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해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대용(大容), 호는 묵수당(嘿守堂)이다.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풍옥(風玉) 조수륜(趙守倫) 등에게 수학하고 간이(簡易) 최립(崔岦)의 임소(任所)에 가서 배우기도 하였다. 병조 좌랑(兵曹佐郎),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공주(公州)와 길주(吉州)의 목사(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경(敬)과 관련된 격언을 모아 자신을 경계하려는 목적으로 주희(朱熹)가 지은 글이 「경재잠(敬齋箴)」이다. 4구씩 10장으로 구성된 글이다. 정주학(程朱學)을 존숭하는 중국의 학자는 물론 조선의 학자들도 이 글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최유해는 「경재잠찬(敬齋箴贊)」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상ㆍ하의 「경재잠해(敬齋箴解)」를 지어 「경재잠」의 의미를 자세히 풀이하였다. 인용한 글은 「경재잠」 4장의 “병의 주둥이를 막듯 입을 지켜야 한다. [守口如甁]”라는 말을 설명하는 데 등장한다.
자신의 의사 표현에 주로 사용하는 것이 말과 글이다. 글은 도구를 사용하므로, 말은 글보다 원초적인 의사 표현 수단이다. 선현들은 말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였다. 많이 하거나 잘하라고 하지 않았다. “일에는 민첩하고 말은 신중히 한다.[敏於事而愼於言]”,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고자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와 같이 실천의 중요성은 강조하되 말을 앞세우지 않았다. 앞세우고 강조하지 않아도 넘치도록 많이 하는 것이 말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말조심을 강조하고 조심하려 노력하지만, 누구나 범하는 것도 말실수다. 하고자 하는 말의 선악(善惡)과 당부(當否)를 일일이 헤아려 침묵할지 발언할지 결정하기가[善惡當否, 一一量度, 不可則默, 可言則發.] 쉬운가? 따라서 말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만큼이나 실수를 수습하는 방법과 태도도 중요하다.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마라.[過則勿憚改]”고 하였다. 실수를 했으면 인정하고 고치면 된다. 그런데 인정하기보다는 핑계를 내놓는다. 핑계는 또 다른 논란을 초래한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핑계로 진실을 감추고자 하면 사람들은 더욱 그 진실을 파헤치고자 한다. 더 큰 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도 마음속으로 자책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라는 말을 보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우리의 DNA 속에 각인된 습성인지도 모르겠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말실수가 없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있다면 뉘우치고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지속해도 ‘나오는 대로 내뱉기’ 쉬운 것이 말이다. 하물며 핑계로 일관하며 얼버무리려 한다면, 진심으로 뉘우치고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허물은 눈덩이처럼 커지지 않겠는가. “잘못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잘못이다.[過而不改, 是謂過矣.]” 쏟아진 물, 시위 떠난 화살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내뱉은 말이지만 뉘우치고 고쳐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부질없는 후회는 아니리라. |