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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3959년(1626) 봄 프랑스 파리
“삑삑삑”
시끌벅쩍한 소리를 잠재우는 날카로운 소리가 세 번 울리자, 몽블랑에서 주색잡기와 난설에 여념이
없는 손님들이 일시에 얼굴을 구기며 방금 들린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한 노름꾼의 말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뭣들 해. 패 돌려 !”
오늘 일진이 사나워 돈을 잃은 것 같은 한 청년이 낸 신경질 소리에 잠시나마 멈춰졌던 몽블랑의
생활이 제자리로 빠르게 돌아왔다. 일상으로 돌아온 사람들로 인해 언제 그랬냐는 듯 몽블랑은
다시금 시끄러워졌다. 그 부산함 속에서 가야금을 타던 마리는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며
스퀘델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스퀘델리 ! 비상벨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
단둘이 방에 들어간 마리가 서둘러 짐을 챙기며 말을 이었다.
“정 내키지 않으면 같이 가지 않아도 되. 하지만 난 같이 갔으면 좋겠어 ?”
바쁜 손놀림은 금새 가방하나를 만들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퀘델리는 잠시 갈등 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그래도 제 고향인데…
설마 연약한 저 같은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
이런 일을 대비해서 그 동안의 모든 일은 스퀘델리가 도맡아 처리하곤 했지만, 비
상벨이 울렸다는 것은 스퀘델리이 역시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녀를 설득할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몸조심하고 우리의 힘이 필요하면 약속된 그곳에 붉은 천을 걸어놓도록 해.
그럼 누군가 스퀘델리를 찾아 올 거야 ?”
“걱정 마시고 어서 피하세요. 전 밖을 나가 볼께요”
스퀘델리가 나가자, 마리는 서둘러 옷을 간편하게 갈아입고는 서류들을 벽난로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책장 깊숙이 넣어둔 석유 병을 꺼내든 그녀가 벽난로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자,
벽난로가 활활 타올랐다. 불쏘시개로 몇 번 불길을 휘졌던 마리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책상 위의 그림 같은 사진에 눈길을 멈췄다. 정복을 입고 있는 남자는 언제나 그곳에서 자신에게
맑은 웃음을 보내주고 있었다. 잠시 딴생각에 젖어있는 마리는 사진을 챙겨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몽블랑을 처음 짓을 때부터 이런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언덕에 세워진 2층은 바로 언덕과
연결되는 비밀통로가 있었다. 이 비밀 통로는 언덕 맞은 편으로 통해 있었고,
그곳에는 또 다른 안가가 마련되어 있어서 지금 지원 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몽블랑밖으로 나온 스퀘델리는 사방이 총칼을 든 왕립 수비대 병력으로 포위당한 것을 보고는 겁이
덜컥 났다. 아직까지 마리는 몽블랑에 있었기에 이러면 빠져나가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안색이 창백해진 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던 스퀘델리에게 장교와 병사 몇이 뚜벅뚜벅 다가왔다.
“이 여자를 체포해. 안으로 들어가서 모두들 끌어내고 특히 동양인을 찾아내라.”
“무슨 일입니까 ? 왜 이러시는 겁니까 ?
여긴 파리의 고급 사교계라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하는 겁니까 ?”
병사들이 막무가내로 몽블랑으로 들어오려 하자 스퀘델리가 온몸으로 출입구를 막아 섰지만,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우악스럽게 스퀘델리를 질질 끌고는 줄로 꽁꽁 묶었다.
우당탕탕 거리며 몽블랑으로 병사들이 난입해 들어가자, 안에서 다시 한번 큰 소란이 벌어졌다.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층까지 다 뒤졌지만 다른 사람은 찾지 못 했습니다.”
리슐리외의 명령을 받고 이곳까지 온 쟌 필립 대대장은 스퀘델리에게 걸어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동양여자는 어디 있나 ?”
“누굴 말하는 것이냐 ?”
스퀘델리는 머리털에서 오는 아픔을 참으려 쟌을 쏘아보았다. 한편으로는 마리가 저들의 수색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끌려나온 많은 귀족 청년들은 자신들의
영원한 우상인 스퀘델리가 쟌 필립의 손에 무참히 짖밟혀지는 모습을 보고 분개하며 일어서려
했지만 병사들의 총칼이 그들을 제지했다.
“동양인이 있었던 것을 다 안다. 방금 전까지도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어디로 빼돌렸지 ?”
“몽블랑에서 일하고 있는 동양인은 마리 한 사람 뿐인데 심부름 보내서 아직 오지않았다.”
“거짓말”
쟌 필립은 더욱 세차게 스퀘델리의 머리채를 움켜지며 흔들어댔다.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악을 써대던 스퀘델리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점점 이성을 상실해 갔다.
“숙녀에게 이렇게 막 대하고도 네놈들이 기사란 말이냐 ? 놔라 놔 ?”
앙칼진 목소리에 아랑곳 않던 쟌 필립이 누군가가 다가와 귓속말을 해대자
움켜지고 있는 손가락의 힘을 뺐다. 끌려나온 자들을 한번 훑어 본 필립은
스퀘델리를 한쪽으로 밀치고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시 한번 철저히 수색하고, 여기 있는 자들을 바스티유로 끌고 가라.”
몽블랑에 있는 모든 것들을 수거해 마차에 실을 때까지 마리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리되자 쟌 필립이 스퀘델리와 마차를 앞세우고 바스티유로 말을 몰아갔다.
일명 장미라는 암호명으로 마리의 탈출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시각,
최우석은 공관 정문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경비대장으로부터 심각한 주변 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다.
“이미 주변이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거의 일개 중대병력이 정문으로 들어올 기세입니다. 옥
상에 기관총을 거치할 까 합니다만.”
“몇 시간만 버텨보게. 가능하면 발포를 삼가고. 그리고 고양이 작전을 실행하도록.
지금쯤이면 몽블랑도 1차 지점으로 자리를 옮겼을 거야. 모든 서류들을 파기하고,
관저에 덫을 놓도록. 아무리 그래도 무단 침입의 대가는 치르게끔 해야 되겠지. ”
“네. 알겠습니다.”
최우석은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활짝 재끼고 밖을 내다보았다. 프랑스 군대와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듯 온통 무장 군인들로 가득 찼지만, 정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있었다.
정문 안쪽에서는 경비병력이 거총자세를 한 상태로 정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대한제국 공관을 폐쇄하고 있던 장 뤽 고다르 왕립 기병 연대장은 돌격중대를 투입하라는
최종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 리슐리외가 보낸 명령서를 접수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격중대를 뒤로 물리고, 주변 경비를 더욱 강화하도록”
무슨 이유에서인지 리슐리외는 돌격중대의 난입을 최종단계에서 철회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최우석은 일단 파리를 벗어나기로 마음을 굳히고
야음을 틈타 계획대로 탈출로를 잡아 나갔다.
“아름답군. 왜 진작 밤에 이곳에 나와 볼 생각을 안 했을까 ?”
굽이굽이 프랑스를 관통하는 센 강은 하현달의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노르망디 해안으로 흘러갔다.
공관을 빠져 나온 최우석 일행은 특수부대의 엄호를 받으며 총 5척의 동력선에 몸을 싣고
하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리가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니, 미처 몰랐군”
주변을 둘러보던 최우석은 몽블랑 식구들은 다른 통로를 따라 파리를 벗어나고 있을 거란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마리와 자신의 소속이 다르다는 것은 새삼 깨달았다. 마리는 자신처럼 천인단 외교부
소속이 아니라 천군부 정보사령부 소속이었는데, 파리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 보니 당연히 자기랑
같이 움직일 거라 생각했었다.
“쉿”
엄호팀을 이끌고 있는 이찬용이 최우석에게 작은 소리로 주위를 주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다리만
무사히 지나가면 파리 외곽이었고 그러면 어느 정도는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다행히 다리 위에는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멀리 로테르담 성당이 달빛에 반사되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3교대로 변환한다.”
“서기관님 이제는 눈을 좀 붙여야 됩니다. 앞으로 갈 길이 멉니다.”
다리를 무사히 건너자 엄호팀장이 잉여인력에게 휴식을 명령했다. 모두들 피곤했지만 잠을 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400킬로미터를 내려가야하는 그들로서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엄호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자리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지만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출렁거리는 강물소리를 들으며 그 동안의 일을 생각하다 스스르 잠이 들었다.
몽블랑 성에 있는 고진영은 각지의 그림자들로부터 전해오는 고양이 일행과 장미일행의 이동상황과
더불어 프랑스 병력이동에 대한 보고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하루를 꼬박 세웠다.
무사히 파리를 탈출했다는 보고를 접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건 뭔가 ?”
고진영은 센 강 주변을 나타내는 지도가 걸려진 벽면에 새로운 표식을 요원이 달자 가까이 다가갔다.
“새로 나타난 기병대입니다. 아미엥에서 루랑으로 일직선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래 ?”
“주변 그림자 호출해서 자세히 알아보라고 해 ! ”
“아미엥 부근의 그림자는 마리일행에 메달려 있어서 점 지점을 이탈한 상태입니다.
루앙에 다섯 점이 있으며, 하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
“아니 그럼 센 강 탈출로에 투입된 요원이 거의 전무하다는 거야 ?”
“그렇습니다만, 이 탈출로는
유럽 해안가에 작은 요새로 위장하여 세워진 간이 무선국은 전역에 뿌려진 그림자들과의
원활한 통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내륙 깊숙한 곳까지는 출력이 약해 송수신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용된 것이 휴대용 VHF였지만, 그것 역시 30킬로미터의 가청거리가 고작이어서
내륙에 듬성 듬성 세워진 무선국을 벗어나면 실시간 통신이 불가능했다.
지금 지도에 나타나고 있는 것들은 모습을 들어낸 프랑스 병력의 추정 위치에 불과해서
신뢰도가 상당히 의심되는 것들이었다.
“전혀 상관없는 듯 하지만 이동 형태가 이상하단 말야 !”
고진영은 마리일행의 탈출로와는 다르게 최우석 탈출로 주변으로 프랑스 기병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깨름직했다. 기병대의 움직임은 최우석의 안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었지만, 꾸준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군다나 그들을 점으로 연결하면
최우석은 반경 100킬로미터에 갇혀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고 파리 탈출 후
계속해서 그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정도 이격 거리면 포위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
“그래. 그래도 불안해.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어. 그리고 마지노는 어디쯤 오고 있나 ? ”
고진영은 남은 길이 먼 최우석의 일행에서 잠시 눈을 마지노에게 돌렸다.
최우석도 위험했지만 로리앙 지방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었다.
“두두두두두”
이백 기의 기병들이 루앙을 눈앞에 두고 방향을 동으로 꺾어 프랑스 평원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이백 기의 기병을 이끌고 있는 프랑스와는 파리의 명령을 받고 오늘 밤 안으로
루앙 동쪽 20마일 지점에 무조건 도착해야만 했다.
“서둘러라. 시간이 없었다.”
프랑스 평원이 잠시 굴곡을 이루는 루앙 주변은 낮은 구릉들이 산재해 있어서 기병대를 숨기기에는
평원보다는 훨씬 용이했다. 루이 13세의 서명이 되어 있는 명령서에는 프랑스와에게 루앙 주변에
있다가 신호가 오면 일정지점을 통제하라는 명령이 쓰여져 있었다.
“이제부터 굴곡이 시작됩니다.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섯번만 무사히 돌면 지원 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찬용은 깡마른 얼굴에 눈빛을 반짝거리며 이리저리 주변을 훑었다. 잔바람만 강변을 휘휘 감돌며
잔물결을 만들어냈다. 디젤엔진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소리가 어둠에 울려 퍼졌다. 하현달이 뜨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내려가기 위해 엔진을 가동시킨 5척의 동력선이 조용히 하류로 내려가고 있었다.
“요 며칠이 몇 달처럼 느껴지는 구만”
“이제 다 왔습니다. 내일 밤이면 하구에 도착합니다.”
“그런가 ? 고생 많았네”
“아직 이릅니다. 그 말씀은 모선에서 다시 듣도록 하겠습니다.”
최우석은 긴장이 서서히 풀려가고 있었지만, 작전 완료가 되기 전에는 항시 긴장하고 있어야만
생존가능성이 배가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찬용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첫 굽이는 도는 사이 반달보다 조금 작아진 달이 동쪽 하늘을 밝히며 떠올랐다.
“온다. 준비”
최우석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일단의 무리들이 불규칙적인 음이 점점 가까워지자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클레르몽 연대장은 리슐리외 재상의 명령으로 반신반의하며 무조건 이곳까지 달려와
손님이 내려 오기만을 기다렸다. 클레르몽은 그의 연대병력을 소규모로 쪼개 이곳으로 집결시켰지만
실재로 손님이 나타나자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신호탄 쏴라”
잔잔한 물결을 따라 다섯 척의 기이한 모양의 배가 가시권에 들어오자 클레르몽은 지체 없이
신호탄을 올리게 했다. 궁수가 쏘아올린 신호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내려오자,
주위가 갑자기 시끄러워지면서 횃불이 올라왔다.
“배를 띄워서 진로를 막아라”
강변에 숨겨둔 작은 목선들이 하나 둘씩 강 중앙으로 나가더니 순식간에 강에 배다리를 만들어 냈다.
그 뒤에 다시 배들이 일직선으로 늘어서기 시작하면서 3중의 차단 선이 형성되어 갔다.
겨우 일백 미터정도의 강폭을 가지고 있는 센 강이 완전히 통제된 것을 모른 상태에서
배가 빠른 유속에 출렁거리자 모두들 주위에 잡을 수 있는 것을 꽉 잡았다.
“뭐야 ?”
이찬용은 두 번째 굽이를 돌자마자,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면서 횃불이 강변 양쪽과 전방에 나타나자
놀라 소리쳤다. 어른거리는 불빛만으로도 주위에 나타난 숫자가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일 듯 싶었다.
“정선. 전투준비. 전투준비”
다섯 척을 연결하는 통신망을 개방한 이찬용은 각 선박에 전투준비명령을 하달하고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머리를 굴렸다. 그사이에도 횃불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선장. 속도를 내서 뚫고 나갈 수 있겠나 ?”
“불가능합니다. 충돌하면 이 배도 부서집니다.”
철선이었다면 해 볼만 했지만 목선에 소형 디젤 엔진만 단 동력선은 방어력이 형편없었다.
이대로 돌진했다간 전멸이 불을 보듯 뻔했다.
“젠장. 어디서 노출 된 거지 ? 일단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까지 오는 중 자신이 알기로 아무에게도 노출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상 파리가 병력을
움직여 이곳을 막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지금쯤 대한제국 공관에 들어가 호되게 당하고 나서
추격에 나설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적들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었다.
“저 놈들이 배를 돌리는 데요 ?”
“그럼 안되지. 화살을 날리도록”
클레르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안에서 일제히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미처 강 중앙까지 날아가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지는 화살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최우석 일행을 위협하며 주변에 떨어져 내렸다.
“이찬용 팀장 ?”
거의 절망에 가까운 목소리로 최우석은 이찬용을 불렀다. 군사작전에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상황은 끝난거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일당 백의 용사라 하더라도,
지금 상황을 무사히 뚫고 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일단 한번 해보죠.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최고 속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별 사격 시작”
이찬용은 죽는 순간까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맡은 물건의 안전한 수송이었지
항복이 아니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등에 메고 있던 단신 소총을 바로잡은 대원들이 사격을 정조준
단발사격을 시작했다. 외교부 해외작전팀이 소지하고 있는 소총은 제국돌격소총을 기본으로 총신을
내부로 깊숙이 감추어 총 자체 길이를 줄인 일명 ‘자라’라 불리는 소총으로 휴대가 간편했다.
물론 총신 끝에 형광물질이 칠해서 있어서 야간사격에도 탄착점을 형성하기에 용이했다
“텅텅텅”
둔탁한 총소리가 울려 퍼지며 총알이 강변을 향해 날아갔다..
몇몇 횃불이 땅에 떨어지며 횃불의 행렬이 크게 일렁였다.
곧이어 양안에서 화살과 함께 총성이 날아들었다.
“탕탕탕탕”
금새 여명이 터오고 있어서 그믐으로 가는 달이 하늘의 지배권을 태양에게 넘겨주려 하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오면서 고양이에게는 더욱 불리해져 갔다.
“퍽. 윽”
대원하나가 짧은 단말마를 지르며 배에서 떨어져 나갔다. 선실에서 두려 운 마음으로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공관 직원들과 최우석은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며 뭔가를 결정하려는 듯 했다.
자신들이 있는 한 엄호팀들은 탈출이 불가능했지만, 몸이 자유로워 진다면 가능성은 있었다.
날이 더 밝기 전에 결론을 내야만 했다.
“일이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잠깐 짬을 낸 이찬용이 선실을 들어서며 큰소리로 말을 했다.
주위가 시끄러워 저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이찬용이 아무리 희망적으로 말하더라도 선실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대장. 앞뒤로 막혔습니다.”
거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총소리를 타고 흘러 들었다.
“그냥 뚫고 지나가. 화력을 한곳으로 집중시켜 탈출구를 만들고 빠져나간다.
마창식에게 선두를 맡으라고 해”
이찬용은 고개를 돌려서 명령을 내리고는 최우석에게로 다가갔다.
최악의 경우 그는 최우석을 비롯한 사람들을 죽여야만 하는 비참한 명령도 수행해야만 했기에
만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우린 여기서 그만 헤어질 준비를 하는게 좋겠어.
그 동안 고마웠네. 혹 살아가거든, 우리를 팔아 넘긴 자를 찾아주게나 ? ”
최우석도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 이유를 알지 못한 것이 억울할 따름이었다.
그의 직감은 어디에선가 정보누설이 되었음을 강하게 애기하고 있었지만,
차분히 따져볼 여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먼저 가서 좋은 자리나 잡아 주십시오. 그럼”
이찬용은 주머니에서 작은 알약이 들어있는 약병을 꺼내 최우석에게 건네고는 경례를 올렸다.
두 눈을 부릅뜬 이찬용의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며 떨렸다.
단기 3959년(1626) 봄 프랑스
완벽하게 최우석 일행을 함정에 빠트린 클레르몽은 천천히 사냥을 즐겼다.
아무리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백배에 달하는 인원이 둘러쌓고 있기에
실패하는 것이 더 어려워 보였다.
“가급적 생포하려 했는데… 끝내버려”
그의 명령에 일 마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야포가 불을 뿜었다.
소리와 함께 날아온 포탄이 강 중간에 떨어지면서 물보라를 일으켰다.
“한번 두번”
계속해서 떨어지는 포탄이 점점 목표를 위협하기 시작하면서
클레르몽은 몇 번째 포탄이 맞추는지 헤아렸다.
“펑”
맨 후미에서 따라오던 목선에 포탄이 정확하게 떨어지면서 굉음이 울렸다.
이찬용은 포탄이 선수에 맞아 뒤집어지며 하늘높이 튀어 올랐다 강물로 곤두박질 치는 동료함을
바라보며 통신망을 개방했다. 지휘관으로서 마지막 명령을 내려야 할 때가 오고 있었다.
“잘 들어라. 우리는 임무에 실패했다. 알아서 잘 하리라 믿는다.
일차 저지선을 돌파한 후 개별행동에 들어간다. 이상.”
마창식이 지휘하는 동력선이 포탄을 요리조리 피하며 상류에 만들어진 저지선을 향해 돌진해 갔다.
그 뒤를 다른 한 척의 동력선이 뒤따라갔다.
“뛰어내려”
배 조타기를 고정시킨 마창식은 동료들에게 소리치고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배에 타고 있던 7명의 대원들이 강물로 뛰어 들었다.
“뿌지직”
시속 40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이던 40톤급 목선이 가지는 운동에너지에 정면으로 충돌 당한
프랑스 선박이 산산 조각나며 강물위로 흩어졌다.
그와 더불어 마창식이 타고 있던 목선 역시 선수가 부서져나가며 사방으로 파편을 날렸다.
로리앙 몽블랑성
마지노 장군은 몽블랑성에 도착하고 나서야, 왜 리슐리외경이 자신의 부대를 전부 움직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쭙잖은 놈들이었지만, 에드몽은 그래도 주변에 있는 농민들과 신교도들을 제법
모아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웃기는 놈들이군. 기껏해야 쇠스랑을 들고 우리와 맞서 싸우겠다고 벌판으로 나왔단 말이지 ?
야포 몇 방이면 무서워서 도망갈 놈들이 숫자만 많다고 모여있는 꼬락서니하고는”
마지노가 보기에 에드몽의 군대는 엉성하기 그지 없게 진영을 갖추고 있었다.
일자로 길게 늘어선 군대는 자신의 기병연대가 집중해서 뚫으면 바로 뚫려버릴 것 같았고,
농민군들이 들고 있는 긴 낫이나 프레일, 석궁 같은 무기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우선 야포를 몇 방 쏘고 바로 밀고 들어간다.
기병대 하나를 우회시켜 적 후방을 교란시키고, 혹시 있을지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한다.”
벌판에 세워진 몽블랑성은 공격자 입장에서 보면 땅 집고 헤엄치기보다 쉬웠다.
공성전이 불리하다 싶으면 포위만 해도 몽블랑성은 완벽하게 외부와 단절되기 십상이었고,
규모도 작아서 포위하는데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쿵쿵 쿠궁”
고진영은 은은이 들려오는 포탄보다도 고양이의 접촉 상실때문에 통신실을 떠나지 못하고
안전 부절하기 시작했다. 장미일행에게서 거의 해안가에 도착해서 물때를 맞추느라 행군속도를
조절한다는 연락이 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났지만 고양이에게서는 아무런 보고가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거의 비슷한 시각에 보고가 올라오던 것에 비하여 수시간째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루앙에 있는 그림자들이 지정 랑데부 지점에서 고양이와 접촉한 후
접촉보고를 해와야 했다.
“사단이 난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소식이 없을 수 있나 ?
아무나 호출해서 고양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하게.
그리고 지급으로 4군 사령부에 연락을 취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하나 둘 공삼 넷 하나 둘 공삼 넷 옹달샘이 고양이를 찾는다.”
“하나 둘 공삼 셋 옹달샘이 고양이를 찾는다. 하나 둘 공삼 넷 옹달샘…”
무전병의 애타는 목소리를 들으며 고진영은 만에 하나 고양이들이 쥐들에게 잡혔을 경우
파생될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몇의 그림자들의 소재를 알고 있는
최우석을 비롯한 공관 직원들에게 해외 작전 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했을 거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희생이 크겠어”
고진영이 한참을 말없이 있더니 혼잣말을 내 뱉었다. 포성은 여전히 들려왔지만
지하실에 마련된 통신실에서는 멀게만 느껴졌다.
“쿵. 쿵.”
“오늘 17시까지 고양이와 접촉이 연결 되지 않으면,
고양이와 연결된 그림자들에게 1급 은신 명령을 내리도록. 젠장”
고진영은 대상 없는 욕을 하며 의자에 깊숙이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오늘까지의 모든 것을 머리 속에서 재생시키던 고진영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상
황판으로 걸어갔다. 고양이의 행로와 주변 프랑스 군의 이동 상황이 세세하게 기록되어있는
상황판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고진영은 초기에 감지되었다가 사라진 프랑스군들의 행로를
머리 속으로 예상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여기까지 나흘, 루앙에서 반나절, 오를레앙에서 칠일…”
예상소요시간을 계산해가던 그는 고양이와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부대들의 이동이
오늘 새벽을 기준으로 한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시간과 거의 일치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먼 거리에 있는 부대는 먼저 움직였고, 가까운 부대는 그만큼 나중에 움직였다.
“그럼. 이미 탈출로가 노출되었다는 결론인데. 그런데 왜 장미일행에게는 아무 일이 없었을까 ?”
다시금 생각에 잠겼던 고진영은 서둘러 통신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탈출로가 노출되었다면 다른 것도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많았다.
“지급으로 전 그림자들에게 1급 은신 명령을 내리도록.”
“네 ? 전 그림자들에게 말입니까 ?”
통신관의 확인요청에 고진영은 망성이지 않고 바로 명령을 확인했다.
“그래. 지금 당장.”
고진영은 다시금 의자에 앉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프랑스의 능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설사 발각되었더라도 그림자들은 살인멸구를 철저히 해왔기 때문에
외부에서 침투해서 자신들을 양지로 끌어낼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제5열이 스며들었다는 결론밖에 없었다.
“내부 문제란 말인가 ?”
중얼거리던 고진영이 백지 한 장을 서랍에서 꺼내 암호문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좀처럼 쓰지 않는 암호문을 작성하려니 몇 문장 작성하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리고 있었다.
전문 작성을 마치자, 그는 다시금 백지 한 장을 다시 꺼내 짧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깃발을 들고 있는 놈과 깔끔하게 차려 입은 놈 그리고 맨 앞에 선 놈을 저격한다.”
농민군에 섞이기 전 특수여단 3대대 병력 400명은 대대장의 저격우선순위에 대한 설명을
다시 한번 듣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아직까지 제복이라는 것이 없었기에,
지휘관과 일반 병들이 입고 있는 복장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절대 적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지금부터 분대 전투에 들어간다. 산개”
특수여단 병력은 벙거지 모자에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얼굴은 땟국 물에 찌든 색깔로 위장을 해서
언뜻 보기에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농민군과 흡사하게 위장을 하고 있었다.
누더기 안에는 특수여단 고유의 소총과 달걀이라 불리는 수류탄 두개 그리고 소총탄 200발이
탄창에 끼워진 채 혁대에 매달려 있었다.
“드드드드드”
대략 일천기의 기병대가 계속된 포격으로 얼이 빠져 있는 농민군 정면으로 치고 들어왔다.
전면전을 하기 전에 탐색전을 펼칠 요량이었는지 프랑스군은 전력을 투입하지 않고 있었다.
“창”
에드몽에게 군 지휘권을 부여 받은 농민군 사령관 부르노 살라몬이 외치자, 그나마 제정신인
맨 앞줄에 서있던 사람들이 2미터 길이의 사람 손목만한 두께의 막대기를 사선으로 들어 올렸다.
한쪽 끝이 뾰족하게 잘려나간 막대기 다른 끝을 왼발에 대고 오른발로 지지하고 있는 사람 뒤로
서너명이 더 붙어 힘을 보탰다. 맨 앞에 선 자는 철판이나 나무판으로 가슴을 보호하고 있었다.
“석궁 준비, 화승총 준비”
기병대가 어림잡아 500야드까지 들어오자 살라몬은 있는 화기를 총동원하여 일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면으로 달려드는 기병대들은 격발식 소총을 빼 들고 농민군을 향해 사격자세를
잡으며 달려들었다.
“타타타타타탕”
기병대가 먼저 사격을 실시하자, 선두에 서서 막대기를 잡고 있던 농민들이 쓰러지며
막대기로 형성된 방어벽이 흔들렸다.
“타타타탕”
마지노 부대의 기병대는 농민군 전방 100야드에서 더 이상 들어오지 않고 100여명씩
순차적 사격을 하며 되돌아 멀어져 가고 있었다. 100야드면 농민군이 가지고 있는
화승총이나 석궁의 사정거리를 아슬하게 벗어난 거리였다.
“화승총 발사. 석궁발사”
이러다가 자칫 부대 전면이 와해될 것을 우려한 브루노가 어쩔 수 없이 화승총발사를 명령했다.
적들에게 피해를 줄리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부하가 쓰러지는데 지휘관으로서
손만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탕탕탕”
“쉭쉬시시”
뿌연 연기가 일수 시야를 가렸다 바람에 흩어졌다. 화승총을 쏜 몇몇 사수들이 서둘러 장전을 하는
사이 부르노는 널 부러져 있는 적 기병들을 보고 입을 좍 벌렸다. 수백 명이 사격한 것에 비하면
적은 숫자였지만 족히 수십 명의 기병들이 말에서 떨어져 신음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
도저히 믿기지 않은 일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겨우 몇일 간 훈련을 받은 농민군
총병치고는 그리고 사정거리가 형편없는 화승총으로 올린 전과치고는 고무적인 일이었다.
“재장전. 재장전”
“와와와와”
자신이 겨냥한 적이 말에서 떨어지자 좋아서 함성을 지르던 석궁 병들이 서둘러 화살을 석궁에 걸었다.
놀라기는 적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공격중지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기에 재차 공격을 하기위해
숨을 고르며 재장전에 들어갔다.
“에드몽의 수완이 대단하군.”
멀리서 기병대의 탐색전을 바라보던 마지노는 농민군의 일제사격으로 자신의 기병대가 피해를 입자
안면 근육이 실룩거렸다. 기껏해야 구식 화승총 몇 정 가지고 있는 농민군으로써는 제법이었다.
“그래 보았자. 무지랭이 농민군에 반란군에 불과하지만 말야. 탐색전은 이만 하면 되었다.
기병대를 모두 투입 시켜서 중앙을 돌파하고, 보병들을 투입한다.”
기껏해야 오천명의 반란군을 상대로 탐색전까지 펼치고, 우회 기동 부대 까지 편성하며 전투에 최대한
신중을 기하고 있던 마지노가 마침내 총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재장전을 마친
탐색전 기병대가 재차 돌격을 시도했다. 이번 돌격은 처음과 달리 고속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뛰어 넘을 기세다. 모두 전투 준비”
달려오는 기병대의 속도가 전혀 줄지 않았고 그 후미에 새로운 부대가 돌격해 들어오자,
브루노 살라몬은 적의 전면 공격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기병대보다 먼저 날아온 포탄이 전면에 작렬하면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방해했고,
일부는 저지선 중간에 떨어져 내렸다.
“사격”
“탕탕탕”
“히히힝”
어느새 방어선에 기병대가 다가왔는지 막대기를 들고 있던 듀팡의 손목에 묵직한 힘이 가해졌다.
막대기 창 끝에 말 가슴팍이 찔려 들어 갔다. 달려오던 힘을 그대로 받은 막대기가 듀팡과
그의 동료들이 지지하는 힘이 엇갈리면서 활처럼 휘어지더니 어느 순간 뚝 부러져내렸다.
“어어어어”
순식간에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네 명의 몸이 앞으로 쏠려 미끄러졌다.
가슴에 격렬한 통증을 느낀 말이 길길이 날뛰며 넘어진 농민군을 말발굽으로 짓 이기며 울부짖었다.
“퍽”
미친 말처럼 날리던 말 머리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사방으로 뇌수와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방에서 화승총과는 다른 총소리들이 들려왔지만, 삶과 죽음을 오가는 전투를 벌이고 있는
병사들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돌격. 신앙의 자유를 위해 돌격 앞으로”
계속되는 기병대의 공격에 인간 목책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자 브루노 살라몬은
마침내 돌격명령을 내렸다. 모든 면에서 마지노 부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열악한 농민군이었지만,
신앙에 대한 자유를 위해서는 싸워야 했다.
“포격 실시”
“모조리 죽여라. 한 놈도 살려서 보내지 마라”
마지노는 전장이 예상보다 힘겹게 돌아가고 있자, 눈에 핏빛을 세웠다. 일천기의 기병대가 농민군에
다가가기가 무섭게 시작된 농민군의 반격으로 인해 짧은 시간 안에 전멸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곧이어 추가된 기병대의 돌격으로 농민군이 만든 인간 목책이 무너지며 중앙을 돌파하는데
성공했지만, 농민군은 오히려 앞으로 돌격을 해옴으로써 보병끼리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탕탕탕”
“와와와”
사방이 칼과 칼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고함소리, 함성소리로 가득 찼고, 가끔씩 총소리가 들려왔다.
일만 명이 한데 뒤엉켜 총을 쏘고, 칼로 찌르고, 화살을 날렸다. 400명의 특수여단 병력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농민군의 피해는 점점 늘어가기만 했고, 설상가상으로 3대대병력이 보유한 탄약이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대대장님 후퇴해야 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후미에 있는 놈들을 우리가 막아야 한단 말야”
농민군을 돌파한 기병대가 말머리를 돌려 달려들고 있었고, 그들을 막아야 할 임무가 3대대 병력에게
주어져 있었다. 농민군 후미에서 간헐적으로 사격을 해대던 3대대 병력이 후미로 한참을 달려
5열 종대로 열을 맞추어 앉아 쏴 자세를 잡아갔다.
“사격”
한중사는 대대장의 명령에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소총을 들어 조준선을 응시했다.
달려오는 기병 하나가 십자선에 들어오자 거리낌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계속되는 사격으로 주인을 잃은 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몰려들던 기병대는 강력한 화망에
걸려 피해가 속출하자 급히 방향을 180도 바꿔 후퇴하기 시작했다. 한차례의 기병대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3대대 병력은 적 기병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 추격이였지 엄연한 후퇴에 해당하는
행위로 그들이 후미를 비우자 부르노는 서둘러 부대 전체에 후퇴명령을 내렸다.
후퇴를 알리는 뿔각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자, 농민군들이 썰물처럼 뒤로 물러나며
몽블랑성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둘러라. 신속히 전장을 이탈한다.”
브루노는 전장을 빠져나가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치며 전장을 돌아다녔다. 브루노가 직접 지휘하는
백 여명의 기병대가 그를 그림자처럼 보호하며 움직였다. 서로 뒤엉켜 싸우던 농민군이 뒤로 물러나자,
접전을 펼쳤던 프랑스 보병들이 뒤쫓아 왔다.
“기병대는 후퇴를 엄호한다.”
브루노는 아직까지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던 기병대를 보병들의 후퇴를 엄호하기위해 투입을 명령했다.
넝마를 뒤집어 쓰고 있던 100여기의 기병이 앞으로 나서자, 브루노는 중군과 함께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전쟁터에서 적을 죽이지는 말라니. 참 내”
2대대장은 안장 위에서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프랑스 병사들을 보면서 소총을 들어 올렸다.
조준선에 머리 하나가 들어왔지만 이내 총구를 내려 하복부 아래 다리를 겨냥했다.
브루노 경호와 후퇴엄호에 투입되기 전 여단장이 2대대 병력에게 가능하면 적을 부상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대대장 역시 큼직한 가슴보다는 명중이 몇 배는 어려운 다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탕. 탕”
2대대 병력의 순차 사격이 시작되고 빗나간 총알아 땅바닥에 박히면서 작은 먼지들이 일어났다.
사격을 한 맨 처음 열이 뒤로 80미터를 전속력으로 후퇴해 전장식 소총을 장전하는 시늉을 해댔다.
팔자에 없는 연극을 하는 2대대 병력은 이런 연극이 적을 얼마나 기만할 수 있을 지 확신 할 수
없었다. 그저 의도대로 먹혀 들기만 바랬다. 어찌 되었던 그렇게 순차사격을 서너 번 하자,
적 보병들이 머뭇거리며 후퇴할 기미를 보였다. 그사이 처음 위치에서 뒤로 200여 미터를 물러난
기병대는 보병이 더 이상 달려들지 않자. 그 자리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후퇴한다. 전속력으로”
대대장은 뒤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머리를 돌려 미련 없다는 듯 후퇴를 명령했다.
농민군은 꽁지라 빠져라 후퇴하고 있었고, 2차 저지선을 넘기 직전이었다.
"이런 걸 승리했다고 해야 하나 ?"
마지노 장군은 농민군이 후퇴하자 기분이 묘했다. 이긴 것 같기는 한데 꼭 진 것 같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는 지금 후퇴하는 농민군을 추격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적은 소수이긴 하지만 자신이 보유한 격발식 소총보다도 뛰어난 소총을 보유하고 있는 듯 했다.
최소한 그 성능이 네덜란드 소총과 비슷한 것으로 보여졌다.
"장군 추격해야 합니다. 저 놈들은 반수 이상의 병력을 상실했습니다. 지금 끝장을 봐야 합니다."
부장들은 추격을 적극 권유했지만 마지노는 결정을 내리는 데 머뭇거렸다. 그의 직감은 다가오는
위험에 대한 경종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다. 월등한 화력과 병력 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대는
완승을 거두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마지노는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 전장을 수습하고 추격을 멈추도록”
마침내 마지노는 자신의 직감에 충실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직감에 따라 손해 본 적이 없던 그로서는 이번에도 자신의 직감을 믿고 싶었다.
“마지노라는 장군은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군.”
몽블랑성 가장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통신장교가 건네주는 전황을 들으며 이길주 여단장이
아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농민군 반수 이상을 희생하면서까지 시도한 유인작전이 먹혀들지 않았기에
앞으로 더 힘든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슬 걱정이 되었다.
“장군님. 브레스트 앞바다에 대규모 함대가 출현했습니다.”
뜬금없는 보고에 이길주 여단장의 눈이 커지며, 통신장교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함대 가 브레스트에 출현할 이유가 없었다.
“뭐라고 ?”
“브레스트에 대규모 함대 출현. 이천톤급 범선 50여 척입니다.
추가 보고에 의하면 영국 함대입니다.”
“상륙함대인가 ?”
갑자기 출현한 영국 함대가 상륙함대라면 문제가 심각할 수 있었다.
50여 척이면 적게 잡아도 만 명이 넘는 병력이 승선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아닌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항로가 남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브레스트에 상륙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입니다.”
브레스트와 로리앙을 잇는 바닷속에는 항상 발틱함대 소속 대한제국 잠수함 1척이 초계를 하고 있었다.
이 잠수함은 브르타뉴반도 최대의 항구인 브레스트와 로리앙을 방어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바다로부터의 위협을 사전에 탐지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영국함대의 상륙에 대비해야겠군.
브레스트를 돌아 로리앙으로 들어온다면 큰일 아닌가 ?
발틱함대가 제때 도착해야 할 텐데 걱정이군.
부상자들 때문에 마지노가 공격시간을 늦추길 바래야 하는 건가 ?”
마지노의 침착함 때문에 일격필살의 전술이 어긋나더니 이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영국함대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발틱 함대에 지원요청을 해놓고 있었지만
시간을 맞출지 의문이었다. 전투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이길주 여단장은 신성로마제국에 퍼져있는
4361여단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다 고개를 가로 저었다.
크레타 지중해 함대 사령부
모스크바에서 돈강을 따라 아조프해와 흑해를 거쳐 크레타기지로 이어지는 대한제국 4군 통신망을 통해
지중해 함대에 출동대기명령이 하달되자, 크레타 기지 전체가 조용히 용트림을 하기 시작했다.
전략기동함대와 지중해 함대가 동시에 정박하고 있는 크레타 기지는 상주 군인만 5만이 넘는
1급 해외 기지로 성장해 있었다.
“발틱함대가 꼼짝을 못 한다는군. ”
때아닌 한파로 신항 주변이 두께 30센티미터 이상의 얼음으로 뒤덮혀 버리자,
발틱함대는 완전히 발이 묶여 있었다. 이길주여단장을 지원하기 위해 출항 준비를 하던 발틱함대는
출항자체가 취소되고 그 임무를 지중해 함대에 넘겨줘야 했다.
“전단장에게 서둘러 출항하라고 하게.”
김성일 지중해 함대 사령관은 대한제국 최초의 항공모함인 2101함을 주축으로 한,
전단을 로리앙으로 파견하는 명령서에 서명을 하고 거리 환산표를 찍어보았다.
크레타에서 가는 거리가 신항보다 천 킬로미터이상 길었다.
시속 13노트로 항진하더라도 3일 이상이 더 걸릴 수 밖에 없었다.
“2101전단이 빠지면 지중해 방어가 쉽지 않겠습니다.
터키해군에게 이점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 까요 ?”
“전략기동군 함대가 있긴 하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래도 알려줘야 겠지.
그건 기지사령관에게 일임하고, 전략기동군단에 협조 공문을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크레타기지에는 전략기동군 4개 사단병력과 전략기동군 소속 함대, 그리고 지중해함대 소속 전단과
함정, 크레타방어 사령부 육군 병력 등 총 6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략 기동군은 천군부 직속부대로 말 그대로 전략적 행동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고,
지역사령부의 명령계통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수립된 작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기에, 김성일 소장명의로 협조공문이 크레타에 주둔중인 전략군 소속 사령부에
전달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예인선이 떨어져 나갑니다.”
오만 톤급 2101함을 외항으로 예인 하기위해 2300마력 엔진을 장착한 예인선 네 척이 양 옆으로
두 척씩 붙어서 2101함이 수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물길을 잡아주고는 떨어져 나갔다.
2101함이 크레타 해군항을 빠져 나오길 기다리던 3척의 순양함과 2척의 전투함이 넓게 산개하면서
2101함에 함대 중앙에 오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로리앙으로 전속 항진”
총 6척으로 구성된 전단이 지중해 물살을 가르며 속도를 높여 최고 속도로 지브랄타해협을 행해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전단 전방에는 잠수함 3척이 주변을 초계하며 유럽함대나 터키함대의 출현을
감시하고 다녔다.
“서경120도에서 일차 변침하고, 138도에서 이차 변침합니다.
지브랄타 해협통과 후, 원형을 그리며 로리앙에 200시간 후 도착합니다.”
항해장교는 함대의 진행방향을 나타내는 직선들을 죽죽 그어대며 변침 장소와 변침 방향들을
세세히 기록해 나갔다. 이윽고 투명종이에 예상 항해도가 완성되자 측면에 걸려있는 해도를 들추어
지중해 해도 위에 겹쳤다.
“3직제로 변환한다.”
2101함장의 명령에 따라 출항을 위해 전원 대기상태에 있는 수병들을 3직제로 근무방식을 바꾸며,
비번인 장병들이 근무지를 벗어나 숙소로 돌아갔다. 고구려전단과 임무를 교대한 이래로
원거리 항해가 처음인 그들은 막연한 설레임마저 느꼈다.
대서양 로리앙 부근 해안
에드워드 허버트 제독은 50척의 범선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이끌고 리버플 항을 출항하진 나흘만에
브레스트곶을 지나 로리앙에 도착했다. 찰스 1세의 명령을 받는 이 함대는 프랑스의 루이 13세를
도와 로리앙지방을 평정하고 리스본으로 이동하여 그라나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조용하군”
주변 해역은 허버트제독의 함대를 제외하고는 텅 비어있었다. 에드몽이 함대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고, 프랑스의 함대는 지중해 툴롱과 도버해협 맞은편에 있는 칼레에 붙박혀 있었기에
허버트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에 위협을 줄만한 세력은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다.
“부관. 전 함정에 전투명령을 하달하고, 상륙준비를 한다.”
“붉은 깃발을 올려라. 발광신호”
허버트가 승선하고 있는 골든 브리지 호는 제임스 왕의 아들이 찰스 1세의 명령에 따라 새롭게 건조된
배로 만재수량 이천톤에 함포만 80문을 장착하고 승선인원이 천명이 넘는 당대 최대의 전투함이었다.
골든 브리지호에 장착된 80문의 함포는 모두 18인치 구경에 포신이 긴 포로 포탄 장전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었지만 사거리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개량된 이 함포에서 쏘아대는 포탄은
무려 3마일을 날아갔다. 대한제국 함대를 겨냥해서 개발된 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50척의 범선이 기함의 명령에 따라 전투준비를 하느라 부산을 떠는 동안, 영국함대의 밑을 조용히
지나친 0361번 잠수함에서도 전투준비에 수병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031시리즈로 61번째 건조된 0361함은 대구어뢰 10문과 피라미 15문을 장착해야 했지만
대구어뢰 대신에 작전 일수를 늘리기 위해, 소모품을 더 많이 적재하고 있었다
“먹이가 너무 많아 큰일이군”
0361 잠수함 함장은 자신의 무장에 비해 저지시켜야 할 함이 너무 많았다..
“상륙을 허용해야만 하는 건가! 부장. 피라미와 대구 발사 준비”
“잠망경 심도로”
영국함대 좌측 1킬로미터 지점에서 떠오른 잠수함에서 잠망경이 수면위로 불쑥 올라왔다.
수십 척의 우아한 범선이 가득 잡혔다. 더없이 좋은 공격 위치인 함대 좌 측방을 잡은 함장이
무장관과 연결된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1번부터 10번까지 순차 발사한다. 발사 후 급속 재장전”
“퐁퐁퐁”
9발의 피라미와 한발의 대구 어뢰가 0361함을 빠져 나와 직전으로 뻗어 나갔다.
무유도 어뢰라 하더라도 어뢰가 빗나갈 염려는 없어보였다.
그러기에는 적의 함대가 밀집대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천 톤급의 영국 범선은 피라미 한발의 명중으로는 침몰 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재장전”
선두 어뢰군이 함대로 다가갈 무렵 2차 피라미 5발을 발사한 잠수함이 잠망경심도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영국함대를 주시했다.
“3시 방향에 이상한 물체가 다가온다.”
30미터 이상 올라간 마스트에서 접근하는 함대나 위협을 탐지하던 견시병이 마스트에서 브리지와
연결된 긴 대나무 통에 입을 대고 외쳤다. 텅 빈 대나무 관을 타고 내려온 목소리가
허버트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함대 산개하라. 말로만 듣던 잠수함이 근처에 있는 건가 ?”
허버트는 출항 전, 찰스 1세가 보낸 정보문건을 기억해냈다. 대한제국이 보유하고 있다던 잠수함에
대한 정보가 자세히 적혀있던 정보문건은 이럴 경우 대처할 요령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후위함대 전속 선회하여 후진. 선두함대 전속 전진”
정보문건에 의하면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어뢰는 일부 신형어뢰를 제외하면 모두 일직선으로
움직인다 했다. 변침할 만한 거리에서 어뢰가 발견되면 충분히 회피할 수 있었다.
“좌 현포 순차 발사”
허버트는 곧 이어 보이지 않는 바다 속 적을 향해 함포 발사를 명령했다.
함대가 양분되는 와중에서도 좌 현포 발사가 가능한 함들이 순차적으로 포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미 장전되어 있던 함포들이 각기 다른 각도로 쏘아 올려져 시시각각 다가오는 어뢰와 어딘가에
있을 대한제국 잠수함을 향해 날아갔다.
“급속 잠항. 해역을 이탈한다.”
0361함 함장은 느긋하게 피라미와 대구가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포연이 보이며
영국함대에서 함포를 발사하자 화들짝 놀랐다. 두어 발씩 발사되는 함포탄이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심도 80까지 내려간다. 침로 050. 10노트”
“퐁퐁퐁”
그 와중에도 수면위로 떨어지는 포탄이 만들어낸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급격히 심도를 낮춰갔기에 잠수함이 심하게 앞으로 기울어졌다.
함장은 천정에 매달려 있는 손잡이를 붙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펑”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함이 심하게 떨려왔다. 충격으로 인해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지 매달려있는
백열등이 계속해서 깜박거렸다. 지휘실이 혼란스러웠다.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모두들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각 부서는 피해 보고 하라”
함장역시 처음 당하는 공격이었지만, 침착해야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각 부서 보고가 들려오지 않자 함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정신차려. 피해보고 하란 말야!”
얼이 빠져있던 부장이 함장의 고함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리자 심도 80을 알리는 심도계가
눈에 들어왔다.
“심도 고정”
땀을 비오듯 흘리며 잠수함의 심도를 조정하는 조정키를 잡고 있던 장교 하나가 부장의 말에
잠수함을 수평으로 만들기 위해 조정키를 급히 잡아 당겼다. 또 한번 잠수함이 요동 치더니
수평을 유지하며 안정화 되었다. 지휘실도 안정을 찾아갔다. 곧 이어 각 부서의 보고가 이어졌다.
“기관실 이상 무”
“어뢰실 이상 무”
“3번에서 8번 소리기를 잃었습니다.”
“통신실 이상 무”
급기동으로 인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소리 수집기가 파괴된 피해를 입었지만
전체적으로 함에는 이상이 없었다.
“소리실. 우리가 발사한 어뢰는 어떻게 되었나 ?”
“주변이 너무 소란스러워 추적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마를 심하게 찡그린 함장은 함 전체 통신망과 연결된 단추를 누르고 심호흡을 한번 했다.
“함장이다. 나는 바로 직전에 보여준 제군들의 행동에 심히 유감을 표한다. 대한제국 해군으로서
그중 정예라는 잠수함 장병으로서 제군들이 보여준 행태는 일찍이 내가 경험하지 못한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대한제국민의 안위를 책임진 제군들이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잠시나마 이성을
상실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물론 제군들이 처음으로 적의 공격으로 인해 당황스러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내가 느끼는 실망감과 당혹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제군들의 잘못은 곧 이 함을 책임지고 있는
나의 잘못임을 통감하며, 이 시간부로 나는 0361함이 잠수함이길 포기한다.
기지로 귀환 할 때까지 함을 부상시켜 초계임무를 수행한다.”
모든 장교들을 비롯한 지휘실 요원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부상”
“부상”
“부장이 함 지휘권을 받는다.”
“차렷. 부장이 지휘권을 인수 받습니다.”
착찹한 심정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온 함장은 불과 10분전의 상황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어뢰를 발사하자 마자, 저쪽에서 대응 포격이 있었고, 자신의 함은 해역을 이탈해야만 했다.
영국 함대에게 자신이 노출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국함대는 대한제국의 잠수함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잠망경에 보인 함대의 움직임은 어뢰를 회피하기 위한 최선의 기동으로 느껴졌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노출된 건가 ?”
“그냥 무조건 발포한 건가 ?.
고폭탄이 수중에서 터졌다는 건 영국이 고성능 화약을 개발했다는 것인데….”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던 함장이 마침내 생각을 정리하고 전투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해군에 입대한 이후 맞는 첫 전투였지만 부끄럽기 짝이 없는 보고서를 쓰려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고진영은 센 강 하류에서 최우석 일행을 기다리던 0342 잠수함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연락을
해 옴에 따라 최종적으로 최우석 일행의 실종을 확인했다. 고양이와 연락이 끊긴 지 만 이틀이
지나고 있었다.
“파리쪽에서 들어온 소식은 없나 ?”
“네. 없습니다. 제1선이 폐쇄되어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제2선이 움직이려면 아직 시간이 더 있어야 합니다.”
유럽에 흘러 들어간 그림자들은 크게 두 조직으로 나뉘었으며 제1선은 드러난 조직이고
제2선은 숨어있는 조직이었다. 제2선은 주로 상인들로 위장되어 있었고, 평소에는 본부와 접촉을
하지 않았다. 제1선이 붕괴될 경우를 대비해 만든 조직이었기에 그만큼 보안이 철저했고,
완벽한 점 조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일단 파리에 있는 2선 만이라도 가동시킬 수 없나 ?”
“아직 안됩니다. 1선이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2선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고진영은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리가 탈출에
성공하여 신항으로 이동 중이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이지만 정보 수집망을 가동 못한다는 것은
정보부서로써 존재 의미를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 흐르듯 유연하면서도 쉴 틈 없이
움직여야만 살아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작전을 입안할 수 있었다.
“로리앙 해안 50킬로미터 전방에 대규모 영국 선단이 나타났습니다.
잠수함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공격을 받고 물러났다고 합니다.”
“프랑스 군대에 증원 병력입니다. 기병 1개 연대규모. 지금 나자레 지방을 통과 중입니다.”
연이어서 좋지 않은 소식이 들어왔다.
“지중해 함대 소속 2101전단이 해군기지를 출항했습니다. 앞으로 7일 후 도착 예정입니다.
그리고 4군 사령부에서 비행장 건설 가능 여부를 타진해 왔습니다.”
“비행장을 미리 만들어 놓는 건데…. 지금 당장 어떻게 만드나 ?
전투하기도 인원이 모자라는 마당에. 그리고 일만 킬로를 넘는 비행기가 있는 있는 거야 ?”
4군에서는 신속 대응군이라도 투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로리앙에는 수송기가 내려앉을 만한 곳이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군.
잠수함이 오히려 공격을 받고 도망쳤다니. 요즘 들어 이상한 일들만 생기는 구만”
“함장의 보고에 의하면, 영국함대는 대잠수함 전투 교범을 가지고 있듯이 공격을 해왔답니다.
아울러 어뢰 회피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고진영은 통신장이 건내주는 주요 전문 필사본을 들고는 통신실을 빠져 나오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면 여단 전체를 동원해야 한다는 건데. 괜히 우리를 감추려고 고생만 했네”
전방에 프랑스 군에 후방에 영국군이라면 이제는 총력전을 펼쳐야 할 것 같았다.
당연히 대한제국 군대에 이곳에 있다는 것이 프랑스와 영국에게 노출될 것이고,
그라나다에 있는 터기군 처럼 자신들도 포위될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한창 전투 회의가 있을 특수여단 회의실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번 한 고진영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새로운 소식이라도 가져 온 건가 ?”
이길주 여단장이 회의를 주재하다 들어오는 고진영을 보며 물었다.
“네. 영국함대가 로리앙에 상륙할 거라는 보고입니다. 아울러 영국이 우리와 비슷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기병여단 하나가 이리로 추가로 오고 있습니다.”
“함대는 언제쯤 도착한다던가 ?”
“7일 후입니다.”
특수여단 참모들은 고진영과 이길주 여단장과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 표정이 어두워져 갔다. 고작 여단병력으로 이만이 넘는 대군과 최소 7일을 버텨야 했다.
“7일을 버텨야 한단 말이지. 요 근래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분명히 우리측에서 정보가 세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정보부를 책임지고 있는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조사 중이라 뭐라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만, 내부의 적이 있다는 말씀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 내부의 적이 아직까지는 우리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일선 요원들을 일단 철수 시켰습니다.”
“그렇군. 아무래도 이번 일은 힘든 일이 되겠어. 알았네 그만 앉지.
그리고 외교부 직원들 철수 계획을 세워 놓게”
“네”
천군부에 적을 두고 있지만, 고진영 소령은 말만 군인이지 하는 일은 모두 외교부산하 해외작전실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에, 이길주는 그를 작전회의에서 배석시키기는 했지만 발언권은 제한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전면에 나서야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방어전술을 대폭 수정해서
전면에 여단 병력을 배치하고 최악의 경우 몽블랑과 에드몽성 중 하나를 포기하더라도 7일을
버틸 수 있도록 병력과 보급품 운용을 해야 합니다.”
“영국군의 상륙을 허용 막을 방도가 없겠나 ?”
여단장은 상륙을 이렇게 쉽게 허용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막지는 못하더라도 희생을 강요해야만 그나마 자존심이 설 것 같았다.
“현실적으로 가용병력이 없습니다. 예비대를 투입한다 해도 일만 명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병력을 집중시켜 거점 방어를 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일당 백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부대원들 아닌가 ?
영국 놈들을 편안하게 땅을 밟게 할 수는 없어.
대대 한 개를 해안가로 보내서 최대한 피해를 요구하라고 해.”
“여단장님 ! 그러면 놈들의 경계심을 부추길 우려가 있습니다. 느슨해진 놈들을 몰아서…”’
“이미 잠수함과 한차례 교전을 펼쳤다고 하지 않았나 ? 그리고 정보가 새고 있다면 영국 놈들도
대비를 하고 오고 있을 거야. 상륙 중에 상상 못할 피해를 보게 되면 공격시간을 늦출 수도 있고,
그만큼 우리는 시간을 벌 수 있지 않겠나 ?”
여단장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에드몽성을 책임지고 있던 3개 대대 병력 중 한 개 대대가
영국함대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가와 항구로 병력을 나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가용 여단 병력이 성밖으로 나와 농민군과 합류하기 시작했다.
로리앙 항구
프랑스 평원 왼쪽에 우뚝 솟아오른 브루타뉴반도 산간에서 발원하는 스코프강의 오른쪽에 위치한
로리앙 항구는 블라베강이 합류하는 하류에 위치한 항구로 대한제국이 이곳에 손을 뻗치기 전까지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브루타뉴 반도 끝에 있는 브레스트 항구와 더불어
이 지역 최대의 항구로 성장해 있었다.
“서둘러라. 시간이 얼마 없다.”
가벼운 차림으로 에드몽 성을 나선 4161 특수여단 7대대 3중대 병력이 항구로 들어오는 영국함대가
보이자 말에 채찍을 가했다. 이미 항구는 이미 폐쇄되어 있었고, 에드몽의 명령을 받는 일부 수비군이
돌아다닌 것을 제외하면 상주인원 일만 명 이상이 거주하던 항구 주변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3소대는 탈출로를 확보하고, 나머지는 산개해서 명령을 기다린다.
030지점에 4중대가 접근하니 오인사격을 각별히 주의하라”
3중대장은 영국함대가 항구에 배를 대고 병력을 내려놓기 전에 목 지점을 먼저 점거할 요량이었다.
중화기가 없는 그들로서는 일단 적 함포를 엄폐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흩어지기 시작했다.
3중대와 4중대가 항구를 일시적이나마 방어하기위해 방어 거점을 확보하는 사이,
7대대 1중대와 2중대 병력 이백 여명 역시 로리앙에서 남서쪽으로 1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해안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다가갔다.
“부대 정지”
“이미 상륙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략 20여 척이 바다에 떠있고,
수백명의 사람들이 해안가에 모여 있습니다.”
앞서 정찰을 보냈던 정찰대에서 정찰 보고를 해왔다. 영국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예초에 계획했던, 참호를 파고 기다린다는 작전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선임 중대장인 1중대장은 2중대장을 바라보며 어떻게 할지를 눈빛으로 물어보고 있었다.
“선배님. 일단 도보로 이동해서 상륙해 있는 놈들을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2중대장 서일영 대위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자 1중대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말에서 내린 병력이 말들이 조심스럽게 해안가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허버트 제독님은 너무 조심성이 많아서 흠이라니까 ?”
해안가로 다가가는 종선들을 바라보던 육군 부 사령관 에식스 백작이 홍차를 마시며 주변 해안을
주시했다. 주변에 아무런 위험도 감지되지 않는다는 일차 상륙군의 보고가 올라와 있었고,
그의 눈에도 주변은 평온하기만 했다.
허버트 제독은 자신에게 먼저 이곳에 상륙하여 로리앙 항구로 진입해 올 것을 명령했다.
행여 에드몽이 병력을 항구에 집중배치해서 자신을 공격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에식스에게 양공을 펼치도록 한 것이다.
“마지노 장군을 막기도 급급할 촌놈들이 대영제국에게 신경 쓸 겨를이라 있을까 ?
소문대로 대한제국군이 있다면 또 모르지만.”
2차 상륙병을 내려놓은 종선들이 해안가를 떠나고 있었다. 한번에 10명을 해안가로 이동시키는
종선이 느릿느릿 자신이 타고 있는 메이 로즈호에 다가왔다. 해안에는 벌써 700명이 상륙을 마치고
로리앙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발대를 먼저 보내고, 상륙을 서둘러라. 난 다음 종선을 타고 하선하겠다.”
홍차를 다 마신 에식스 백작은 그만 메이 로즈호를 떠나고 싶었는지 상륙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하선하겠다는 . 울렁거리는 배위보다는 맨 땅위에 발을 딛고 서있는 것이 더 익숙한
에식스 백작이었기에, 가능하면 빨리 배에서 내리고 싶었다.
“테일러 ! 병사들을 한 줄로 세워라. 언제라도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조금 있으면 연대장님께서 내려오신다. 그전에 주변을 정리해”
“네. 알겠습니다.”
“여기 이것 저리로 옮겨. 그리고 너.너.너. 부대 깃발을 들어라.”
살이 퉁퉁하게 오른 테일러는 모래밭을 힘겹게 걸어 다니며 사병들을 윽박질렀다. 영국군이 생긴
이래 최초로 통일된 군복을 입고 있는 상륙군은 자신의 부대 깃발이 움직임에 따라 서둘러 정렬해
나갔다. 테일러가 군기를 바닥에 내리 꽂자. 700명의 인원이 순식간에 대오를 정렬했다..
“이쯤에서 공격 하는 것이 ?”
“좀더 끌어 올리는 게 좋지 않겠나 ? 너무 일찍 공격하면 우리 위치만 노출되고 함포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는데….”
“아닙니다. 벌서 이동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더 기다리다가는 공격 시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아니야. 아직 말들이 내려오지 않았다.
자네는 설마 말도 없이 영국군이 움직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무전기를 통해 1중대장과 2중대장이 작은 목소리로 해안가에 몰려있는 영국군을 공격할 시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상륙초기의 어수선함을 정리하고 이동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옵니다. 말을 실은 종선이 다가옵니다.”
각기 말 한필씩을 실은 종선들이 해안가로 서서이 다가오는 것이 망원경에 들어왔다.
어림잡아 10여마리가 한꺼번에 수송되고 있었다. 다른 종선에는 영국군들이 가득차 있었다.
“좋았어. 1중대는 말을 실은 종선이 사거리에 들어오면 바로 공격에 들어간다.
때를 맞추어 2중대는 해안 병력을 공격한다.”
공격명령이 중대에게 전달되자 대원들이 완벽한 공격을 위해 숨을 죽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영국군은 태평하게 장교들을 태울 말들이 해안가에 오기만을 기다리며
바다쪽을 바라보았다.
“테일러 중대가 먼저 움직인다.”
정시명칭 프랑스 원조군 육군 1 대대장인 페어팩스는 먼저 테일러 중대를 로리앙으로 출발시켰다.
이동 명령을 받은 테일러는 자신의 중대 2/3지점에서 중대원들에게 우렁차게 소리쳤다.
“중대 어깨 총”
200여명의 중대원들이 일사분란하게 긴 총을 어깨에 매었다. 대한제국 소총을 모방하여 윈스턴이
개발한 이 소총은 연발 사격능력은 없었지만, 후장식 장전에 근대적 총탄을 사용하여 능숙한 사수라면
발사속도가 1분에 15발도 가능했다. 케플러 소총이나 아돌프 소총보다는 한 단계 진일보한 윈스턴
소총은 화승총이나 바퀴식 소총병들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녀야 할 화약주머니나 총알, 거푸집,
그리고 화약을 다질 때 사용하는 총대등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기에, 영국군 총병들의 몸은
다른 나라 총병에 비해 한결 자유로웠다.
“1소대 앞으로 가”
“2소대 앞으로 가”
테일러의 명령에 따라 차례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소대간 간격 100미터를 유지하며 3소대가 움직이자 테일러 역시 발걸음을 떼었다.
“4소대 앞으로.”
“탕. 타타타앙”
“적이다. 산개하라”
4소대를 출발시키려던 테일러의 명령이 끝내기 직전, 매복해 있던 대한제국 저격병이 테일러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머리가 반쯤 날아간 테일러의 통통한 몸이 앞으로 쓰러지며 멍하니 서있던 3소대원들
앞으로 굴렀다. 곧 이어 날아온 총탄들이 꼿꼿이 서있던 테일러 중대원들을 휩쓸었다.
“엎드려라. 응사하라
페어펙스 연대장은 뭍으로 올려진 보급품들 사이로 몸을 숙이며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한 차례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제각각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기며
대응사격에 나섰다. 한숨을 돌리던 페어펙스는 급히 손거울을 꺼내 함대에 함포 지원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종선에 내리려던 에식스 백작은 난데없이 해안가에서 총소리가 들려오자 크게 놀랐다.
“함포 사격”
“당당당당당”
내항으로 진입해 가던 허버트 제독은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자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해안가로 상륙하고 있는 에식스 백작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이어서 총소리보다도 분명한 함포소리가 들려왔다.
“펑펑펑”
“공격하고 있는 건가 ? 공격 받고 있는 건가 ?”
망원경으로 항구 구석구석을 살피던 허버트 제독은 에식스 백작이 처한 상황을 알 수 없어
답답해 했다. 분명한 것은 에식스 백작이 함포를 쏘면서 까지 대응해야 할 적이 해안가에
나타났다는 것이고, 이곳에도 보이지는 않지만 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함포 준비.”
“부두를 파괴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안쪽 건물에 포격”
허버트는 혹시나 건물 주변에 숨어있을 적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함포 공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정도 안전한 거리가 확보되었을 때에 배를 접안 시키고 병력을 하선 시킬 생각이었다.
“햄스턴 대대 하선”
포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허버트는 정찰대대를 내보냈다.
대대병력이 종선으로 옮겨 타고 노를 저으며 천천히 항구로 나가갔다.
“아예 도시를 불태워버릴 작정인가 ?”
함포 사거리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7대대 3중대와 4중대 병력들이 함포사격에 산산조각 나는 건물들을
바라보며 두 눈을 반짝거렸다. 차근차근 함포를 쏘아대며 접근하던 영국함대가 하나 둘씩 부두에
접안하기 시작했다. 먼저 항구로 올라온 햄스턴 대대병력이 주변으로 흩어지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항구 수비군들을 찾아 다녔다.
“좌측 35명. 우측 23명”
3중대장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중대원들의 보고를 들으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영국군을 결코 만만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대로 군사교육을 받은 행태를 보여주는 영국군들은 건물들을 하나씩 수색하며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전 소대장들은 지금부터 30분간 공격을 지속하고 080지점으로 후퇴한다.
섣불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적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상”
햄스턴이 이끄는 정찰 대대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사이 제일 먼저 부두에 접안한 샤먼 프라임호에서
기병들이 말을 타고 내려왔다. 하선을 마친 기병연대가 연대장 주니어 베스경이 내려 오기만을
기다리며, 사방에 경계를 눈초리를 날리고 있을 때, 대한제국군의 일제사격 총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타앙타앙탕탕탕”
햄스턴 대대에서 발사 한 것으로 보이는 윈스턴 소총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항구 시내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듯 했다.
“연대 차렷”
주니어 베스경이 화려하게 치장된 말안장 위에 몸을 얹고 조심스럽게 샤먼 프라임호를 내려왔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말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지 연신 앞발을 땅에 긁어댔다.
“햄스턴 대대를 지원하며 신속하게 주변을 정리한다.
오늘 중으로 에드몽성 앞까지 진격할 수 있도록 진격로를 개척한다.”
“드드드”
주니어 베스경이 앞으로 천천히 이동하자, 연대가 대대별로 나뉘어지며 각자 맡은 지역을 접수하기
위해 흩어졌다. 주니어 베스 연대장은 30여기의 호위를 받으며 중앙으로 달려가고 있는
헌팅턴 대대 뒤를 쫓아갔다.
“전방에 기병 출현”
“숫자는 ?”
“대략 300기. 좌측방에도 동수의 기병 출현”
각개 전투에 여념이 없던 4중대장은 전면을 공격하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기병출현을 보고
하자 예정보다 빠르게 후퇴명령을 내렸다. 자칫 고립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전 중대원들은 서둘러 080지점으로 후퇴하라. 3소대는 대기병 장애물을 서둘러 설치하고 대기”
조국민 중사와 이일환 하사는 이층 목조건물 창가에서 골목길로 들어서는 기병들을 향해 총탄을
연신 퍼부었다.
“탕탕”
정조준 사격으로 인해 한발이 발사될 때마다 영국군이 말 위에서 떨어져 내렸지만, 몰려오는 적이
두명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영국군이 발사한 총탄이 벽을 뚫고 들어와 반대편에 박혔다.
“이하사 그만 후퇴하란다.”
“벌써 말입니까 ?”
“그래 그만 가자”
공격을 시작한지 겨우 15분이 지났지만 중대장의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그만큼 상황이 어렵게 전개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서둘러. 수류탄 까고 바로 후퇴한다.”
이하사와 조중사는 서둘러 수류탄을 던지고 영국 기병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골목으로 나와
모퉁이를 돌았다.
“헉”
조중사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새로운 기병대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영국군 역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자 놀라는 눈치였지만 서둘러 윈스턴 소총을 들어올렸다.
“이하사 조심해”
조중사의 경고보다 먼저 총탄이 날아왔다.
미처 적을 발견하지 못한 이하사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타타타타타”
자동으로 탄창하나를 다 비워버린 조중사가 서둘러 이하사에게 다가갔지만
이미 이하사는 숨이 끊어져 있었다. 자신의 부사수이자 든든한 엄호벽이었던
이하사가 허무하게 죽어버리자 조중사가 거의 이성을 상실했다.
“다 죽어”
이하사 총과 자신의 총을 양손으로 잡은 조중사가 연신 사격을 퍼부었다.
“퍽”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총탄이 조중사 등을 뚫고 척추를 지나 허파에 박혔다.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썩은 짚단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주변에서 들려오던 총소리가 자자 들었다.
항구가 허버트 제독이 이끄는 영국군에게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단기3959년(1626) 에드몽 성
특수여단 3개 대대가 머물고 있는 에드몽 성에는 비상이 걸렸다. 7대대 병력이 소수의 병력 손실을
입고 무사히 후퇴해오긴 했지만, 항구에 들어갔던 중대장들의 전투보고를 전해들은 여단 작전 참모이며
임시로 3개 대대를 이끌고 있는 한상민 대령은 걱정이 앞섰다. 자신에게 다가올 일만 명의 영국군은
녹녹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병대에 포병대를 갖춘 완편 사단급이라.”
“저희는 이런 정규전에 투입되면 불리합니다. 그리고 사령부에서도 여차하면 에드몽 성을 버릴
생각이지 않습니까 ? 차라리 중대별로 흩어져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7대대장은 영국 함대의 함포를 직접 겪어보았기 때문에 수성 전을 펼친다는 것이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수여단에는 이렇다 할 포병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적이 성을 포위하고 포격만 해댄다면
자신들은 온몸으로 떨어지는 포탄을 맞아야 했다. 여단이 보유하고 있는 몇 문의 60미리 박격포나
12.5미리 기관총으로는 영국의 함포를 당해낼 수 없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우리가 여기서 몇일 만이라도 영국군을 막고 있어야 빌라봉 성에 가해지는
압박을 줄일 수 있어. 이곳은 배후에 산지가 있으니 여차하면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빌라봉은 평지에 세워져 있어서 고립되면 가망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영국군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
한상민 대령은 7대대장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7일을 버틸 묘안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눈총이
7대대장에게 쏘아졌다.
“빌라봉 성과의 교통로 확보에 병력을 배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후방에 적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방어막을 형성하고, 일부 병력이 이곳에서 수성전을 펼칩니다. 이곳은 너무 좁기 때문에
많은 병력을 밀집 시켰다가는 적 포병세력에 괴멸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이 이곳을 지나쳐 바로 빌라봉 성으로 가면 어쩔 셈인가 ?”
“그렇게 되면 우리가 영국군 포병대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영국군에게서 포병대만 제압하면 7일이
아니라 한 달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호되게 당했으니까 이곳을 그냥 지나칠리
만무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한상민 대령은 7대대장의 말이 옳게 느껴졌다.
다른 대대장들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좋아.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는 것 같으니 7대대장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도록 하지.
7대대는 빌라봉 성과 연결되는 교통로와 에드몽 성의 배후를 책임지고 방어하도록.
그리고 5대대는 수성전을, 3대대는 후퇴를 맡는다. 3대대는 항상 말을 타고 대기하도록.
그리고 에드몽 영주에게 빌라봉 성으로 옮기시길 권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한민족은 수성전에서 최고라는 명성을 쌓아 올렸다.
우리가 비우지 않는 이상 적들은 결코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모두들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해산”
영국군을 맞이하기 위해 1200명의 대한제국군이 에드몽 성에서 전열을 가다듬을 무렵,
모든 병력을 순조롭게 상륙시킨 허버트 제독 역시 에드몽 성을 공격하기 위해
영국군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대한제국군이 분명합니다. 복장은 이곳 촌놈들처럼 하고 있지만 얼굴생김새나 소지하고 있는
무기들로 보건 데 이 사체는 대한제국 군인입니다.”
항구 전투에서 사살된 적병의 시체를 살펴보고 온 주니어 베스가 허버트 제독에게 전투 보고를 하는
동안 에식스 백작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구두 끝만 바라보았다.
“햄스턴 대대는 거의 대부분 전투력을 상실했고, 해안가로 상륙하던 페어팩스 연대 중 절반이
전투력을 상실했습니다. 겨우 30여분만에 사망자는 238명, 부상자 850명이라는 믿지 못할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가 사살한 적은 12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알겠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적을 효과적으로 물리쳤다는 것이고 로리앙 항구를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는 거야. 부상병들을 격리 치료하고, 함포를 끌어내려 내일 부대를 이동시킬 수 있도록
하게. 마지노보다 우리가 월등히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
허버트제독 역시 생각치 않은 매복에 병력손실이 컸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구태여 그런 것을 들춰내어 군대 사기를 저하시킬 필요가 없었다.
원정 초기인 지금은 첫 단추가 잘 꿰어졌다는 것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빌라봉 성
마지노 장군은 한차례의 격돌에서 생긴 부상병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왔다. 군대에서 부상자는
사망자보다 확실히 귀찮은 존재였다. 한 명의 부상자는 두 명의 온전한 사람의 행동을 제약했고,
심리적인 파급효과는 미루어 짐작할 수 없었다.
“장군님. 파리에서 통지문이 왔습니다.”
리슐리외가 보낸 통지문을 부관이 들고 왔다.
마지노 장군이 손을 내밀자 부관이 공손이 돌돌 말아진 통지문을 건넸다.
“부상자들 때문에 진영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클레르몽 기병 연대가 머지않아 도착합니다.”
“그래 ! 그나마 다행이군. 부상자들은 주변 마차들을 징집해서 르망으로 보내버려.”
매듭을 풀어서 통지문을 다 읽은 마지노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관에게 그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아주 웃기는 군. 대 프랑스 영토에 영국 놈들이 들어왔단 말이지. 그것도 루이 13세의 요청으로….”
이 지역 야전 사령관인 자신에게는 사전 언급도 해주지 않고, 타국 군대와 협조하여 로리앙 지방을
빠른 시일 안에 접수하라는 리슐리외의 편지를 받은 마지노는 심정이 복잡했다.
은근히 리슐리외는 영국군보다 먼저 에드몽의 신변을 확보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다음날 아침 클레르몽 기병 연대가 많은 보급품과 함께 마지노 진영에 도착하자,
모처럼 프랑스 군 진영에 생기가 감돌았다. 한쪽에서는 부상병들을 실은 마차들이 줄을 이어
르망으로 출발하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빌라봉 성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영국 놈들이 왔답니다. 우리가 그놈들에게 뒤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오늘 중으로 빌라봉 성을 공격해서 함락 시키고 바로 에드몽 성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
클레르몽은 자신만만했다. 그는 얼마 전에 센 강에서 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적이 있었기에,
대한제국이든 에드몽 촌놈이든 두렵지가 않았다.
“좋지. 클레르몽 자네가 먼저 선봉을 서겠나 ?”
마지노의 말에 클레르몽의 입이 실룩거렸다.
공성전에 기병대를 선두에 세운다는 것은 가서 죽으라는 이야기와 똑 같았다.
“왜 ? 싫은가 ? 빌라봉 성은 성벽이 10피트도 되지 않아서
자네 기병대가 뛰어 넘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안 그런가 ?”
“맡겨만 주신다면 선봉에 서겠습니다.”
계속되는 마지노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마음이 상한 클레르몽이 객기를 부리며 앞으로 나서자,
주위에 있던 연대장들의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하하하. 농담이었네 ! 하지만 지금은 자네의 그 무모하기까지 한 마음가짐이 필요한 때야.
모두들 오늘 야간에 공격할 준비를 하고 대기하도록.
여기 모인 부대장들은 오늘 밤 클레르몽 연대장 같은 용맹함을 보여주기 바란다.”
마지노 장군은 클레르몽의 만용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부대가 오늘 밤 공격에서는 꼭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기병대를 공성전에 투입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성벽이 10피트도 되지 않는 다는 장군님의 말씀이 사실이었군 !”
클레르몽은 빌라봉 성이 보이는 곳까지 다가가서 성벽의 높이를 어림잡고 있었다.
마지노 장군의 말을 들었을 때는 설마 하는 심정이 있었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약간 높은 지지대만 있으면 진짜로 성벽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너무 들어왔습니다.”
마지노 장군이 클레르몽에게 보내준 연락관 겸 안내인인 폴 중대장이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클레르몽에게 그만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클레르몽은 대범하게도 빌라봉 성에서 불과 4-5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해가 중천입니다. 서둘러 가셔야 공격회의에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 저 성을 누가 만들었다고 했지 ?”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작전회의에 늦거나 빠질 수는 없었다. 말머리를 돌리며 클레르몽이
폴에게 빌라봉 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다.
“들리는 말로는 에드몽이 직접 설계하고 만들었다고 합니다만, 대한제국의 기술이
들어갔으리라 생각됩니다. 일찍이 유럽에서는 보이 힘든 성이지요. 건축물이 예술에 가깝습니다.”
“그렇군. 일반 상식으로 공격해 들어갔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겠어 !”
빌라봉 성은 그 성벽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공략이 쉽지 않았다. 원형의 이중 성벽에 특이한 팔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빌라봉 성은 모서리가 8개가 비뚤어져 나와 있고, 각각의 모서리에는 망루가
만들어져 있었다. 모서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한쪽 면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다른 쪽 면도 동시에 공격해야만 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입구가 좁아져 일시에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설사 외벽을 점령하더라도 공격군은 내벽을 또다시 넘어야만 했다.
해가 서산너머로 자취를 감추자, 정찰대원 들이 여덟 개의 성문을 나와 팔방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경계초소에 투입되는 병력들이 빠른 걸음으로 빌라봉 성을 빠져 나와
각자 담당하고 있는 초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밤도 무사히 넘어가려나 ?”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면 앞으로 5일만 버티면 희망이 보였다. 최성일이 참호 덮개를 치우고는 안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뱀 같은 것들이 들어 있지 않나 참호 안을 살펴 보던 최성일은
시계를 보았다. 시침과 초침이 오후 7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모를 일이지요. 아침에 기병 연대 하나가 적진에 추가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내일 중으로 공격해 오지 않겠습니까 ?”
“재수 없는 소리 그만 하고 뚜껑 닫아”
최성일이 겨우 한 사람 들어가는 참호에서 자리를 잡자, 무안해진 박대일이 참호 뚜껑을 닫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저는 그만 가겠습니다.”
빌라봉 성에서 3킬로미터까지 전진 배치된 이들은 경계 임무와 함께 적이 야습해 올 경우
후퇴하는 적을 기습 공격하거나 혹시 이곳까지 끌고 올지도 모를 포대를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기 위해 참호는 유개호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덮개는 두꺼운 판자로 만들어졌고
그 위는 흙으로 덮였다. 최성일을 땅에 묻고 대략 800미터를 뒤로 물러난 박대일이
자신의 무개호 들어가 소총을 옆에 놓고는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오늘 밤도 무사히 넘어가야 할 텐데…”
최성일 했던 말을 되 내이던 박대일은 앞으로 3시간 동안을 혼자 지내야 했다.
병력이 모자란 대한제국군은 경계병력을 많이 풀 수 없었기에 2인 1조로 운영되던 경계병 수를
나누어 한 명은 매복하고 다른 한 명은 경계근무를 서도록 했다.
그것도 규정 2두시간을 한시간 초과한 3시간 말뚝을 서야 했다.
‘뭐지’
잠을 자면서도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던 최성일은 주위 땅을 울리는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땅이 조심스럽게 울려대고 있었고,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참호 뚜껑 틈새로 흙들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접근한다’
정신을 바짝 차린 최성일은 박대일과 연결된 무선 송신기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톡톡톡. 톡톡톡”
“톡톡”
몇 번을 두드리고서야 저쪽에서 답이 들려왔다.
이상 징후를 알리는 암호가 오가고 저쪽에서 감지했다는 확인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가 벌써 자고 있는 거야 ?’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없던 최성일은 한참 후임인 박대일이 그새를 못 참고 잠이 든 지 알았지만
이내 시계를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시계는 벌써 새벽으로 가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박대일은 침대 위에서 대자로 뻗어 있을 시간이었다.
“비상이다. 비상”
박대일은 자신의 구둣발을 힘껏 차며 외치는 소대장의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이 시간에 비상이라면 한가지 밖에 없었다. 서둘러 자신의 총과 총대를 챙긴 박대일은
모자를 눌러쓰고 자신이 맡고 있는 8번 망루를 향해 달려갔다.
“꽈 광, 꽈광”
적들이 쏘아대는 포탄이 곳곳에 떨어지는지 포성과 함께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젠장. 최성일 상사님에게 아무일 없어야 할 텐데’
본 박대일은 묻고 온 최성일이 걱정되어 8번 망루 밑에서 벌판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 프랑스 보병들이 공지선을 넘어 몰려들고 있었다.
“박대일 하사. 빨리 올라와라”
“네.”
사다리에 오른 박대일이 손발을 급히 돌려 망루에 올라섰다.
먼저 올라와 있던 장경재 중사가 기관총 손질을 마치고 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떨리나 ?”
“아닙니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누군가 ? 4군 최강 4161여단이 아니냐.
저기 오는 놈들은 식은 죽 먹기다. 겁먹지 말고 차분히 명령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네 알겠습니다.”
장경재와 박대일이 차분히 공격 준비를 마치고 사령부에서 공격명령이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도 포탄이 떨어져 내렸다. 아직 조명탄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외벽에 달라붙은 여단 병력은
달빛에 의존하며 눈을 적응시켜 나갔다.
“300미터까지 접근했습니다.”
이길주 여단장은 팔짱을 낀 채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전황보고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지금 마지노는 모든 방향에서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100미터까지 기다린다. 처음 일분의 전투에서 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이길주를 비롯한 여단 지휘부는 빌라봉 성에 있는 모든 무기와 인력을 동원에 지금 달려드는 적들에게
큰 거 한 방을 먹이려 하고 있었다. 이길주는 빌라봉 성의 구조를 믿고 있었다.
이런 구식 공격에 결코 무너질 성이 아니었다.
“펑 펑 펑”
박격포에서 쏘아져 올린 조명탄이 꼬리를 물고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은
천 이백 여명의 여단 병력과 농민군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활과 석포까지 동원된 집중된 공격을
받은 프랑스군의 선봉이 일시에 무너지더니, 들판에 시체를 가득 남겨놓고 썰물처럼 뒤로 물러났다.
“성벽이 그대로군. 포대를 500미터 앞으로 이동. 한곳에 모아 집중 포격한다.
포대를 5렬 종대로 배치하라. ”
적의 방어력을 확인하기 위해 실시된 1차 공격에 투입된 일천명의 병력을 서둘러 후퇴시킨 마지노는
클레르몽이 끌고 온 야포와 자신이 보유한 포대를 한 곳으로 모았다. 빌라봉 성을 빙 둘러싸고 포격을
실시하던 포대가 7번과 8번 사이의 외벽과 성곽을 공격하기위해 이동하는 사이 최성일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보병대가 이쪽을 집중 공격하는 사이 클레르몽경은 반대쪽을 타고 넘어가게.
지지대면 충분히 성벽을 뛰어 넘어갈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은 빌라봉 성에서 맞이하겠군요”
“그렇게 되겠지”
클레르몽의 기병연대가 본대를 떠나고, 포대가 포격준비를 마치자 마지노는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밤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근 한시간 동안 부대를 정비한 마지노는 제2차 공격을
명령했다. 전 부대원을 동원한 이번 공성전에서 그는 기필코 성벽을 뚫을 생각이었다.
“공격”
마지노 장군의 짧은 명령에 포성을 시작으로 보병들이 사다리와 공성기를 앞세우고 앞으로 천천히
이동해 갔다. 일제 포격이 7번과 8번 모서리를 집중적으로 때리자, 외벽이 차츰차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7천에 가까운 병력이 쇄도해 들어왔다.
“개미떼처럼 몰려온다. 지원 바란다.”
6번과 7번, 8번 구역을 맡고 있는 1대대 대대장은 정면으로 몰려드는 프랑스군을 저지하면서
연신 지원 요청을 외쳐댔다. 연속되는 포격에 직격탄을 맞은 모서리 망루가 무너져 내렸고,
외벽의 일부가 무너져 외벽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예비대 투입. 1대대에게 버틸 때까지 버티다 내벽으로 철수하라고 하고 적 포대 공격을 지시해”
마침내 여단장이 예비대 투입을 결정하자, 성 중앙에 집결해 있던 6대대 병력이 1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아울러 땅속에 숨어있던 요원들이 잠망경으로 주변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땅 위로 올라왔다.
“지정된 통로로만 움직여라. 자칫 오인 사격을 받을 수 있다.”
6대대장은 병력을 분산하기에 앞서 대대원들에게 주위를 주었다. 야간 전투에서는 항상 오인사격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았기에 빌라봉 수비군은 지원로와 퇴로가 미리 지정되어 있었고,
다른 길은 폐쇄되거나 농민군들의 매복이 있었다.
“이동 대기 명령이다.”
외벽 모서리 2번 3번 4번을 맡고 있는 2대대장이 전 중대원과 연결된 무전기를 들고 사령부에서
내려온 이동 대기 명령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예비대인 6대대를 투입하고도 외벽이 무너진 곳을
방어하기가 어려운지 사령부는 공격이 없는 반대편 병력을 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병력은 교통로 집결해 양 옆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치고 보고하라.”
성 중앙을 지나가는 것 보다는 거리가 약간 멀었지만 외벽 안쪽으로 난 이동로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더 용이해 보였다.
“공격준비”
클레르몽은 연대병력에게 공격 준비명령을 하달하고 시간을 조율하고 있었다.
마지노 장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지 성 반대편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지대 앞으로”
사선으로 만들어진 높이 2.5미터, 길이 4미터의 지지대가 말 2필에 이끌려 앞으로 천천히 나왔다.
보병 공성전에 쓸려고 만들어진 지지대가 기병용으로 전용되어 대한제국군의 후위를 강타하기 위해
돌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격”
20여개의 지지대 뒤를 따라 기병대가 거리를 빠르게 좁혀갔다. 클레르몽은 돌격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말 안장에서 라이플 한정을 꺼내 들었다. 보통 세 자루의 라이플을 가지고 다니는
그의 기병대는 각각 머스켓 한정도 소지하고 있었다.
“뭐야 ? 무슨 소리야 ? 망루 뭐가 보이 나 ?”
2대대장은 갑자기 사방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리자 망루를 급히 호출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앗, 뭔가 빠르게 다가옵니다.
기병대입니다. 수천이 넘을 것 같습니다.”
“대대 전투 배치. 대대 전투배치”
대대장의 갑작스런 명령에 이동 준비를 위해 부산히 움직이던 대대원들이 쌓던 짐을
다시 풀며 사격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사이에 지지대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딱다구리 ! 옹달샘 나와라”
“옹달샘 ! 딱다구리 말하라”
“우리는 공격 받고 있다. 전방에 다수의 기병대 출현. 외벽을 넘을 것 같다.
조명탄 지원 바란다. 대대 자유 사격.”
사령부와 교신와중에 대대에게 사격명령을 내리고 있는 대대장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여단 지휘부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연이어 총소리가 들리며 고함소리가 들렸다.
“막아라. 적이 외벽을 넘어온다”
“딱따구리 ? 딱따구리 ?”
지휘부 통신병인 연신 딱따구리를 부르고 있었지만 응답이 없었다.
이길주 여단장이 박격포 반과 연결된 직통 수화기를 들었다.
“여단장이다. 지금 당장. 딱다구리 머리 위에 조명탄을 날려라”
“네. 알겠습니다.”
여단장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당황한 눈빛이 역력했다. 지금 2대대가 맡고 있는 주변이
어떤 상황인지 먼저 확인을 해야 했다. 한참이 지나자, 딱따구리와 통신이 연결되자 지휘부는
더욱더 당황하기 시작했다.
“적 기병이 지지대를 외벽에 대고 곧바로 외벽으로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수류탄을 써서 막고는 있지만 워낙 많은 수가 밀려들고 있어서 막기 어렵습니다.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 주십시오.”
“적의 규모는 ?”
“연대급입니다.”
“알았다. 잠시만 막고 있어라. 내벽으로 이동해도 좋다.”
이길주 여단장은 지도가 펼쳐진 곳으로 눈을 돌렸다. 적의 주공은 1대대와 6대대의 정면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2대대 앞의 적 기병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원형 방어진에서 한쪽이라도 뚫리면 방어진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디스크 잘 고치는 병원 아시는 분 있습니까 ? ///
요즘 허리 아파서 미치겠습니다.
종로 6가에 있는 용하다는 한의원에 갔었는데
아무래도 신통치 않은 것 같습니다.
강삼호에 대한 앞으로의 일이 궁금하시죠 ?
저도 궁금합니다.
17세기의 유럽의 기술력을 과대평가한 것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었습니다만, 전 오히려 우리가 과소평가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그들이 축적한 연금술 지식이면 충분하리라 보는데요 ??
-------------------- 전하는 말씀이었습니다. ------------------
“지금 가용병력은 ?”
“사령부 본부 중대가 유일합니다. 4대대 일부 병력이 지금 소규모 접전을 벌이고 있어서
한 개 중대는 빼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4대대는 내버려 둬. 통신병과와 경계병력 한 개 소대만 남겨놓고 모든 본부 중대원을 2대대
방어구역을 보내. 서둘러. 1시간만 막으라고 해”
이길주는 가용병력 모두를 쏟아 부으며 수성전에 임하고 있었다.
“여단장님 ?”
“또 뭔가 ?”
통신장교가 자신을 부르자 여단장이 고개를 홱 돌렸다.
또 다른 방향에서 공격이 시작된 건 아닌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에드몽 성을 버린다는 전문입니다. 한상민 대령을 비롯한 병력이 산속으로 들어가
지연전을 펼친다는 전문을 끝으로 통신이 끊어졌습니다.”
“그래. 그나마 오래 버텼군. 젠장. 에드몽 영주는 ? ”
“모르겠습니다. 한상민 대령과 같이 움직이리라 생각됩니다.”
“고집불통”
에드몽은 빌라봉 성으로 옮기라는 한상민 대령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에드몽 성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부인을 비롯한 자식들은 브레스트에 있는 안가와 처가로 일찍이 보냈지만,
자신만은 영지를 떠나길 거부했다. 자신의 영지에서 이렇게 쉽게 떠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살며시 내민 최성일이 자신의 망원경을 장착하고,
소총에 탄창을 끼웠다. 적지에서 혼자라는 것이 약간 불안했지만
적 후방을 교란시키라는 명령을 수행해야만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가 은신해 있던 참호 옆에 포대가 위치해 있어서 표적은 많았다.
표적들은 환하게 횃불을 켜놓고 있어서 조준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최성일은 포대를 공격하지 않고 포대를 등지고 돌아섰다.
빌라봉 성으로 달리고 있는 적 보병들의 뒷모습이 총에 장착된 망원 조준경에 선명히 들어왔다.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조명탄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기에 외벽 주위는 충분한 시야를 제공하고 있었다.
포병대쪽으로 발사광이 보이지 않도록 은폐를 한 후 천천히 조준을 시작했다.
“탕. 탕. 탕.”
그의 최초 사격 후,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대원들도 사격을 시작했다. 안정된 사격자세와 확보된
시야로 인해 최성일은 총알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20발들이 탄창을 갈아 낀 최상사가
사격을 계속할 때까지 적들은 자신이 어디서 공격 받는지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부관.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
외벽을 넘어 교두보를 확보해 나간다는 전선의 상황을 보고 받던 마지노는 가까운 곳에서
연이어 총소리가 들려오자, 지휘 막사 밖에 있는 부관을 급히 불러들였다.
“포병대가 공격 받고 있습니다.”
부관보다 먼저 들어온 근위대 대장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지휘막사를 철통같이 경비하는 임무를
막고 있는 근위대 소속 기병들이 제일 먼저 공격 받는 것을 감지하고 비상을 걸었다.
“꽈과광”
곧 이어 쌓아놓은 포탄들이 유 폭을 일으켰는지 굉음이 들리면서 파편을 사방으로 날렸다.
파편이 종대로 모여있던 포병대를 휩쓸며 포병과 야포들을 덮쳐갔다.
후미에서 갑자기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성 내로 진격하던 보병인 마르셀이 일순 멈칫거렸다.
“피우웅”
고개를 뒤로 돌리려는 찰라, 왼쪽 귓가를 스치듯 날아가는 총알이 만들어내는 파공음이 달팽이관을
흔들어 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인 마르셀은 귓가가 따끔거려 손이 저절로 왼쪽 귀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포대가 하늘높이 날아가는 모습과 그보다 조금 앞쪽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반짝일 때마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적이 뒤에도 있다.”
마르셀이 소리쳤지만,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연대병력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동료들이 등뒤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맞고 쓰러져갔다.
“뒤에도 적이 있다.”
앞으로 한참을 앞질러 나간 마르셀이 있는 힘껏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마르셀이 외치는 소리는
돌격부대를 순식간에 술렁이게 만들었고 마침내 대대장이 나팔수를 불러 돌격 중지 나팔을 불게 했다.
대대를 이끌고 있는 자크리 남작은 뒤를 돌아보며 경악했다.
“이럴 수가”
후미에서 따라오던 한 개 대대 병력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야금 야금 꼬리를 잘라가던 최성일은 적이 방향을 바꿔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탄을 세어 보았다.
“탄창이 3개나 남았네 ! 이백 명이라. 지옥에 가겠군.”
지급 받은 10개중 7개를 이미 써버린 최성일 상사는 위치가 노출되었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위치가 노출되었다. 각자 알아서 후퇴하라”
주위에 있는 동료들에게 제일 먼저 경고를 한 최성일이 무전기를 허리춤에 차고 계속해서
사격을 해댔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제대로 조준이 되지 않았다. 조명탄의 범위에서 벗어나 표적이
차츰 어둠 속으로 들어왔다.
“그만 갈까 ?”
앞가슴에서 수류탄 두개를 이용해 덫을 만든 최성일은 더 이상 사격이 불가능해지자 서둘러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참호에서 빼냈다. 반대편에서는 포병대를 구원하기위해 기병대가 출동했는지
말발굽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뛰는 데는 이골이 난 최성일은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고 허리를
숙여 몸을 낮추고 전력질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1번과 5번을 방어하고 있는 4대대 병력을 이동하면서 2대대를 지원하도록”
이길주 여단장은 프랑스 보병의 공격이 고착상태에 빠지고 더 이상의 추가 병력이 투입되지 않자,
우선 급한 곳으로 병력을 돌렸다. 이미 클레르몽이 이끄는 기병연대가 3번 외벽을 장악하고
외벽을 넘어와 급히 투입된 본부중대 병력이 지휘부로 통하는 길을 막아 섰다.
“왜 후퇴하는 거야 ?”
“왜 후퇴하는 거야 ?”
근위대와 예비대가 포병대 진지를 정리하고 숨어 든 대한제국군을 소탕하는 것을 지켜보던
마지노 장군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해져 주변 부관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빌라봉 성을 공격하는
보병들이 후퇴명령도 없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지만 모두를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이동 명령이다. 교통로를 이용해 뚫린 외벽을 확보한다.
1중대는 2번 외벽으로 4중대는 4번 외벽으로 이동하여 서로 연결한다.”
4대대장의 명령에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1중대와 4중대 병력이 망루주위에 있는 인원을 뺀
전부를 양 옆으로 이동해가며 클레르몽 연대의 흐름을 끊어놓기 시작했다.
“수류탄 준비. 1.3소대는 외벽 바깥쪽을 2.4소대는 안쪽을 맡는다. 일시에 던지고 돌격한다.”
“투척”
4번 외벽을 확보하고 3번 외벽으로 이동하던 4중대장은 조명탄이 사그라드는 찰나를 이용해
외벽 양쪽으로 수류탄을 던지게끔 했다. 이어서 수십 개의 수류탄이 양 옆에서 터지고
순간적으로 적 기병대의 이동이 끊어졌다.
“돌격”
일 미터가 넘지 않는 교통로를 2열로 늘어선 중대병력이 계속해서 사격을 하며 외벽을 장악해 나가자,
바깥쪽에 있던 기병들이 라이플과 머스켓 소총을 쏘아대며 어떻게 든 안쪽과의 연결고리를
이으려 했다.
“으악.”
“멈추지 마라. 돌격. 1중대와 연결하라”
상호간의 근접사격으로 인해 사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지만 4중대장은 부하들을 계속해서
전진시켰다. 50여 미터를 이동하는 동안 소대병력이 통째로 사라졌지만 중대장의 입에서는
계속 돌격명령이 터져 나왔다.
“돌격 앞으로”
“피우웅. 펑펑펑”
하늘에서 다시금 조명탄이 터져 내리자, 중대원 모두가 바닥에 엎드렸다. 미처 움직이지 못한 몇 명이
집중사격을 받고 외벽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어 훤하게 노출된 기병대에 대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시야가 확보되자, 4중대 병력의 사격술이 빛을 발하며 순식간에 주변을 싹 쓸어 갔다.
이미 상당수가 성 내로 들어갔는지 바깥쪽에서 성안으로 들어오려던 기병의 수가 많지 않았다.
“3번 외벽을 장악했다.”
“수고했다. 서둘러 적 퇴로를 차단하고 성 내로 들어온 기병대를 척살하라”
빌라봉 성 안으로 들어온 클레르몽 기병연대는 중앙으로 통하는 대로가 막히자 병력을 소규모로
나눠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골목길 곳곳에는 브루노 살라몬이 이끄는 농민군들이 매복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 구식 화승총이나 석궁으로 무장한 농민군들은 숨죽인 체 기병대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일시에 공격을 퍼부어 적의 발목을 붙들었다.
“온다. 조준”
바게트 거리라고 이름 붙어진 한 골목길을 책임지고 있는 기욤 칼은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자,
손에 들려있는 석궁에 화살을 걸었다. 이어 오십 여기가 골목길에 나타나자 창가에 석궁을 올려놓았다.
주변 건물에 있던 수십 명의 동료들이 그의 명령을 기다리며 숨죽였다.
“공격”
“쉬 이익”
기욤 칼이 발사한 화살이 날아가 한 병사의 가슴에 적중하는 것을 신호로 수십 발이 화살이 기병대를
향해 날아갔다. 졸지에 공격을 받은 기병들이 길이 막히며 우왕좌왕하는 사이 뒤를 쫓아오던
4중대 병력이 마무리를 해 나갔다.
단기3959년(1626) 봄
크레타 기지를 출항한 2101항모 전단이 지브랄타 해협을 지나치자 항모 갑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2101함에 실려있는 봉황이 떠오를 준비를 시작했고, 정비사들은 함상 비행기인 제비호 출격을 위한
마지막 정비를 서둘렀다.
“앞으로 3일만 가면 로리앙 앞바다인가 ?”
전단장이 항해 장교가 표시해 놓은 해도를 바라보며 손가락 마디에 힘을 주자,
우두둑하며 관절 꺾이는 소리가 상황실에 울려 퍼졌다.
“그렇습니다.”
“옹달샘과 연결이 되려면 얼마나 가야 되나 ?”
“봉황을 오늘 밤에 띄울 예정입니다. 그러면 내일 정오에는 통신이 가능하리라 보입니다.”
2101함장은 신형 봉황의 통신 거리와 로리앙까지의 거리를 어림잡아 계산해 보았다.
로리앙까지 천오백킬로미터가 약간 넘었고, 봉황의 통신 중계 능력이 반경 300킬로미터니,
내일이면 얼추 가능할 것 같았다.
“음. 그런가 ?”
전단장은 2101함에 소속된 봉황 두 척을 모두 투입할 까도 고려했지만,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봉황 두 척을 동시에 띄웠다면 오늘이라도 통신이 가능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전단은 옹달샘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예비로 봉황 한 척을 남겨놓는 것이 나았다.
“빙 둘러가지만 않아도 반나절은 앞당길 수 있습니다만…”
“해안가에 너무 접근하면 괜한 시비에 걸려들어 더 늦을 수 있네. 예정항로로 움직이게”
1미터 내외의 잔잔한 파도가 함대에 밀려왔다 부서져 하얀 물보라를 만들어 냈다.
사방이 온통 바다로 둘러 쌓인 북대서양을 2101전단이 힘차게 밀고 올라갈 무렵,
빌라봉 성은 또 한 차례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에드몽 성을 비교적 쉽게 함락시킨 허버트 제독은 한상민 대령의 방해공격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진격을 계속하여 마지노 장군이 주둔하고 있는 진영에 도착했다.
“저 놈의 성벽이 의외로 단단합니다. 그리고 안에는 또 다른 성벽이 있습니다.
내벽은 높이가 높지 않아서 외벽을 확실히 장악하면 내벽을 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마지노는 허버트 제독에게 빌라봉 성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며, 내일 있을 공격방법을
조율해 나갔다. 하지만 마지노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병력 태반이 사라져 버려서 이제는 이름뿐인 장군이 되어 있었다.
“에드몽 성에서 겪어 보셨겠지만. 적이 보유한 개인화기 성능이 너무 뛰어납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적이 요새포나 야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 저희 대영제국군은 정공법으로 빌라봉 성을 공격할 생각입니다.
마지노 장군께서는 잠시 쉬고 계십시오. 일단 저희 포병대를 동원해서 적에게 항복을 강요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보병을 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노 장군께서도 그렇게 준비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지요.”
두 번의 전투에서 거의 7천에 가까운 병력을 상실한 마지노 장군은 더 이상 빌라봉 성 공격군의
지휘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자신의 나라에서 전투를 하고 있음에도 외국군 사령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마지노 장군은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꾹 참았다.
루이 13세가 자신을 경질하지 않은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그럼 언제 공격을 개시하실 생각이십니까 ?”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 공격 할까 합니다. 먼 길을 오느라 병사들이 지쳐있습니다.
마지노 장군께서 진영 외곽을 경비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외곽 경비를 말입니까 ?”
“그렇습니다.”
허버트는 쓸모도 없는 프랑스군을 경비 임무에 투입시키고 자신의 병사들을 쉬게 할 요량이었다.
마지노 장군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는 것을 보면서 허버트가 대답했다.
한참동안 계속된 두 장군의 눈싸움은 결국 마지노 장군이 고개를 떨구면서 끝이 났다.
“하하하”
마지노 장군이 막사를 떠나자, 남아있던 영국군 장교들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마지노 안색이 볼만합니다. 집지키는 개 신세가 따로 없습니다.”
애식스 백작이 프랑스군을 비하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해대자, 모두들 유쾌한 웃음을 자아냈다.
“그렇더라도 면전에서 프랑스 놈들을 무시하지는 말게, 개 코도 없는 것들이 자존심을 내세우는
족속들이니. 그리고 아무래도 저 놈들을 믿을 수 없으니, 자체적으로 경비를 서도록 하고,
항구와 연결이 끊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쓰도록. 그리고 내일 빌라봉 성에 포격을 실시할테니
만만의 준비를 해 놓게.”
“네. 제독님”
허버트는 에드몽성을 무사히 빠져나간 놈들이 항상 배후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언제고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시도할 놈들이었기에 조금도 경계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항상 여유를 잃지 않던 이길주 여단장은 영국군이 빌라봉 성을 포위하면서부터 매시간을 초조하게
보내고 있었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됨을 알리는 태양이 떠올랐지만, 며칠째 밤잠을 설친 이길주
여단장의 눈은 핏빛으로 가득 찼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듯 하군”
망원경을 내려놓은 여단장은 영국군 진영에서 포병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프랑스 군의 포대를 괴멸시키고, 성내로 진입해 들어온 클레르몽 기병연대를 몰살시키는 전과를
얻긴 했지만, 대한제국군과 프랑스 농민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8번 외벽이 심하게 손상되어 급히 보수를 하긴 했지만 또다시 집중포격을 맞으면 뚫릴 것은 뻔했다.
“이틀이라 !”
내벽을 한바퀴 돌아 다시 중앙에 위치한 지휘부로 들어오는 내내 말이 없던 여단장이 작전실에
걸려있는 전투 진행도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발생한 사상자가 400명을 넘어서고 있었고,
보급품도 많이 줄어 있었다. 작전실과 연결된 통신실 문이 열리면서 고진영이 들어왔다.
“만일을 대비해서 주요 시설에 자폭장치를 해놓게.
그리고 그림자 부대의 철수 계획도 다시 한번 점검하고”
항상 한 발 앞서가야 하는 입장에 있는 고진영은 이미 자폭장치를 해놓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고진영은 모든 통신시설과 기타 시설에 자폭장치를 장치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길주 여단장을 비롯한 여단 병력은 설사 빌라봉이 무너지더라도 철수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갈마이 지지 지지지 옹달샘 지지지”
그때 통신기에 잡음이 심하게 섞인 통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신장교와 하사관들이 잔뜩 긴장하며
전파를 잡기위해 주파수 수집기를 이리저리 돌려댔지만 더 이상 수신이 되지 않았다.
“갈매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통신장교가 여단장을 바라보았다. 갈매기라면 자신들이 목놓아 기다리던
지중해 함대 2101전단을 의미하는 암구어다. 그리고 옹달샘은 이곳 빌라봉을 의미했다.
만약 이것이 갈매기에서 보내온 통신이라면 거리가 함재기의 공격 범위 안에 옹달샘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것은 앞으로 최대 하루 어쩌면 몇 시간 안에 함재기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더 이상 수성전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쪽에서 통신을 시도해 보지”
목놓아 기다리던 소식에 여단장을 비롯한 통신실 요원들의 얼굴이 모처럼 밝아졌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찬 얼굴이 지축을 흔들며 들려오는 포성에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곧이어 곳곳에서 전투를 알리는 통신이 유무선을 타고 통신실에 계속 들어왔다.
“아침부터 시작이군. 갈매기와 연결되면 바로 알려주게”
여단장은 통신실 요원들을 둘러보며 격려의 말을 하려다가 그냥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그가 지휘실에 들어가자, 참모들이 모여들어 각 부대들에게 지침을 내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갈매기가 옹달샘을 찾는다”
“갈매기가 옹달샘을 찾는다”
2101함 갑판을 이륙한 봉황 통신관이 출력을 최대로 높이고 빌라봉성과 교신을 위한 호출을 계속했지만
아직까지 응답이 없었다.
“연락이 되어야 제비를 날릴 수 있는데. 북쪽으로 좀더 이동해서 다시 교신을 시도한다.”
봉황의 운용을 책임지고 있는 덕천 대위는 손바닥에 난 땀을 바지에 닦고 부조종사에게
봉황을 맡기고 항법사에게 다가갔다.
“현재 위치는 ?”
“북위 45도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람 방향이 바뀝니다. 고도를 200미터 내렸으면 합니다.”
항법사는 유리판 위에 올려진 지도상에 한 지점을 표지하고 로리앙까지의 거리를 산출했다.
사선으로 이어진 직선거리에 415라는 숫자가 쓰여졌다. 묵묵이 항법사의 손놀림을 바라보던
덕천 대위가 간이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영국군의 포격은 프랑스군에 비해 더욱 치밀하고 위력적으로 빌라봉 성 외벽을 때렸다.
수천명의 기병과 보병의 엄호를 받으며 빌라봉 성 4킬로미터까지 접근한 포대가 계속해서 외벽을
부수고 있었다. 일부 포대는 겁도 없이 2킬로미터까지 접근해 있었지만,
대한제국군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아침나절에 시작된 포격은 점심때가 되어서도 그칠 줄 몰랐다.
“빌라봉에서 삼일만 기다려주면 항복하겠다는 이상한 제의를 해왔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포격을 잠시 멈춘 허버트는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로 에식스 백작을 빌라봉 성에
보냈고, 지금 에식스 백작이 돌아와 허버트 제독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웃기는 놈들이군. 삼일 후에 항복을 하겠다고….”
“그렇습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예정대로 공격하시지요.”
마지노 장군은 대한제국군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에게 시간을 준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부하들을 살육한 빌라봉에 있는 놈들을 포로대접을 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루앙을 떠난 지원군이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에식스 백작은 지금 당장 공격해도 빌라봉 성을 접수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무혈 입성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프랑스 군인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리앙에 상륙해서 이곳까지 오는 데만 천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그로서는
빌라봉 성 공격에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올지 상상할 수 없었다.
“앞으로 두시간 후에 공격을 시작하겠다. 병사들에게 푸짐한 식사를 먹이도록”
허버트는 마지노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내심을 달랐다. 에식스 백작의 의견이 현실적이었지만,
루앙에서 온다는 지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빌라봉 성을 함락하고 영국군이 주둔함으로써
이 일대를 선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겁대가리 없는 놈들을 저격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덕천기 하사가 저격용 소총에 달려있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며 박만중 중사를 바라보았다.
영국군의 포격을 견디지 못한 대한제국군은 병력을 내벽 안쪽으로 철수 시키고 소수의 정찰병만을
외벽에 남겨놓았다. 그들 중 한 팀인 덕하사와 박중사는 2킬로미터까지 접근한 영국군 포대를
저격할 위치에 있었지만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지휘부에서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 괜히 나 여기 있소 광고할 생각 하지 말고 전방 주시나 잘해”
“어. 저놈들이 움직이는데요 ?”
“젠장. 저런 개새끼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좀 좋아 ! ”
덕하사가 보고 있던 망원경을 뺏은 박중사가 욕지거리를 해대며, 지휘부와 연결된 통신망을 개방했다.
영국군의 움직임을 지휘부에서도 이미 파악했는지, 박중사가 보고하기도 전에 반대쪽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박중사 ? 적 포대를 저격하고, 현 지점을 고수하라. 곧 지원병력을 보내겠다.”
“알겠습니다.
통신을 마친 박중사가 덕천 하사를 바라보았다.
“너도 들었지 ? 우리 소주내기 시합할까 ?”
“좋죠. 진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기 입니다.”
덕천 하사가 박중사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명사수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덕천 하사는 1킬로 동전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박중사 역시 만만치 않았다.
덕천하사가 여단으로 오기 전까지 박중사가 명사수의 영예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이후로는 덕천 하사와 박빙의 승부를 해왔다.
“전 포대 포격 개시”
허버트는 공격시간이 임박하자, 우선 모든 포병대를 동원하여 일제히 포탄을 빌라봉 성으로
쏘아 올렸다. 아울러 보병대를 진격시키고, 기병연대에 기동공격을 명령했다.
이미 집중포탄을 맞은 외벽은 여기저기가 허물어져 있었기에 그대로 밀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대 속보로 전진”
넓게 흩어진 햄스턴 대대 병력이 앞으로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적이 땅속에 호를 파고 숨어있었다는
마지노 장군의 지난 전투 설명에 영국군은 땅속을 수색하면서 착실히 접근해 갔다.
그 뒤를 주니어 베스가 이끄는 기병 연대가 정면을 응시하며 이동했다.
그렇게 2킬로미터까지 접근한 영국 보병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병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기병연대 돌격 앞으로”
주니어 베스는 빠른 속도로 연대를 빌라봉에 접근시켰다. 적의 조준을 피하기 위해
회피 기동을 하던 기병연대 병력이 외벽 수십미터까지 이르자 대한제국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탕탕탕”
시속 60킬로미터로 움직이는 물체를 명중시킨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탄창을 두개나 비워버리는 동안 박중사와 덕천하사는 각각 7개의 표적을 명중시켰을 뿐이었다.
“지원병은 언제 오는 건가 ?”
“조금만 기다려라. 적의 포격 때문에 길이 막혀 우회하느라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
“적 기병대가 외벽에 거의 접근했다. 후퇴를 허락해달라”
“안돼. 이건 명령이다. 현지점을 사수하라. 박중사 박중사.”
소대장의 고함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왔지만 박중사가 무전기를 꺼버렸다.
이미 적 기병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런 시팔. 꼼짝없이 죽겠네.”
그러면서도 박중사는 연신 총알을 날렸다. 이제는 조준경이 필요없었기에 박중사와 덕천하사는
조준경을 떼어내 버리고 연신 사격을 해댔다. 저쪽에서도 이쪽 위치를 찾아냈는지 반격탄이 날아와
주변에 박혔다.
“전대장이다. 1000미터까지 하강을 시작한다.
1편대는 적 포병을 2편대는 적 기병과 보병을 성벽에서 분리시켜라.”
2101함에서 이륙한 경 폭격기 제비호 20대가 일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단발 복좌 함상 폭격기로 개발된 제비호는 엔진 1기를 장착하고 최대속도 시속 430킬로미터
항속거리 1350킬로미터, 7.7미리 기관총 3정에 적재폭탄 300킬로그램을 장착한다.
앞 뒤로 두명의 승무원이 승선하는 제비호가 항속거리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지점에서 이륙하여
로리앙 상공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여기는 제비편대. 옹달샘 응답하라.”
“여기는 옹달샘. 기다린지 오래다. 030방향에서 들어오기 바란다.
적은 우수한 소총을 가지고 있으니, 폭격시 유의하라.”
“알았다. 이상”
옹달샘과 간단한 통신을 마친 전단장이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하고, 곧바로 대지상 공격을 명령하자.
총 20대의 제비들이 편대장의 지휘에 따라 소규모 편대를 만들어 갔다.
“연료가 부족하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고 객기를 부리지 마라. 구름 아래로 내려간다.
모두들 무운을 빈다. 제2편대부터 진입한다.”
10대로 구성된 제2편대를 이끌고 있는 편대장 장충호 중령을 선두로 해서 9대의 제비들이 차례로
구름을 뚫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평지에 솟아있는 빌바봉 성 주변으로 개미떼처럼 인간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 장충호 중령의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서 연기가 올라 오고 있었고, 화염이 치솟았다.
그것만으로도 하늘아래 지상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사격을 가한다.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 차례대로 들어와라”
일분 일초가 급한 장중령이 기체를 급강하 시켰다. 지상 50미터까지 내려온 장중령이 기체를
상승시키자, 후미에 타고 있던 부조종사가 폭탄창을 열어 폭탄을 떨어뜨렸다.
100킬로그램짜리 고폭탄 3개가 자유낙하하면서 뇌관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투하 후 일 초만에 지상에서 폭발하며 내장되어 있는 800개의 구슬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길주 여단장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강하하면서 우아하게 폭탄을 떨어뜨리고는
이제 기총 사격을 해대는 제비호의 공격을 지켜보았다.
제비호가 저공으로 지상을 비행하며 기관총을 쏘아댈 때마다 적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비행기에 걸맞지 않게 7.7미리라는 작은 구경의 기관총이었지만, 비행기의 운동에너지가 더해지자
육군이 운용하는 12.5미리 기관총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거기에 하늘을 나르는 물체라는
공포심까지 더해지자, 영국군과 프랑스군 진영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드레곤이다”
하늘에서 지상을 유린하는 제비들이 영불 육군과 포병대에게는 전설 속의 드레곤으로 보였다.
지상 20-30미터의 저공비행을 십여초동안 지속하면서 양 옆에 달린 기관총이 불을 뿜어내는 모습이
중세 기사들이 멸종시켰다는 드레곤의 그것과 비슷했다.
“타타타타타타”
“퍼펑”
20기의 제비호가 밀집되어 있는 영불 지상군을 공격하고 한차례 선회를 시작하자,
얼이 빠져있던 영불 지상군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지휘관들이 진영을 유지하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망가는 부하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적 기병대가 빌라봉 성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농민군이 성을 벗어나 공격해 옵니다.”
마지노 장군과 허버트 제독은 불과 5분전부터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드레곤으로 인해 부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고, 사방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진영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지휘체계 역시 무너져서 통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대한제국군과 농민군이 움추린 개구리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포병대 포격하라”
허버트 제독이 가장 신뢰하는 포병대로 일단 적을 공격하려 했지만, 들려오는 부관의 보고는
그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제독님 ! 모든 포대가 드레곤의 공격을 받고 전부 부서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다시 선회를 마친 20기의 제비호가 각자 먹이를 찾아 난잡하게 하늘을 휘저으며
기관총탄이 쏘아댔다. 대한제국군 2101함 함상기 제비호는 장착된 모든 무기가 다 소모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전단장이다. 앞으로 1분 후 전장을 이탈한다.
모두 연료 잔량을 확인하고, 빠듯한 기체는 지금 즉시 공격을 중지하고 상승하라”
겨우 5분에서 10분사이의 체공시간밖에 여유가 없는 연료로 인해 전단장의 명령에 반수의 기체가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비록 10여분의 짧은 공격이었지만, 지상에서 공격 당하는 영불군은
한시간도 넘는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장군님 ?”
“여단장님 ?”
고진영이 몇 번을 부르고 나서야 이길주 여단장이 고개를 돌렸다.
“제비들의 체공시간이 한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알았네. 이제 반격을 해야지.”
여단장이 아쉬운 마음으로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보고 발걸음을 지휘실로 옮겼다.
모든 대대장들과 중대장들이 지휘실에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브루노 살라몽 농민군 대장도 끼여 있었다.
“오래 기다렸다. 지금 이시각부터 반격에 나선다. 이 기회에 남부 프랑스를 확실히 해방시키고,
오늘을 프랑스 농민혁명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각 성문을 열고 로리앙으로 진격하도록.
한상민에게는 루앙에서 오는 적 지원군을 며칠만 붙잡고 있으라고 하고. 자 가지.”
“네. 장군님”
이길주 여단장이 고진영에게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지휘실을 나가자, 모두들 빌라봉 성을 떠날 채비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고진영은 통신실로 향하는 통로를 지나 통신실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고진영의 얼굴만은 펴지지 않았다.
“아직 암호문이 도착하지 않았나 ?”
“그렇습니다.”
고진영은 지금 상부에서 내려오는 최종 명령문은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소식이 없었다.
제비이란 글자가 선명이 쓰여진 비행기들이 접은 날개를 하나씩 펴자, 펴진 날개 위에 숫자들이
나타났다. 83이란 숫자가 양 날개에 새겨진 제비호 조종사가 엄지를 들어 올리며,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비행 갑판 요원이 마지막으로 날개 접합부분을 살펴보고 바퀴에 끼워진 목침을
빼냈다. 제비83호는 프로펠라를 돌리며 천천히 비행갑판 맨 끝으로 이동하더니 창문을 두 손으로
끌어 조종석을 닫았다.
“제비 83 이륙한다”
“제비 83 이륙을 허가한다.”
관제탑과 짧은 교신을 마친 제비 83이 속도를 높이더니 시속 200킬로미터로 가속하며 힘차게
날아올랐다. 2101함 갑판은 착륙하고 이륙하는 제비들로 연신 북적댔다.
에드몽 성
허버트 제독과 마지노 장군이 이끄는 영불 연합군은 제비호의 집요한 폭격과 이길주 여단장이 이끄는
4161여단의 공격에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에드몽 성까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항구에 정박해 있던 영국의 자랑인 50척의 범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과 바닷속의 어뢰 공격으로
단 한 척도 살아 남지 못하고 전부 불타 올랐다. 50척이 불타며 만들어진 검은 연기는
지상 1000미터까지 치솟아 올랐다.
“항복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
용케 폭격을 피해 에드몽 성까지 들어온 마지노 장군은 허버트제독이 항복이라는 말을 꺼내자,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 항복이라고요 ? 나는 죽어도 항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잘난 체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항복하겠다는 것 입니까 ?
영국군의 실체가 이런 것이었습니까 ?
조금 힘들다 싶으면 바로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것이 당신들이 그토록 내세우던 신사도 입니까 ?
정녕 그런 거라면 지나가는 개에게 던져주고 구차하게 저 개만도 못한 놈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시오.”
고래고래 소리치며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고 쏟아 부은 마지노 장군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탕탕 치며 계속해서 허버트 제독을 밀어 부쳤다.
“우리 프랑스군은 단 한 사람까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구차하게 사느니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 이 말씀입니다. 저 노란 원숭이들이 어떤 마법을 써서 불을 뿜는 드레곤들을 불러냈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에 굴복할 만큼 나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라봉 성조차 함락시키지 못하고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며 우리의 힘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
니까 ? 그렇게 용맹한 프랑스 군이라면, 능히 대한제국군을 몰살시키고도 남았을 텐데 말입니다.”
허버트 역시 일이 이지경까지 올 줄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고, 자신의 군대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자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지노의 말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참다 못한 허버트가 마지노 장군을
빈정대자, 핏기가 솟은 눈빛으로 허버트를 쏘아보던 마지노 장군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었다.
양국의 주요 지휘관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칼이나 총을 빼 들어 살벌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 누구 좋으라고 서로 총칼을 겨누는 것입니까 ?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해 보십시오. 적들은 월등한 화력으로 우리를 공격했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이곳까지 밀려났습니다. 지금 이 성은 프랑스 농민군으로 둘러 쌓여 있고,
해만 뜨면 하늘에서는 드레곤들이 날아다닙니다. 루이 13세가 구원병을 보낼 때까지 버티느냐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애식스 백작이 양편을 중재하고 나서자, 날카롭게 대립하던 눈빛들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제독님 ! 대한제국군이 최후 통첩을 해왔습니다.
오늘 정오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에드몽 성을 지상에서 지워버리겠다는 협박입니다.”
“젠장”
성벽에 나가있던 전령이 전한 소식에 애식스경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지껄였다. 정오라고 해 보았자,
겨우 한시간 가량 남아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마지노 장군이 항복에 응할 것 같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 만해도 자신이 대한제국군에게 항복을 권유하지 않았던가 ?’
“우리가 보유한 야포는 이제 단 한 문도 없습니다. 그리고 식량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 악랄한 놈들이 성을 텅텅 비워놓고 떠났기에 우리가 가져온 것이 전부입니다.
그 드레곤을 상대할 무기도 전무한 상태이고… 이렇게 되면 여기서 버틴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애식스 백작이 상기시켜주자,
마지노를 제외한 모든 지휘관들의 고개가 저절로 떨구어졌다.
“그래서요 ? 백작은 지금 항복하자는 것 입니까 ?”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
“왜 방법이 없습니까 ? 저 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산속으로 들어갑시다. 그곳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구원병이 올 것입니다. 농민군은 신경쓸 것 없고, 대한제국군은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어차피 보급에 한계가 있을 것 아닙니까 ?”
마지노 장군의 제의는 모두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지만 이내 영국군 장교들은 모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에드몽 성 배후에 있는 산속으로 이동하는 동안 막대한 희생이 뒤따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지노 장군은 반응이 시원치 않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나는 절대로 항복 안 합니다. 아니 못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
항복하는 사람은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옥신각신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영불 연합군의 항복 소식을 기다리던 이길주 여단장은 시계를 시시때때로 바라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폭격 편대는 예정대로 도착하나 ?”
“네. 사령관님. 이미 항모를 이륙해서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제시간에 도착한다는 통신이 10분전에 있었습니다.”
“그래. 적이 탈출을 시도할 지 모르니.
여단병력은 항상 주변을 순찰하며 만만의 준비를 다하도록. 무조건 항복을 받아 내야 된다.”
이길주 여단장은 이곳에서 적장의 항복을 받아야만 다음일이 비교적 순조로워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항복문서에 영국과 프랑스의 사령관이 서명을 한다면, 대한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대할 때
그만큼 부드럽게 일을 진행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독님. 성을 포위했던 놈들이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옥신각신 끝에 마지노 장군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을 내린 영불 연합군 지휘부에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적들이 오히려 포위망을 뒤로 물린다는 정찰 보고가 들어왔다. 총공격 준비를 할 것이라 생각했던
영불 지휘부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가장 약할 것 같은 곳을 골라 뚫고 나가시지요 ?”
자신의 연대가 거의 전멸당하는 수모를 겪었던 클레르몽이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나섰다. 항복하지 않을 바에야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그는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왜 ? ….”
“준비되는 대로 서둘러 성을 벗어난다. ”
허버트 제독이나 마지노 장군은 상식밖의 행동에 일말의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행여 드레곤이 떼거지로 몰려오지 않을 까 하는 우려에 허버트제독은 후퇴를 서둘렀다.
“드래곤이 온다. 드레곤이다.”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하늘을 뒤덮은 제비호들이 에드몽 성으로 내리 꽂혔다. 두 대씩 짝을 지어
급강하하던 경폭격기들이 날쌘 놀림으로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폭탄을 떨어뜨렸다.
로리앙에서 반나절 거리까지 접근한 2101함에서 이륙한 제비들은 연료에 여유가 생겨서 인지,
천천히 그리고 철저하게 에드몽 성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브루노 살라몽은
화염이 치솟는 성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서리가 저절로 처졌다.
“천군을 보내 불벼락을 내리시나니.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저기구나”
성 안은 지옥도가 펼쳐 지고 있을 거라는 것은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 오르며 간간히 폭격기들의 모습을 가려졌다.
바다에서는 제 2파에 해당하는 폭격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장군님. 서쪽 성문이 열리고 소수의 기병대가 탈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막아라. 무슨 수를 쓰더라도 탈출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넋을 놓고 불구경을 하던 살라몽은 급히 달려온 전령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둘러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말을 잘 다루는 사람들로 구성된 100여기의 농민군 유일의 기병대가
살라몽을 따라갔다.
“우리는 할 일이 없구만”
적 기병대의 탈출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살라몽은 이미 대한제국군이 적들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아 정리가 끝나 있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렸다.
숫자만 많았지 그의 군대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3시간 동안 계속된 폭격에 에드몽성은 그 형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
성한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성내로 조심스레 진입하던 프랑스 농민군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이런 곳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네”
반쯤 무너져 내린 건물들을 수색하던 농민군들은 얼이 빠져 눈동자가 풀린 영불 연합군 병사들을
곳곳에서 찾아내 광장으로 끌고 갔다. 가끔 농민군과 대한제국군을 공격하는 연합군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농민군의 화풀이 대상밖에 되지 않았다. 나자레 출신 병사들은 부상을 입었건 말건
눈에 띄면 무기를 휘둘렀다.
“처참하군”
시체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서쪽 문을 통해 들어온 이길주 여단장은, 얼굴을 찡그리며 깊숙이 안으로
들어갔다. 유난히 서쪽에 많이 몰려있던 영불 연합군들은 직격탄을 맞고 수십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일부 시체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지고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여단병력을 뒤따라온
농민군들이 토를 해댔다.
“전쟁 아닙니까 ? 지금 땅바닥에 누워있는 자들은 우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새 뒤 따라온 브루노 살라몽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여세를 몰아 파리로 진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지금 전 프랑스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에드몽 영주와 상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후로는 저희들보다 장군님이나 영주님의 역량이 더 중요한 시기 아닙니까 ?”
“그렇습니까 ?”
“그렇지요…. 맞습니다. 하하하”
이길주 여단장의 말을 들은 살라몽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 cibam님과 어둠의 이지스님에게 ///
우선, 천군을 관심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지적해주신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두분의 특히 cibam님의 해박한 지식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미약하지만 제 의견은 아래와 같습니다.
-. 중국과 일본 러시아를 점령 유지하는 병력이 부족하다는 지적
=> 중국에 20만, 일본에 10만, 러시아에 40만이란 병력이 그렇게 작은 것이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과거 영국은 인도를 3만명의 상비군으로 수백년동안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17세기 초 폴란드는
단지 3천명으로 모스크바 공국을 무너뜨렸습니다.
-. 1400년대 중반에 유럽에는 우리가 아는 조총(화승총)이 만들어졌고, 1500년대 초기에는 바퀴 격발 총이 그리고 1570년에는 부싯돌 격발총이 그리고 1600년대 초기에는 좀더 발전된 부싯돌 격발총이 만들어졌습니다.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는 끊없는 종교전쟁을 거치면서 유럽의 무기가 급속도로 발전을
이루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거기에 대한제국에서 유출된 총기류와 지식들이 유럽에 스며들었다면,
그동안 체계가 잡히지 않던 저들의 기초과학들이 빠르게 체계를 잡아 갔으리라 판단됩니다.
유럽애들이 말하는 원숭이들은 아니니까요 ?
검증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과학이라는 것이 원리만 알면 복사하기가 무척 쉬운 것 아닙니까 ?
무엇보다도 유럽애들에게 약간의 힘을 주기위한 의도적인 설정이기도 합니다.
-. 당시 독일과 스웨덴에서 수출한 대포가 한해에 수백톤이 넘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1600년
대에 일본이 보유한 철포수가 무려 십만정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일본도 그럴진대,
유럽애들이 탄피를 만들 황동이나 구리가 모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빌라봉성의 설계는 대한제국에서 한 것 입니다. 보방원수의 설계를 모방해서리.
-. 제가 유럽의 기술력을 과신하게 된 이유는 문제중년의 총이야기를 읽고 나서 입니다. 물론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었지만, 만약 대한제국의 지식이 약간이라도 유럽에 전해졌다면 좀더 빨리 발전하지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해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