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제1독서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12-15
그 무렵 베텔의 사제 12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1,3-1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요즘엔 왜 기적이 적게 일어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는 능력을 받고 파견받습니다. 병의 치유는 하느님만의 능력이고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치유의 기적을 좀처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그냥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세상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예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한 중년 남성이 자전거를 탄 10대 소년이 차에 깔린 것을 보고는 얼른 달려가 차를 들어 올렸습니다. 소년은 극심한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아저씨, 조금만 더 높이요, 조금만 더 높이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중년 남성은 차를 20센티미터 이상 들어 올렸고 그 소년을 친 운전사가 소년을 빼냈습니다. 그는 “사고 현장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어요. 그 소년에 제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거였죠.”라고 말했습니다. 중년 남성의 이름은 톰 보일이고, 이 일은 2006년 여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뜻밖에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2005년 여름 영국 선더랜드에서 친구와 함께 캠핑하던 23세 카일라 스미스는 차를 나무에 들이박는 사고를 당해 차가 뒤집혔습니다. 신장 165센티미터의 가냘픈 스미스는 자신도 등뼈 두 마디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과 함께 타고 있던 친구를 빼내기 위해 차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무조건 차를 들어 올리지 않으면 친구의 다리는 못 쓰게 되니까요. 그래서 제 팔을 운전석 창문으로 넣어 차 지붕을 밀어 올렸죠.”
스미스는 BBC 등 영국 언론에 나와 자신의 몸무게보다 20배가 더 나가는 무게를 들어 올릴 당시 자신은 차 무게에 관한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출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이런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할 때의 특징은 ‘사랑’은 있는데 더는 줄 것이 없는 상태라는 데 있습니다. 이를 ‘가난’, 혹은 ‘청빈’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이르셨습니다. 억지 가난이 아닌 다 내어주어 더는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당신 영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이지만, 2017년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며 후원금을 모은 뒤 수만 명으로부터 120억 원이 넘는 기부금을 모아 외제차를 사고 요트 파티를 하는 등 호화 생활을 즐기는 데 쓴 일당이 잡힌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들도 받은 돈 일부를 후원하기는 하였습니다. 사진은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알고 그들에게 기부할 사람이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병원에 갈 돈 정도는 줄 수 있으면서 그것은 아끼고 주님께 치유의 기도를 하면 들어주실까요? 하느님은 조롱당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교회에 기적이 없다면 아직은 교회가 신자들이나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이 남아있기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교황이 교황청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온 유럽 전역에서 걷은 돈들이 수레에 실려 교황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자랑스럽게 “저것을 보아라. 이제 베드로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사도 3,6)라고 하던 때는 지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도 “맞습니다. 교황님, 이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라고 하던 때도 지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페루 리마의 성 마르티노 수사는 흑인입니다. 수도회의 재정 사정이 나빠지자 그는 자기를 노예로 팔아 수도회의 재정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줄 때 빵이 무한정 늘어나는 기적도 일으켰습니다. 이런 분들의 시복·시성 조사 때 꼭 하는 게 기적 심사입니다. 성인의 생전에 일으킨 기적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뒤에 거룩함의 표징으로 일어나는 기적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은 곧 죽음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성인이 더는 줄 것이 없이 되었을 때 분명 그 성인을 통해 당신께서 더 내어주십니다. 이러한 표징들이 많아야 초대 교회처럼 다시 뜨거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한 남성이 상체에 ‘타투’를 했습니다. 자기 친구들이 많이 했고, 또 그 친구들이 자신감 넘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정했습니다. 이 남성의 어머니께서 우연히 아들의 타투한 것을 보았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김치 담던 반찬 통으로 아들의 머리를 두들겨 패며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사실 이 남성은 부모의 말씀에 늘 순종하며 살았던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할 때마다 긴소매 티셔츠를 입거나 토시를 해서 상체의 타투를 가렸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운전하다가 전방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신호를 기다리는 앞차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잠시 뒤에 앞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고 우락부락한 모습의 운전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빨리 윗도리 벗어!”
숨기고 싶었던 아들의 타투가 이런 상황에서는 드러내고 싶었나 봅니다. 이렇듯 숨기고 싶은 면이 때로는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잘못이라고 단정지었던 것이 아닐까요?
섣부르게 단정짓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찾으려 노력하면 어떨까요? 그러나 만약 도저히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라면 과감하게 그만둘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하시지요. 부족함 없이 챙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게 다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에 제자들은 모두 실망했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부족하고 나약하다고 생각해서 예수님 없이 그 모든 것이 가능할까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가지고 있는 것까지 놔두고 떠나게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만을 모시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할 것을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평생 제자들과 함께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곧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늘 나라에 자리 잡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늘의 가치를 좇는 삶입니다. 사랑만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세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할 것을,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명언: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힘써라(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사진설명: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