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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선택
단기3959년(1626) 봄 이베리아 반도 남부 그라나다 지역 말라가 항구
터키제국의 재상인 무할라비의 작은 아들이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말라가 항구에 대한제국에서
사온 증기포함 3척이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었다. 고토 회복 전쟁이래 줄곧 말라가 내항에서 한번도
움직인 적이 없던 증기포함이 내뿜는 세 줄기의 연기를 바라보던 우다이는 그라나다 요새에서
전령이 왔다는 소식에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항구 바로 옆에 있는 우다이의 집무실은 백색 벽돌로 만들어진 이층건물로 내부는 대리석이 깔려있고,
그 위에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우다이가 의자에 앉자, 그라나다에서 왔다는 전령이 들어왔다.
“쿠사이 행정관님의 전갈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
돌돌 말은 종이 더미를 건네 받은 우다이가 종이를 펼쳐 들었다.
“요즘 그라나다 상황은 어떤가 ?”
전갈을 다 읽은 우다이는 내륙으로 들어간 원정군의 소식이 궁금했다. 이교도들이 연합군을
결성해서 이곳으로 온다는 소문이 지난 겨울부터 파다했지만, 말라가에서는 평온하기만 했다.
“사담 사령관님의 지휘아래 3만의 원정군이 리나레스로 진격할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온다는 이교도 연합군은 그라나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모양입니다.”
“오느라 고생했네. 그만 나가서 쉬게.”
“감사합니다. 행정관님.”
전령이 나가자, 우다이는 다시 한번 그라나다에 있는 형에게서 온 전갈을 읽어 보았다.
본국을 출발한 2차 원정군이 도착하는 즉시 출병할 생각인지, 사담 사령관은 2차 원정군의 도착 소식과
보급품에 대한 소식을 묻고 있었다. 그리고 2차 원정군을 세비아로 보내 과달콰비르 강을 경계로
확실한 방어선을 구축했으면 하는 의견을 보내왔다.
‘어서 2차 원정군이 도착해야 할텐데.’
지난 1년여 동안 구축해 놓은 요새와 방어선으로 주변 지역을 확고히 다져놓은 터키제국 원정군은
올해부터 조금씩 진격을 시작하여 고토 대부분을 회복할 생각이었다. 2차 원정군을 실은 함대의
조기 도착은 그 병력 뿐 아니라 보급품에 있어서도 1차 원정군에게 중요했다.
거기에는 대한제국이 무상으로 제공한 소총탄 오십만발과 포탄 천여발도 포함되어 있었다.
티레니아해를 바라보는 팔레르모 항구는 시칠리 섬에 있는 최대의 도시로 페르난도가 아라곤에서
쫓겨와 나폴리에 들어오면서 더욱 번성해졌다. 배후에 콩카드로라는 비옥한 평야가 있어서
아라곤 왕국의 식량창고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팔레르모에 스페인 바르셀로나 함대,
프랑스 툴롱 함대, 토스카나 대공 휘하의 이태리 연합 함대 그리고 페르난도의 함대가
속속 모여 들어 대규모 함대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스탄불에서 도착한 첩자의 보고에 의하면, 터키의 대규모 함대가 곧 이스탄불을 떠날 예정이라
합니다. 대한제국군의 해군들에 대한 동정에 대해서는 들어온 바가 없지만, 거대선 예닐곱 척이
크레타를 떠난 이후로 지중해에서의 활동이 뜸합니다.”
교황청에서 파견된 안토니오 콜로나 제독이 토스카나 대공과 총 함대 사령관인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며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콜로나 제독은 교황 직속 함대인 갈레아스선
6척과 갤리선 30척을 지휘하는 지휘관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총 사령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혹시 모르지. 바닷속에서 움직인다는 놈들이 있을지도….”
“그 잠수함이라는 놈은 물고기와 같아서 그물로도 잡을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
그리고 이곳까지 들어올 만큼 간이 큰 놈이 있긴 있겠습니까 ? 저기 추기경께서 오시는데요 ?”
연신 주변을 둘러보느라 머리를 돌려대던 안토니오 콜로나가 시내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벨라르미노
추기경 일행을 가리키자, 모두들 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빨간 모자와 빨간 사제복을 입고 있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눈에 확 들어왔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각지에서 모여든
함대간의 이견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고, 총 사령관의 행동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방금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이틀 전에 터키의 대함대가 이스탄불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도 서둘러 함대를 이동시켜야 겠습니다.”
그리스에는 비록 교황청이 인정한 교회는 아닐지라도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슬람교로의 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거운 세금을 내고 있긴 했지만,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종교를 유지하는 기독교도 지역 내에서 살고 있는 타 종교인들과는 다르게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로마 교황청은 그리스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의 정보 수집자로
이용할 수 있었다. 동방 정교회라 하여, 그 동안 철저히 외면했던 로마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정교회 수장들은 러시아 정교회가 대한제국에 의해서
와해되자 로마 교황청이 내민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렇습니까 ? 출항 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
출항 시기를 조절하고 있었는데, 오늘 야간에 출항하는 게 좋겠습니다.
부관. 각 함대에 보내 오후 회의에 지휘관은 전원 참가하라는 통지문을 넣어라”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흡족한 표정으로 총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영국 놈들이 끝내 오지 않는군.”
수백 척이 떠있는 항구에 영국 배는 단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50여 척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도 배를 보내지 않은 것이다.
“프랑스 남부에 들렀다 오느라고 조금 늦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리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10년 전에도 그놈들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대한제국에게 덜미를 잡히지 않았습니까 ?”
총사령관은 영국 함대가 자신의 함대에 합류하지 않는 것을 내심 반겼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출정에 대해 언급을 하자마자 전령을 각 함대에 보내버렸다.
“총 사령관. 저는 항구를 둘러보고 회의에 참석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추기경님. 콜로나 경이 추기경님을 안내해 주시게나 !”
“아니. 되었네. 콜로나 경도 바쁘지 않겠나 ? 안 그런가 콜로나 경 ?”
“그리고 혼자가 편해”
아우스트리아 사령관의 말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며 만류하고 나섰다.
콜로나 경은 그 나름대로 할일이 있었는지 추기경이 자신의 안내를 거절했는데도
싫어하는 내색이 없었다.
“정 그러시다면….”
아우스티리아는 자신의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안토니오 콜로나를 잠시 동안이지만
떼어 놓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추기경이 극구 사양하고 있었다.
중부 지중해 판텔라리아 섬 부근 어느날 아침
시실리 섬에서 남쪽으로 10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판텔라리아 섬은 시실리와 아프리카대륙 북부
지중해 해안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주위에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군도가 자리잡고 있다.
이스탄불을 출발해 그리스 아테네에 잠시 들러 보급과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병사들을 태우고 가는
터키제국의 대 함대는 총 갤리선 210척과 갈레온 40척 그리고 수송선 20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총 병력 7만 5천명이 승선해 있는 터키 함대는 무어인, 그리스인, 시리아인, 이집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함장이나 사령관들이 공인된 해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터키제국의 함대는
과거 어느 때 보다 도 소속감이나 동질감 면에서 결속력이 강한 함대였다.
“함대를 밀집 시켜라”
터키제국 함대를 이끌고 있는 알리 파샤 사령관이 시실리 해협 입구에 다다르자, 함대 대형을
밀집대형으로 만들도록 명령을 내렸다. 몰타 해협을 거쳐 시실리 해협을 통과하면, 하루 이상을
절약할 수 있었지만 시실리 섬과 너무 가깝다는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알리 파샤는 조금 늦게 가더라도 판텔라리아섬 남부를 돌아 튀지니 해안을 따라 함대를
이동할 생각이었다. 알리 파샤에게는 시간을 앞당기는 것 보다는 병력과 보급품의 안전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좌익과 우익함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견시병들은 사방을 주시하며 계속 상황을 보고해 왔다. 우루치 알리가 맡고 있는 좌익함대와
모하메트 시로코가 맡고 있는 우익함대가 점점 중앙 함대로 몰려들었다.
밀집대형을 형성하기 시작한 터키함대는 시속 6노트의 속도로 말라가항을 향해 순항을 계속했다.
“1시 방향과 11시 방향. 소형 선박 2척 발견.”
“멀어지고 있습니다.”
함대 최전방에서 들어오는 보고를 받아서 알리 파샤에게 전달하는 부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단지 두 척뿐인가 ?”
“그렇습니다.”
“멀어지고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쾌속선을 내보내 추격하라”
알리 파샤는 아무래도 자신의 위치가 노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 만에 하나 적 함대라도 만난다면 화물을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알리 파샤가 전 함대에 전투 명령을 내렸다.
“전 함대 전투 대형으로. 수송함대는 후미로 빠진다.”
“우리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지 않습니까 ?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부관은 사령관을 안심시키려는 듯 대한제국을 언급하자, 사령관이 한심하다는 듯 부관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대한제국이 언제까지 우리를 도와 줄 것 같은가 ? 항상 자신의 힘을 키울 생각을 해야지
남의 도움을 기대하면 안되네. 힘이 없으면 흡수되던지, 노예로 살던지 둘 중 하나야. 지금은
이용가치가 있어서 우리를 도와주지만 필요 없다 싶으면 언젠가는 우릴 노예를 삼을지도 모르지.”
“대한제국에는 노예가 없다던 데요. 사령관님께서는 괜한 걱정이십니다.”
“족쇄를 채우지 않은 노예는 노예가 아니던가 ? 한심한 소리 그만하게 누가 들을까 겁나는군.
인샬라. 인샬라.”
사령관은 마음이 답답해져서 알라를 갈구했다.
시실리 섬을 출항한 연합 함대는 함대를 4개 전단으로 나누고, 봉 곶 부근에서 터키함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총 316척으로 구성된 함대에는 팔만 여명이 병사가 승선하고 있었다.
서 지중해 지역으로 팽창해 오는 터키 세력을 막고 기독교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단판 승부를
걸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 한 그들은 갈릴레이가 만든 우수한 망원경으로
각 전단이 맡은 해역을 감시하고 있었다.
“터키 함대 발견 신호입니다.”
근 50킬로미터를 물 셀 틈 없이 정찰을 하고 있던 정찰선들이 아우스트리아가 타고 있는 기함에
발광신호를 보내왔다. 해전에서 적을 먼저 발견한다는 것은 반쯤 승리한 것과 같았다.
레이더가 없던 양 함대는 적을 먼저 발견하면 그만큼 위치 선정과 진영 구축에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그것은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함대를 후방으로 물려라”
아우스크리아는 마침내 기다리던 적이 나타나자 적에게 발각되기 전에 함대를 뒤로 물렸다.
이제 싸우기 좋은 곳으로 가서 진영을 갖추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함대 기함에서 명령이 전파되자
예정되어 있었다는 듯 300여 척의 전함들이 봉 곶까지 일사분란 하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함대 후미에는 소형 프리깃 함들이 터키 함대의 이동을 감시하기위해 남겨졌다.
“적 쾌속선이 접근한다. 노를 저어라”
평소 잘 쓰지 않던 노까지 동원하며 연합함대의 프리깃 함들이 빠른 속도로 시실리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속도가 비슷하고 거리가 워낙 떨어져 있어서 도망자와 추격자 사이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해안 바닷속
“터키 애들에게 알려줘야 되지 않을 까요 ?”
터키 함대를 앞서가던 잠수함 418함 부장은 수백 척으로 구성된 연합 함대가 기다리고 있는 해역으로
터키함대가 들어가려 하자 적잖이 우려가 되었다. 정면 대결을 한다면 양쪽 모두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 분명했지만, 터키함대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럼 좋겠지만 상부에서는 이번 전쟁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저 번에는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지.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를 물고 있기를 바라는 어부의 심정이 우리들
상부의 마음이야. 가2-89해역에서 자체 판단해서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승인이 있었네만.”
부장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함장으로부터 확인을 받자 심정이 착찹해졌다. 대한제국은 외국에
대해 수십 개의 얼굴을 준비해 두고 자신이 필요할 때마다 얼굴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철저한 방관자 입장에 있었고, 그 선봉에 그가 타고 있는 잠수함이 있었다.
“심도 80미터까지 잠항한다.”
복마전에 끼어 들었다가 재수없게 포탄에 맞을 수 있었기에 함장은 잠수함을 안전심도로 내려가도록
지시를 내리고는 지휘실을 부장에게 인수했다.
“난 그만 쉬겠네. 부장이 지휘권을 인수한다. 일단 가2-89 해역을 조사만 하도록”
“네. 지휘권을 인수합니다.”
복명복창을 뒤로하고 함장이 자리를 비우자, 지휘실은 금새 시끌벅적 해졌다.
“이번에는 누가 이길까요 ? 난 유럽 놈들에게 걸고 싶은데 !
대부분이 대형 함이고 숫자도 많은데, 터키함대는 11세기에나 쓰던 것들이잖아.”
“난 터키 놈들에게 걸지. 넘겨준 무기도 있는데 설마 지기야 하겠어 ?”
“하지만 터키 함대의 진영이 너무 안 좋아. 위치도 그렇고. 유럽함대를 누가 지휘하는 지 모르지만
이번 싸움은 일방적인 싸움이 될 확률이 커. 터키 함대는 지켜야 할 것도 있으니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유럽 놈에게 30원 걸지.”
지휘실 한쪽 구석에 있는 양 함대의 진영을 표시한 해도를 보면서 항해장교가 유럽에게 돈을 걸었다.
터키함대가 집중되어 있다가 산개하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한 진영을 갖추지 못한 반면,
유럽 함대는 4개 전대는 각 전대 앞에 쾌속성 두 척을 앞에 배치하여 상황을 본대에 전달할 수
있게끔 했고, 함대 후미에 예비함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터키 함대도 함대를 4개로 분리하고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수송함대일 것이 뻔했다.
“자.자. 돈 생기지 않는 말씨름 그만하고 돈을 걸어요. 돈. 부장님도 10원만 거시죠 ?”
승무원 중에서 유난히 돈을 밝히기로 소문난 금동기 상사가, 쓰고 있던 모자를 들고 지휘실을
돌아다녔다. 평소 승무원들과 격이 없이 지내던 부장은 금상사에게 눈을 한 번 흘기고 소리장교가
벗어놓은 소리 감청기를 자신의 귀에 대었다.
“퐁퐁퐁”
부표를 달고 수면 가까이 끌려 올라간 소리 수집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시작했나 ? 소리장 ! 이거 포탄 입수하는 소리지 ?”
“이리 줘 보십시오 ?”
“풍퐁풍퐁 꽈광”
소리장은 자신의 고막을 자극하는 소리를 즐기는 듯 눈을 감고 감상하고 있었다.
불규칙적인 화음이 계속해서 들려왔고, 가끔 배끼리 충돌하거나 부딪쳐서 발생하는 끼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소리장의 눈살이 저절로 찌뿌려졌다.
“난리가 났습니다. 한바탕 크게 붙는 모양입니다.”
“한 척 침몰. 또 한 척 침몰.”
소리장은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는 농구경기를 중계하는 해설자처럼 점점 목소리가 들떴다.
그가 침몰하는 배 숫자를 말할 때마다 금동기 상사의 손에 쥐어진 모자에 쌓이는 돈이 점점 늘어났다.
418함 잠수함 승무원들은 딴 세상 사람이 되어 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전을 감상했다.
“소리장. 조용히 못 하겠나 ? 그리고 금상사도 그만 둬 !”
보다 못한 부장이 화를 버럭 냈다.
“지금 남의 불행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용하려는 귀관들의 모습이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
아니, 최소한 즐기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 대한제국의 군인으로서 명예를 지키도록 하게.
항해사 ?”
“네. 대위 이철민”
부장이 이철민 대위를 부르자,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이철민이 큰 소리로 관등성명을 댔다.
“가2-89 해역으로 함을 이동시킨다.”
“네. 알겠습니다. 승무원 정위치. 침로 변경 030.”
모두의 얼굴에는 좀더 머물며 해전을 지켜보고 싶어하는 표정이었지만, 잠수함이 침로를 바꾸자
체념한 듯 자리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크레타 해군 기지에 배속된 잠수함들은 평시 지중해 탐사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탐사를 효과적으로 하기위해 지중해 구역을 총 800개 구역으로 나눠 하나씩
조각을 맞춰가고 있었다. 가2-89해역은 시실리섬 남서부 해안을 의미했다.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중부
“수송선을 보호하라. 예비대를 수송함에 붙여라”
알리 파샤는 후미에서 대기하던 수송선 20척에게로 스페인 함대가 접근해가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앙의 접전을 지휘하느라 잠시 눈을 돌린 사이 마누엘이 이끄는 대형 갈리아스 선 10척과 6척의
프리깃 함이 수송함대로 접근하고 있었다.
“꽈광. 탕탕탕”
사방에서 포탄 소리와 총탄소리가 들려왔다. 불화살이 날아다니고, 포탄에 직격탄을 맞은 갑판 조각이
하늘높이 날아갔다. 봉 곶 해역을 가득 메운 수백 척의 범선들이 뭉쳤다. 흩어졌다는 반복하며
서로에게 죽음의 포탄을 쏘아댔다. 좌익, 우익, 중앙으로 나뉘어진 양 함대는 각각 대응되는 전단을
상대로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다.
“안토니오 콜로나 함대 좌익 투입”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연합 함대 총 사령관은 대형 전열함인 네오 리스본함 대신, 작지만 빠른
쾌속선에 승선하여 함대 구석 구석을 돌아다녔다. 그가 탄 쾌속선이 지날 때마다 연합함대 소속
수병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런 와중에 아우스트리아는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는 전장에
뒤에 처져 있던 예비함대를 투입 시켰다. 스페인 함대가 적 후미를 공격하자, 적은 일부 함정을
예비대로 돌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최전방을 휘저으며 군 사기를 진작시키고 필요한 명령을
적시에 내리고 있었다.
“로즈함이 침몰합니다.”
적 기함 근처까지 접근하던 프랑스 툴롱 함대 소속 로즈 함이 침몰하고 있었다.
“벌써 세척째인가 ?”
난전 중에서 유럽 연합 함대는 함포의 우수성으로 적을 제압해나가고 있었지만, 유독 중앙에서만은
조금씩 밀리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적 기함 주변에 배치된 갈레온선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예비함대를 중앙에 투입시키지 않고 좌익으로 보낸 이유는 적의 허술한 곳을 먼저 부수기 위해서였다.
“총병 대기”
알제리 총독 얄 샤파드의 배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는 범선 갑판에 몰려있는 총병들이 총알을 장전하고
명령을 기다렸다. 대한제국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단발 수동 장전식 터키 제국 소총은
이제 겨우 이만정이 생산되었다. 물론 그 대부분이 1차 원정군에게 지급되어 있었지만 이번에 출정하는
2차 원정군에게도 오천여정이 지급되어 있었다.
“함포 발사”
툴롱이라고 쓰여 있는 배가 접근해 오자 터키함대 기함을 호위하던 삼선호 함장이 발사 명령을 내렸다.
“펑펑펑”
“좌현 전타.”
기독교도 연합함대의 전함은 대부분이 터키함대의 전함보다 몸집이 컸다. 그래서 인지 선수에 함포가
5문이나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터키함대의 주력함인 갤리선은 선수에 기껏해야 함포 2문밖에
설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삼선호 함장은 선회를 명령했다. 좌,우현포를 이용해야만 했다.
“꽈과광 꽝”
선회하는 사이에도 돌진해 오는 로즈함의 함포가 불을 뿜었다. 현갑판에서 대기중이던 대여섯명의
총병들이 포탄에 맞아 날아갔다.
“함포 발사. 우현 전타. 총병 자유 사격”
“탕탕탕. 펑펑”
서로 총포탄을 주고 받는 사이 함이 가까워지자 양쪽에서 갈고리를 던져 서로를 끌어당겼다.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 해군이 널판자와 줄을 타고 삼선호에 넘어오기 시작했다. 삼선호 갑판 위에
움추리고 있던 총병들이 일시에 일어나 넘어오는 적을 향해 다시 한번 일제 사격을 시작했다.
쏘면 빗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순식간에 수십명의 프랑스 수병들이 바닷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손놀림이 빠른 총병들이 탄피를 꺼내고 다시 장전하여 두번째 총탄이 날아가자,
프랑스 수병들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알리. 적함을 폭파하라”
갑판에 대기하던 알리는 선장의 명령에 부하들을 이끌고 서둘러 적함으로 건너갔다. 로즈함 갑판에는
프랑스 군인들이 흘린 핏물을 머금은 널판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선실로 향하는 문을 통과한 알리는 아래층에서 화약통 더미들을 발견하곤 서둘러 한 통을 칼 손잡이로
깼다. 나무로 만들어진 통 한 쪽이 깨지면서 화약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통 더미에 화약을 잔뜩 뿌리고 다른 한 통을 또 깼다. 부하들의 엄호를 받으며 갑판으로 나온 알 리가
함장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뚜우 뚜우 뚜우”
후퇴명령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자, 로즈호로 건너간 병사들이 서둘러 삼선호로
되돌아왔다,
“줄을 끊어라”
로즈호와 삼선호를 연결하던 줄이 도끼에 끊어져 나가자, 두 함이 급속도로 멀어졌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로즈호가 큰 폭발을 일으키며 중앙에서 불기둥이 솟아 올랐다. 두 동강 난 로즈함이
침몰하고 미쳐 배를 탈출하지 못한 수병들이 바닷속으로 빠졌다.
삼선호에 탄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러댔지만, 터키함대의 모든 함들이 그들처럼 잘 싸우지는 못했다.
중앙함대를 제외한 양익 함대에는 소총이 극소수 지급되고 있었기에, 유럽 함대에서 바퀴식 머스켓과
화승총을 쏴댈 때 터키군은 불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터키함대 우익을 맡고 있는 모하메트 시로코 제독은 베르세오와 곤살레스가 이끄는 페르난도 함대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터키 함대보다 우수한 함포를 보유한 아라곤 왕 페르난도 함선들은
먼거리에서 함포를 집중시켜 시로코 함대의 갑판을 유린한 후에야 근접전을 펼쳤다.
칼과 활로 무장한 시로코 제독의 함대는 용감히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음에도
전황이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적함이 좌현에서 추가로 나타났습니다.”
견시병의 보고는 모하메트 시로코제독에게는 거의 사형선고나 같았다.
가뜩이나 함선 숫자에서 밀리고 있었는데, 적은 예비 함대를 이곳으로 투입한 것 같았다.
“중군에 구원 요청 신호를 보내라”
“펑”
항상 중군을 향해 포문이 열려있던 신호탄이 노란 끈을 이끌며 하늘로 올라갔다.
“함대 돌격. 물러서지 마라.”
“두척씩 짝을 지어 적들을 집중 공격 하라. 우현 반타.”
이즈미르호에 타고 있는 시로코의 외침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조금만 버티면 예비 함대가 이곳으로
지원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시로코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아침에 시작된 전투는
정오가 될 때까지 지속되고 있었고, 주변 하늘은 불타면서 올라간 연기들로 가득 찼다.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자 하갑판에서 노예를 감시하던 감시병들이 선미와 선수에 한명씩을 남겨놓고
우르르 상갑판으로 몰려갔다. 터키함대의 노를 젓고 있는 노예들이 서로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평소 같으면 서로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죽도로 채찍을 맞았지만 감시자가 둘 뿐이라 조심스럽게
고개를 움직였다. 그들은 대부분 그리스도 교도들로 여기저기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병사나 해적들에게
잡혀 노예로 팔려온 자들 이었다.
온몸이 근육덩어리로 만들어진 알프레도가 맞은 편에 있는 노예 토마스에게 눈짓을 보내자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스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손도끼 한 자루가 떨어져 있었다.
상갑판에서 떨어져 내렸다. 잽싸게 도끼를 집어든 토마스는
자신의 먼저 손목에 채워진 쇠사슬을 힘껏 내리쳤다.
“쨍. 쨍”
“거기 뭐하나 ?”
감시자가 토마스를 발견하고는 칼을 빼들고 달려왔다. 마음이 급해진 토마스는 있는 힘껏 쇠사슬을
내리쳤다. 쇠사슬이 풀리며 두 손이 자유로워진 토마스는 이어 발목 사슬을 내리쳤다.
순식간에 기나긴 노예의 족쇄에서 풀려난 토마스는 손에 들고 도끼를 달려오는 감시병을 향해 던졌다.
“퍽”
머리에 정확히 도끼를 맞은 감시병은 눈을 부라리며 달려오던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선수에 있던 또 한명의 감시병이 활을 들어 토마스를 겨누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무기를 버려라.”
좌우로 움직일 수 없는 공간에서 활은 칼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토마스는 도끼머리가 떨어트린 칼을
가슴에 대고 숨을 골랐다. 주변의 노예들이 숨죽이며 둘의 대치가 어떻게 끝날지를 바라보았다.
“칼을 버려라”
다시 한번 소리쳤지만, 토마스가 칼을 버릴 기미가 없자 감시병이 화살을 날렸다.
쉬 이익하며 날아간 화살이 토마스의 가슴 앞까지 왔다.
“헉. 윽”
짧은 비명소리가 두 번 들렸다. 토마스는 팔에 화살이 박혀 있었고, 활을 쐈던 감시병의 목에는
손도끼가 박혀 있었다. 알프레도가 던진 도끼가 정확히 목표를 명중했다.
“어서 열쇠를 가져와”
팔에서 전해오는 통증도 잊은 체 토마스가 서둘러 감시병의 몸을 수색했지만 열쇠가 없었다.
그때 선수에 걸려있는 커다란 도끼가 눈에 들어왔다. 단 한번에 사슬을 끊을 수 있을 만큼 커
다른 도끼를 빼어든 토마스가 알프레도에게로 와서 족쇄를 내리쳤다.
족쇄에서 풀려난 수십명의 노예들이 토마스와 알프레도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상갑판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몰려들었다. 도끼 두 자루와 칼 두 자루 그리고 활 하나가 전부인 노예들이 쥐 죽은 듯
소리를 죽이며 계단으로 올라갔다.
“쏴라. 물러서지 마라.”
“탕탕. 펑. 꽈광”
상갑판으로 다가갈수록 전투상황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살아서 만나자. 가자”
토마스가 손도끼를 높이 쳐들고 갑판위로 튕겨나가고, 그 뒤를 이어 노예들이 줄줄이 뛰어나갔다.
혼란스러운 갑판은 그들로 인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우현 전타.”
“둥둥둥”
“우현 전타”
시로코는 적함이 좌측에서 다가오자, 이즈미르호의 방향을 바꾸어 평행선을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배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고 선회가 되지 않았다.
“부관. 우현 전타”
“키가 완전히 돌아갔습니다.”
“왜 배가 움직이지 안는 거야 ? 이런 노예들을 진압하라”
불길한 예감이 든 함장이 상갑판을 내려보았다. 노예들이 갑판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지만,
당황한 수병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토마스 바다에 뛰어들어 !”
한참 칼부림을 하던 토마스는 알프레도가 외치는 소리에 찔러오는 칼을 막아내고는 바다로 몸을
날렸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노예들도 줄줄이 바다로 몸을 던지기가 무섭게 폭발이 이즈미르 호를
휘감았다. 바로 침몰할 정도의 폭발은 아니었지만, 상갑판 곳곳이 너덜너덜해지고 불이 붙어있었다.
“불을 꺼라”
포대 옆에 항상 비치되어 있던 모래주머니와 물통으로 불이 번지는 것을 간신히 막은 이즈미르호는
완전히 기동력을 상실하고 전장을 표류하기 시작했다. 터키함대 우익함대의 기함이 무력화됨을
시작으로 페르난도 함대에 의해 터키함대 우익이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익에서 지원 요청입니다.”
시로코가 쏘아올린 신호탄이 알리 파샤의 눈에도 들어왔다. 중군도 박빙의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고,
예비대가 후방으로 빠져 있는 지금, 그에게는 우익을 지원할 함대가 남아있지 않았다.
“좌익에서도 지원요청 신호입니다.”
고개를 홱 돌리자 좌측에서도 노란색 신호탄이 하늘높이 올라갔다 떨어져 내렸다.
전체적으로 터키함대가 밀리고 있었다.
“대한제국 놈들은 어디 있는 겁니까 ? 지금쯤 나타나야 되는 것 아닙니까 ?”
“나타날 놈들이었으면 벌써 나타났다. 전 함대에 후퇴 명령을 내려라”
어쩔 수 없이 알리 파샤가 패배를 시인하고 함대에 후퇴를 알리는 신호탄을 쏘도록 명령했다.
이어서 신호탄이 오르고 후퇴를 위해 기함이 선회를 시작했다. 함대 기함을 엄호하는 전투함들이
천천히 선회를 마치자 최고속도로 수송함대쪽으로 움직였다.
“붙지 마라. 거리를 유지하라”
마누엘 스페인 함대 사령관은 배 한 척이 수송선에 접근하려 하자 급히 신호를 보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수송선 엄호 함대에 타고 있는 총병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총탄을 날리고 있어서 접근하면
수병들의 피해가 급증했다. 다행이 터키함대가 가지고 있는 함포는 위력이 약하고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아 위협적이지 못했기에 원거리 함포전을 치루며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발포”
적함이 함포 사거리에 들어오자 좌현에 배치된 20문의 함포가 일제히 포탄을 날렸다.
명중률이 형편없었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적함에게는 위협적이었다.
“우현 30도”
거리를 좁히려는 터키함대와 반대로 거리를 늘이려는 마누엘은 함대를 다시 뒤로 무르기 위해
선회를 지시했다. 그런 와중에서 우현포를 쏘아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12시 방향에서 수십 척의 함대 접근. 적 수송선 함대. 선수를 돌려 멀어져 갑니다.”
“멍청한 놈들. 자기편도 몰라보나 ?”
마누엘은 터키함대 수송함대가 12시 방향에서 다가오는 함대를 적으로 판단하고 도망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터키 수송함대는 후퇴명령을 받고 후퇴를 하고 있었다.
“계속 늘어납니다. 30척. 35척”
마누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적함의 숫자가 갈수록 불어나자 어리둥절 해졌다..
최고속도로 날려오고 있는지 양 함대의 간격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1시 방향 총함대 사령관 기함입니다.”
그랬다. 터키함대는 연합함대에 쫓겨 지금 도망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전 함대 죽을 각오로 적의 진로를 방해하라”
마누엘은 함대를 일렬로 세워 측면을 적에게 향하게 했다. 측면을 받치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치는
터키함대의 발목을 잡기위해 동귀어진을 택하고 나섰다.
“발포”
“서둘러 재장전 하라. 우현포를 좌현포로 이동시켜라”
거리가 가까워지자, 스페인 함대에서 연신 포탄을 날려댔다. 맹렬이 돌진하던 터키함대는 돌연 방향을
구십도 바꿔 스페인 함대와 평행선을 만들며 봉 곶 해안을 행해 나아갔다. 쾌속선 서너 척은 그대로
직진해 왔지만, 마누엘은 터키함대 본대의 진행로에 맞추어 전진해 나갔다. 스페인 함대은 티키함대와
상대속도로 움직이며 함포를 쏴댔다. 터키함대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그대로 맞으며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던 마누엘 함대의 피해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터키함대를 뒤따라온 연합함대가 뒤 썩이면서
다시 한번 난타전이 벌어졌다.
“전속력 항진”
이합 에사 살라몬은 알리 파샤가 미끼가 되며 항로를 열어주자 수송함대와 함께 말라가를 향해 전속
항진을 시작했다. 알리 파샤는 안전하게 후퇴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적들을 아프리카 해안으로
유인하는 동안 수송함대는 독자적으로 말라가로 향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쾌속선이 함대를 이탈했지만, 다행히 스페인 함대는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노를 저어라.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야 한다.”
40여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해역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남쪽 해역에서는 계속해서 화염과 시커먼 연기가 수평선 너머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놈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이교도 놈들…”
이합 에사 살라몬의 턱이 부르르 떨려왔다.
터키 해군 전사자 2만 5천명, 그리스도 연합 해군 전사자 칠천 여명을 내고 끝이 난 봉 곶 부근의
해전은 튀니지와 알제리 부근 해안에서 육상전으로 이어졌다. 터키함대를 끝까지 추격한 연합함대는
터키군이 배를 버리고 상륙하자 따라서 해안에 상륙을 시도했다.
도망치기 바쁜 터키군은 상륙하자마자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갔고, 연합군은 해안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었음에도 해안가는 새벽까지 훤했다. 버려진 터키함대가 불타면서 해안가를 비추고
있었고, 노예의 족쇄에서 해방된 그리스도교 일만여명이 자유로운 새벽을 만끽했다.
단기3959년(1626) 봄 신성로마제국 발렌슈타인 영지
발렌슈타인 공작은 지난 겨울에 있었던 전투로 인해 심각한 곤경에 빠져 있었다. 비록 구스타프를
죽이긴 했지만,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한 그는 사면초가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스웨덴과 프라하에
대한 동시 공격에서 모두 실패하고 페르디난트2세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오명까지 뒤집어 쓴 그에게
봄은 잔인한 겨울의 연속이었다.
“황제께서 공작에게 부여한 총 사령관직을 회수한다는 칙령입니다.”
“황제가 나에게 이럴 수는 없어. 누구 때문에 황제에 올랐는지 벌써 잊어 버렸단 말이냐 ?”
예상보다 빠른 행보에 발렌슈타인은 처남인 아담 트로츠카에서 역정을 내고 있었다. 자신의 군대가
구스타프에게 패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신성로마제국 대부분의 병력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방 영주들이 황제를 협박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다음 황제에 올려놓으려면 그들의 지지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
아담 트로추카의 추측대로, 신성로마제국의 지방 제후들은 발렌슈타인이 제국의 병권을 쥐고 있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웠고, 황제군을 십자군에 편입시킴과 동시에 발렌슈타인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황제의 아들을 다음 황제로 인정하겠다는 맹세와 함께. 그 맹세는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황제의 아들은 다음 황제가 될 수 없다는 협박을 동반하고 있었다.
“처남. 모든 장군들과 연대장들을 필젠으로 불러들여라”
아직까지 자신의 돈으로 병력을 먹이고 있는 연대장이나 장군들은 많았다. 발렌슈타인은 올 1월과
2월에 휘하의 장군과 연대장들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지 맹세가 생생히 떠올랐다.
그는 반란을 꿈꾸고 있었지만, 아담 트로츠카의 말은 그를 더욱더 비참하게 몰아갔다.
“황제의 칙령은 각 연대장에게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임 총사령관으로 갈라스가
선임되었습니다. 이미 저와 공작전하 그리고 크리스티안 폴 일로장군, 하인리히 홀크만, 케플러에
대한 체포.숙청 명령이 하달되었다는 풍문입니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지경입니다.”
“마티아스 갈라스 그놈이 총사령관이 되었단 말이냐 ? 일이 이지경이 되도록 장인어른께서는
아무런 소식를 주시지 않으시다니….”
그의 분노는 마침내 장인에게까지 이어졌다. 빈을 책임지고 있는 장인은 분명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자신에게 단 한 줄의 서신도 보내지 않았다. 장인만을 믿고 빈의 사정을 파악하지
않은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지만 사위를 배신할 장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보헤미안 놈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데 나를 버린단 말이냐 ? 이럴 수는 없어.
당장 영지의 군대를 소집해라. 내 돈으로 겨울을 보낸 놈들이 나에게 칼을 들이 밀겠다니. 하나님께서
그놈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정의가 살아 숨쉰다는 것을 기필코 보여줘야 겠다.”
두어달 전에 지지 맹세를 하며 자신에게 온갖 아부를 하던 장구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돈을 더 많이 지원 받으려 어려움을 토로했던 연대장들의 얼굴에 추악한 가면이 덧씌워지더니
이내 자신을 조롱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직까지 나에게는 용병대가 있다. 재기할 수 있어. 황제가 나를 버렸다면 나도 황제를 버리면 된다.
황제가 될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발렌슈타인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가 일생동안 이뤄놓은 일이 대지에 쌓인 눈이 녹과 함께
녹아 내리고 있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 수도 브루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칭송받는 도시 브루셀에 유럽 각국의 대표들이 신분을 위장하고 들어와
있었다. 영국왕 찰스1세와 프랑스왕 루이13세가 공동발의하고 스페인왕 필립4세가 적극 지지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각국의 대표들이 비밀리에 브루셀에 있는 루아얄로(路)에 있는 고풍스런
주택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조용히 하십시오. 우선 이렇게 회의에 참석해 주신 각국의 대사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두들 국왕의 친서를 소지하고 전권을 위임 받아 오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철저한 보완아래에 열리고 있는 이번 회의를 위해, 회의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주택에서 반경
500미터안의 주변 모든 주택을 주최측에서 임대하여 경호 병력을 위장 투입시키고 있었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도시 아래를 흐르는 제네강변에 수십척의 배를 띄워놓고 있었다.
브루셀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제네강과 수많은 지류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복개되어 수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다. 하지만 마차가 드나드는 길 아래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는 수로가 거미줄 처럼
엮어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 임시로 회의를 맡은 버킹엄입니다.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영국의 대사 자격으로 온 버킹엄이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임시 의장인 버킹엄공이 밝힌 내용은
회의에 모인 20개 왕국의 대사들을 경악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영국,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덴마크, 폴란드, 보헤미안, 토스카나, 아라곤, 러시아, 스위스,
교황청 그리고 소왕국들의 대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버킹엄의 입이 다물고 나서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니까 영국에서 파악한 바로는 대한제국이 터키제국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고,
프랑스 로리앙 지역에서도 역시 그들의 사주를 받고 있는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폴란드나, 우크라이나, 스웨덴, 네덜란드, 영국에서도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고,
발렌슈타인이 구스타프를 공격한 것도 대한제국이 관여되었다는 말씀입니까 ?”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폴란드 남부의 영주들이 지난 겨울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버린 사건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사고사로 위장된 대한제국의 술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거대하고도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적을 상대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들이 이미 우리들 코앞까지
다가왔으며,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그 때가 지났는지 모릅니다.”
“경께서는 대한제국을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것 아닙니까 ?”
신성로마 제국의 대사자격으로 온 기안 바티스타 제노가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며 말을 했지만,
그의 발언은 각국의 대사들에게 무시되었다. 해외정보에 어두운 신성로마제국은 이런 국제 회의에서
언제나 밀리기 일 수 였다.
“여기를 보십시오”
프랑스 대사로 참가한 리슐리외경이 지구전도를 펼쳐 벽면에 걸었다. 지도 맨 윗부분에는 대한제국
전도라는 글씨와 밑부분에 대한제국 황립지리국이란 글씨가 선명한 지도에는 도시이름 그리고 제주도
크기 이상의 섬들이 자세히 나타나 있었다. 거기에는 유럽인들에게 생소한 북극과 남극 그리고 호주
등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도시이름은 있지만 국경선이나 나라이름이 빠져 있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지도가 정확하다는 가정하에, 현재까지 파악된 대한제국의 영토는 여기 모이신
국가를 다 합친 것의 10배도 넘습니다. 인구 역시 그렇고, 보유하고 있는 군대 역시 그렇습니다.
육군만 100만이 넘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드러난 대한제국의 실체입니다. 그 뒤에 어떤 것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10년 전의 치욕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불과 20척의 대한제국 군함에 우리의 200척의 함대가 몰살당했습니다. 그때 연합함대와 싸웠던
대한제국의 함대가 그들이 보유한 함대 사령부 정도의 전력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
그런 함대를 대한제국은 무려 6개 이상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한 제국 육군은 폴란드에서
더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이번 로리앙 전투에서는 불을 뿜는 드래곤까지 등장했다는 풍문입니다.”
회의 참석자들은 리슐리외의 발언이 계속되는 동안 불신과 놀라움의 표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스웨덴보다 대한제국과 더 밀착되어 있다고 소문난 프랑스 대사가 한 발언이기에 좀더 신뢰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못 미더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 드래곤이라고 알려진 것은 대한제국에서는 비행기라고 부르는 하늘을 나는 기계입니다.
대한제국에는 이것 말고도 다른 종류의 비행기가 있다고 합니다. 심각한 것은 이것을 공격할 만한
무기가 우리에게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약점도 있습니다. 그건 무한정 하늘에 떠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 몇시간 하늘을
떠다니면 반드시 땅으로 내려 와야 하고, 그것도 평평하고 긴 활주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이용한다면 대한제국의 비행기를 공격할 방법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늘에 떠있으면 천하무적이지만 땅에 내려오면 전혀 힘을 못쓰는 것이 바로 이 비행기 입니다. ”
버킴엉공작이 리슐리외의 발언에 첨가를 하며 희망적인 의견을 내놓긴 했지만 모두들 표정이
시무룩했다. 영국과 프랑스 대사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의 왕국은 거대한 태풍 앞에
서있는 촛불과 같은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 그런 전력이라면 단번에 폴란드가 무너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국제실정에 가장 어두운 스위스대사가 폴란드 대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서 의문을 재기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 대한제국의 약점이 또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선 지리와 기후가 생소하고
극동에서 시작되는 보급로가 너무 길기 때문에 단기간에 폴란드를 점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파악된 정보에 의하면 대한제국은 지중해 크레타섬에
대규모 해군기지를 건설했고, 발틱해에도 신항을 건설하고, 심지어 프랑스 남부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준비가 점점 끝나 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힘을 다 합쳐도 대한제국 하나를 상대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
아닙니까 ?”
당장 대한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폴란드 대사는 현 상황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힘이 거대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실체가 이정도 일지는 몰랐다. 스몰렌스크에서 시작된
폴란드 영토의 축소는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제 민스크까지 줄어 들었고, 바르샤바가 위협 받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 드리기 전에 선결해야 될 문제가 있긴 합니다만.
그 선결 문제란, 바로 여기 모이신 분들이 공동으로 추대하는 왕을 선출하거나 기독교 사회 전체를
총괄하는 기구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 입니다. 분열된다면 대한제국의 침략에 차근차근 먹혀
들어갈 뿐 입니다.”
모든 이야기를 곰곰이 듣고 싶던 스페인 대사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해가며 옆에 있는 사람과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둘은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이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 폴란드는 의장의 제안에 찬성하는 바 입니다.”
가장 위협을 받고 있는 폴란드가 지지하는 발언을 했지만 다른 참석자들은 서로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는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영불 대사가 각국의 대사들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지만 그들은 같이 온 조력자들과 상의 하느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리슐리외의 눈이 스페인 대사의 눈과 마주쳤다.
“저희 스페인은 그라나다에 상륙한 이교도 놈들을 먼저 몰아낸다는 조건 하에 의장의 제안에
찬성할 용의가 있습니다.”
“바티칸은 지난번 밀라노 공의회의 연장선에 있는 의장의 제안에 찬성합니다.”
찬성 발언이 조심스럽게 이어졌지만,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스웨덴 대사에게
찬성국가의 대사들이 눈을 돌렸다.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스웨덴 대사는 구스타프가 전사한 이후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일고 있는 스웨덴의 국내 사정을 감안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입장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일단 반대하시는 분이나 기권하신 분들은 회의장에서 퇴실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밖에 나가시면 각자에게 머무를 곳을 안내해 줄 사람이 대기하고 있을 것 입니다.”
스웨덴 대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버킹엄 공작이 만류하고 나섰다.
“대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스웨덴을 대표할 수
없다면 대사 개인자격으로라도 남아계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훗날 이번 결정이 대사에게
좋은 일로 다가올 거란 생각이 안 드십니까 ?”
“개인자격도 가능하겠습니까 ?”
“귀국의 국내사정을 감안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요 !”
스웨덴 대사는 버킹엄공의 말을 곱씹어 보더니 다시 자기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여기에 앉아있는
것이 스웨덴 왕국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찬성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찬성한 것으로 스웨덴 대사로서
최선의 임무 수행을 했다고 변명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 러시아부 모스크바 근교
해질녘 황혼 속에서 다섯 살 된 딸과 갓 세 살이 된 아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정경일은
부인이 저녁준비가 다 되었다며 부르는 소리에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은미야 ! 경성아 ! 오늘은 그만 놀자. 우리 어머니께서 뭘 만드셨는지 알아 맞춰 볼까 ?”
“네. 아버지”
“그럼 은미부터”
“전 김치 찌개요 그리고 음… 삼치 구이 그리고 모르겠는데요”
마당으로 풍겨져 오는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던 은미가 생각나는 대로 음식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우리 경성이는 ?”
“맘마. 바아브”
세살박이 경성이는 무엇이 좋은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아버지에게 아장아장 걸어갔다.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려 목마를 태운 정경일이 성큼 성큼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잔디가 촘촘히 깔려있고 군데군데 서서 자라고 있는 커다란 낙엽송 밑에는 나무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아부지 저기”
무등을 탄 아이가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르키며 정경일을 불렀다. 군인이 아니면 보기 힘든 자동차
하나가 자신의 집으로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던 정경일은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집안으로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자동차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뜻밖에도 투박하게 생긴 네모난 군용 자동차에서
내린 사람은 군복이 아닌 경찰복을 입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 전 러시아부 경찰청 특수4부에서 나온 방문수입니다. 정경일씨 되십니까 ?”
경찰은 정경일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신분을 확인했다. 방문수는 경찰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특수부에 배치되어 수습딱지를 막 뗀 신출내기로 자신의 경찰생활 첫 사건을 조사 중에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인지 ?”
“아 네 별일 아닙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녁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더니 시장기가 돌긴 했습니다만 음식냄새를 맡으니 창자가 요동을 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저기 저분도 시장하실텐데 같이 드시죠 ?”
“감사합니다.”
방문수가 손짓을 하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자가 쪼르르 달려와 정경일에게 감사하다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정경일과 두 명의 불청객을 바라보던 김은아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두 사람의 자리를 만든다며 부산을 떨었다.
아이들은 이방인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감청색 경찰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정은미가
조심스럽게 제복에 손가락을 갖대 댔다.
“에게. 이거 나이롱이네 !”
만의류 러시아부 담당인 아버지의 직업때문인지 다섯 살 박이 은미는 옷감에 민감했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방문수의 눈이 똥그래지며 졸망졸망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꼬마가 나이롱을 알고 있네. 내년에는 면이 섞인 합섬섬유로 제복을 만든단다.”
방문수는 대견스럽다는 웃음을 띄고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꼬마 아닌데요. !”
“그래 ? 꼬마 숙녀님 이름이 뭐지 ?”
“꼬마 아니라니까요 ? 그리고 아버지께서 숙녀이름을 함부로 물어보는가 아니랬는데….”
“하하 하”
어린아이의 치기어린 대답에 모두들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이물질이 낀 것 같은 분위기가 정은미라는 윤활유로 인해 조금씩 변해갔다.
“그럼 못써 손님에게. 어른이 말씀을 하시면 대답을 해야지 ? 자자 식사들 하시지요 !”
김은아는 딸에게 주위를 주고 밥 두 공기를 더 퍼서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
은미의 입이 한자는 앞으로 삐져 나왔지만, 정경일이 숟가락을 들자 식탁에 모여든
여섯 명의 사람들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은미는 식사도중에도 힐끔 힐끔 방문수를 바라보았고,
불청객들은 연신 음식 칭찬을 하며 개걸스럽게 밥공기를 비워갔다.
“무슨 일 때문에…”
2층 서재로 옮긴 정경일은 방문수에게 방문 목적을 묻고 있었다.
식사도중 내내 생각했지만, 자신의 집에 경찰이 방문할 일이 없었다.
그것도 천군부와 관련이 있는 특수4부에서.
“책이 참 많으십니다. 親舊분 중에 강삼호라는 장교가 있지요 ?”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폴란드 전선에 나가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
정경일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눈빛으로 방문수를 바라보았다.
강삼호라면 4군에서 잘 나가는 장교로 그의 오랜 親舊이기도 했다.
“그분이 지난해에 실종되었습니다. 부대 이동 중 갑자기 사라졌다더군요.
4군에서 자체적으로 조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며칠 전에 사령부에서 정식으로 저희에게
협조공문이 왔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몇 가지 여쭤볼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요 ?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 삼호가 실종이라니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군요.
그런데 강삼호 여동생이 모스크바에 있는데 먼저 그분을 만나보시는 것이 순서가 아닐런지요 ?”
“이미 만나보았습니다만, 그 강영미 선생님께서는 요즘 두문불출하십니다.
오빠와 약혼자가 비슷한 시기에 실종되었거든요 !”
“네 ? ”
정경일은 강영미 약혼자도 실종되었다는 말에 외마디 경악성을 내질렀다.
자신이 알기로 강영미의 약혼자는 프랑스에 있었다. 두 사건이 상호 연결되었을 리 만무했지만,
강신승 장군에게서 시작된 강씨 일가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기만 했다.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너무 늦으면 모스크바 들어갈 때 복잡하니까요 !”
“자고 가시지요 ?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감사합니다만 할 일이 산더미 갔습니다.”
방문수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30분가량 나누고 서재를 나와 현관으로 갔다.
거실에 있던 아이들과 김은아가 일어나자, 방문수는 손사래를 쳤다.
“폐가 너무 많았습니다. 언제 한번 정식으로 답례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 숙녀 분에게도 ?”
“별말씀을 ! 손님대접이 소홀해서 흉이나 보지 않으실러지… ”
“아닙니다. 너무 맛있는 저녁이었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현관을 나와 차에 오른 방문수가 손을 흔들어 대자, 엄마의 치마자락을 붙들고 있던
은미가 빼꼼이 얼굴을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감찰관님 어떻습니까 ?”
방문수는 멀어져 가는 정경일 가족을 뒤 거울로 확인하면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에게
이번 방문 성과가 있었는지를 물었다.
“단순한 사건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어째거나 오늘 있었던 내용은 극비입니다.
특히 강삼호 소령이 유럽쪽 무기 밀매 희망자를 조사했다는 것은 일급비밀로 해 주십시오.
저는 내일 강영미씨를 다시 만나보겠습니다.”
강삼호 실종사건은 4군 헌병대에서 천군부 정보사령부로 이관되어 새로운 조사를 받고 있었고,
방문수 운전사 노릇을 하던 사내는 정보사령부에서 파견된 감찰관으로 이번 조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20명의 정보사령부 요원이 투입되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강삼호 소령에 대한 의문점만 점점 더 커지자
감찰관은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실마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습니다. 실마리를 찾기만 하면 조각 맞추기만 하면 되는데….”
지금까지 강삼호에 대해 수집된 정보는 책장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그의 군 행적은 차곡차곡 기록되어 정보사령부에 쌓여 있었다. 소령으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당하는 것이지만 비밀리에 수행되는 진급 검열로 인해 진급 전 1년 진급 후 1년 총 2년간의
행적은 날짜 단위로 보고서가 정리되어 있고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정보도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강삼호 실종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와 신항 주변을 구석구석 헤매던 방문수와 감찰관이 4군 사령부 기지 정문을 통과 하면서
머리에 쓴 털모자를 벗었다. 가끔 찾아오는 찬바람으로 인해 4월 말의 모스크바는 아직
겨울의 때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쥬신 대륙에 가봐야 하는 건가 ?”
이마에 난 땀을 손등으로 훔친 감찰관은 전임 4군 사령관인, 김경환 5군 사령관을 만나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스크바에서 그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면 지구를 한바퀴 돌아야 할
판이었다. 오늘도 별 소득이 없던 그들의 눈에 뜻밖의 광경이 들어왔다.
한 여자와 남자가 4군 사령부 감찰실 건물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글쎄. 저희도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서 애를 먹고 있다니까 그러십니다. 집에 가셔서 기다리세요.
거참. 이봐 경비병. 이 분을 정문까지 모셔다 드려”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을 가족에게는 실종되었다고 통보하는 게 무슨 경우입니까 ?
사실 확인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 담당 감찰관님은 도대체 언제 오십니까 ?”
“아니, 전투 중 폴란드에서 실종된 사람이 파리에 어떻게 갑니까 ?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야죠?”
앙칼진 목소리와 군인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4군 사령부내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진 방문수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리자 감찰관 역시 방문수를 따라갔다.
“아니. 강영미 선생님 아니십니까 ?”
통통했던 강영미는 그새 몰라보게 홀쭉해져 있었다. 감찰관의 얼굴을 알고 있던 강영미는
구원군이라도 만난 듯 반색을 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이제야 오십니까 ? 이걸 먼저 읽어보세요. 여기요 ?
오빠가 살아있어요. 최소한 폴란드에서 실종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강영미는 대뜸 감찰관에게 편지를 건넸다. 파리 공관의 직인이 찍힌 편지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내 읽던 감찰관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갔다. 필사의 탈출이 있기 직전 파리에서 보내진
한 통의 연애 편지에 쓰여진 두어줄의 문구를 읽는 순간 그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단기3959년(1626) 늦봄 스웨덴 수도 웁살라
스웨덴 왕가의 상징인 웁살라 성은 웁살라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 구스타프 바사가 만든 웁살라 성은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이래 스웨덴의 권위와 왕권을
상징하는 색체인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여왕 폐하. 그만 내려가시지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돌프 구스타프의 딸인 이자벨은 국왕이 유럽 원정길에서 전사하자, 왕위를 계승해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순위에서 밀려난 다른 왕위 계승권자들의 도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자벨은 이름을 크리스티나 여왕으로 불려지고 있었지만 아직 확고한 왕권을 확보하지 못한 체
카를스타드와 구신의 도움을 받으며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재상. 대왕이신 할아버지께서 이곳에 성을 쌓은 이유는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누르고
여타 권위로부터 바사 왕조의 권위를 수호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저 발아래 대성당을 보십시오.
밤색 지붕의 웅장함이 성당을 짓밟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
“제가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 여왕 폐하. 하지만 선왕께서 전사하시고 그 충격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지금이 가장 위험한 때이옵니다. 덴마크와 폴란드에서도 이번 일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벌써부터 지방 영주들이 그들과 내통한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휴우”
크리스티나는 시가지를 한차례 둘러보고는 성곽에서 성체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한걸음 내려 놓았다.
붉은 색 성체에서 발하는 빛이 언덕 아래에 있는 대성당을 감싸 안으며 길게 그림자를 늘였다.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한 재상이 노쇠한 몸을 이끌고 힘겹게 여왕의 뒤를 따랐다.
“그래 무슨 말씀이십니까 ?”
“네. 오늘 저녁에 대한제국 공사가 방문을 했었습니다.”
“그래요 ? 우리를 도와줄 의향이 있긴 있는 것 같습니까 ?”
여왕은 별 기대를 하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심 대한제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재상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을 달고 왔습니다. 그 조건을 우리가 수용한다면,
대한제국에서는 여왕폐하의 변함없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것이라는 약속을 해왔습니다.”
“무슨 조건입니까 ?”
“그것이 !”
재상은 여왕의 재촉에 말을 바로 잇지 못 했다. 말하기 민망한 듯 재상의 얼굴이
난처하게 변해갔지만 여왕의 재촉이 계속되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대한제국에서는 여왕폐하께서 지금 모스크바에서 유학중인 카지미에슈 바자와 결혼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도를 웁살라에서 스톡홀름으로 옮기고, 대한제국군의 사운드 해협의 자유로운
통항허가, 스타벵가르를 50년간 대한제국에 임대해주는 것,……”
“그만. 그만 하시오”
크리스티나가 더 듣기 싫다는 듯 양손으로 두 귀를 막고 소리쳤다.
재상은 여왕의 화난 목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원정군을 불러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이 돌아온다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
스웨덴 선조들인 바이킹처럼 발틱해를 스웨덴의 호수로 만들 원대한 꿈을 꾸며 내륙 진출을 꾀한
원정군은 뤼베크와 주변 항구도시를 장악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선왕의 충성스런 부하들은
자신에게도 충성할 거라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지 잘 알고 있었지만,
여왕은 그들을 굳게 믿고 싶었다.
“언제 올지 모를 일입니다. 벌써 내달째 급료가 밀려있는 상태이기에 영주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 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시간을 좀 주세요. 하긴 그 사촌도 나와 처지가 비슷하겠구려 !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요.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서……
차라리 당숙에게 왕위를 이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아니면 숙부에게라도. 여러모로 속 편할 것 같지 않습니까 ?”
“안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선왕의 복수를 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
더군다나 왕위를 이양하시면 여왕폐하는…”
카를스타드는 크리스티나의 당숙이 되는 크리티안 덴마크 왕에게 스웨덴 왕권이 넘어갈 경우
100년 전에 있었던 대학살의 재연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것은 숙부인 지그문트에게 왕위를 이양해도
다를 바 없었다. 더군다나 지그문트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스타벵가르를 양보한다면 노르웨이 반발이 심하겠군요…
왕권을 지키고 선왕의 복수를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
“죄송합니다. 여왕폐하”
카를스타드는 이번 혼례만 끝나면 재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대한제국에서 내건 조건에는
대한제국 사람을 스웨덴의 재상으로 임명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 로리앙 항구
외항에 정박하고 있던 2101전단 주위로 수많은 조각배들이 몰려들어 식료품 보급을 하고 있었다.
연료 잔량이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어 전단은 보급을 마치는 데로 크레타기지로 귀환해야만 했다.
여러 차례 전투를 겪으면서 농민군들은 점점 정예화 되어 갔고, 그 활동 지역을 비스케이만 남부로
넓혀가고 있었다 일천오백 여명의 여단 병력이 2101 전단에 몸을 싣기 위해 로리앙 항구에
집결하는 것을 바라보던 에드몽은 며칠 전 있었던 이길주 여단장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상부에서 저희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미 이곳에 가해진 압박이 해소된 이상 저희들이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
에드몽은 브루타뉴 반도를 포함하여 이미 확보된 지역을 위그노의 땅이라 세상에 공포하고
초대 왕이 되어 있었다. 언제고 이곳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제약할 것으로 생각했던 대한제국이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말에 에드몽은 만감이 교차했다.
구태여 그들을 잡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에게는 한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구교도이 걱정입니다.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
“그런 점을 감안해서 저희와 위그노간에 국가간 동맹을 체결한 것이 아닙니까 ?
귀국을 침략하는 것은 곳 대한제국을 침략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만약 귀국이 공격을 받게 된다면
저희 대한제국은 조약에 의거 즉각 파병을 할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조만간 본국에서 대규모 지원물자를 실은 선단이 이곳으로 도착할 것입니다.”
“네. 그건 그렇지요. 그리고….”
“또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 말씀해 보십시오 ?”
“이번에 고진영 대장도 같이 떠나는 것 입니까 ?”
“아닙니다. 고진영께서는 잠시 더 머물며 귀국과 대한제국간의 연락관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것을 안 드렸군요 ! 떠나기 전 드리라고 했는데..”
가슴에서 뭔가를 꺼낸 이길주 여단장이 에드몽에게 건넸다.
에드몽은 곱게 접은 종이를 펴 들고 내용을 확인하더니 얼굴색이 몰라보게 밝아졌다.
이길주 여단장을 선두로 여단 병력이 승선을 완료하자 2101전단이 천천히 외항을 빠져나갔다.
연통에서 검은 연기가 연이어 올라오더니 이내 색깔이 점점 흐려졌다.
며칠 전 이길주 여단장에게 받은 종이를 꺼내든 에드몽이 불티나를 잡고 불을 붙였다.
기름이 먹여져 있는 담보부 차용증서가 순식간에 불타 올랐다.
한동안 에드몽을 옥죄었던 문서가 한줌 재로 변해 바람에 날려 하늘로 올라갔다.
“그만 가시지요 폐하 !”
농민군 대장이었던 브루노 살라몽은 방위 사령관으로서 휘하에 삼만의 상비군을 지휘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제 2인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까 사령관. 남서부에 널리 퍼져있는 신교도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은 없는가 ?”
“아직은 미비합니다만, 루이 13세가 가만이 있지를 않을 터, 조만간 150만 위그노들이
폐하의 신민이 되길 갈망할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우리는 바로 그들과 우리의 신앙의 자유를 위해 지금까지 싸워온 것이 아닌가 ?
대한제국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말니야. 그래서 말인데, 백성들에게 대한제국군은 천군이었다고
설파해야겠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 그 천군말이야.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 위그노를 불쌍히 여겨 천군을 보내주셨다고 한다면 우리가 곧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가진 자들이라는 것이 되지. 칼뱅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어요.
구원받을 자들은 이미 태초에 결정된 것이었어.”
“그렇습니다. 폐하. 지금 떠나고 있는 저분들은 천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 혹자는 대한제국이 천국이라고 말한답니다.”
어느새 대한제국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브르봉의 말을 유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에드몽은
막 수평선을 넘어가고 있는 2101전단에게서 눈을 떼었다.
저 중 한 척만이라도 자신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앞으로 몇 년이 가장 중요해. 파리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주변 신교도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서 우리의 입지를 돈독히 해야겠어.”
브루셀에서 반 대한제국 동맹이 맺어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에드몽은 스웨덴이나 네덜란드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장미빛 환상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만 되면 자신은 지방 영주에서
일국의 왕으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많은 신교도들로부터 존경 받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던 에드몽은 보수가 한창인 성으로 말을 몰았다.
폴란드 바르샤바
겨우내 죽어나간 남부 폴란드의 영주를 새로이 임명하고 북부 영주들에 대한 견제를 하느라 길고도
바쁜 겨울을 보낸 지그문트는 어제 저녁에 있었던 영주회의를 다녀온 이래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대며 밤을 꼬박 세웠다. 어떻게 알았는지 북부 영주들은 지그문트에게 노골적으로 왕위를
바쟈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고, 자신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경우 영주회의에서
자신을 탄핵할 지도 모른다고 협박해 왔다.
“나쁜 놈들. 충성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영지만 지킬 수 있다면 자기 자식도 팔아먹을 놈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불구덩이에서 뒹굴다 소금에 절여지는 고통을 당하고,
그의 자식들은 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돌다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지그문트는 북부 폴란드 영주들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지만 성이 차지 않았다.
모조리 반역죄로 처단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런 일을 벌리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페하 ! 민스크 영주가 밤새 진영을 떠나 북으로 향했습니다.”
“뭐라고”
바르샤바 외곽 경비를 맡고 있던 민스크 영주 시메온이 자신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돌아간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바르샤바를 떠나버렸다. 민스크가 대한제국에 점령당한지 오래여서
그를 따르는 병사라고는 기병 100여기가 전부였지만, 그 파장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오늘 저녁 때 영주회의를 재소집한다는 전문을 보내라.
내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말과 함께. 알겠나 ?”
“폐하 ?”
왕권 이양을 수락했다고 짐작한 라울 스투카스가 경악성을 터트렸지만
지그문트의 다음 말을 듣고는 서둘러 지그문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병사들을 위장시켜 회의실 주변에 배치하고 회의가 끝난 후 대한제국의 협박에 굴복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드려. 죽여도 무방하다. 이 놈들을 더 이상 가만두지 않겠다.
그리고 추격대를 편성해서 시메온을 잡아오도록”
라울의 명령을 받은 전령들이 바르샤바에 모여든 영주들에게 지그문트의 말을 전하자,
북부영주들은 기쁜 마음으로 속속 영주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침통한 표정의 남부 영주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영주 회의실 주변에는 영주들이 대동하고 온 호위병들로 물 샐 틈 없이
경비가 되고 있었다. 빙 둘려져 있는 반원형의 회의실 중앙에 서서히 오른 지그문트가
영주들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떨구고 말문을 열었다.
“어제 밤에 배신자 시메온이 대한제국에게로 투항하기 위해 내 명령도 없이 진영을 이탈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반역행위로 그의 처단을 명령했습니다. 이미 추격대가 바르샤바를 떠나
시메온을 뒤쫓고 있습니다.”
“왕은 영주를 처단하려면 영주회의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으셨소 ?”
북부영주의 지도자 격인 빌뉴스 영주가 소리치자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그럼 경은 폴란드를 배신한 시메온이 잘했다는 것이오 ?”
“폴란드를 배신한 사람은 시메온이 아니라 바로 당신 아닙니까 ?
바쟈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것 입니까 ?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그대는 폴란드를 구한 영웅으로 대접 받을 수 있습니다.”
“모두들 빌뉴스 영주와 같은 의견이십니까 ?”
갓 영주회의에 참석한 7명의 어린 영주들이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그들은 아쉽게도 발언권이 없었다.
그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영주들은 지그문트의 눈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려버리고,
빌뉴스 영주만이 지그문트의 눈을 응시했다.
“좋습니다. 더 이상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 주시오.
대한제국은 지금까지 피지배국의 귀족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러시아 귀족들이 모두 어디론가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오.
난 이만 바르샤바를 떠날 생각이오, 나와 같이 갈 사람은 나를 따르시고 그렇지 않을 사람은 남아서
대한제국에게 당신들의 알량한 목숨을 구걸하시오”
지그문트가 왕위 이양서에 서명을 하고, 총사령관직에서 사임하는 서류를 내던지고
회의실을 박차고 나섰다. 우물쭈물하던 남부 영주들 중에 5명의 영주가 지그문트를 따라 나서자
회의실이 다시금 술렁거렸다.
“이제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지를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 서둘러 이 사실을
대한제국에게 알리고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의 신임 왕이신 바쟈왕을 모시러 갑시다.”
소란을 잠재우려는 듯 빌뉴스 영주가 목소리를 높이자, 북부 영주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치고
서로를 껴 앉았다. 영주들은 서로 자신들이 대한제국에 가겠다고 발 벗고 나서며 옥신각신 거렸다.
미리 대한제국에 눈 도장이라도 찍어놓으려는 얄팍한 수작을 벌이고 있었지만 누구도 영주 회의실이
라울의 근위대에 의해 포위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탕탕탕”
“무슨 소리야 ? 누가 여기서 총질을 해대는 거야 ?”
빌뉴스 영주는 갑자기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려오자 화를 내며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영주 회의실은 칼 이외에는 무장이 금지되어 있었고, 각각의 영주 직속 호위병들을 제외하면
출입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이봐.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와라”
빌뉴스 영주를 따라나 온 각 지방의 영주들이 복도로 나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모두들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탕탕탕. 지그문트가 배신을 했다!”
이어지는 총소리에 섞여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밖으로 향하는 복도로 우르르 달려가던 영주들이 뒷걸음질 치며 반대편으로 난 창문으로 달려갔다.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내 달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폴란드를 배신한 놈들은 멈춰라. 한발만 움직여도 벌집을 만들어 놓겠다.”
창문으로 다가가던 영주들이 뒤에서 들리는 협박소리에 주춤하며 몸을 돌렸다.
라울이 이끄는 근위대가 총구를 들이댄 체 복도 한쪽 끝에 가지런히 정렬해 있는 것이 보이자
모두들 지그문트에 대한 분노감과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발사”
“탕탕탕”
“움직이지 말랬잖아 ?”
단순히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10여명의 영주를 학살한 라울은 악마 같은 미소를
흘려보내며 쓰러져 있는 빌뉴스 영주에게 다가갔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빌뉴스 영주는
두 눈에 저주의 눈빛을 가득 담고 다가오는 라울을 바라보았다.
“뭘 봐 ?”
‘퍽’
라울의 오른발이 빌뉴스 영주의 머리통을 차버리자 부릅뜬 눈 그대로 영주의 목이 부러졌다.
복도에 쓰러진 자들의 숫자를 세던 라울은 머리숫자가 모자라자 눈을 부라리며 주변을 살폈다.
창문밖에는 자신의 부하들이 진을 치고 있기에 들키지 않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이 회의실에 들어갔나 보군. 들어가서 끌어내.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네. 대장님”
우르르 회의실로 들어간 병사들이 회의실을 뒤집어 놓으며 구석에 숨어있는 자들을 질질 끌어냈다.
너무 급작스래 일어난 일이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비상통로는 이용하지도 못한 체
지그문트를 반대했던 영주들은 라울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잡혀갔다.
잠시 목숨을 부지한 영주들은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
자신들은 대한제국에 폴란드를 팔아 넘기려 했다는 자백서에 서명을 하고 화형을 당했다.
터키제국 수도 이스탄불
황궁을 떠난 지 3년 만에 겨울 방학을 이용해 이스탄불로 돌아온 무라도 4세는 매일밤을 하렘 가에서
보냈다. 태후인 타라한이 모든 국정을 돌보고 있었기에 그는 아직 유명무실한 존재로서 오히려
무할라비나 타라한의 짐이 되고 있었다.
“좋구나. 좋아. 이런 오묘한 이치를 진작에 알았다면 세상살기가 더 좋았을 텐데”
침대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누워있던 황제는 여인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에 힘을 가했다.
여인이 아픈 듯 허리를 비틀었지만, 황제의 손은 더욱더 가슴을 옥죄었다.
“이랬단 말이지. 무할라비가 이랬었단 말이지 !”
어렸을 때 살았던 집 이층에서 문틈으로 엿봤던 어머니의 침실 광경은 두고두고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두려움에 떨던 소년은 침대 위에 있던 다리들이 뱀으로 변해 자신을 감싸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남녀간의 일을 이해할 만큼 큰 지금은 어머니와 무할라비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황제폐하. 아프옵니다.”
여인이 참다못해 얼굴을 찡그리며 볼멘소리를 해대자, 황제의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나는 칼리프이며 황제야. 나의 손길이 아프단 말이냐 ? 여봐라. 환관을 썩 들라”
“아니옵니다. 폐하. 하나도 아프지 않사옵니다. 폐하”
“네가 나를 능멸하려 하느냐 ? 내가 분명히 네가 아프다고 한 소리를 들었거늘.
그럼 내 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냐 ? 환관은 나를 능멸한 이년을 끌고 가 목을 쳐라.”
“폐하 ?”
오돌오돌 떨고 있는 여인을 측은히 바라보던 환관이 황제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황제는 알몸으로 일어나 환관을 따라온 경비병에게 다가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 들었다.
“아니다. 내가 직접하마”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여인은 반 실성하여 방안 구석으로 내몰렸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에도 여인은 계속해서 뒷걸음치며 가 들고 있는 칼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폐하! 살려주십시오. 어어엉”
여인의 숨 넘어갈듯한 목소리에 정신이 든 무라도 4세가 오른손에 든 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이내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모두들 나가봐라. 그리고 오늘 일은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라.
이번 일이 알려지는 날에는 이 방에 있던 너희들의 구족을 멸하겠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무라도 4세는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어린 소년이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가는 것이 보이자,
무라도 4세는 소년에게 올라가지 마라고 소리쳤다.
‘가지마. 애야, 가면 안돼’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의 입에서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년은 계단을 올라갔고 2층 복도로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안돼”
“무서운 꿈을 꾸섰나 보군요. 무엇을 보았기에 그리 잠꼬대를 하시오”
어느새 무라도 4세의 머리맡에는 황태후가 다가와 있었다. 아침이 되었는지 밖이 밝아 있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흥건히 적셔진 무라도 4세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니옵니다. 어인 행차시옵니까 ?”
“황제의 자는 모습을 보고싶어 이렇게 왔습니다. 왜 잘못되었습니까 ?”
“아니옵니다. 어머님”
“시녀들은 들라”
황태후가 소리치자 세숫물을 담은 그릇을 가슴위로 올려 든 시녀들이 들어와 황제의 몸을 씻겼다.
옆에서 흐믓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황태후는 자식이 장성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제 보니 황제께서도 혼인을 할 나이가 되셨습니다. 그려. 좋은 규슈를 알아봐야겠습니다.
애미가 국정에 바빠 이런 중차대한 일을 헤아리지 못했다니…
그나저나 서둘러야겠습니다. 아침에 조례가 있습니다.”
“조례라니요 ? 그건 어머님께서 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
“아닙니다. 황제께서 나오셔서 직접 챙기십시오. 이 애미는 뒤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번 해전에서 터키함대가 크게 패하여 사기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럴 때 황제께서 늠름한 모습을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보여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잠시 작은 기대를 했던 무라도 4세는 이미 풀이 죽어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필요한 때가 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타라한 황태후는 아직 자신에게 권한을 이양할 생각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대한제국에서 우리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동맹규약 위반이며,
과거에 우리가 그들을 도와준 것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옵니다.
하지만 증기선 5척을 우리에게 매각할 의향이 있음을 알려왔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재상 ? 이번에 잃어버린 함대를 재건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소 ?
“최소 6개월은 걸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유능한 해군을 구하는 것이 큰 문제이옵니다.
무라도 4세는 타라한과 무할라비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대한제국의 무기를 구입하느라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동방무역으로 벌어드리는 수입 대부분이 무기를 구입하느라 소진되고 있어서 큰일입니다.”
완전 독점이었기에 터키는 대한제국이 부르는 값을 군소리 없이 지불해야만 했다.
특히 소모성 총탄에 들어가는 돈이 막대했다. 자체개발을 시도했던 무할라비는
개발품의 불량률이 반반이라 할 수 없이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재상의 두 아드님이 잘 해주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더 힘을 써 주십시오.
그리고 내무대신 아바스가 우리의 요청을 거부했다지. 정벌군을 보내 아바스를 응징하도록 하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황태후 폐하. 지금은 아바스가 영국에 의지하고 있지만,
조만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황제폐하와 황태후 폐하의 넓으신 아량에 감읍할 것이옵니다.”
“아니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아바스를 폐하고 그의 아들 사피를 왕위에 올렸으면 좋겠어.
속주 이라크 파이샬에게 이 일을 맡기도록 하시오.
이교도와의 싸움에서 빠지려는 자들은 알라의 자손이 아니오”
점점 커져가고 있는 이란 아바스왕조를 못 마땅히 여기던 타라한은 이번 패전의 이유를 이란으로
떠넘기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묵묵히 타라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라도 4세는
연신 작은 한숨을 쉬어댔다.
중부 쥬신대륙 파나마 함대 사령부.
대한제국 원정군 위원회에서 내려온 명령문을 받아 든 함대 사령관은 올해의 건기가 끝 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먹구름들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천군부에서는 흡연자는 진급에 불이익을 준다는
엄포와 함께 군대 내 흡연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지만, 사령관은 옷을 벗으면 벗었지 담배를 끊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런 맛이라도 없다면 이런 곳에서 어떻게 버티라는 거야 ?”
한 모금의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내년에 있을 진급을 생각하던 사령관은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동파나마 분함대 사령실과 직통으로 연결된 수화기를 들었다. 자신에게 소장진급이 이미 물건너간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몇 차례 신호음이 들리더니 이내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동함대 사령실입니다.”
“사령 있나 ?”
“충성. 네 그렇습니다. 바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동파나마 함대 사령인 정한성 대령이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정한성 대령입니다.”
함대 부사령관직을 겸임하고 있는 정한성 대령은 매일 74킬로미터를 왕복하며 한시도 한자리에 앉아
있지를 못했다. 항상 돌아다니길 좋아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
한동안 기지를 떠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사령관은 괜한 걱정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 한동안 이곳을 떠나있어야 겠어 ?”
“네 ? 무슨 말씀이십니까 ?”
“신들의 전쟁을 시작할 모양이야”
“정말이십니까 ?”
전화선을 타고 정한성 대령의 놀라움에 가득 찬 목소리가 전달되어왔다.
“그래. 자세한 것은 내일 아침 회의 때 이야기 하고, 주요 지휘관들을 소집하게”
“네. 알겠습니다.”
딸깍하고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 너머로 정한성이 외치는 소리가 잠깐 넘어왔다.
언뜻 느끼기에 정한성의 목소리에서 들뜬 분위기를 느낀 사령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에 무법자. 정한성이 그 진가를 발휘하겠군”
사령관은 기지개를 한번 켜고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며 몸의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다.
무감각해진 세포들이 하나 둘씩 되살아 나고 뼈들이 제자리를 잡아가며 작은 마찰음을 만들어냈다.
반쯤 열려진 창문위로 빗방울이 하나 둘씩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소나기가 퍼부었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