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걷기에 좋고, 유람하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자 단풍의 계절이고 그리고 그리움의 계절이다. 또한 봄여름 내내 푸르렀던 나뭇잎이 한껏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겸손하게 대지를 향해 낙하하는 계절이다. 그러므로 가을의 절정에 공기 좋고 아름다운 산천을 며칠 동안을 걸어서 답사하면 값비싼 보약 한재 먹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그런지 “일편 가을 산이 능히 병객(病客)을 치료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옛 사람들의 가장 고급스런 취미가 산천유람이었다.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한다면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또한 “견문(見聞)이 많은 사람일수록 안목(眼目)이 좁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사대부들의 산천관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사람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통로였다.
“8월 5일에 문득 보내주신 가장을 받고 몇 번이고 펴서 읽으니 얼굴을 마주하고 친히 위문해주시는 것 같아서 기쁨과 위안을 느낍니다. 벼슬하는 정은 내 낙(樂)이 아니므로, 가을이 될 때마다 산수(山水)의 흥을 더욱 마음속에 느끼는데, 선생은 어떤 사람이기에 능히 홀로 이것을 갖추었습니까? 이 사람이 돌아오면서 낭패스러워 못 견디겠습니다. 나머지는 절서(節序)를 따라 스스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날이 저물어 대강 씁니다.”
고려 말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포은 정몽주가 서울 강동구 둔촌동의 어원이 된 <둔촌(遁村) 이집李集에게 답한 글>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조차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이자 <무오사화>로 희생된 김일손은 <두류산 기행>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선비로 태어나서 덩굴에 달린 박이나 외처럼 한 곳에만 매어 사는 것은 운명이다. 천하를 두루 구경하여 견문을 넓히지 못할 바에는 자기 고장 산천이라도 두루 탐방해야 하겠지만, 사람의 일이란 매사가 어긋나기를 잘해서 항상 뜻을 두고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십중팔구는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이름났던 선비들은 틈이 날 때마다 산천을 유람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살찌웠다.
“아버지는 나라 안의 명산들을 두루 다니셨는데, 서쪽으로는 평양과 묘향산, 남쪽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화양동(華陽洞)과 단양 등 여러 명승을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나는 과거를 일찍 그만두어 마음이 한가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산수 유람을 많이 했었다”.
박종채가 지은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 실린 글이다.
단풍이 가장 아름다웠던 가을에 묘향산 일대 유람을 떠난 박제가에게 이덕무(정조 때의 개혁 사상가)는 시 한편을 보냈다.
“단풍이 한창일 제, 향산에는 들렀다가, 어서 빨리 돌아와서, 그리던 회포 풀어보세”.
그 편지를 받은 박제가는 묘향산의 퇴락한 상원암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가슴 아린 글을 보냈다.
“나는 일찍이 옛일이란 어떤 것이건 매양 찾을 데 없음을 한하여 오던 터이다. 이제 가을 산 조각 돌이 거친 풀, 찬 이슬 속에서 옛일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옛것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를 대하여 서글프고 심란해서 저축저축 머뭇머뭇 오래 동안 가지를 못하는가! 빈 산, 떨어지는 해, 끊어진 다리, 흐르는 물, 이는 예로부터 회고의 정서를 하염없이 자아내게 하는 곳이로구나!”
걸어온 길이 누군가의 글처럼 “깨끗하게 쓸어놓자마자, 다시 마른 잎으로 덮이는 가을날의 길처럼” 즉시 사라져 버렸을 때의 막막함, 나뭇잎 흩날리는 가을 길은 항상 미로처럼 아련하고 희미하다.
알베르 카뮈는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라고 찬탄했는데, 그 가을 길에 나서면 아스라하게 펼쳐진 쓸쓸한 길이 길 걷는 나그네에게 말을 건넨다. “너 누구냐?”, “너 어디로 가느냐?”고.
그래, 나는 오늘 통영의 한산섬으로 가기 위해 이른 새벽 짐을 꾸린다. 다시 가는 한산도는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2025년 11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