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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와 더베 선교 14:19~23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옴 14:24~28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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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선동된 무리가 돌로 바울을 칩니다. 죽은 줄 알고 시외로 내쳤지만, 바울은 일어나 바나바와 함께 복음을 전합니다. 두 사도는 복음 전했던 도시를 다시 방문해 제자들을 굳게 하고, 장로들을 택해 기도로 주님께 위탁한 후, 안디옥에 돌아가 선교 보고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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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와 더베 선교 14:19~23
은혜가 큰 만큼 방해도 큽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쫓아와서 방해합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충동을 받아 돌로 바울을 칩니다. 불과 얼마 전에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하던 이들이 충동을 받고는 돌변한 것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로 향하고, 박해 속에서도 주님의 제자는 계속 늘어납니다. 고난 속에서 얻은 구원의 역사는 더욱 값집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전에 들렀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면서 교회의 필요를 돌아보고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합니다. 믿음의 삶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참된 믿음의 제자로 세우는 것이 복음 전도자의 소망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과 바나바가 이전에 들렀던 지역을 다시 방문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열매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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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으로 돌아옴 14:24~28
바울과 바나바는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이곳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한 곳입니다(13:1~3). 그들은 교회를 모아 그간의 선교 사역을 보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27절)이라고 하며 선교 사역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또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27절)을 말하며, 복음 전도의 새로운 차원이 열렸음을 알립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시키시는 일을 하도록 따로 세우신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선교 사역의 지경을 넓히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수고와 공로는 감추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높입니다. 부르심과 사명에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이 복음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한 일은 무엇인가요?
복음의 열매가 나의 수고와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 은혜임을 고백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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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 속에서 시작되는 부흥
사도행전을 자세히 보면 두 가지 특이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는 세력은 외부에도 있고 내부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부의 비난과 분열, 거짓과 위선은 교회의 내적 신앙의 기초를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외부로부터 오는 강한 핍박은 교회가 영적으로 도약하고 부흥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박해자들은 물리적인 힘을 동원해 사도들을 압박했고, 때리고 옥에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들의 육체를 가둘 수 있었을 뿐, 믿음까지 붙들어 맬 수는 없었습니다.
힘으로 위협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역사적으로도 폭력과 물리적 힘만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했던 나라들은 오래 융성하지 못했습니다. 복음 전하다가 부딪히게 되는 고난과 핍박은 결코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해 주신다면 어떤 시련도, 비록 그것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받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고, 고난을 겪을 때 더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악조건과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의 길을 따르십시오. 그렇게 할 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교회는 부흥할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 / 하용조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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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 14장 22절
믿음을 지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유혹과 내면에서 작동하는 죄성이 우리를 믿음에 머물지 못하도록 강력한 힘으로 흔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꽃길만 걷는 인생이 되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여정에는 많은 환난을 겪는 고통의 시기가 따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걷는 그 길 끝에 모든 성도의 소망인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자기 삶을 믿음의 레일 위에 올려놓는 인생에서 환난은 그저 지나가는 역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역량은 무리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주님만 의지할 때 최대한으로 발휘된다. - 제임스 답슨
오늘의 기도
하나님,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선교사들의 발걸음을 통해 복음의 지경을 넓히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선교사들이 핍박을 뚫고 복음을 전했지만, 실제 그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삶의 고난 중에도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신뢰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55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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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들에게도 반드시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실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 환난 속에서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하고, 환난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힘 주시고, 도움의 길을 열어 주시는 주님을 더 풍성히 경험할 수 있도록 하자
- 환난을 겪고, 어려움에 처하지는 않을까 두렵고 떨리지만, 그 모든 것들을 주님 발 앞에 내려놓고, 그 모든 것들보다 더 크시고, 그 모든 것들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맡겨 드리고, 열심히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한 노력들을 해 나가도록 하자
- 주님께서 우리가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일을 보여 주실 것임을 기대하고, 우리가 섬기는 이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을 간절히 기대하면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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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낫는 것도 큰 기적입니다. 그러나 사람 자체가 변하는 것은 가장 큰 기적이고 진정한 기적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병도 고치시고, 가난과 저주를 바꾸어 축복으로 만드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시는 것은 한 사람을 예수님의 모습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미움의 사람이 사랑의 사람으로, 싸우던 사람이 평화의 일꾼으로, 죽이던 사람이 생명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섬기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최고의 기적입니다. 바로 나같은 사람이 변하여 주님의 사람이 된 것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신의성품에 참여~ 고난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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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타우루스산맥을 넘어 해안 늪지대인 밤빌리아와 버가로 되돌아와 교회를 굳게 하고 앗달리아로 내려와 배를 타고 모교회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와 1차 선교 여행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서 구함 받은 것은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5)’의 증언처럼
바울에게도 매우 중요하고 유일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돌은 자신이 속해 있는 무리가 스데반을 향해 던진 돌이었고 마음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는 못이었습니다. 그는 그 돌과 못이 마땅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을 알고 나서는 자신에게 해당되는 징벌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새겨져야 할 흔적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동역자들에게 그 여정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일 열렸음을 보고하였고 그곳에서 2차 선교여행 전까지 약 2년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그들의 자녀들을 위로하시고 다시 일어설 힘과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그 생명과 평안 안에 회복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능력 주시는 여호와를 바라보는 주님의 자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을 따라오려거든 각오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갈라디아서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관심이 곧 영성의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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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그룹은 잘못된 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19절)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열광했던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찾아왔습니다. 행13:50절을 보십시오.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여 내 좇았습니다.
그런데 행 14:5절의 이고니온 사람들은 한 술 더 떴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망쳐서 루스드라와 더베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까지의 거리가 얼만지 아십니까? 무려 160km입니다. 오늘날로 생각해도 몇 시간을 차로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당시처럼 교통수단이 좋지 않았던 시절에 하루나 이틀을 꼬박 걸어야 했을 이 길을 열일을 제쳐놓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고니온 사람들과 합류했습니다. 이고니온 사람들은 몇 사람이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들이 와서 바울과 바나바는 천하에 못된 사람들이다 오죽하면 우리가 생업도 제쳐두고 왔겠느냐고 설득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사람들이 불과 얼마 전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쓰스와 허메라고 소리 지르면서 제사하겠다고 열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이라고 떠받들겠다던 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의 몇 마디 말을 듣고 이제는 돌로 쳐 죽이겠다고 난리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건을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들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앉은뱅이가 자리를 들고 벌떡 일어나서 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허메와 쓰스라고 흥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섬기던 신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게 흥분했던 사람들이 그저 몇 사람이 와서 바울과 바나바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선동하자 돌을 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보는 신앙의 위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였던 수많은 군중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저런 사람이라면 우리의 메시아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기대가 산산이 무너지고 주님이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돌아가시는 듯하자 바라바를 외치는 군중들이 되었습니다.
이 루스드라의 군중들이 얼마나 답답합니까? 저는 루스드라의 이 사람들이 팔랑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쉽게 변하는 사람들.... 우리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강퍅한 마음대로(19절)
두 번째로 생각해 보실 것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이고니온에서는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 항상 성경은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순종치 않는 사람들,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선동해서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5절에 의하면 이방인들과 유대인, 그리고 그 관원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망쳐서 루스드라로 온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말씀을 더 듣기 위해서 남아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고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의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적을 보기 위해서 모여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는 기득권자들, 유대인들이 시기가 가득해서 변박했고 종래에는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의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내 쫓았습니다.
그런데 이 안디옥 사람들과 이고니온 사람들이 루스드라까지 원정을 온 것입니다. 그래서 루스드라 사람들을 또 선동합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은 자기 경비를 들여가면서 또 시간을 들여가면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과거의 바울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처음에는 스데반을 핍박하는 현장에서 옷을 맡아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가둡니다. 그래도 마음이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종자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이를 갑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공문을 받습니다. 점점 마음이 강퍅해져만 갑니다.
혹시 여러분! 이런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기분 나쁜 일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냥 정신이 없어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곱씹고 또 곱씹어서 마음속에 증오를 키워갑니다. 나중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마음속의 증오가 커집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치닫게 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욕심입니다. 이것인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방법을 동원하고 더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지 않은 일을 곱씹고 또 곱씹고 하는 것은 마음속에 더 큰 죄를 양산합니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악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악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속에 좋지 않은 감정을 빨리 해결하지 못하고 키워 가는 것은 우리 속의 성령을 소멸하는 일이며 죄악된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마 안디옥과 이고니온 사람들도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분하더라는 것이지요. 저들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죄를 키워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제는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이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생겼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악한 마음입니까?
복음에 사로잡혀(19, 22절)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던져 버렸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사형은 로마 법정에서만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돌로 치다보니까 죽은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만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서 성 밖에다가 버린 겁니다. 사람이 악해지면 이렇게 악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퍅한 마음대로 내버려둔 결과입니다. 나쁜 생각이 커 가는 것은 그대로 방치한 결과입니다. 마음속에 죄를 키워간 결과입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여기서 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조금 전에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을 벌떡 일으키셨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이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서 몸을 바치고 있는 사도 바울이 지금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는데 가만히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렇게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리시고 자연을 복종시키셨던 주님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마음이 상하고 믿음이 흔들립니까? 주님 살아 계시면 내게 이럴 수 있습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도를 맞도록 그냥 놓아두시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죽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고난을 면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을 면하게 주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 고난에 동참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정작 자신이 고난당할 즈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지금 돌에 맞아서 거의 죽음에 가까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꼭 이렇게 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초죽음이 되도록 매를 맞고도 정신이 회복되자 더베로 가서는 또 복음을 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치면서 제자들에게 권면합니다.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고 말입니다.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환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들립시스(θλιψἰς)입니다. 이 말은 외부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환난이라는 헬라어는 파메마(παμεμ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환난은 내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근심과 걱정, 불안, 초조, 평안이 없는 상태를 일컬을 때 사용된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환난은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은 외부적인 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11:24-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회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런 외적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확신이었습니다. 내적 평안이었습니다. 비록 외적으로는 고난을 당하고 초죽음이 될 정도로 돌에 맞았지만 내적인 확신, 내적인 평안만큼은 산처럼 컷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내적인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고 고통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외적인 환난을 당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소속이 다릅니다. 그래서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고통, 물리적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내적 평안이요, 확신인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더베 동쪽에는 다소 산맥의 고개를 넘어 길리기아로 가는 통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갈라디아 도시들의 새 신자들에 대한 관심 때문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복음의 씨가 견고히 자라나도록 물을 주고 김을 멜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지도자들을 세우고 조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렇게 1차 전도여행은 고난 속에서 매듭지어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과거 사도 바울을 연상하게 하는 잘못된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과 돌에 맞아도 생명의 복음을 포기할 수 없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느냐고 물어 오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팔랑귀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바나바처럼 복음에 굳게 서서 요동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드려지는 복된 날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1.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19절)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활동을 시기하고 반대한 무리들은 포기를 모릅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와서 바울을 쳐서 죽을 지경까지 이르게 합니다. 사단은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일을 포기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없이 그들 스스로 복음에 대하여 우호적일 수 없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되면 극복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잘못된 복음관은 결국 복음전파자인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을 통해 증명 됩니다.
신앙인도 동일한 유혹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갖지 못할 때 자칫하면 복음의 반대편에 설 수도 있음을 기억하고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바르게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묵상하기
나는 혹시 복음을 방해하는 자리에 서 있지는 않은가?
2.죽음이 몰려와도(20-28절)
유대인들에게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바울은 정신이 회복되자 마자 다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더베로 향하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가진 복음의 열정은 어떠한 환란과 어려움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바울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전파의 사명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속에 살아가는 진정한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사명을 다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내가 사는 이유가 바울처럼 복음을 위한 삶을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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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울 일행이 루스드라와 더베에서의 마지막 선교의 일정을 마치고 안디옥에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1.루스드라에서의 환난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는 핍박을 피할 수 있었는데 루스드라에서는 큰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Ac 14:19) 사람들이 바울을 죽은 줄로 알 정도로 돌로 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는데요. 자신이 받은 그 환난에 굴하지 않고 선교의 여정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Ac 14:20–21) 1차 선교를 더베까지 하려고 계획을 하고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더베라는 곳까지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마지막 도시를 채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환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Ac 14:22) 그는 자신이 받은 환난에 대해 '당연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믿음을 가지면 더 넓고 편한 길로 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더 편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더 편한 길도 있을 수 있으나 더 좁고 힘든 길인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시작된 교회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이제 믿음을 시작한 소의 연약한 신앙의 사람들이라고 편하고 좋은 길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분의 길을 또한 따라가게 됩니다. 십자가는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그러기에 환난도 신앙인의 중요한 정체성이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아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환난을 당한 것을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신앙인들에게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하는 신앙인의 본질적인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전하였습니다.
2.귀가길
바울은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선교하고자 하는 마지막 도시를 채웠습니다. 선교를 위해 떠나온지 1년이 지나는 시점입니다. 힘든 일도 겪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곳에서 150km 정도만 게속 나아가면 그의 고향인 다소가 나옵니다. 얼마나 다소가 그리웠을까요? 다소에 가서 푹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더베에서 길을 돌이켜 그가 지금까지 지나온 도시들을 거꾸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매우 먼 길이고 위험한 길이기도 합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Ac 14:23) 그러나 그 길을 다시 돌아가서 각 도시에 세워진 교회들을 점검하고 지도자들을 세우면서 돌아왔습니다.
쉬운 길로 가려면 인생은 한이 없습니다. 인생은 쉬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사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사명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사명은 사람을 가슴 뛰게 하는 일이지만 사명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사명이라서 묵묵히 가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떠나도 사명이라서 남아야 하고 사명이라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명만 아니라면 결코 그 힘든 길을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이기에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짧고 편한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명이기에 그 먼 길을 돌아가고 있습니다.
사명이기에 위험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사명은 힘든 길입니다. 쉬우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힘들기에 사명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Ac 14:26–27) 바울 일행은 그들이 1차 선교의 사명을 이루면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행하신 일을 안디옥 교회에 보고하였습니다.
많이 힘들었지만 그들은 사명의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사명의 길이기에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은 힘들었지만 사명의 길을 감으로 보고할 일이 많았습니다. 이 땅의 힘든 사명의 길을 가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봅니다. 많이 힘든데 사명이라 갑니다. 눈물 흘리면서도 갑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늘에 가면 보고 할 일이 많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 길 가운데 우리의 눈물 닦아 주시는 주님을 많이 경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주님의 함께하심과 손길에 대해 보고할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큰 환난을 당하여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쉬운 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힘든 길을 잘 감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명의 길이기에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인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울의 고백을 잘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힘들다고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을 불평하고 피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명자가 가면서 겪는 환난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면류관입니다. 주님의 길을 가면서 겪는 그 환난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영광입니다. 그 눈물을 닦아 주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환난을 넘어가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명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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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대적자들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루스드라 사람들을 충동질하니 그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돌로 바울을 쳐서 죽여 성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한 번 돌로 맞고"(고후11:25)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은 다시 일어나 자기를 돌로 쳤던 그 시내로 다시 들어가서 형제들을 위로하고 더베로 가서 복음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자기를 돌로 쳤던 루스드라와 자기를 돌로 치려고 멀리 원정까지 왔던 대적자들이 있는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에 돌아가서 형제들을 권면하고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바울의 거침 없는 행보는 저들의 비방과 위협과 돌로 치는 박해로도 결코 막을 수 없었습니다 보내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모든 박해에서 건지셨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딤후3:11)
저들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려고 박해하나 그럴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될 뿐입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8~9)
저들은 우리의 걸음을 막아보려고 박해하나 그럴수록 우리는 더 멀리 퍼져나가게 될 뿐입니다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출1:12)
저들은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낮추려고 박해하나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높아지게 될 뿐입니다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신32:13),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사58:14)
이제도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이 반드시 항상 건져주실 줄 믿습니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7~19)
지금도 이후로도 항상 건지실 줄 믿습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1:10)
그래서 넉넉히 이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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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유대인들이 비시디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에 원정 왔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루스드라는 70km라고 합니다. 그들은 먼 거리에서 원정 온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은혜 신앙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평등하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강한 유대이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충동질하였습니다.
무리들이 격변하여 돌로 죽기까지 바울을 쳤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쳤습니다. 큰 성령의 역사 후에 사단의 거센 핍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런 핍박을 받게 하여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였습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혀주셨습니다. 큰 능력은 거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핍박을 통하여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루스드라에 다시 들어간 바울)
20,21a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제자들이 바울을 둘러섰을 때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일어나 멀리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과거 돌로 치는 자였으므로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던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는 오뚝이와 같습니다. 그는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순교신앙이 있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돌로 친 곳에 다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떠나지 않게 도왔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안위보다 핍박받는 자신으로 제자들이 실족할까봐 염려하였습니다. 이튿날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길리기아에 있는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전도에 그치지 않고 제자 삼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편지를 통해서 제자양성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순교신앙을 축복하여 주시고 많은 제자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한 바울)
21b 22a절을 보십시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바울은 이어서 이미 복음을 전했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핍박하고 자신을 죽이려던 곳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순교신앙으로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히브리서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미 복음을 전한 성도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핍박을 보고 신앙을 잃기 쉬웠습니다. 그들은 헬라의 이성주의와 유대의 율법주의와 토속의 우상숭배에 영향을 받기 쉬웠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지속적으로 은혜 신앙에 뿌리를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한번 예수님을 믿었으면 지속적으로 포도나무되신 에수님에 붙어 있어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지속적인 제자양성을 해야합니다. 어떤 환난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도록 도와야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22b“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사도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핍박을 감당하였습니다. 바울은 제자들에게도 핍박을 받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는 고난을 각오하고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제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도 자신처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갖고 핍박을 받아야한다고 복음 신앙을 심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도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 받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고자 해야 우리는 목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십자가의 문입니다.
지금도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가면 지하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루스드라에 믿는 자에게 큰 환난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 십층의 지하교회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전에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만한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운 바울)
23절을 보십시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바울은 이미 복음을 전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의 각 교회에 가서 장로를 세웠습니다. 이제 막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장로로 세웠습니다.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책임자를 세웠습니다.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앞장 서서 환난을 받아야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 자를 리더로 세우는 것은 엄청난 믿음입니다. 그들은 금식기도하고 그들이 믿은 살아계신 주님께 그들을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굳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안디옥에 돌아와서 선교보고를 한 바울)
24-25절을 보십시오.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두 사도가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기록합니다. 그들은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렀습니다.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였습니다. 기회만 되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안디옥은 두 사도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증거하는 선교보고)
27,2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그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교회를 다 모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구브로 섬에서부터 시작하여 루스드라까지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전하였습니다. 총독의 변화와 앉은뱅이가 일어난 일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한 일보다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두 사도는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재충전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로서 일차 전도 여행은 끝이 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
일차전도 여행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방인의 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문을 이미 안디옥교회에서 여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소아시아 지방의 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점차로 이방인의 문을 확대하여 열어가고 계십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여십니다. 그러나 그 문은 믿음과 환난을 통하여 들어가는 문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도 환난을 당하고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도 환난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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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역자로 살아가는 길 -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까지 이릅니다. 바울은 다시금 루스드라로 들어간 후 다음날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심하게 박해를 받았던 곳을 다시 지나 안디옥에 이르러 제자들을 격려하고, 장로들을 세운 후에 버가에서 복음을 전하고, 앗달리아에서 안디옥에 도착하여 1차 선교 여행 보고를 합니다.
_ 오직 한 길만 걷는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19~20절).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살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루스드라에까지 원정을 와서 사람들을 부추겨서 바울을 향해 돌을 던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심하게 돌을 던졌습니다. 심지어는 그가 죽은 줄로 알고 그를 성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들의 눈에 바울이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말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루스드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그는 더베로 가서 복음 전하는 사역을 계속 이어갑니다.
바울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면 바울의 상태가 참으로 심각했을 것입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사역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루스드라를 떠나는 고독한 바울의 뒷모습이 안쓰럽게만 여겨집니다. 오직 예수 때문에, 복음의 그 가치를 알기에 또다시 사역의 길로 나아가는 위대한 전도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의 고독과 삶의 낙심 그리고 한숨이 이어집니다. ‘하나님 언제쯤 막혀있는 물꼬를 터 주시렵니까?’하소연도 해 봅니다. 그리고 갈등도 해 봅니다. ‘이 일이 나한테 정말로 맞는 일인가?’라고 묻기도 합니다. 주님께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여러 길이 있을 터인데, 굳이 이 길이어야만 하는가...하는 생각도 합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또 다른 사역지로 옮겨 가는 위대한 전도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오직 한 길만 걷는 사역자가 되자...’
_ 믿음 안에서 많은 환난을 견디는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21~23절).
루스드라에서 핍박을 당하고 더베로 온 후에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에게 심하게 박해했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다시금 방문합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22절)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다시 위험에 노출 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안위보다는 새로 태어난 믿음의 공동체가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을 더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겪어 보았기 때문에 이제 막 세워진 이들에게도 박해와 핍박이 있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말고,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고, 믿음의 삶에는 환난의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난에 대해서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해서 당당하게 맞서 고난에 동참함으로 장차 주어질 영광에 참예하는 기쁨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으로 세워진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굳건한 믿음의 반석위에서 교회와 성도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23절).. 사람을 세워가되 잘 세워가는 역할 또한 사역자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_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24~28절).
버가에 이르러 말씀을 전하고,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에 이르러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 함으로 1차 선교여행이 마무리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하셨기에 그들은 박해와 고난을 당함에도 그들이 가는 곳마다 제자들을 만들어 냈고,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눔으로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자신에게 일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직 믿음의 길 위에서 많은 환난을 견뎌 이겨내는 사역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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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하나님 아버지, 구함 받기 합당하지 않은 우리의 삶 가운데 오셔서 그 심판을 감당하시고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걸어가는 길마다 그 빛을 드러내시고
거한 곳마다 하나님의 참 맛을 드러내는
소금의 삶으로 스며드는 거룩한 통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주시고 돌보아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와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을 찾아가 만나주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