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칩, 고어텍스, 테트라팩. 누구나 알 만한 브랜드들이지만 완제품에 장착되는 부품들이기에 소비자가 직접 구매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소비자는 인텔 인사이드 마크가 부착된 컴퓨터를 선택하고 고어텍스 마크를 보고 방한옷을 산다. 부품의 요소와 재질이 구매를 결정할 만한 독자적인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학자 필립 코틀러에 따르면 이는 요소 브랜딩(ingredient branding)이다. 독보적인 품질과 가치를 갖는 부품들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완제품 판매를 좌우한다. 그 부품이 없으면 완제품은 팥소 빠진 찐빵과 같다.
신발 밑창을 만드는 비브람도 요소 브랜딩을 하는 회사다. 신발 기능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라면 비브람의 신발 밑창을 믿고 신발을 산다. 이탈리아에 본사가 있는 비브람은 1000여 개의 신발 회사에 매년 3500만개 밑창을 공급하고 있다.
비브람은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신발 밑창이라는 한 우물을 70년간 팠다. 고무로 된 신발 밑창을 제일 먼저 발명한 곳도 비브람이다. 그리고 비브람은 신발 회사에 납품하는 모든 제품에 비브람 로고를 넣는다. 비브람의 선명한 노란 로고는 신발의 견고함을 증명하는 인증서와 같다. 최근 방한한 비브람의 최고경영자(CEO) 안토니오 두스는 매일경제 MBA팀과 인터뷰하면서 부품회사들도 품질과 기술력을 끊임없이 소비자들에게 알려야 한다. 비브람이 신발 밑창에 비브람 로고를 박는 원칙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안토니오 두스 CEO와의 일문일답.
- 신발의 많은 부분 중 비브람은 신발 밑창만 생산하고 있다. 브랜드 파워를 활용하면 다른 영역까지 확장할 수 있는데 왜 밑창에만 집중하나.
▶ 신발 밑창 회사로 쌓아온 신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우리가 밑창만을 생산하는 회사로 알고 있고 우리의 조직과 기술력은 여기에 특화되어 있다. 다른 제품도 생산하면 이익은 날 수 있어도 우리의 정체성이 흐려진다. 최고의 제품에 집중하는 것이 요소브랜딩임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비브람은 고무 밑창이란 새로운 카테고리를 발명한 회사다. 창업주이자 등반가인 비탈레 브라마니가 등반을 하던 중 동료들을 잃은 사고가 계기가 돼 창업했다. 그전 등산화의 밑창은 모두 가죽이나 금속으로 되어 있어 발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었다. 비탈레 브라마니는 탄력성 있는 고무로 된 밑창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 보통의 부품 회사들은 대부분 기업 간 거래(B2B)를 한다. 그런데 비브람은 소비자와의 거래(B2C)도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 비브람의 거래 방식은 일명 B2B2C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부품회사와 달리 우리는 소비자와도 직접 대화하기를 원한다. 소비자들의 지지와 수요가 우리의 브랜드 파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비브람의 밑창이 들어간 신발을 신던 사람은 신발 밑창을 바꿀 때 다시 비브람을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소비자와의 직접적인 대면 접촉이 필요하다.
- 소비자들에게 직접 다가가기 위해 따로 하는 마케팅 활동이 있나. ▶ 우리 회사의 수선 부서는 소비자와의 대면 접촉에 특화된 부서다. 유럽에선 비브람의 밑창만을 취급하는 수선가게들이 있고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우리가 직접 훈련시킨다.
이벤트 활동도 한다.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이라는 장거리 트레일 경주가 있다. 180㎞를 이틀 만에 주파해야 하는 경주다. 이런 혹독한 코스를 완주하려면 신발 밑창이 얼마나 빨리 닳겠나. 더구나 닳은 밑창은 주자들의 속도를 떨어뜨린다. 우리는 밴 차를 몰고 주자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신발 밑창을 교체해준다. 비브람의 밑창 중에선 메가그립이라고 접지력이 뛰어나 미끄러움을 방지하는 제품이 있다. 이 경주에서 메가그립을 체험해본 사람들은 바로 비브람의 팬이 된다.
- 신발을 살 때는 보통 전체적인 디자인을 많이 보지 신발 밑창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신발 밑창을 만들며 브랜드를 알리는 게 어렵지 않나. ▶ 좋은 신발 밑창을 체험해본 사람은 다음번 구매에서도 제대로 된 밑창을 산다. 신발 밑창은 시각적인 요소가 없다. 신는 사람이 신발 바닥을 통해 느끼는 땅의 질감, 즉 촉각에 호소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강렬하고 큼지막한 비브람 로고를 신발 밑창에 붙인다. 밝은 노란색이라 검은 고무 밑창과 또렷이 대비된다. 비브람의 밑창이 주는 접지력, 안전성, 내구성이 노란 비브람의 로고로 형상화돼 그들의 기억 속에 남도록 한 것이다(안토니오 두스를 비롯한 비브람의 경영진들은 양복 상의에 노란색의 큰 비브람 배지를 달고 다닌다. 그들의 브랜드를 계속 사람들 눈에 각인시키려는 노력이다).
- 비브람이 납품하는 모든 밑창은 로고를 부착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신발회사들로서는 자기의 브랜드를 내세워야 하는데 밑창에 부품회사 로고가 크게 보이는 게 달갑진 않을 것이다. ▶ 실제로 몇몇 신발 회사들은 로고가 표시되지 않은 밑창을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럴 때 우리의 선택은 거래가 깨지는 한이 있어도 로고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비브람의 로고는 우리 브랜드의 평판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 그래도 거래가 깨지는 것이 부담이 크지 않나. ▶ 물론 단기적인 손실은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시적인 이익이 아니라 브랜드 가치를 어떻게 영속시킬지다. 계약을 몇 건 더 따자고 우리의 원칙을 버리면 비브람의 브랜드 파워는 약해진다.
이렇게 장기적인 브랜드 가치를 고집할 수 있는 건 비브람이 가족기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 달 후의 주가 향방에 영향받지 않고 기업을 위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안전한 신발 밑창을 만들겠다는 창업주의 의지가 지금까지 경영이념으로 남아 있다. 창업주의 손자가 여전히 오너로 있으며 브라마니 가문은 70년간 기업의 100%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 보통 부품회사는 완제품회사가 요구하는 제품을 단순 제조하는 을의 입장인데 비브람은 다른 것 같다. ▶ 부품회사는 완제품회사와 호흡이 잘 맞아야 서로 윈윈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같이 제품을 개발하고 소통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비브람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밑창만 만들지는 않는다. 아웃도어용이라면 기능이 중요하니까 비브람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밑창을 신발회사에서 그대로 갖다 쓴다. 그러나 패션이 중요한 캐주얼 신발 밑창은 이야기가 다르다. 우리는 휴고보스나 처치스, 더클랙슨, 쿠치넬리 같은 유명 패션 브랜드와 공동으로 신발 밑창을 개발하고 있다. 그들의 디자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밑창을 만들기 위해서다.
- 신발 밑창은 거의 비슷해 보이는데 매년 150여 개의 새로운 밑창을 내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 신발 밑창은 용도에 따라 밑창의 재질과 문양이 조금씩 달라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아웃도어용으로 묶을 게 아니라 암벽등반용, 하이킹용, 조깅용 등 여러 카테고리가 있다. 용도에 따라 기본 원료인 고무에 화합물을 배합하는 최적의 비율이 달라진다. 신발 밑창 전문 회사로서 비브람이 모든 카테고리의 밑창을 전부 커버하는 것은 당연하다.
- 비브람은 2005년 파이브핑거스라는 신발을 출시했다. 부품회사에서 완제품을 만드는 것은 회사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을 것 같다 ▶ 우리는 계속해서 혁신을 하는 회사이고 파이브핑거스 역시 혁신의 한 종류다. 지금까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신발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부품회사로 명성을 쌓아온 비브람이 굳이 출사표를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파이브핑거스 신발은 마치 사람의 발을 그대로 석고로 뜬 형태로 되어 있다. 무좀양말처럼 발가락 부분도 다섯 개로 나뉘어 있을 정도다). 파이브핑거스는 비브람 밑창의 연장선상이다. 신발 밑창이 주가 되고 다른 부분은 맨발로 걷는 느낌을 최대한 살릴 수 있게 디자인했다.
- 파이브핑거스는 현재 비브람의 매출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 처음 출시했을 때 우려가 컸던 건 사실이다. 못생긴 신발이란 평을 많이 들어서다(웃음).
그러나 소비자들은 파이브핑거스의 착용감과 신선함에 손을 들어줬다. 런칭 3년만에 판매량이 3배 늘었다.
파이브핑거스가 비브람의 전체 1억5000만유로(약 2200억원)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 정도다. 물론 판매량으로 따지면 훨씬 적지만 밑창은 6~18달러고 운동화는 100~150달러로 판매가격에서 차이가 나니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 비브람의 본사는 이탈리아에 있지만 중국과 미국에서도 생산공장과 연구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명품제품이라면 유럽에서 생산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없나. ▶ 우리는 소비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류비용을 아끼고 소비자들 수요에 가장 긴밀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다. 단순히 원가 절감을 위해 생산공장을 다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느 국가에나 동일한 품질의 제품을 동일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다.
포장박스를 보면 메이드 인 비브람으로 되어 있는 것도 전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제품을 공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다.
■ who he is…
안토니오 두스 CEO는 가몬트와 살레와와 같은 아웃도어 신발회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지난해 1월부터 비브람 창업주의 손자 마르코 브라마니의 뒤를 이어 비브람의 CEO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