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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일
제1독서 : 욥 38,1.8-11
제2독서 : 2코린 5,14-17
복 음 : 마르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03년 봄,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KBS 라디오의 방송작가가 건 전화였습니다.
라디오 프로에 나와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을 잘하지 못하고, 혹시라도 교회에 누가 되는 말을
실수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주님을 알리는 선교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허락했습니다.
방송 녹음을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오후 2시에 라디오 홀에서 녹음하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생각만 하면 긴장되었습니다.
미리 방송국에 가서 대기하는데도 이 긴장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에 담당 피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믿음이 있으니까 처음으로 하는 방송이어도 떨지 않으시겠어요.”
아침부터 긴장하고 초조해하며 떨었는데….
피디의 말을 들으면서 제가 왜 이렇게 긴장하고 초조해하고 떨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저를 맡기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함께하지 않으니 떨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그렇게 긴장하며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뒤, 긴장하게 될 때 주님께 대한 믿음을 되새겨 봅니다.
주님만 믿는다면 긴장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그토록 의연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지친 이들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시는 분께서 오히려 지치셨습니다.
그만큼 전교여행의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기에 지치시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쳐 주무시고 계시는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지요.
이때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바로 스승인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놀라운 표징을 봐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겁을 내며 믿음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제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그마한 일에도 두려움을 갖고 얼마나 힘들어했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믿음 없는 모습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자들의 방법을 우리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주님을 부르면서 간절하게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힘으로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말끔히 지워주실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연중 제12 주일입니다.
불볕더위가 찾아오나 봅니다.
활활 타는 사랑의 불가마에서 단단히 정련되고 단련 받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바로 고통과 위기 속에서, 주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요청합니다.
때때로, 질병이나 고통이 우리의 삶을 비참한 상태로 몰아가고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자연 재해, 물질적 상실, 가정이나 공동체의 분열, 온갖 종류의 근심걱정, 시련과 박해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인이나 무죄한 이들이 불합당한 처사를 당해 신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원망하기도 하고, 억울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신앙을 흔드는 거센 풍랑에 휩싸이기도 하고, 믿음이 시험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 1 독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의인 욥이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왜 침묵하시는지?’ 따지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욥을 깨우치고자 하느님은 ‘누가 진정 하느님인지?’를 되물으십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 38,8).
“도도한 파도를 멈추게 하는 이는 누구이냐?”(욥 38,11).
오늘 <복음>은 바로 이 물음에 대답을 해줍니다.
곧 거센 바람을 꾸짖으시고 풍랑을 잠재우시는 바로 그분이 누구신지를 밝혀줍니다.
이를 대치되는 극한 상황을 통해 잘 드러내줍니다.
곧 바람과 풍랑에 겁먹고 두려워하며 죽음을 걱정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바람과 풍랑에도 편안하게 잠들어 계시며
권능으로 죽음과 풍랑을 잠재우시는 예수님 모습의 대치를 통해서 드러내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때는 저녁이 되었고 어둠이 닥쳐오는데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임을 알려줍니다.
호수 건너 저편, 생명의 뭍으로 가는 여행,
예수님께서 바로 이 여행을 이끌고 계시며,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칩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 함께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뱃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바로 여기,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 순간이, 바로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입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도 주무신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내줍니다. 시편작가는 말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기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풍랑은 잠재우고,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깨우십니다.
곧 풍랑을 향해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며,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
렇습니다.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시편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능하시고 진실에 쌓여 계시오니,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의 생명으로 깨우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들어주시지 않으신다고 투정부릴 때,
곧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라고 투덜댈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입니다. 아니, 바로 그 때가 불신에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바로 그 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시며,
제자들을 불신의 어둔 잠에서 깨우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제2 독서>는 바로 이러한 그분의 사랑을 전해줍니다.
곧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평화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우리에게 거센 풍랑 속에서도 평화를 줄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당신께서 함께 계시는 사랑입니다.
이제,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새로운 건너감으로 초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예수님이 호숫가에서 군중에게 비유로 많은 가르침을 주신 뒤 제자들에게 제안하십니다.
"건너감"은 성경에서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물을 건너는 매우 상징적인 체험으로 초대된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거센 돌풍으로 배에 물이 들어차는 돌발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태평스럽게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시니
다급해진 제자들이 스승을 깨우며 외치지요.
물일을 했던 제자들은 물이 생명이면서 동시에, 동전의 양면처럼 죽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본능과 체험으로 알 터이니 얼마나 겁이 났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올 때도 그랬습니다.
갈대 바다와 마주치자, 앞으로는 검푸른 바닷물이, 뒤로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을 해오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탈출 14,10)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이집트 탈출 때 모세가 주님의 분부대로 지팡이를 뻗자 바다에 길이 납니다.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님은 말씀으로 바람을 꾸짖고 호수에 침묵을 명하시지요.
그분 말씀에 곧바로 순종한 바람과 물결을 보며 제자들은 얼이 빠집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처럼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고 주권자이심을 본 것이지요.
이것이 제1독서에서 주님이 욥에게 물으신 질문의 답입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 38,8)
고통과 억울함에 차서 주님과 시비를 가리려는 욥에게 주님께서 물으시지요.
온 세상 만물과 자연 질서를 주관하시는 분께서 마치 모든 걸 아는 듯
결백을 주장하며 따지는 욥을 새로이 깨우쳐 주시려는 겁니다.
"여기까지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욥 38,11)
주님께서 자연에 이렇게 명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를 건널 때의 주님의 생각이고,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풍랑에게 던지신 일갈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면 하느님 자리에라도 있는 듯
불행과 고통에 분개하는 피조물 욥에게 선을 그어주시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외부적 파도와 돌풍 못지않게 요동치는 제자들의 내면을 두드리십니다.
죽을 것 같았던 두려움과 공포가 지나간 뒤 예수님께서 "믿음"을 확인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건너감입니다.
물을 건너면서 죄로 물든 옛 사람이 죽고, 믿음으로 거듭 난 새 사람으로 탄생하는 것이 세례지요.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를 건너며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듯,
풍랑으로 죽을 위기를 넘긴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요구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죽음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이스라엘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나고,
제자들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정립해야 하듯,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 역시
새로운 피조물로써 그분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삶이 그다지 녹록치 않지요?
좋고 행복하고 기쁠 때도 분명히 있지만 내 맘 같지 않은 혼돈과 불안,
어둠과 고통이 곳곳에서 요동을 치는 게 인생이니까요.
막막한 인생의 바다를 두려움과 불안에 싸여 건너는 우리가
그 파도와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이미 이 물에서 죽음을 건너 생명을 얻은 존재라고 굳게 믿는 것,
둘째, 매일 그 믿음을 갱신시켜 주시는 말씀을 꼭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다시 힘을 얻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미 죽음을 건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83년의 기억입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본당의 여름행사를 마치고, 성당 주일학교 교사들의 여름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당시에는 여름행사가 많았습니다. 고등부는 지리산으로 산행을 갔었고,
중등부는 용문청소년 수련장에서 다른 본당과 함께 수련회를 하였습니다.
초등부는 성당에서 놀이마당을 했습니다.
교안을 만들고, 물품을 준비하고, 율동을 연습하면서 여름을 보냈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수고했던 교사들 30여명이 안면도로 3박4일 여행을 갔습니다.
민박집에 머물면서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고, 낚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여름, 젊음, 바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1983년의 여름 안면도를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잊지 못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랜턴의 건전지가 떨어져서 몇몇 여교사들과 건전지를 사러 바닷가의 가게로 갔습니다.
건전지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동네 청년들이 우리를 불렀습니다. 제게 말을 걸었는데 저는 솔직히 무섭기도 하고, 두려웠습니다.
캄캄한 밤이었고, 청년들이 몇 명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에 중등부 교사인 홍 데레사가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동네 청년들은 이상한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초등부 교사인 강 막달레나는 조용히 빠져나와서 민박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떨고 있었는데 한명은 묵주기도를 하였고,
다른 한명은 어둔 밤을 헤치고 민박집으로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다행히 민박집 주인과 교사들이 왔고, 모든 일은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두려움은 캄캄한 어둠과 같습니다. 작은 불빛은 어둠을 밝혀 줍니다.
믿음의 불빛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려움은 조심해야 하지만 무서워 할 것은 아닙니다.
행동은 두려움을 벗어나는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1년 넘게 코로나 팬데믹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결핍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미사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미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시간,
영성체가 얼마나 은혜로운 선물인지를 절절히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사제들은 신자 없는 미사를 지내면서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가 얼마나 풍요롭고 은혜로운 것인지를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일상을 잃어버리고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게도 지난 1년은 결핍의 시간이었습니다. 성지순례도 취소되었습니다.
어렵게 약속을 잡았던 신문홍보도 취소되었습니다. 사순특강도 취소되었습니다.
매달 결산을 하면서 늘어나는 손실에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러나 동료사제들과 정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텃밭을 가꾸면서 결실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줌으로 강의를 시작하였고, 회의도 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분명 불편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수녀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명단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넣으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나의 이름을 기억하심을 믿습니다.
또한, 체온을 측정하면서,
내 마음 안에 사랑의 온도는 얼마나 될지 헤아려 봅니다.
손 소독제로 손을 닦으면서
하느님 앞에는 깨끗한 손, 빈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필요 없는 말을 많이 했는지,
과식 과음했는지를 반성하면서 말을 줄이고, 덜 먹고 덜 마시기를 다짐해봅니다.
성당에 들어가서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서
하느님이 내게 정해주신 자리를 찾았는지 성찰해봅니다.
사회적 거리를 두기 위해 띄엄띄엄 앉으면서,
내 이웃 사람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해주었는지 반성해봅니다.”
오늘의 제 2독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풀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의 억울함을 서로 풀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 시켜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화해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백신은 공공재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국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교회가 교황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개발한 백신을 한국에서 생산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산된 백신이 공공재로서 모두에게 나누어지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조심하면서, 가진 것을 나눈다면 곧 일상의 삶으로 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 없이 사는 유일한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 주제는 ‘믿음과 두려움의 관계’입니다.
당연히 믿음과 두려움은 반대입니다. 두려우면 믿을 수 없고 믿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 배 위에 있던 제자들은 두려워했기에
자신들과 함께 있었던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두려움이 인다면
어쨌거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든 두려움이 생기는 근본 원인은 ‘생존’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나를 생존시키기 위해 나와 동일시한 모든 것입니다.
나 자신과 나의 육체, 그리고 그것을 생존시킬 수 있는 재물과 명성,
그리고 자녀, 인간관계나 내가 속한 공동체입니다.
내가 나와 동일시하는 것들을 잃는 것은 곧 나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요?
세상 가장 큰 부자도 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면 두렵지 않을까요?
그도 분명 죽을 것입니다. 생존문제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은 벗어나려 할수록 더 두렵게 합니다.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날 방법은 죽음뿐입니다.
죽지 않는 이상 죽음의 문제는 영원히 나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림자를 무척 두려워하였습니다.
도시에 있어도 건물의 그림자가 있고 숲으로 가니 나무의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사막으로 가니 자신의 그림자가 쫓아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그림자를 떨쳐버리려 사막을 걷다걷다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포기하듯 나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죽음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살하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사실 사랑하면 자연적으로 나의 생명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사랑이란 죽어가는 것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 5월 22일 영국 맨체스터 경기장에서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콘서트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자살 폭탄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이 테러로 23명의 목숨이 희생되고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경기장 인근에 있던 노숙자 스티브 존스는 폭죽놀이인 줄 알았던 굉음에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자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하고 친구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은 수많은 사람과 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존스와 친구들은 몸에 못이 박힌 채 울고 있는 부상자들을 부축하고 지혈을 도우며 보살폈습니다.
존스의 위대한 선행에 대해 사람들이 칭송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우려는 본능이 있고 그것이 우리가 한 행동입니다.
만약 그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면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티브 존스는 하루하루 구걸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장 내일 생존할 걱정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차 테러가 있을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부상자들을 떠나지 않고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상하게도 편안하고 살 걱정이 없는 상황에서는 모두 죽음에 대해 걱정합니다.
그러다가도 막상 죽음의 공포 속으로 들어오면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아깝지 않게 여기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존스는 그것을 ‘본능’, 곧 ‘양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 배 위에서 제자들이 찾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분을 깨우지 않으면 죽는 것이 그리도 겁이 납니다.
두려우면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존을 단축하거나 심지어 생존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죽음 방법은 ‘아사’(餓死)였습니다. 굶어 죽는 것입니다.
만약 콜베 신부가 굶어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사랑을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죽음의 두려움 없이 살려면 죽음보다 소중한 가치인 사랑을 일깨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금 지옥 불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옥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본성을 깨워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는 내 안에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본성을 일깨울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만이 살려고 하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만이 두려움 없이 사는 유일한 길이고 참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류해욱 요셉 신부
오래전에 일본에 훌륭한 무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폭풍우에 배는 금방이라도 파선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아내가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갖고 있던 칼을 빼어 들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 칼이 무섭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그 칼이 사랑하는 당신 손에 있는데 왜 무섭겠소.
그런데 이 상황에 왜 갑자기 칼을 빼어 나에게 보여 주시는 거요?”
무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칼이 무섭지 않듯이
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폭풍우가 무섭지 않소.
이 칼이 내 손에 있듯이 이 폭풍우는 하느님의 손에 있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절대로 우리를 해치지 않으실 거요.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 말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폭풍우는 잠잠해지고 미풍이 불어왔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은 지녀야 하겠지만 두려워 떨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지었기에 두렵다고 합니다.
죄를 지어 두려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죄는 피해야 하겠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죄를 짓고 하느님을 피해 숨는 그 행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오히려 용기를 갖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 앞에서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도 그렇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다르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작은 머리 안에 하느님을 집어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리의 사고 안에 다 잡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어떻게 했습니까?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느님 눈에 띄지 않게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몰라서 부르신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이 스스로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상처가 햇빛을 쏘여야 낫듯이 죄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하느님을 뵈어야 낫을 수 있기에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담은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답했습니다.
“두려워 숨었습니다.”고.
복음서 안에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이 수없이 나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두려움은 우리를 작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바로 불안의 전주이고 불안은 옛말처럼 마귀의 운동장입니다.
불안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쉽게 유혹에 빠집니다.
하느님께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유혹, 책동입니다.
죄를 짓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잘하는 일인 줄로 착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찬란한 착각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착각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옵니까?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참으로 사랑이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두려워 숨지 않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서 “잘못했습니다.”하고 용서를 청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때마다 용서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벼룩이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같은 죄를 자꾸 짓고 또 고백성사를 보느냐고 합니다.
실은 자기가 쩨쩨하니까 하느님도 그렇게 쩨쩨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가 번역한 ‘일상 삶 안에서의 영신수련’이라는 책에 있는 작은 환상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립니다.
제목이 ‘가장 처참한 죄인에 대한 작은 환상’입니다.
<너무나 무서운, 누구도 죄목조차 댈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을 상상한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였다. 그는 그러한 죄를 범하고 또 범했다.
그러나 마침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심했다.
그는 하느님께 가서 고한다. “저는 죄를 뉘우칩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신다.
“무슨 죄인데?” 그는 자신의 죄목을 댄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래, 나는 네가 자신의 죄에 이름을 붙이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다려 왔다.
지금 네가 네 죄를 뉘우치니 기쁘기 그지없다. 이제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
그 사람은 기쁨에 넘쳐 돌아왔다.
일주일 동안은 그 무서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또다시 죄를 짓고 말았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그는 두 번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고했다.
“주님, 저는 또다시 그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셨다. “무슨 죄인데?”’
하느님은 우리가 한번 용서를 청한 죄를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 고 묻는 베드로에게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일곱 번 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용서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거꾸로 당신도 용서에 한계를 두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