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 그 숲의 끝에 서서 - 정복여
지난해 당신이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속 눈 덮인 상수리 나무숲, 그 숲을 걸어들어간 나는 발자국마다 다시 내려덮이는 눈을 뒤돌아보며 어딘가에 숲이 끝나는 길을 찾고 있었다 눈 위에 다시 눈이 쌓이고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가지들은 마른 뼈마디를 부러뜨리고 그때마다 나무들은 온몸을 흔들어 겨울을 털어내곤 하였다 흐린 하늘에도 태양은 있어 나무들의 언저리를 둥글게 비추기도 하였지만
초점이 어긋난 빛의 선들은 곧 스스로 빛을 삼켜버리곤 하였다
그해 겨울이 녹으며 그 숲에는 너도밤나무, 산이스랏나무, 떡갈나무, 어린 가시나무들도 함께 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들은 바람을 불러모으며 가지 끝으로 푸른빛을 밀어내고 물이 오른 등 위로는 하늘다람쥐가 미끄러져 오르기도 하였다 숲은 이미 더욱 깊어져 내가 처음 만난 숲은 아니었고 뒤돌아보면 지나온 날들이 키작은 풀잎으로 누워 길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고 다 자란 나뭇잎들이 제 몸의 열기를 견디지 못해 붉고 노랗게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낯선 공기 속으로 가벼워진 몸을 둥글려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간혹 바람을 만나지 못한 잎새들이 나무 주위에 남아 서걱이기도 하였지만 잎을 잃은 나무들은 이런 일에는 익숙하다고 수런거리고 있었다 그때 내 몸을 돌아 울리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우린 더욱 단단해지고 있어요 둥근 밑동이 되어 있는 발등을 가리키는 나는 어느새 작은 상수리나무 한그루가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숲은 내게 함께 있었고 없기도 하였다 이제 잎이 떠난 내 머리 위로 눈이 쌓인다 그렇게 차갑지만은 않은 세월이 마른 어깨 위에도 쌓이고 나는 오늘 광화문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산다 당신에게 보낼 집 한채, 흐린 불빛을 보내는 작은 창, 그 그림의 첫장을 넘기며,
'12월, 숲의 끝' 이라고 쓴다 *
* 정복여시집[먼지는 무슨 힘으로 뭉쳐지나]-창비,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