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상자 시론(詩論)
- 함민복
종이상자가 납작하게 접혀 있다
종이상자는 겸손하다
물건을 담기 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이상자에도 글씨가 있다
글씨가 내용이 되지 않고
내용물을 대변한다
주로 질 낮은 종이로 만든다지만
파도 모양 골판지로 음양의 힘을 깨치며
중심에 어깨 맞댄 비움의 뼈대를 촘촘히 세운다
종이상자는
나란히 연대하고
차곡차곡 공간을 절제한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담아내는
시(詩)가 더 깊은 시라면
종이상자는
과묵한 시집이다
나무처럼 우직한 시인이다
ㅡ『창작과 비평』(2016. 여름)
*****************************************************************************
애초에 종이상자는 내용물을 나타내고 소비자에게 안전하게 배송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번 그렇게 쓰이고 나면 첫 역할을 사라지고 두번째 역할만 남아 재사용됩니다
과일상자에 담기는 내용물은 구구각색입니다
얼마전 설 준비를 하고 돌아오면서 라면박스에 온갖 제수를 담아왔습니다
갖가지 과일, 육고기, 생선과 나물을 함께 담았지요
서로 다른 쓰임새가 연대하여 차곡차곡 담긴 채 우리집 부엌까지 닿은 것이지요
최근에 배달된 시집에도 온갖 사유가 숨을 죽인채 조용히 움츠리고 있었는데
한 장 한 장 펼쳐 읽을 때마다 되살아나면서 기지개를 켜더군요
종이상자가 접혀서 쌓였고, 한 번 읽은 시집도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언제 부활할 지는 아직 미정인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