주어가 생략된 경우가 많은 한글 특성에도 무려 30번이 사용되고 있다. 1-4절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이 짧은 4구절에도 무려 10번이나 사용되고 있으니 시편 116편의 색상이 철저히 개인화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3절에 표현된 대로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란 표현에서 느끼듯 시인은 죽음의 문턱이라는 극한의 고통을 홀로 통과하며 뼈에 사무친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8-9절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주께서>
그렇다. 우리의 힘으로 누구도 사망의 결박을 풀 수 없고,
내 눈의 눈물을 스스로 닦을 수 없으며, 넘어지는 내 발을 지탱할 수 없다.
시인은 극한의 고통을 지내면 오직 '주께서'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고난의 깊이를 걸어낸 자의 입에서 나오는 진정한 고백임을 깨닫는다.
이 고백은 바로 인간이 고난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언약에 신실하시며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무한한 능력을 사용하시는지를 총천연색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기 고백인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는 ‘코람데오’라는 이론적 고백이 아니다.
나를 사망과 눈물과 넘어짐에서 건져주신 분의 그 사랑과 그 신실함을 기억하며 살겠다는
고난을 믿음으로 이긴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백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 은혜의 믿음을 이렇게 고백한다. 10-11절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그의 믿음은 큰 고통의 삶에서 놀랐고,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야 하면서 흔들렸음을 고백한다.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음도 아니고, 태연함도 아니다. 시인은 마구 흔들렸고, 세상을 향한 모든 기대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손을 놓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자신의 믿음의 초라함과 무력함을 너무 잘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크기와 넓이가 너무도 놀라워서 그는 모든 백성 앞에서 이 은혜를 무엇을 보답할까 하며 두 번에 걸쳐서 나의 서원을 갚겠다고 고백한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흔들리면 세상이 모두 흔들리기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렇기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손을 놓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풀었다. 시인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흔들림을 인정했고 비명을 질렀다. 다 거짓말쟁이야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 비명을 외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분이며 내 소리를 기울여 들으시는 분이심을 믿었던 것이다.
목사로서 나의 흔들림의 자리를 괜찮은 척 보여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목사의 자리는 괜찮음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구체적인 자리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의 흔들림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되고 설교가 될 것을 말이다.
그 믿음 하나로 오늘이란 자리의 흔들림을 나는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가감없이 이것이 고난 앞에 무력한 나의 모습이라고,
아니 이것이 인간 박정제의 실제 실체라고 말이다.
그러나 시인처럼 하나님의 손을 놓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손을 붙잡았기에 흔들림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본다.
그제 어제 나는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그 힘겨운 순간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울증으로 시달리다 겨우 일어선 한 사람을 섬기는 시간을 어제 가졌다. 다녀와서 나는 너무 힘들어서 쓰러졌다. 아내가 쉬지 왜 그렇게 하고 이렇게 힘들어 하느냐고 외친다.
나의 하나님을 믿는 나의 저항이다. 나는 목사라고 외치는 저항이다. 오늘도 나는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흔들리는 나의 모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마구 흔들려 갈 것이다.
주님, 오늘도 말씀을 통해 나의 삶을 다시금 분명하게 정의하고 살아갈 힘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나의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는 분이시기에 당신 앞에서 살아가겠습니다. 주여 받아주소서.
한줄 묵상 :
<나의 무력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흔들림의 비명은,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끝내 주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가장 치열한 신앙의 저항이다.>
적용 질문 :
1. 오늘 '괜찮은 목사'라는 가면을 벗고 나의 '무력함과 흔들림'을 주님과의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정직하게 공유할 용기가 있습니까?
2. 육체적·영적 탈진 속에서도 타인을 돌보는 이 수고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외치는 나의 가장 강력한 저항이 되고 있습니까?
3. 무력한 나를 붙드시는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고백한 시인처럼 내가 보답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