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지인지감 〈24〉 육척(六尺) 고아를 보호할 대신들을 고르는 안목
육척(六尺) 고아를 보호할 대신들을 고르는 안목
현종이 선택한 김석주는 숙종을 잘 보필하면서 중흥정치를 일구었다.
왕조 국가의 가장 큰 위기는 후사(後嗣)가 아주 어릴 때 반복해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 위기에 어떻게 대비했느냐에 따라 먼저 죽은 임금의 사리분별력 혹은 현부(賢否)를 판단할 수 있다. 주로 당시의 대신들에게 이런 위기에 대한 처방을 부탁하는데 이런 부탁을 받은 신하를 고명대신(顧命大臣)이라 한다. 그 기원은 주나라의 성왕(成王)이 임종 시에 군신들을 불러 강왕(康王)의 보호와 선정(善政)의 시행을 당부한 것에서 비롯한다.
이 문제는 이미 《논어(論語)》에서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가 “육척 고아를 맡길 만해야 군자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 ‘육척 고아를 맡길 만한 군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성왕의 당부에 일단 그 실마리가 있다. 첫째는 후사의 보호이며, 둘째는 어린 임금을 대신해 선정을 펼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후사의 보호다.
후사를 보호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점이 충족돼야 한다. 하나는 충성심이 지극해야 하고 또 하나는 어린 임금을 지켜 낼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어린 임금의 자리는 위태로워진다. 예를 들면 삼국시대 유비(劉備)의 뒤를 어린 유선(劉禪)이 이었는데 이때 제갈량(諸葛亮)이 고명대신의 역할을 맡아 위기를 극복하고 잘 보좌했다. 특히 우리는 한(漢)나라를 거대한 제국으로 만든 무제(武帝)의 고명대신 임명을 상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 무제, 곽광(霍光)을 고명대신으로 삼다
한 무제(왼쪽)와 그의 어린 아들을 맡긴 곽광.
무제는 한편으로는 명군(明君)으로 평가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폭군(暴君)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어떤 평가를 받건 떠나서 그는 한나라를 거대한 제국으로 일으켜 세운 황제다. 무엇보다 그는 일을 알고[知事] 사람을 볼 줄 아는[知人]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무제는 말기에 후궁인 조첩여를 데리고 이궁인 감천궁(甘泉宮)에 갔다. 이때 조첩여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다. 역사서에는 그 실수가 무엇인지 기록돼 있지 않다. 어쨌거나 그것을 이유로 무제는 조첩여를 하옥시키라고 명한다. 끌려가던 조첩여가 무제를 올려다보았지만 무제는 덤덤하게 “잘 가거라! 넌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한다. 얼마 후 조첩여는 감옥에서 죽었다.
무제는 왜 그랬을까? 1년여 후에 무제와 조첩여 사이에서 태어난 유불릉(劉弗陵)이 태자로 정해지고서야 조첩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옥사(獄死)한 이유를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사전 정지 작업 차원에서 외척(外戚) 제거를 위한 첫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에서도 외척제거를 하느냐 못하느냐가 그 후 임금의 명운을 갈랐다. 태종(太宗)이 세종(世宗)의 처가를 제거했기에 세종의 치세가 있었다. 정조는 오히려 순조의 처가인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에게 사실상 권력을 갖다 바쳤기에 세도정치의 문이 활짝 열렸다.
외척을 제거한 무제는 이제 8살밖에 안 된 유불릉(훗날의 소제·昭帝)을 보필해 줄 신하를 고르고 또 고른다. 그 첫째가 곽광(霍光)이다. 중국 역사학자 강붕(姜鵬)은 《혼군 명군 폭군(왕의 서재)》에서 무제가 곽광을 첫 번째 고명대신으로 꼽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한무제 곁에서 20년 동안 시종하면서 한 번도 실수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수하지 않는다면 참을성이 강하고 스스로 신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속담에 ‘본심은 한 겹 뱃속에 있다’는 말이 있다. 호랑이를 그릴 때 겉모습은 그려도 그 속은 그릴 수 없듯이 시간이 지나야 본심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한무제는 곽광의 충성도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파악은 어려우나 곽광의 이복형인 곽거병(霍去病)은 한무제가 인정하는 충복(忠僕)이었다. 그래서 한무제는 곽거병이 죽었을 때 그 동생인 곽광을 대우하며 은혜를 베풀었다. 곽광으로서는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고, 20여 년 동안 실제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곽광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경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주도면밀했던 무제는 곽광 외에 상홍양(桑弘羊), 김일제(金日磾), 상관걸(上官桀)도 함께 고명대신으로 삼았다. 이들도 모두 무제가 크게 신임했던 신하들이다. 즉 1대3의 견제구도를 만들어 어린 임금을 보필하게 한 것이다. 결과는 크게 성공적이었다. 강붕의 말이다.
“고명대신을 선택한 일에서 우리는 한무제의 안목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한무제는 확실히 용인술에 능통했다. 한무제 사후에 한나라가 근 100년 동안 수성할 수 있은 원동력은 그가 선택한 고명대신들의 공에 기인한 것이다. 그중에 곽광의 활약이 대단했다.”
숙종을 지킨 김석주
조선 역사에서 고명대신의 성공사례는 숙종(肅宗)의 보호자 김석주(金錫胄)다. 그 점에서 김석주를 선택한 현종(顯宗)의 안목은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김석주는 현종비이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종형(從兄), 즉 사촌오빠였다. 김육(金堉)의 후손답게 서인이면서도 ‘친(親)남인 반(反)송시열’ 성향을 갖고 있던 김석주는 특히 서인과의 일전불사(一戰不辭) 및 남인으로의 정권교체를 추진했던 현종 말년에 주목을 끌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현종이 급사했을 때 현종의 그 같은 유지(遺志)를 고스란히 이어서 관철할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흔들리는 집권 초반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어리고 미숙한 숙종을 권력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1등공신이 다름 아닌 김석주였다.
김석주는 영의정 김육의 손자이자 병조판서를 지낸 김좌명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무에 뛰어났다. 남아 있는 영정에서 보듯이 어릴 때부터 그의 모습은 호랑이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현종3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사간원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한당(漢黨)이라 하여 서인 중에서도 핵심인 송시열의 산당(山黨)에는 들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김육 집안과 송시열은 같은 서인이면서도 대동법 논쟁에서 촉발된 현실주의 노선(한당)과 명분주의 노선(산당)의 대립으로 인해 갈등을 빚어 왔다.
그런데 한당과 산당의 대립은 김육이 죽자 더욱 격화되며 대(代)를 이어 가게 된다. 김육을 장례 지내면서 김좌명 등이 ‘참람하게’ 수도(隧道)를 파서 산당의 비난을 자초했다. 수도란 평지에서 묘소까지 난 길을 말하는 것으로 왕실에서만 할 수 있었다. ‘참람하게’란 분수를 넘어서 왕실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뜻이다. 서인계통의 대신(臺臣) 민유중 등이 법에 의거하여 김좌명 등을 죄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이조판서 송시열이 민유중의 편을 들어 김좌명을 몰아세웠다. 그로 인해 김석주 집안에서는 산당에 대해 깊은 원망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현종 때 김석주는 중궁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인사상의 불이익까지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현종이 말년에 제2차 예송(禮訟)논쟁을 주도하면서 김석주는 핵심 참모로 떠오른다. 도신징의 상소가 올라왔을 때 현종이 은밀하게 부른 이가 바로 좌부승지였던 처사촌 김석주였다. 당시 현종은 제1차 예송논쟁을 재검토하기 위해 김석주로 하여금 당시의 주요 문건들을 정리해 보고할 것을 명했는데 김석주는 남인 허목의 상소를 비롯해 주로 남인의 입장을 옹호하는 문건들을 중심으로 보고를 함으로써 현종의 서인 제거 결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숙종의 중흥정치 뒷받침
이후 그가 숙종10년 5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김석주의 노선이 곧 숙종의 노선이었다고 할 만큼 두 사람은 정확하게 같은 노선을 걸었다. 숙종은 처사촌 김석주의 길을 따랐고 김석주는 숙종의 의중을 미리 따랐다. ‘표범의 정치’ 숙종과 ‘범의 정치’ 김석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길을 걸어간다.
우선 숙종 즉위년 한 해 4개월여 동안만 김석주의 특진과정을 추적해 본다. 8월 23일 숙종이 즉위했을 때 김석주는 우승지로 있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9월 20일 김석주는 수어사(守禦使)로 임명된다. 수어사란 정묘호란 이후 북방의 경계를 강화하면서 남한산성에 설치됐던 중앙군영으로 굳이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요직이었다. 원래 이조와 병조에서 올린 인사후보군에는 들어 있지 않았으나 숙종의 특명으로 품계가 다소 낮음에도 불구하고 김석주가 발탁된 것이다. 그리고 수어사의 경우 비변사의 일원으로 국가 중대사를 논의할 때 직접 참여하여 발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실록의 평이다.
“당시 임금은 서인들을 미워했는데 김석주는 (서인임에도 불구하고) 취향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여 김석주를 인사책임자로 끌어다 두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이날 김석주는 이조참판에 오른다. 그러면서도 수어사를 겸직했다. 문무의 핵심요직을 동시에 장악한 것이다. 서인들은 반발했다. 혈육을 중용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게 부담스러웠는지 11월 13일 김석주는 이조참판에서 물러나겠다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숙종은 일언지하에 사직서를 물린다.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라!”
오히려 숙종은 불과 22일 후인 12월 5일 김석주를 도승지로 제수하여 최측근에 갖다 놓는다. 서인 제거 작전을 보다 긴밀하게 협의하기 위한 조처였다. 서인들은 분노와 원망 속에서도 김석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과 행동이 곧 숙종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김석주는 숙종의 주석지신(柱石之臣)이었다. 김석주의 이 같은 고명을 받든 신하로서의 임무 완수가 이후 숙종의 중흥(中興)정치를 이룩한 원동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실패한 고명대신 - 김종서와 유영경
문종(文宗)이 어린 단종(端宗)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면서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을 고명대신으로 지명했다. 분명 김종서는 세종 대와 문종 대에 큰 업적을 남긴 신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고명대신의 책무라는 관점에서 보면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충성심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육척 고아를 지켜내야 할’ 책무에서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김종서는 당시 좌의정으로 사실상 인사권은 물론 병권(兵權)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수양대군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면밀하게 살폈어야 한다. 그런데 어이없게 자기 집에서 일격을 당해 결국은 단종까지 죽게 만들었다. 이 점에 관한 한 김종서는 죄인일 뿐 의인(義人)이라 할 수 없다. 학계의 김종서 평가가 워낙 일방적 칭송 일변도이기에 지적해 두는 말이다.
광해군(光海君) 때의 영창대군 죽음은 사실 선조(宣祖) 자신이 만든 비극이라 할 수 있다. 1602년(선조35년) 7월 13일 51살의 늙은 국왕 선조는 19살 신부와 국혼을 거행했다. 그때까지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미뤘던 선조는 결국 후궁의 자식이 아니라 정비(正妃)의 혈통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4년 후인 1606년 드디어 원자가 태어나니 이 아이가 훗날의 영창대군이다.
당시 영의정이던 유영경은 대대적인 하례(賀禮)를 열 것을 주청해 이를 관철한다. 이는 사실상 광해군을 배제하겠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이때부터 선조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결국 2년 후에 3살짜리 적자(嫡子) 하나를 남긴 채 왕위를 광해군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이에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는 선조가 미리 써 놓았던 유언을 공개한다.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로써 너에게 부탁하니 모름지기 내 뜻을 본받아라.”
여기에 문제의 본질이 숨어 있다. 원칙대로 하자면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왕위는 영창대군에게 가도록 하고서 인목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도록 했어야 사리에 맞다. 그렇지 않고 애당초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면 국혼(國婚)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사리(事理)를 저버린 결과는 처참했다. 결국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도 죽였고 영창대군도 죽였으며 인목대비는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서인들의 반정(反正)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오랜 유배생활을 했다. 유영경의 경우는 고명대신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광해군이 임금이 된 상황에서 영창대군을 지켜 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유영경은 결국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 모든 잘못의 책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선조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출처] 이한우의 지인지감 〈24〉 육척(六尺) 고아를 보호할 대신들을 고르는 안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