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평등.박애를 이념으로하는 프랑스 혁명을 이루어낸 후 200년이 지났다.
하지만 현대사회가 과연 이러한 이념들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인 계급,
누군가의 성공을 위해서는 또 누군가는 실패해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그물망에서 평등의 실체를 망각하고 계급적 불평등에 익숙한 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한국인의 강남선망은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 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인상적인 고전이 있다.
바로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의 ‘구별짓기’(La Distinction·1979)이다.
이 책에서 그는 개인적 취향이 사회적으로 결정되며 이를 통해 '구별짓기'가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구별짓기란, 곧 계급의 차별화다.
계급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전통적으로 두 개의 큰 줄기가 있다.
마르크스는 경제자본을 절대시하는 반면, 베버는 사회적 지위나 평판을 중시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두 흐름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계급이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총합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두 자본은 서로 다른 자본으로 전환되는 고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문화자본은 물밑에서 은밀하게 계급을 구분하고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상.하, 1997. 새물결
계급 즉 권력의 다른 이름 '문화자본’
'계급은 교육과 부모의 배경에 의해 신분이 재생산된다. 즉 교육으로 신분이 대물림 된다'. 고
주장하는 피에르 부르디외는 프랑스 사회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로 부르디외 사회학의
상표가 되는 ‘아비투스’ 이론을 정립했다.
'부모에 의해서 교육과 자본으로 대물림 되어 계급은 상속된다.'
계급 즉 권력은 문화자본으로 그들은 그것으로 ‘구별짓기’를 한다.
특히 계급이 교육을 통해 대물림된다는 그의 주장은 프랑스 대학간 서열폐지 정책의 이론적 바탕이 되기도 했다.
소르본느 등 학교명으로 서열화되던 것을 파리 1대학 2대학.. 으로 바꿨다.
구별짓기’는 1960년대 프랑스 사회에 대한 광범위한 설문조사와 실증자료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보고서이다.
따라서 그러한 설문내용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여 조사·분석한 사례가 다수 있다.
- 한국사회 이론과 현실의 비교정치학 홍성민 저 | 살림출판사 | 2004년
그 결과를 종합해 보면, 한국 사회에서 문화적 취향은 소득수준별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오히려 성별 또는 연령별 차이가 더 뚜렷하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사회에서 아직 계급문화가 형성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배명자 역 | 다산초당 | 2020년 08월 03일
아비투스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
한국사람들이 강남을 선망하는 것은 고급문화에 대한 선망이라기보다 경제적 성공에 대한 욕망이다.
강남 주거지의 상징이랄 수 있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23개동 1500여가구, 1975년 완공)는 분양 당시,
각종 특혜와 뇌물로 제공되는 등 온갖 비리와 스캔들의 온상이었다.
아파트 유래와 유사히 오늘날에도 그곳은 여전히 ‘돈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나라를 뒤흔들고 대통령이 탄핵당한 최순실의 경우도 흥미롭다.
그가 가진 것은 돈과 권력이었다.
그는 이런 수단을 이용하여 딸에게 귀족 스포츠인 승마를 강요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일을 감당할 만한 ‘아비투스’를 갖추지 못했다.
우리나라 재벌 사모님들은 유난하게 미술관을 사랑한다.
문화적 과시를 넘어서 더군다나 그것이 세금과 관련되어서는 더 더욱 부자연스럽다.
어느 경우든 체화 형태의 문화는 단시간 내에 체득되기 어렵다.
이처럼 ‘구별짓기’는 외부로 객관화된 경제자본보다 내부로 은폐된 문화자본의 은밀한 기능에 주목한다.
물론 계급적 ‘아비투스’ 개념은 각자 자신만의 개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구별짓기’는 우리가 사회현상을 마주할 때 여전히 예리한 분석력과 통찰력을 제공한다.
부르디외는 <상속자들>(64년)에서 회사 간부 자녀들의 58%가 대학에 진학하는 반면,
노동자의 자녀는 1.4%만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통계에서 출발해,
학업적 성취의 불평등에서 문화적 요인이 지니는 중요성을 분석한 바 있다.
학교 제도속의 선택과 배제에 의해서 문화와 교육도 ‘재생산’되고 상속된다는 주장을 담은 이 책은,
부르디외의 이름을 프랑스 학계에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문화적 장에서의 부르디외 사회학을 일관하는 관심사다.
학교 졸업장으로 이루어지는 교육 자본,
가족에 의해 전달되고 상속된 문화 자본,
개인들 사이의 지속적인 관계망을 뜻하는 사회 관계 자본 등
부르디외 사회학이 사용하는 다양한 상징재(상징적 재화)의 개념들은 문화적 갈등, 상징적 갈등을 분석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다.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한 독일에서조차 노동자계급의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여 겪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이,
대학에서 쓰는 어휘와 집이나 자신의 계층에서 사용하는 어휘가 달라 어려움을 격는다는 말을 들었다.
20세기를 살아가는 유럽사회가 여전히 신분사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부르디외는 계급의 재생산 과정을 분석하면서 문화적 요인을 강조하고,
경제자본이 지식·취향·감성·교양·권위 따위의 상징재에 기초한 상징적 지배를 중시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직 경제자본에 편집적으로 매몰되어 있다.
우리에게 중산층의 조건은 30평형대 아파트,
중형차, 월수입 얼마 이상 등이다.
어떤 교양이나 문화를 가져야 하는지는 아예 비교 대상도 되지 않는다.
반면 서구에서 중산층의 조건은
취미생활, 페어플레이, 약자보호, 비평지구독 등이다.
경제적인 것은 굳이 따지지도 않는다.
전통적으로 서구권에서 중산층이라고 하면 보통 중산층 특유의 사고방식을 가진 개인 혹은 집단을 의미한다.
실질적인 소득 수준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이들 계급은 고유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그러한 이해관계는 곧 이를 정치화 할 수 있는 문화적인 배경을 가진다.
서양의 중산층은 다른 계층에 비해 취미나 특기, 관심사 등 개인적 성향이 매우 다양하다.
많은 선진국에서 중산층의 기준을 미술, 음악, 체육 분야에 해당되는 적어도 한 두가지 이상의 취미를
진지하게 가질 수 있는 계층으로 정의 내리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렇듯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개인들은 노동자 계급에 비해 반드시 금전적인 풍족함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특수한 소비 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중산층 집에 가보면 어떻게 이런 걸 가졌나 할 정도로 고가의 미술품이나 예술품 등이 있다.
부족한 상황에서도 그런 것을 소유 할 만한 심미적인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중산층은 어느 지점까지 경제적 수준을 확보하게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여유를 바탕으로 문화생활을 영위하는데,
접근성이 낮은 비싸고 어려운 취미가 아니라면 어지간한 것들은 중산층만이 향유하는 문화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중산층은 일반적으로 사회의 윤리 의식을 책임진다.
시민사회를 구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데,
본인들이 사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며,
그런 이유로 정치에 있어서도 상당한 주장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 일정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가지고 있으며,
영향력이 있거나 책임감, 전문성을 요하는 직종에 대다수가 종사한다.
노동자계급에 비해 도덕적 책무 혹은 윤리적 책임의식에 민감하고 추상적 사고에도 능하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의식,
자기 주장이 뚜렷하다는 점 역시 중산층의 특징이기도 하다.
상류층이나 중산층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그들 나름의 의식의 잣대가 있다.
이를 '계급 의식'이라고 한다.
정치 사회적인 스탠스에 있어서 '중소기업을 운용하는 사업가'는 '글로벌 대기업을
운용하는 사업가'와 마찬가지로 친기업적이고 사업가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을 찬성할 것이다.
'대기업의 억대 연봉 노동자'는 '일용직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을 찬성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급 의식'이다.
의식에 있어서는 상류층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업가들도 버는 돈이 다르고,
노동자 계급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소득 수준이 각각이다.
중소기업을 운용하는 사업가가 대기업에 소속된 특수한 고유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노동자보다
돈을 적게 벌 수도 있다.
이렇듯 중산층의 계급 의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소득은 각자 천차 만별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세 가지 자본 즉 소득과 소유권으로 이해되는 경제자본,
사람들과의 연결을 지칭하는 사회자본,
교육과 문화적 대상, 학위로 이해되는 문화자본이다.
부르디외는 교육과 문화가 사회계층에 따라 다른 내용을 재생산하고 있고 '문화자본'으로는 상당히 객관적인
내용을 가진 상징폭력이라는 주장이다.
‘구별짓기’(1979)의 중심 개념인 문화자본은 아비투스 즉 취향의 한 측면이다.
아비투스처럼 문화자본은 예술과 문화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 문화적 취향과 선호, 대학, 학위 등의 공식 자격,
문화적 기술과 악기를 다루는 능력 등의 실제적인 지식,
스스로를 차별화하고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능력 등 여러 측면을 가진다.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미학적인 판단으로 무엇이 고상하고 천박한 취향인지에 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는 철학적 사고를 비판한다.
그 대신 그는 취향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고 보았다.
‘구별짓기’는 프랑스 사회의 특정 계급과 직업집단이 음악, 예술, 음식에 있어 구분되는 취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문화자본이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를 반영하는 하나의 지표임을 드러낸다.
문화자본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동시에 구별과 불평등의 영속화를 도와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비투스와 마찬가지로 문화자본은 무엇이 가치 있고 없는지를 규정해준다.
‘구별짓기’에 묘사된 대로 문화자본을 더 많이 가진 엘리트집단은 자신들의 ‘고급문화’를 대중문화와 구별 짓고
정당화함으로써 문화의 위계, 더 나아가 계급의 위계를 영속화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문화자본은 교육을 통해 상속 가능하다.
그것도 경제자본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상속할 수 있다.
경제자본은 상속법을 만들어 손쉽게 상속을 제한할 수 있지만,
문화자본의 세습은 은폐되어 보이지 않게 상속할 수 있다.
문화가 사회계층에 따라 다른 내용을 재생산하고 있고 '문화자본'으로는 상당히 객관적인 내용을 가진
상징폭력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불평등 상태가 과거와는 달리 문화적 생활양식을 통해 개인의 무의식과 습관을 지배하고,
이러한 연유로 현대사회의 권력관계가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부르디외가 주장하는 상징적 폭력의 실체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적 기반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
예컨대 노동자들이 보수 정당에 표를 주는 것은 현대 정치에서 대단히 큰 논란거리다.
이러한 문제를 설명하는 데 부르디외의 해석은 큰 실마리를 준다.
- 베블런‘인간은 가난할수록 보수적이 된다?'
계급문화는 단시간에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도 개인의 삶에 있어서만큼은 자신만의 가치나 문화를 소중히 가꿔야 할 때가 되었다.
금전적 자산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적 자산도 헤아려 보아야 할 때다.
부르디외는 현대 프랑스적 의미의 가장 상징적인 지식인이다.
프랑스에서 지식인이란 ‘참여’ ‘좌파’와 동일한 의미다.
현실 참여는 곧 지식인이다.
그는 지배문화와 타협하지 않고 저항적인 학문 경향을 보이며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을 견지했다.
그 표상들에 작용해서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간 자신의 저작 활동과 실천을 통해서 그런 입장을 명백히 했다.
‘알제리의 노동과 노동자들’에서 보여준 알제리인에 대한 관심,
‘세계의 비참’에서 보여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폴란드 연대 노조에 대한 지지, 동성애 운동 지지,
86년 교육 개혁을 위한 학생 시위 지지, 88년 뉴칼레도니아 평화협정 지지,
2000년 겨울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지지가 그 예들이다.
그는 진보학자로 지성인의 현실참여는 '의무'이고,
지식인의 다른 이름은 '현실참여'로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