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시 여행] 신선이 사는 산내면 퇴수정...........100
.
.
100. 산내면 퇴수정(退修亭)
.
유랑자는 10월 어느날 모든 여행지가 문을 닫는 월요일을 피해 화요일 아침일찍(04:30분)서울을 출
발 남원 산내면으로 향한다. 남원 여행에서 몇군데 놓첬고, 또한 가보고 싶었던 곳이자 남원 4번째
방문이자 15일 간의 남원 여행의 마지막 일정 이었다.
.
관직에서 물러나 심신을 수양코자 했던 매천 박지기(朴致基)의 남원 퇴수정원림(退修亭園林)외 서너
군데의 정자들을 둘러 보기 위함이었다. 서울에서 중부-경부-대진-88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지리산
IC를 나와 직진하면 인월면(동면), 자연마을로 주변 경치가 수려한 고을이다.
.
.
퇴수정 앞을 흐르는 시냇가에는 주변에는 물이 스쳐지나가는 아주 평평하고 너른 너럭바위가 수 곳이 소년대(少年臺), 노인암
(老人巖),세진대, 매천별업(梅川別業) · 반선대(伴仙臺) · 심진암(尋眞巖)이 퇴수정과 어우러져 하느바람과 풍욕하며 초록에 물
드리며 안락한자연 쉼터가 되고 있다.
.
.
유랑자는 익숙한 길을 따라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일성콘도 앞에 이른다. 이곳 대정리 매동(梅洞)마
을 뱀사골 일성콘도 입구에 길 오른쪽의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5호 퇴수정 간판을 보고서 냇가로
내려가면 고색창연(古色蒼然)한 퇴수정(退修亭)을 만날수 있다.
.
지리산의 역사는 넓고 깊다. 그 넓고 깊은 만큼 지리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 또한 그러
하다. 우리는 산을 가다, 혹은 길을 가다. 바위에 새겨놓은 많은 각자들을 만난다. 그 속에 그 역사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가 묻어있다.
.
.
이러한 별서를 선인들은 대명속세(臺名俗世)를 피할 수 있는 높고 평평한 곳이라는 뜻으로 피세대(避世臺)라 불렀다.
.
.
조선팔도 산수를 두루 찾아서 노니며 주옥같은 편안한 작품을 많이 남겼던 우인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 박인로(朴仁老 1561-1642)
시조가 어울린다. 그중에 ....명리에 뜻이 없어 베옷에 막대 짚고/, 방수 심산(訪水深山)하여 피세대(避世臺)에 들어오니어즈버 무릉도원(武陵桃園)도
여기런가 하노라
.
남도의 천혜의 산소통. 절경의 보고 지리산 계곡, 이곳의 자연을 구성하는 사물들은 '산은 산이요 물
은 물이였다.' 각자가 지니는 역활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가 그래서 더 아름답다. 유
랑자는 퇴수정이라는 안내판을 발견하고 도로변 한켠에 주차를 하고 내리막길을 내려선다.
.
저만치 람천을 끼고 언덕위로 인간이 축조한 정자가 하나 보인다. 정자 앞으로는 넓직한 평바위 사이
로 시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암석이 높게 솟아 있는 전북 남원시 산내면 천왕봉로 626-8, 대정리(大井
里) 매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퇴수정(退修亭)의 주변의 자연의 구성원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
.
퇴수정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람천을 따라 울창한 소나무군락이 압권을 이룬다.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진달래 군락들도 계류가에늘어져 조화를 이룬다.
인간사에 이러한 선계가 또 있으랴?
.
.
반선대(伴仙臺):~신선과 함께 어울려 놀았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
말 그대로 숨어있는 비경중에 비경이랄까?, 지금까지 남원에서 보아왔던 많은 정자중 당연 최고의 풍
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산내 소수력발전소에 물을 대느라 나즈막한 보와 수로가 생기고 인월과 운봉
에서 흘러오는 물이 정자의 풍광을 더해준다.
.
유랑자는 다가간다, 안내문에 퇴수정원림은 매천 박치기(梅川 朴致箕: 1825-1907)가 퇴임 후 은거하
기 위해 1870년 조영한 별서형 누정원림이다. 박치기는 조선의 토목건축을 관장하던 종3품 선공감(繕
工監)의 가감역관(假監役官)을 역임하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曺參判)을 지낸 인물
이다. 요즘 벼슬로 치자면 차관급 정도이다,
.
.
.
.
바위에 아슬아슬하게 살아있는 소나무의 수명은 100년이 훨씬 넘었다,
.
퇴수(退修)란 퇴관(退官)하여 초야에 은거하며 심신을 수양한다는 의미로, 퇴수정원림은 박치기가 퇴
관 후 삶의 터로 삼은 장구지소(杖屨之所)이다. 퇴수정 원림(退修亭園林)! 그곳은 매천 박치기(梅川
朴致基)가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傅)의 선조의 정신을 기리며 지리산 자락을 따라 올라가다 찾은
별서이다.
.
그의 후손들은 다시 그들의 직계 선조 매천 박치기를 기리며 관선재(觀仙齋)도 짓고 퇴수정 옆에 매
천별업(梅川別業)이란 글씨를 각인해 놓았다. 워낙 신선처럼 살아 당시대 선비들의 흠모의 대상이었
던 선조 지족당 박명부의 정신을 기리며 선계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
매천별업(梅川別業):~호를 따서 박치기의 별장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이는 1922년 후손들이 사당인 관선재를 건립할 때
각자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선조 박치기의 은덕에 대한 추모의 뜻과 효 문화(孝文化)를 실현하고자 했던 의지를 담고 있다.
.
정자앞 냇가엔 돌이 깨끗하게 펼쳐 있고 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으며, 람천을 흐르는 강줄기가 잠시 이곳에 머물어 못을이루고 있다. 맑은 물은
거울과 같고, 세차게 흐르는 물은 여울을 이루어 물거품이 용솟음치고 있다
..
.
퇴수정(오산 홍성모 화백 그림)
야박담(夜泊潭):~야박담은 ‘어느 늦가을 강가 배위에서의 한밤’이라는 당나라 문인 장계(張繼)의 시 풍교야박(楓橋夜泊)에서유래된
명칭이다. 이것은 박치기가 주간뿐 아니라 야간에도 퇴수정 정자에 앉아 물속에 잠긴 바위를 바라보면서 이곳의 경치를마음껏 즐기
고자 한 뜻이 아니었을까? 싶다.
.
말보다는 가서 보면 알겠지만 퇴수정원림은 람천을 따라 깨끗한 물과 기암괴석이 펼쳐져있고, 지리
산 연봉에 에워싸여 있어 안온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본제(本第)가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내면 대정리 매동 마을은 매화를 닮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
해발 420~490m의 표고를 가진 산촌마을로 달성서씨가 처음으로 정착 한 이후 김해김씨, 밀양박씨 등
이 들어와 살았다 한다. 매동 마을은 퇴수정원림과는 불과 300M 거리에 위치한다.
.
야박담(夜泊潭):~이 글 덕분에 핑게 삼아 풍교야박(楓橋夜泊)에서 시를 감상할 기회로 삼아본다.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달 지고 까마귀 울고 서리는 하늘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강가의 단풍나무 고기잡이 불 곁에 시름겨워 조노라니,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멀리 고소성 밖의 한산사에서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 배에 들려오누나..
.
퇴수정(退修亭) 퇴수정의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다.
.
매천 박치기(梅川 朴致箕)의 퇴수정 주련(退修亭柱聯)에는 원운 반선대기(伴仙臺記)가 걸려 있는데 원운 에는 이러한 의미를담고 있다.
글씨체는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
塵外孤臺晩托踪(진외고대만탁종)어지러운 세상 떠나 늦게사 누대를 지어 의탁하니,
淸流九曲嶽千里(청류구곡악천리)맑은 물은 굽이쳐 흐르고 산은 첩첩이라.
蒼松隔水冷冷韻(창송격수냉냉운)푸른솔 물에 드리워져 그 운치 은은하게 빛나고,
白石和雲淡談容(백석화운담담용)하얀 바위 돌과 어우러진 구름은 매우 맑은 모습이네.
忘世許同群鶴鹿(망세허동군학녹)세상사 잊으려 학과 사슴 벗하니,
存身傀比蟄珪龍(존신귀비잠규룡)이 몸 숨김이 칩거한 규룡에 비하면 부끄럽구나.
靜觀認是仙人過(정관인시선인과)고요히 돌아보니 이곳은 신선이 지난 곳인지라,
林壑依然道氣濃(임학의연도기농)산림과 골짜기엔 변함이 없어 의연한 기상이 짙구나..
.
이러한 구성물경이 자연과 잘 어우러져 여름이면 시냇물과 암석이 어우러진 풍경에, 더위를 씻어주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시름을 덜게 한다.
그 분위기를 선비들은 눈과 마음으로 느끼고는 시로 은근히 자랑했다. 그리고 마직막에는 항상 삶은 한바탕 꿈였고 허상이었음을 알리고 회후
한다. 이곳에서도 그랬다.
.
이현우(2011)의 연구에 의하면 매천 박치기는 함양 안의(咸陽 安義)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했다
고 한다. 매천이 이전에 살던 함양 안의는 매천의 선조인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傅:1571-1639)가
경영했던 화림계곡 최고의 경승지 농월정(弄月亭)이 있는 곳이다. 현재 남원지역의 대표적 인물지인
운성지(雲城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정8품 문신인 통사랑(通仕郞) 박치기는 지족당 명부(知足堂 明傅)의 후예요, 참판 명천의 9세손이다.
성품이 온후하고 행실이 결백하였으며 친척간은 물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고 흉년이 들면 많은 혜택을 베풀어서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
.
.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주는 방(과방(果房)
.
.
박치기는 반선대기(伴仙帶記)를 저술하였는데 자신이 안의(安義)에서 매동(梅洞)으로 이주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취헌 박상철(醉軒 朴相喆)에 대해서는 효자편에 “지극한 효성이 천성에 근본하여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에 힘썼다.
.
일찍이 모친상을 당하여 예를 따르면서도 부친의 마음을 슬프게 할까 두려워하여 슬픈 마음을 다 표
현하지 못하였다.” “부친이 학질에 걸렸을 때에는 손가락의 피를 내어 국을 끓여 올리니 쾌차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박상철을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찬했다.”고 전하고 있다.
.
.
퇴수정기(退修亭記):~영가 권도용(永嘉 權道溶)의 기문에는 ‘지리산 일대 가장 아름다운 택승지(宅勝地)에 대를 쌓고 정자를지었는데, 별경(別景)인
동천세계를 구축하고 은일을 위한 별업(別業)으로 삼으니, 신선경(神仙景)이 펼쳐지누나.’라고 기록하고 있다.(우측).
.
.
정자 내부에는 박완경(朴完卿)·완산 이명상(李明翔)·안동 권도용(權道溶)·풍천 노보현(盧普鉉)의 기문(記文)과 월성 이규남(李圭南)의상량문이
남아 있다. 현재 밀양박씨 은산공파 매천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
퇴수정 원림의 공간 구성은 매천별업(梅川別業) 각자바위, 너른 반석 등을 포함한 퇴수정권역(退修
亭圈域)과 사당을 겸한 교육공간이었던 관선재권역(觀仙齋圈域), 람천 계류변에 펼쳐진 계정권역(溪
亭圈域)으로 나눌 수 있다.
.
유랑자는 주변을 둘러 본다음 마루로 올라본다. 누군가가 관리를 하는지 제법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고 바닦청소 또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신발을 신고 들어가기가 뭐해 유랑자는 신발을 벗고 올
라선다.
.
퇴수정기
.
퇴수정기(退修亭記):~ 완산 이명상(完山 李明翔)의 퇴수정기에는 “제일 명승처 강 언덕에 축대를 쌓고 가히 은사가 거할만하다
하여 이름 하기를
반선(伴仙)이라 하였다. 세상의 혼탁함을 싫어하면서도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불러 술과 거문고와 바둑으로
여가를 즐겼다.
그런데 그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속세의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마치 신선처럼 느껴졌다.
”라고 썼다. 이때 퇴수(退修)와 반선(伴仙)은 일맥상통한 용어로, 퇴수정이 속세에 있지만 신선세계로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좌측)
.
.
.
마루에 오르면 계자난간이 삥 둘러쳐져 있고 8면으로 모서리의 각을 따내어 외장이 섬세하다. 가운
데는 관념적으로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정도의 작은 방을 하나 두었다. 그러나 불 때는곳도 지붕도 없
는 그냥 칸막이 방이다.
.
이방은 사람이 기거하기 위한 방이 아니라 이곳에서 모여 회포를 푸는 연회를 열거나, 다과를,하거나
할 때 음식을 만들고 내어가는 그런 방이다. 당시엔 남녀칠세 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유교사
상에 따라 거리를 두어야 하기 때문에 천을 가리고 여성들이 일하는 그런 방으로 일종의 과방(果房)
이라는 곳이다.
.
1870년(고종 7)에 지은 퇴수정은 1922년 봄 고을의 모든 선비들이 의논하여 그 해 4월 15일 처음으로 선비들의 계모임을 열고협소한 퇴수정의
좌편을 가리어 1937년 관선재 4칸을 더 증축하였다.
.
.
관선재(觀仙齋)는 매천의 후손이 후학들의 강론처로 사용하다 밀양박씨 제실 겸 후손들이 담락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
관선재(觀善齋):~사당겸 독서하는 곳이다. 의미로는 신선을 볼수있는 집이란 뜻을 담고있다.
.
지금까지 유랑자가 수 백군데의 정자를 둘러 보았지만 처음보는 특이한 구조다. 그리고 퇴수정 내부
에는 선비들의 시문과 기문이 많이 걸려 있다. 그리고 퇴수정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람천을 따라 울창
한 소나무군락이 압권을 이룬다.
.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진달래 군락들도 계류가에 늘어져 조화를 이룬다. 인간사에 이러한 선계가 또
있으랴? 그곳은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의 길인지, 때로는 휴식
을 취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그런 곳이다. 유랑자가 그리고 원하던
그런 별서지이다.
.
상량문과 반선대기(伴仙臺記).
.
..
.
.
암튼 신선(神仙)이란 따로 있겠는가, 이런 별천지에 와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유랑자가 바로 신
선이 아니겠는가? ㅎㅎ 신선이란 산사람(山人)을 말한다.
아름다운 산수를 지닌 한 지역을 얻어 그곳에 살면서 호흡하고 밖으로는 흥망과 영욕을 내 몸에 가하
지 않고 안으로는 걱정 수심 온갖 생각들이 마음에 침범하지 아니하고서 정신을 함양하여 장수를 누
린다면 어느 누가 신선이 아니겠는가. 바로 유랑자가 꿈꾸는 마지막 삶이다.
.
.
매천(梅天) 박치기(朴致箕, 1825~1907)가 함양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온 후 이 일대에 반선대(伴仙臺)라는 석대 조성하고유유자적하다
생을 마감했다.
.
.
..
관선재(觀仙齋)
퇴수정 우측에 위치한 관선재(觀仙齋)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에 ‘ㅡ’자형 배치로 되어 있는데, 192
2년 박치기의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지만, 평소에는 시서예
악(詩書藝樂)을 교육하는 강학 처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
반선대(伴仙臺)에 대해서는 1872년에 쓴 장석영(張錫英)의 기문과 1868년에 쓴 박문재(朴文在)의 반
선대기(伴仙臺記)가 남아있다. 장석영의 기문에는 “운성산중 푸른 절벽 청류곡절지에 자리한 반선대
는 봉래, 방장, 영주의 3선지대(三仙之臺)이다.”라는 설명이 기술되어있다.
.
.
큰 너럭바위가 인상 적이다.
.
.
그리고 물가의 바위에 각자된 1862년 박치기의 ‘반선대기‘의 내용은 구지(舊誌)의 내용으로 볼 때 다
음과 같다. “신선과 짝할 수 있는 것일까? 성현이 이에 대해 말한 바 없으며, 만승천지로서도 구할 수
없는 일이다. 참으로 신선이란 말은 황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선이란 짝할 수 없는 것일까?
.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같이 신선이란 산사람(山人)을 말한다. 나는 이에 술을 떠서 객에게 권하기를, “나
는 옛적 말하는 신선을 볼 수 없지만, 또한 후인이 나와 그대를 보면 거의 신선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객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기에 나는 이로 인하여 나의 누대에 이름을 삼고 암벽석면에 반선(伴仙)이
라 새기고 산중고사(山中古事)를 삼노라.”
-壬戊年(1862년) 중춘(仲春)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 기록함-
.
.
.
아무도 없는 지금 송림을 비롯하여 느티나무, 산벚나무, 살구나무 그리고 물가 쪽으로 굽은 소나무 등이 호위하는 신선지향적별업원림(別業園林)의
오솔길에는 수북히 쌓인 솔잎이 만든 융단을 밟으며 호젓한 분위기에 발걸음을 옮기니 정말 마음이 홀가분하고 온통 초록물로 물드인 듯 하다.
.
이현우(2011) 등의 연구에 의하면 매천 박치기는 이 기문을 통하여 “아름다운 산수에 의하여 세속의
좋은 것 버리고 정신을 수양하여 장수한다면 그것이 곧 신선에 이르는 길임을 천명하고자” 하였다.
.
또한 반선대 각자는 곧 “본인이 실제로 신선과 같은 생활을 영위하였음을 후세에 전하고 싶다는 염
원”을 새긴 것이다
.
퇴수정은 호남 지방에서 소담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정자로 손꼽을 만하다. 그래서 2000년 11월 17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
퇴수정원림도(김영환.2014): 퇴수정 내원에서 김영환 화백이 신선이 된 모습을 상상도로 그렸다. 매천별업,반선대,야박담등의
각자가 보이고
사슴과 학, 그리고 달이 표현되었다.
.
매천 박치기는 이곳에 1893년 삼선대(三仙臺), 세진대(洗塵臺), 삼청담(三淸潭), 야박담(夜迫潭), 삼
서(三嶼), 탁금담(濯錦潭), 반석(盤石), 암굴(巖窟), 석상(石牀), 수확(水確) 등 퇴수정 반선대 10영을
설정하였다.
.
이는 퇴수정이 만수천 석벽임류(石璧臨流) 계류가에 설치된 삶의 장소로서의 별업원림(別業園林),
신선경(神仙景)의 동천세계(洞天世界)라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곳은 야박(夜泊)하며 시와 술 거문고
를즐길 수 있는 풍류지처(風流之處)라는 장소적 의미를 갖는다.
.
.
https://cafe.daum.net/b2345/LKz0/387
.
전북 남원시 산내면 천왕봉로 626-8
(지번) 산내면 대정리 82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