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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룻기의 시작 1,1.3-6.14ㄴ-16.22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려고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3 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어서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게 되었다.
4 이들은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파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룻이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십 년쯤 살았다.
5 그러다가 두 사람도 죽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두 자식과 남편을 여읜 채 혼자 남게 되었다.
6 나오미는 며느리들과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나 돌아가기로 하였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시어 그들에게 양식을 베푸셨다는 소식을 모압 지방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14 오르파는 시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며 입 맞추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15 나오미가 말하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제 겨레와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그러자 룻이 말하였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22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모압 출신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은 보리 수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데 묶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참 사랑을 가져오며, 반면에 아버지의 아들,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1요한 4,20)
사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있을 뿐이며,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문헌 <새 천년기>(43항)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친교의 영성은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의 일부가 되고,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암수동형처럼 섞여 혼합되어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일부로서 각각의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곧 생물할적인 한 몸을 이루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상의 한 몸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인격적인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한 생명을 이룹니다.
곧 사랑의 인격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격체인 자기에로의 전환입니다.
곧 남인 이웃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며,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곧 인격체로서 전환이요, 존재론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1요한 4,12)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으로의 순간 회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이 짧은 가르침을 몰랐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실로 제 인생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말씀과 이 말씀을 몰랐다면 저는 불행할 것이고 늦게 알았다면 늦게 행복을 알게 되었을 겁니다.
제 인생은 이 두 가르침을 알기 전과 안 후로 나뉩니다.
이 가르침들을 몰랐을 때 제 인생은 한 마디로 혼란과 방황이었습니다.
그러니 계속 몰랐다면 저는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봤을 것이고, 모르는 채 어떻게 사랑은 했더라도 이런저런 사랑으로 방황했을 것이며,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로 저의 <무조건 행복론>은 이 두 가르침의 뒷받침 덕분에 가능합니다.
그러면 지금 어떻습니까?
이 말씀들로 행복합니까?
진정 행복합니까?
이 가르침대로 산다면 진정 그리고 틀림없이 행복하겠지만, 이 가르침들을 정말로 잘 실천하며 사느냐는 물음입니다.
잘 알고 있지만 순간 망각할 때가 있고 그래서 사랑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욕심과 교만 때문에 순간 또는 일시적으로 사랑보다 다른 것을 더 우선할 때가 있고, 그래서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힐 때도 있지요.
이렇게 아는 만큼 실천을 잘하지 못할 때도 있고 그래서 많이 반성도 하지만, 그래도 이 가르침을 아는 것은 앞서 본 것처럼 무척 중요하고, 제가 잘못 갔다가도 얼른 돌아오게 하는 앎이기에 너무도 소중한 앎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저처럼 이 가르침을 순간 망각한 것이니, 얼른 이 가르침에게로 돌아오는 회개, 곧
얼른 사랑으로 돌아오는 순간 회개를 잘하시길 바랍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 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마태 5,45)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요한 4,19)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613개 조항의 율법 규정과 10계명의 숫자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당시 사람들을 홀가분하게 하는 선언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항상 하나의 줄기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
(1요한 4,20-21)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성 아우구스띠노)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삶에서 우리는 언제 길을 잃게 되는가?>
2018년 대한민국 청년 수 1,400만 명, 이 중 69.5%가 무기력증, 불안증, 우울증을 경험했고 이 수는 4년 전보다 약 30% 증가한 수치라고 합니다.
아마 코로나를 거치면서 사태는 더 심각해졌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유튜브 동영상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삶이 힘든 20대가 보면 폭풍 오열 각인 영상」에서는 삶에 힘겨워하는 젊은이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꿈을 잃은 사회 초년생, 매번 면접에서 떨어지는 취업 준비생, 승무원 포기한 배우 지망생, 고3 수험생 등이었습니다.
질문은 이런 것들입니다.
“하루 수면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일주일에 몇 번 사람들과 어울리나요?”,
“모든 일이 힘들게 느껴지나요?”,
“꿈이 있나요?”,
“하루에 몇 번 소리 내 웃나요?”
그리고 뒷장에는 같은 질문 앞에 ‘어린 시절에’란 단어를 붙였습니다.
'어린 시절 수면시간은 얼마였나요?', '어린 시절 몇 번 소리 내어 웃어보았나요?' 등입니다.
당연히 어린 시절이 앞길이 막막한 청년들보다 훨씬 행복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행복해지자고 사는 건데 왜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살면서도 결국엔 길을 잃고 말까요?
아이 때는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부모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빠진 우리도 그래서 길을 잃습니다.
‘비벡 H 머시’의 『우리는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라는 책은 ‘외로움’과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복권 당첨자가 머시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복권 당첨된 것은 저에게 저주가 되었어요.”
“아니, 왜요?”
“복권 당첨되기 전에는 직장 동료, 친구와 이웃들이 많았습니다.
복권에 당첨되고 부자 동네로 이사 오고 나니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집에 갇혀있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다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습니다.”
행복은 하느님께 속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됩니다.
어린이는 이를 잘 압니다.
하지만 어른은 돈이나 범죄 집단에 의존하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쉽게 길을 잃는 이유는 행복을 위한 핵심 계명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율법 교사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길을 잃은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 낫습니다.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도 이런 내용입니다.
어린 크리스토퍼 로빈은 ‘100에이커 숲’에서 곰돌이 푸를 포함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기숙학교에 보내지면서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삶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흐릅니다.
크리스토퍼는 자라서 에블린이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마침내 매들린이라는 딸을 갖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런던의 한 여행 가방 회사에서 효율성 전문가로 일합니다.
직업에 대한 요구와 전쟁의 트라우마로 그는 가족, 특히 딸 매들린과 멀어집니다.
주말에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딸만 시골로 보내고 자신은 일에 매진합니다.
우연히 곰돌이 푸는 런던 도시에서 크리스토퍼 로빈을 만납니다.
로빈은 푸가 반가우면서도 귀찮습니다.
그를 100에이커 숲으로 돌려주러 왔다가 자신이 일에 지쳐서 가족과 친구들을 잊고 살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숲에는 괴물이 있었는데 결국 자신이 괴물 헤팔럼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100에이커 숲에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구덩이에 빠졌더라도 잠시 기절해 있으면 비가 와서 물이 차올라 몸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발버둥 치면 더 가라앉습니다.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에 둥둥 떠내려가면서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운명에 자기 자신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자신이 그러한 동물들을 도와주면서 자신은 그런 환경에서 살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길을 잃은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도, 회사에 다니는 것도 가족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가족과 친구를 돌볼 시간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이러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제가 신자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친밀한 관계는 하나도 맺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그리도 쉽게 잊을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나를 지켜주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운전할 때 초보나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차선에 집중합니다.
저도 전방에서 안개가 껴서 길이 안 보일 때 길이 아닌 벽을 보며 운전한 적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곁가지를 보며 결국 길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정말 벽만 보고 운전하다가 진짜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뻔한 적도 있습니다.
사탄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삶을 헤쳐 나가게 합니다.
그 두려움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잊게 만드는 것입니다.
곰돌이 푸와 친구들은 100에이커 숲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갑니다.
그럴 때 친구를 생각할 여유가 생깁니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두려움을 해결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고 의탁하면 지금 이 순간 나는 100에이커 숲에 머물게 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닙니다>
한 멋진 수도 공동체 형제들의 연피정 동반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이 나이나 직무 상관없이 형제적 친교를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모습,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잠시나마 천국의 한 조각을 맛보는 분위기였습니다.
사실 우리 수도 공동체는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형제의 허물과 실수 앞에 왜 그랬냐고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용서하며, 서로가 서로를 깊이 보듬어 주는 그런 공동체!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를 보고, 가슴을 치고 회심을 하며,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따뜻하고 훈훈한 모습을 실현시키게 하는 모델 공동체...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금권과 타락으로 얼룩진 성전 정화작업을 실시하십니다.
다음으로 행하신 일은 유다 지도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당시 가난한 백성들, 세리들과 죄인들, 고아와 과부들은 기쁘게 예수님을 환대했고,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지도층 인사들, 바리사이, 사두가이, 율법학자, 헤로데 당원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그분에게 난감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분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올가미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마태오 복음 22장에서는 예수님과 유다 지도자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펼쳐진 이른바 ‘마지막 논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존경하는 랍비, 메시아로 오신 주님께 겸손하게 여쭈어보는 질문이 아니라, 그분을 시험하고 곤경에 빠트리려는 야비한 의도의 질문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세금 문제, 부활 문제, 다윗 자손 메시아 문제, 그리고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가장 큰 계명’ 문제였습니다.
난감한 질문을 던지면서 계속 예수님께 태클을 걸었지만, 결과는 예수님의 연전연승이었습니다.
계속되는 논쟁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 적대자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 한 가지를 던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태 22,36)
그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또 다시 촌철살인의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요약과 종합의 명수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구약 성경 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 구약 성경 전체를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게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마태오 복음 22장 37~40절)
예수님께서는 못 배우고 가난한 백성들도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신앙의 진리를 아주 간단히 종합해서 설명하십니다.
이 또한 그분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느님 사랑, 인간 사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주 쉽게 가르치십니다.
한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해야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심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함을 통해, 두 사랑이 지닌 불가분의 관계를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이 실천하던 이웃 사랑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동족 유다인들에게만 적용시켰고,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개념을 크게 확장시키셨습니다.
사랑은 국경이나 인종을 넘어서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뿐 아니라 이방인들,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냥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 안에 얼마나 진심, 진정성, 정성이 포함되어 있는지 성찰하며,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아니면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그분을 대해온 것을 크게 뉘우칩니다.
그분께서 가장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 불같은 사랑, 순수한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계명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예님과 논쟁을 하려고” 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에 관해서 자기들끼리 자주 논쟁했습니다.
‘가장 큰’이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이라는 뜻입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미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18-19)
모든 계명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계명들을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라는 말씀은 지금 당신의 답변은 “계명들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다.” 라는 뜻으로 하신 답변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는 ‘가장 중요한 계명은 무엇인가?’ 라고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냐고 묻지 마라. 계명들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모든 계명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에서 온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너희를 사랑하시니 너희도 그렇게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요한 4,8-10)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 내주신 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뒤에 물러나 계시고 아들 예수님만 희생시키신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은 곧 하느님의 희생이고, 예수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0,30).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명들은 ‘생명을 얻는 방법들’입니다.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서 ‘사는 방법’으로 계명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살기를 바라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신 것이 바로 계명들입니다.
따라서 계명들 자체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계명들을 실천하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응답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는 것”, 바로 그 순종이 응답하는 방법입니다.
사랑 실천과 계명 실천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잘 실천하게 됩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계명 실천을 잘하는 것은 사랑 실천을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점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요한 14,21; 15,10).
요한 사도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1요한 5,3)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계명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나는 사랑 실천은 잘한다.” 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또 계명 실천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원래 신앙인으로서 하는 일들은 그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1코린 13,1-3).
“둘째도 이와 같다.” 라는 말씀에서, ‘둘째’ 라는 말은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고, “이와 같다.” 라는 말은 “두 사랑은 같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이웃은 곧 너 자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들이고, 하나입니다(1코린 12,13).
“그런데,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고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다 주는 것이 곧 사랑 실천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내 삶의 스토리는? 내 삶의 콘텐츠는?” - 사랑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시편 146,1ㄴ)
오늘 화답송 후렴처럼 끊임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각자 삶의 아름다운 스토리(story)와 콘텐츠(contents)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일어나서 맨먼저 강론 쓰기 전 일별해 보는 인터넷 메인 뉴스입니다.
미사시 청원기도를 위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역시 메인 뉴스는 어제부터 방류한 일본의 핵 오염수였습니다.
“일본, 오염수 결국 바다로 쏟아냈다.
올해만 3만t 방류 예정; 2011년 3월 원전 폭발 사고로 인해 발생한 방사능 오염수 134만t을 30년 이상 바다로 흘러 보내는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여파로 한,일 양국 모두에서 수산물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관련 소비가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태평양 침공, 1200일 지나면 남해에 삼중수소 영향”
이런 메인 뉴스에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우려와 탄식, 규탄으로 가득한 뉴스였습니다.
참으로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하거나 묵과할 수 없는 일이 국가에 의해 공공연히 자행되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앞으로 전개되는 활동에도 예의 주시하여 기도와 동시에 행동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스토리와 콘텐츠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엊그제 어느 교구 사제의 무심코 한 말, “스토리가 있어 재미있어 지루한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라는 말마디 중 ‘스토리’가 마음에 꽃쳤고 이어 연상되는 ‘콘텐츠’ 말마디와 더불어 어제는 하루 종일 두 말마디를 묵상했습니다.
영어 스토리는 ‘일정한 줄거리를 담고 있는 말이나 글’을, 콘텐츠는 ‘담고 있는 내용물’을 뜻합니다.
번역보다는 스토리와 콘텐츠가 마음에 와닿아 영문자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정말 현대판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입니다.
크고 작은 공동체는 물론 정치 지도자들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여과없이 소개하여 공동체 성원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보면 미래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 예언자들처럼 가짜 언론, 가짜 뉴스가 얼마나 큰 범죄인지 드러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내 삶의 스토리는? 내 삶의 콘텐츠는?-사랑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몸의 건강에는 최대 관심을 쏟습니다.
이런 몸의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듯 하루하루 날마다 내영혼, 내정신, 내마음의 건강에도, 특히 내 삶의 스트리와 콘텐츠에도 최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 배웁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윗 사람이나 이웃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은 예외없이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가 좋습니다.
아름답고 고운 꽃이 색깔이나 크기, 모양이나 향기가 다 다르듯 사람도 그러합니다.
세상에 똑같은 성인이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성인들이나 위인들의 평전을 보면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는 다 다르지만 한결같이 아름답고 품위있고 향기롭습니다.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삶의 중심입니다.
삶의 중심이 좋고 살아 있어 또렷하고 분명해야 스토리도 콘텐츠도 좋습니다.
삶의 중심이 없으면 스토리도 콘텐츠도 없어 겉은 사람이지만 속은 괴물이요 악마요 야수요 폐인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영양가 없는, 공해가 되는, 좋은 스토리와 콘텐츠가 결핍된 영화나 책, 삶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의 스토리와 콘텐츠가 결핍된 식탁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습니다.
어제 주간지에 나온 글 제목도 잊지 못합니다.
“인격보다 상품 앞세우는 한국 교육”
올바른 인생관, 가치관을 통해 스토리와 콘텐츠 좋은 참사람을 우선하는 교육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듯 유용성을 잣대로 교육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수한 철부지 괴물을 양산하는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됨의 요소에 “철학, 실력, 용기” 중 가치관의 철학이 결핍된 교육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가톨릭교회의 매일미사는 얼마나 고맙고 중요한지요!
하느님께서 날마다 주시는 최고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하나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면서 주님을 닮은 참 좋은 진선미眞善美와 신망애信望愛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형성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저는 피정 강론 중 매일미사는 못하더라도 매일 미사전례문을 꼭 영적독서하듯 선택-훈련-습관의 수행을 강조합니다.
참으로 좋은 스토리와 콘텐츠를 위해 좋은 영적 선택과 훈련, 습관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런 참 좋은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위한 결정적인 답을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주십니다.
답은 오직 이 하나뿐입니다.
구약의 613개 율법을 둘로 요약한 경천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율법교사의 “가장 큰 계명이 뭐냐?”는 불순한 질문에 개의치 않고 주님은 정면돌파의 답변을 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서와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
작금의 기후재난으로 인해 이웃 사랑은 공동의 집인 지구사랑, 자연사랑으로 확대되야 하는 절체절명의 현실입니다.
구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된 사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 피조물인 이웃인 형제들과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사랑을 통해 하느님 사랑의 진위가 검증됩니다.
오늘부터 룻기의 시작입니다.
성인마다 다 다른 그 고유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이삭, 모세, 다윗의 스토리와 콘텐츠가 다 다릅니다.
그러니 누구의 삶의 스토리나 콘텐츠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하느님 중심의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풀꽃 시인 나태주의 풀꽃시를 기억할 것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바로 룻기의 룻이 풀꽃같은 성녀입니다.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일편단심 사랑의 고백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로 녹아 있습니다.
참으로 작은 풀꽃처럼 그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도 곱고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룻으로 부터 마침내 다윗이 나오고 우리 구원자 예수님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하느님 앞에 갔을 때 하느님은 우리 각자 삶의 스토리를, 콘텐츠를 참으로 살았느냐, 즉 각자 고유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랑의 스토리를, 콘텐츠를 살았는가 점검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시간 최후심판에 앞서 우리 모두 제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점검해 보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
(시편 25;4.5 참조)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미국 텍사스의 암 병원에서 25년간 환자를 돌보던 김의신 박사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암과 관련해서 세계적인 석학인 박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암은 아직 정확하게 발생 원인을 모르는 병입니다.
그래서 암에 대한 완벽한 치료 방법도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의료 현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암 병원은 가능하면 수술을 하지 않습니다.
암은 특정부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암은 전신에 걸쳐 있기 때문입니다.
암이 머무는 집을 수술로 제거한다고 해서 암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암과 관련된 의사들이 우리 병원으로 연수를 옵니다.
그리고 우리 병원의 암 환자 치료방법을 보고 가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한국은 아직도 암의 발생 부위를 제거하는 것을 최선의 치료방법으로 고수하고 있습니다.
암은 항암제를 투약하고, 증상이 호전되면 덩어리를 제거하거나 방사선 치료를 병행합니다.”
암 병원에는 매년 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데 외국에서 삼분의 일, 타주에서 삼분의 일, 텍사스 주에서 삼분의 일이 온다고 합니다.
박사님은 암이 치료되는 사람과 암이 더디게 치료되거나 쉽게 재발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소위 전문가들은, 돈이 많은 사람들은 치료하기 쉽지 않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검색하고, 부작용을 찾기 때문에 의사의 말을 제대로 신뢰하지 못 한다고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그 돈 때문에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회사, 돈, 가족들을 신경 쓰면서 잠을 못 이룬다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도 암을 치료하기 어려운데 이렇게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사람은 암을 치료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시골에서 온 사람, 잘 모르는 사람은 치료가 쉽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우선 미국에 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고 합니다.
평소에 먹지 못했던 음식도 잘 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병원에서 치료하는 방법을 기쁘게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치료하기도 쉽고, 치료도 잘 된다고 합니다.
저는 박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영혼의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위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나라의 기쁜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자렛의 고향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알면서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참된 행복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전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과 계명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학벌을 보았고, 예수님의 출신 가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단죄하였습니다.
박사님은 의사들을 치료하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오히려 의사들이 자신의 몸을 잘 돌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도 어쩌면 눈 뜬 장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사여 먼저 너의 병을 고쳐라.”
박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치료는 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서 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을 편하게 갖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암을 치료하는 데 가장 어려운 장애물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치료될 확률이 30% 정도가 된다고 하면 무척 기뻐한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치료될 확률이 30% 정도 된다고 하면 무척 실망한답니다.
미국 사람들은 치료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을 이야기하면 담담하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부작용 때문에 죽을지 모른다고 먼저 걱정한답니다.
마음을 편하게 먹는데서 암의 치료는 시작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잘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 먹고 몸의 면역력이 좋아야 암을 치료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잘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기도 잘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하고, 음식을 열심히 먹으면서 암의 치료는 시작된다고 합니다.”
병원에는 1,500명의 자원봉사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분들 대부분은 암을 치료중이거나, 암이 치료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이런 자원봉사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행복은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것이고, 보람 있는 일은 타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롯은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롯은 보아즈의 아내가 되었고 유다의 임금 다윗은 이 가문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요즘 도시에서 아이를 보기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아파트 놀이터는 늘 텅 비어 있고, 아이를 보려면 학원에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사는 송도의 공원에서는 쉽게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젊은 부부가 많이 사는 지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운 여름, 공원의 분수에서 쏟아내는 물을 맞으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의 유년 시절과 다른 점을 발견합니다.
우선 보호자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또래 문화가 중심이었고, 같은 또래와 함께 어울려 뛰어놀았습니다.
지금처럼 부모가 함께 있었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놀이터도 없어서 그냥 공터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그곳에서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얼마 전에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놀이들을 하면서 하루 종일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놀았는데, 당시 친구들 모두 지금 자기 자리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물론 어려움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종종 만날 때마다 그때 같이 놀던 이야기를 하며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요즘 아이를 보면 걱정이 됩니다.
방학이라서 많이 놀고 있냐고 묻자, 오늘도 학원만 여섯 군데를 가야 한다며 한숨짓는 것입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책이나 영화를 볼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스토리입니다.
스토리가 있어야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삶도 이 스토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스토리를 통해서 신나고 멋진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강조하신 것은 이 스토리입니다.
결코 이 세상 안에서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라는 세속적인 길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 교사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시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던졌던 율법 교사는 공부만 했던 사람입니다.
문제는 공부만 하니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을 잊어버리고 율법 조항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의 길이 바로 우리의 스토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 밖에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등등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사랑 이야기의 배경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도 스토리를 만들지 않아서 늘 사랑을 잊어버립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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