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들은 왜 싸울 수밖에 없는가.
영국의 이중 약속, 중동 분쟁의 씨앗
유대인이 쫓겨난 이후 2000년 동안,
이곳은 많은 역사적 변화가 거치게 된다.
로마의 지배에 들어간 것인데,
로마가 서로마와 동로마로 갈라지게 되면서
(395년) 동로마의 관할이 된다.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때에도
팔레스타인 지역을 동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세력은
한손엔 칼, 한손엔 코란을 들고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불과 50년도 못된 사이에
동로마 영토를 침략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우른다(우마니아 왕조 성립 661년).
이로써 이 지역은 아랍인(아라비아인)들의
거주지로 확고히 정립하게 된다.
코란는 마호메트에게 전해진 신, 즉 알라의
말씀이다.
어느날 히라산에 들어가 명상과 기도중,
영적체험으로 대천사 가브리엘에 의해 신의
말씀이 그에게 계시된 것이었다.
결국 마호메트도 자신의 가르침이 예언자의
전통적 흐름에 따른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그 이전의 아브라함,모세,예수 등 유대교의
예언자들과 같은 사명을 띠고 인류에 보내졌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켰다,
신에게서 주어진 계시를 왜곡하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에 코란이 그 모든 것을 재확인.정정한 것이며,
코란은 종래의 계시를 능가하는 것을 준다고
믿고 있다.
셀주크 투르크가 아랄해 지역에서 그 강력한
기동력으로 호라산을 거쳐 바그다드로 치달아
압바스 왕조의 지배권을 거머쥐더니,
그 세력에 불안한 동로마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로마교황 우루바노스 2세에 요청,
11후반에서 13세기 까지 200년에 걸쳐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1차 십자군 전쟁 때, 되찾은 것도 잠시,
3차 십자군 운동 때, 다시 빼앗기고 그사이 몽골족의
서방원정이 일어났고,
셀주크 투르크에 이어 오스만 투르크가 이지역을
장악하여 19세기까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동안 인종도 많이 섞였겠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에서 오스만과 영국이 전쟁을
치르게 됐고, 영국은 지원국 확보를 위해 이중 약속을
하게 된다.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이었던 맥마흔은
1915년 아랍인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약속하는 선언을 한다.
이른바 ‘맥마흔 선언’인데, 아랍 세력이 오스만 제국과
전투를 치러 준다면 통일아랍 영토를 보장하겠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랍영토가 오스만제국의 영토
즉, 이스라엘 땅이었다.
그런데 2년 후 영국 외교장관인 아서 벨푸어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의 국가 수립을 약속하는
외교선언을 한다. 이 선언 역시 유대인이
영국으 전쟁수행을 지원하는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1차대전이 끝나자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그 당시 유대인 이주를 도운 유대인 가문이 한 때
글로벌 금융가를 장악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하지만 영국은 이처럼 팔레스타인에도 이스라엘 땅을
약속했다.
결국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 간 갈등만 격렬해졌고,
영국은 대안을 제시했지만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영국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통치를 포기하면서
철수하고 말았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관리는 유엔으로
넘어갔다. 유엔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영토를 분할 관리할
것을 제안한다.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를 분할하는 것이
골자였다. 예루살렘은 유엔이 특별 관리한다.
그 당시 인구로 따지면 유대인은 아랍인의 3분의 1도
채 되지 않았고, 전체 면적의 소유비율도 7% 미만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팔레스타인은 극렬 반대했지만 유대인은
이 결의안을 근거로 1948년 5월 14일 자신들의 나라인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옮긴 글-
첫댓글 분쟁이 씨앗의 상세한 설명
완전히 이해는 못했지만 유익한글. 잘 읽고 갑니다
강대국들도 전쟁 말릴수 없을까요?
안타까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