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를 따라 처음 서울 올라온 날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강남터미널 주변에 아파트가 드문드문 있었던가? 촌닭은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해서 멀미를 했던 것도 잊고 두리번거렸다.
누이는 버스 안에서부터 서울은 눈 뜨고 코 베가는 곳이니 단디 정신 차리라 했고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도 절대 먹지 말고 따라가지도 말라고 주의를 줬다.
누이 공장이 있는 인천까지 가야 하는데 문맹인 누이의 가장 큰 무기는 무조건 주변 사람에게 묻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르쳐준 대로 가다가도 마주치는 사람이 있으면 맞는지를 또 물었다.
강남터미널에 지하철이 없던 때라 버스와 전철을 번갈아 탔던 기억뿐 어떻게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누이는 부평역 부근의 여인숙에 나를 맡기고 공장으로 돌아갔다.
누이는 길을 잃는다면서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라 했고 몇 개의 빵과 먹을거리를 사다 주면서 얼마의 돈도 주고 갔다. 다음 날 데리러 온다던 누이는 이틀 만에 왔다.
웬 중년 남자와 함께였는데 신문보급소 소장이었다. 한동안 나는 이곳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당시 신문보급소에 딸린 골방이 있었고 여러 명이 함께였다.
어떻게 누이가 이 사람과 연결되었는지 몰라도 소장은 내게 잘 대해줬다. 그가 나의 두 번째 인생 스승이다. 배달원 대부분이 고등학생이거나 더 많은 나이여서 내가 막내였다.
누이는 몇 달만 여기서 지내다가 자기가 방을 얻으면 그때 함께 살자고 했다. 누이는 당시 형광등 공장 옆에 딸린 기숙사에서 동료 여공 두 명과 함께 살았다.
누이가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곧 나와 같이 지낼 줄 알았는데 웬 남자와 동거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오랜 기간 누이의 인생을 망친(?) 키 작은 남자를 증오했다.
지금이야 매형이라고 부르지만 키 작은 남자와 얼굴 마주치는 것을 거부했다. 누이 집에 가더라도 그 남자가 없을 때만 갔고 있다가도 남자가 오면 서둘러 나왔다.
내가 막 자위행위도 알고 뭐든 반항부터 하고 보는 사춘기 때이기도 했지만 그 사람이 누이와 나를 갈라 놓았다는 미움이 가장 컸다.
어머니도 누이가 몇 년만 있다가 결혼을 했으면 돈을 벌어 집에도 좀 보탰을 것이라 아쉬워했는데 나의 학교 생활도 비교적 순탄했을 것이다.
나는 이듬해에 들어간 중학교를 1학년만 다니고 그만 둔다. 사연이 있으나 오늘은 그냥 지나간다. 내가 한 해 쉬고 중학교를 갔기에 63년생 토끼띠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나는 몇몇 연락이 닿는 그들을 만나면 귀여운 자식들이라 부르며 대장 노릇을 한다. 제일 찌질하게 살지만 그들도 내가 늘 1등을 했다는 걸 알기에 친구들은 눈감아 준다.
나는 평생 주류에서 비껴난 주변인으로 B급 인생을 살았다. 친구도 62년생과 63년생이 반반씩이다. 예전엔 이것이 어느 한쪽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 컴플렉스일 때도 있었다.
양쪽에 반씩 친구를 둔 경계인 입장에서 본 바로는 62년 범띠 친구 만났을 때와 63년 토끼띠를 볼 때 확연히 차이가 남을 느낄 때가 많다. 정치 성향도 63년생이 진보적이다.
옛 추억담을 말해도 63년생은 80년대 추억을 말하는데 62년생은 70년대 시절을 끄집어낸다. 어느 한 쪽을 폄하 하자거나 더 낫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토끼띠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중학교를 못 갈 수 있냐는 쪽이다. 하긴 내가 깡촌에서 국민학교 졸업할 때도 중학교 안 간 친구들은 손에 꼽을 정도고 대부분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딱 1년 차이인데도 62년생은 보수적이고 좀 늙은 티가 나는 반면 63년생은 훨씬 개방적인 중년 느낌이 난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나이를 숫자가 증몀함을 말해 준다고 할까.
누이는 일찍 출산을 한 것도 모자라 첫 애 낳고 반 년만에 둘째를 임신해서 거의 연년생이나 마찬가지다. 누이 표현으로는 쌍둥이 키우는 것 같았다고 했다.
누이는 일찍 결혼한 고달픔은 둘째치고 자신의 처녀 생활이 너무 일찍 마감한 게 아쉬운지 늘 나에게 결혼은 가능한 늦게 하라고 했다. 실제 나는 결혼을 조금 늦게 했다.
누이는 연이서 낳은 두 아이를 키우느라 몇 년 쉰 것 빼고는 줄곧 직장을 다녀야만 했다. 아이 키울 때도 집안에는 늘 부업거리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럴 것이 키 작은 남자는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한 직장에서 진득하게 일하는 체질도 아니어서 이직을 자주 했다. 누이가 신혼 때부터 부업을 했고 평생 직장을 다녀야 했던 이유다.
나중 누이에게 들은 얘기로는 월급 때가 지나도 돈을 안 가져오기에 추궁했더니 그동안 직장을 가는 척하면서 두 달 가까이 실업자였다고 한다. 아침에 나가 사우나에서 종일 자다가 왔다나,,
그나마 내 아버지처럼 노름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할까. 한 10년 가까이 미워하던 키 작은 남자를 나는 받아 들였다. 미움은 받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훨씬 힘들다.
어느 날 누이에게 키 작은 남자 어쩌구 했더니 버럭 화를 냈다. 그 동안 남편과 동생 사이에서 늘 조마조마했을 누이였지만 화를 낸 건 처음이다.
이제 너도 그만 해라. 비록 그가 좀 볼품은 없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나 되니까 나 같은 년과 산다. 가난한 집 딸에다 까막눈인 내가 무슨 남자 고를 처지냐는 얘기였다.
어쩌면 누이 말이 맞다. 흔히 내 딸이 좋아야 사위를 고른다는 말이 있다. 훗날 나도 결혼할 때 가난하고 근본 없는 집안이라는 이유로 처갓집 식구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키 작은 남자를 받아 들인 후 어느 날 술을 잔뜩 먹여 놓고 누이와의 첫 만남을 슬쩍 물어 봤다. 남자는 엉덩이를 살살 긁어주니 술기운에 그 날의 경험을 줄줄이 말했다.
같은 공장에 일하는 누이를 평소 눈여겨봤다고 한다. "니 누나 말야. 그때 아다(숫처녀)더라구." 나는 순간 눈에 불똥이 일고 피가 솟구쳐 남자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이 ㄱㅅㄲ,,
키 작은 남자는 나의 화가 풀릴 거라면 더 때리라 했지만 소주잔의 술을 남자 얼굴에 끼얹고는 술집을 나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인정하겠다 했으면서도 열불이 났다.
이후에도 나는 오랜 기간 키 작은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3살 연상이지만 호적으로는 14살 차이가 난다. 거기다 머리 숱까지 없어서 더욱 나이 들어 보였다.
키도 자기는 160이라 우기지만 내가 보기엔 잘해야 158이다. 눈이 저울인데 그걸 모르나? 내 누이는 키가 163이다. 그걸 커버하기 위해 그 사람은 평생 키높이 구두를 신었다.
남자는 미웠지만 조카들은 예뻤다. 나는 큰 애가 외탁이어서 유독 그 아이를 예뻐했다. 큰 아이가 네 살 무렵이었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일곱 살 사내 아이 하나를 데려왔다.
"며눌 애기야, 내 미안혀서 우짤끄나, 참말로 면목 없데이" 그 아이는 아빠를 꼭 닮은 키 작은 남자의 아이였다. 키 작은 남자는 결혼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는 결혼하고 2년 만에 마누라가 가출해서 여태 소식이 없단다. 그 동안 시어머니가 그 아이를 키우다 데려온 것이다. 연속극에서나 보던 일이 실제 누이에게 생긴 것이다.
*누이 얘기 중 자꾸 옆으로 새고 글이 길어진다. 올리고 나서도 여러 줄을 지웠다. 할 말이 많아지는 것도 나이병이라던데,,
첫댓글 두아이에 전처의 자식까지......
생활력이 좋은 남편도 아니고......
님의 이야기 보다 누님의 그 인생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여자, 아니 어머니로서의 운명은
정말 비껴갈 수 없었을까?
내 누나도 17살인가 국민핵교 졸업하고
몇 년 있다가 배고픔이라도 덜어보자고
어머니는 천안 시내의 부잣집으로
식모살이를 보냈었지요.
내 나이 열한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식모살이하는 누나를
찾아간 적도 있었지요.
가난이 빚어낸 슬픈 생활사입니다.
그때 그시절 모두가 가난할때가 눈에선해 ,
다시 생각하기도 싫네요 ㆍ
박 경리선생님도 살아계실때 두번다시 태어나고 싶지않다고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ㆍ일제시대 어려울때 볼껄, 못볼껄 다봐서 두번다시 보기 싫다고 ㆍ
아
정말 그 누이
그럼왜도 불구하고 입니다
저는 복이 많은 할머니임을 이 아침 느낍니다 이렇게 진솔하고 재미진 글 엮어 보내는 님들 때문에 제 노후는 행복해질거라는 기대가 ㅎㅎ 부자의 삶은 비슷해서 재미적지만 가난한 삶들은 그 형태가 다양해서 문학이 예술이 .. 통틀어 미디어가 발전하지요 저는 서민의 삶을 동경하던 서민 축에도 못낀 세월 살았어도 글이 있고 독서가 있어 견뎌왔습니다 이제 7순이 코앞인 오늘까지 글에 미쳐있습니다
글과 함께 할 수있는 모든 회원님들께 고마움 전합니다
아울러 우리세대들이 공감할 수있는 가슴 뭉클한 글 가져오신 유현덕님께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
드라마같은 누이의 이야기네요
저도 주류에서ㅇ비껴간
B라고 자처합니다
그나마도 감사하며~~^^
아이고야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된 질곡된 삶이였네요 어찌 그리 힘든 삶을....
가슴이 먹먹해지며 몇 살 아래 사연이라
더욱 긴가민가 생각까지 ...
질 나쁜 남자에 얼마나 울화통이 터질 남자의 기분 이해 백배 됩니다
외탁하여 더 잘 생기고 정스러운 조카 덕에 그 남자도 살았네요 ㅎ
드라마 보다 더 한 각본 없는 인생살이
집안 역사 이기에 이렇게라도 풀어 버리심이 참 잘 하신듯 여겨집니다
이제 지난 일이고 상처도 아물었겠지요
끝까지 관심으로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